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회의 압구정터 비와 황희정승의 반구정>
●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
- 한명회가 노닐던 정자가 있던 곳-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조선 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에 속하던 마을이었다. 압구정리는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인근의 옥골오고上谷)을 병합하였으며, 동명은 그대로 하였다. 경기도에 속하던 압구정리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압구정동이 되었고, 그 후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통해 오늘날 강남구 압구정동에 속하게 되었다·압구정동은 강남구의 북쪽 한강 연안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동쪽의 청담동과 서쪽의 신사동 중간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강북의 옥수동, 금호동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에 한명회韓明澮가 노닐기 위해 지은 압구정狎鷗亭에 있었기에 유래한 이름이다. 압구정은 동호東湖의 남쪽 강가에 있는 저자도楮子島에서 볼 때에 낭떠러지로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정자의 위치는 465번지 현대아파트 73동 부근이었다고 한다. 한편 압구정는 일찍이 중국 송나라 재상이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한명회의 호이다. 압구정은 조선 시대 말까지는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으며 강남 개발 전에는 고목의 정자나무만 있었을 뿐 정자가 철폐된 때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1980년 8월 28일자에 실린 압구정 정자에 관한 기록으로 정자가 사라진 시기를 알 수 있다.
1970년 4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아파트 건설을 위해 현대건설이 압구정동 북쪽 저자도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 지대를 높이고, 한강 재방을 쌓아 정자의 터가 사라지게 되었다.
정자터 서쪽으로는 수은睡隱홍석보洪錫輔가 지은 정자인 숙몽정夙夢亭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터마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압구정 부근에 있던 연못 두멍소는 두멍(큰 솥) 같이 패어 있었기 때문에 연못의 이름이 되었다.
주민들 사이에 두멍소가 묻히면 나라에 난리가 나고, 두멍소가 패이면 평화가 온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왔다. 두멍소 또한 아쉽게도 현재는 못의 위치마저 식별하기 어렵다.
압구정동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이 마치 무지개 모양으로 굽어져 흘렸기 때문에 무지개 개울이라고 하였으며, 압구정 제1동의 현대아파트 부근에는 압구정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 역시 강남 개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흔적을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과거 압구정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은 주로 현재의 압구정역 근처 이전 소망교회 자리, 신구중학교, 현대맨션, KT플라자 신사지점을 주변으로 대략 80여호가 되었다. 이러한 압구정동의 자연 마을로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長者말 등이 있었다.
-동네 뒤쪽에 위치했던 뒤주니-
뒤주니 마을의 이름은 '뒤지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 동네인 압구정 아래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로서 뒤쪽으로 압구정을 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뒤주니 마을은 대략 5-6호 정도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옴폭 파인 마을 안쪽에 위치한 옥골-
옥골은 마을의 위치가 안으로 옴폭하게 파인 곳에 위치했으므로 옥골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안쪽으로 오그라져 있다는 뜻의 '옥다'와 '골'이 결합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옥골은 맑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옥골은 마을 뒷산에 석기시대의 돌도끼(석부石斧)가 출토되기도 한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깊은 곳이다. 옥골에는예로부터 한양 조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대략 10여 호 안팎이었다고 한다. 옥골은 현재 청담사거리의 갤러리아백화점 동편에 있는 청담중·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