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임직식의 형식과 절차를 전통과 관행에 매이지 말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임직인지 냉철한 성찰을 촉구한다.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있다. 교단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주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이다. 이런 임직자를 세울 때는 날을 잡아서 임직식을 거행하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 관행이다. 임직식의 순서를 보면 그 교회의 규모나 정체성이 가늠되기도 한다. 식순의 내용은 어느 교회나 별반 다르지 않지만, 행사의 성대함이나 화려함의 정도는 교회의 사이즈에 비례할 때가 많다.
그런데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임직자를 위한 축하 세리머니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행사에 축사가 빠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축하 화환이 즐비하게 진열되는 것은 다반사이고 심지어 교회당 로비에 축의금을 받는 코너를 설치하는 교회도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교회 직분의 본질을 모르거나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임직은 세상의 명예나 권력을 주는 자리가 아니다. 이를 모르는 목회자나 교인이 있을까?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직분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세상에서 영전이나 출세를 한 사람들에서도 보기 힘든 축하 세리머니를 거창하게 하는 교회를 접할 때마다 이 생각이 더 굳어진다.
교회의 모든 직분 자는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섬겨야 한다. 누구보다도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더 희생해야 한다. 그 때문에 작은 명예욕이나 권력욕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 심하게 표현하면 죽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신 의미만 되새겨 봐도, 과연 ‘축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인지 금방 분별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남보다 고생하는 자리거나, 명예도 없고 힘도 없는 직위에 가는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보다 주목받고 영광을 받는 자리에 갈 때, 그리고 혜택이 많아 누리는 것이 많은 지위를 얻을 때 축하한다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교회의 임직자에게 ‘축하합니다’를 남발하며 세리머니를 하고 축의금까지 전달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임직식을 축하 세리머니 일색으로 진행하는 교회가 적지 않은 현실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혹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직분을 받는데 당연히 축하할 일이 아니냐고 한다. 분명히 거룩한 직분이긴 하지만, 그 역할 감당을 생각하면 축하한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없다. 위로하고 격려해야 맞다. 임직자에게 축하를 남용하면 직분의 본질을 흐리게 하여 오해하거나 착각하게 할 소지를 제공할 수 있다. 은연중 섬김을 받으려 하거나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 잡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런 현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때문에 임직자가 되면 목에 힘을 준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 회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교회 대부분의 일꾼은 묵묵히 희생하며 헌신하고 있다. 자신을 죽이고 낮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성도들이 교회마다 포진해 있다. 이들에게 임직 축하의 말은 불편한 것이 될 수 있으며, 굳이 축하 세리머니를 하지 않아도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성경에도 없는 축하 세리머니를 하면서 임직자에게 충성과 헌신을 부추길 것까지 있을까?
많은 경우 교회의 특별한 재정이 필요할 때를 맞추어서 임직식을 하는 관행이 있다. 재정 충당의 상당한 부분을 임직자에게 부담하기 위함이다. 노골적으로 금액을 정하여서 임직자에게 부과하는 교회도 있다. 그래서 임직을 기피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축하 세리머니의 정당성을 강변해도 순수성을 의심받게 된다. 지금이라도 임직식의 형식과 절차를 전통과 관행에 매이지 말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임직인지 냉철한 성찰을 촉구한다.
오세준 목사 새누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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