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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피아노의 합창 등 3편
오종락
100대 피아노의 합창
새색시 얼굴처럼 반들반들 윤기 나는 몸매를 자랑하며 서있다.
나루터 무대에 즐비한 그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곳으로 외출 나온 피아노들은 예사로운 악기는 아닐 성싶다. 음질 좋기로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간택되어 온 피아노의 거대한 집합체가 아니겠는가!
피아노 한 대 한 대는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새로운 피아니스트 짝꿍을 만났다. 그 짝꿍의 섬세한 손길을 만나자 그 몸속에서 청아한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둘은 나룻배와 뱃사공처럼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신바람 나게 연주를 해댔다. 가을밤 나룻가에서 만난 환상의 콤비는 손발을 맞춰 가며 고운 선율을 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무대 위에는 이런 짝꿍들이 무려 일백 쌍이나 된다니 참으로 놀랍다. 그 일백의 합창소리는 빗줄기와 불빛을 타고 나루터 건너편 마을까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을비는 오케스트라 선율에 따라 춤을 추듯 부슬부슬 내려 관중들의 머리와 어깨 위를 촉촉이 적셨다. 무대는 세계적인 지휘자 금난새가 혼신의 힘을 바쳐 지휘하고 있었다. 나룻가에 울려 퍼지는 100대 피아노 합창은 그야말로 장엄하고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지휘자는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10번 키에프의 대문”이란 곡으로 오프닝 문을 열었다. 지난 10월 1일 대구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터에서 열렸던 “100대 피아노 콘서트” 행사장의 모습이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자, 아내는 3년 전 관람했던 100대 피아노 행사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올해는 놓치지 않고 꼭 보고 싶다고 했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에 느꼈던 피아노 선율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기다리던 10월 1일 공연 날이 다가왔다. 즐거운 맘으로 오전에 가벼운 산행을 다녀온 후 저녁 공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 가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7시 공연을 앞두고,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져만 가고 있었다. 모처럼의 공연 관람을 방해할 심상인지 날씨가 심술을 부렸다.
내가 창밖을 자꾸 내다보며 ‘귀신 통’은 “쉽게 만나는 게 아닌가 봐? 날씨가 도와주지 않네!” “3년 전 공연 날도 바람이 몹시 불고 꽤나 쌀쌀했었지?” 하니까, 아내는 “옛사람들이 피아노를 ‘귀신 통’이라고 부른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라고 했다. 아내는 조바심이 나서 공연장 인근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예정대로 공연은 하는지 물어본다. 비가와도 공연은 예정대로 한다고 전해 준다.
오전에 등산을 다녀온 터라 몸은 몹시 노곤했다. 무거운 몸에다 비까지 계속 내리며 나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갈까 말까 수차례 망설였다. 아내도 망설이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공연 2시간 전이다. 용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며 포기하면 또 1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용기를 내어 가봅시다. 하니, 아내도 좋다고 했다. 우산과 비옷, 컵라면 등을 모두 챙겨서 출발했다.
공연장 부근은 차량들로 도로가 정체될 것으로 생각되어 아예 시내버스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우린 일기가 불순하여 올해는 관람객이 좀 적게 왔을 거라고 예상하면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운무가 낀 희미한 조명 아래 관중들이 어마어마하게 운집해 있었다. 내가 “아이고! 웬 관중들이 이렇게 많아!” 하자, 아내도 뜻밖이라며 깜짝 놀랐다. 예상과는 달리, 1만 관중이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고 질서 정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좌석을 거의 다 꽉 매웠고, 무대와 멀리 떨어진 맨뒤 좌석만 몇 개 비어있었다. 일부 관중은 무대 가까이 관중석 좌우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동안 몇 년 사이에 홍보가 많이 된 영향일까? 우중에도 관람객이 이렇게 많이 오다니 정말 놀라웠다.
대구시민들이 이처럼 피아노 선율을 좋아 하나? 그렇지 않으면 지휘자 금난새의 명성 때문일까? 뮤지컬 꽃미남 가수 정동하를 보기 위해서 온 걸까? 아니면 가을밤 운동 삼아 나룻가에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일까? 비도 제법 많이 내리는데…. 자못 궁금하기만 했다. 그중에서 어느 하나일 테지만 엄청난 규모라는 사실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왼쪽 관중석 중간쯤 외곽에 서서 관중들 틈바구니에 끼워 관람한 지 한 시간가량 흘렀다. 자세도 불편하고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제대로 기분이 나지 않았다. 무대와 대형 스크린 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좋은 자리가 없는지 물색했다.
간혹 아이들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 빈 좌석이 한두 개씩 생기기도 했다. 빈 좌석이 생길 때면 잽싸게 가서 비에 젖은 의자에 덥석 앉았다. 또 공연을 보다가 앞줄에 더 좋은 위치에 좌석이 생기면 앞으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기를 세 차례. 드디어 맨 앞줄에서 네 번째 줄, S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와 출연진들의 얼굴이 눈에 확 잘 들어왔다.
늦게 도착하였지만, 좋은 좌석을 잡았다는 기분 좋은 안도감을 느끼며, 좌우를 살펴보고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관중들이 비옷을 입은 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지어 앉아, ‘오케스트라 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흰색, 파란색, 노란색 등 각양각색의 우비를 입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에서 엄숙함마저 느끼게 했다. 언뜻 성당의 미사나 세례식을 보는 듯했다. 관중들의 복장에다 내리는 비와 가을밤이 만들어준 환상적인 연출이었다.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분위기와 음악에 서서히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피아노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에 취하고, 가을밤 내리는 비에 내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많은 관중들도 대부분,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란 것을, 말은 안 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왼쪽 옆 좌석, 다정히 앉아 공연을 보는 나이 든 자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맛있는 간식을 서로 권하며 공연의 맛을 더하고 있다. 이들에겐 내리는 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 부부도 질세라, 셀카로 기념사진을 한 컷 찍으며 기분을 내었다. 그 순간, 우측 옆에 앉은 새댁은 곁눈질로 우리를 응시했다. 그런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재미를 더해 주었다.
잠시 후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와 함께 피아니스트들은 차이코프스키의 역사를 담은 “1812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의 순간과 퇴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삽입되어 있었다. 러시아 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질 때는, 전쟁에 패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눈물인 양, 빗줄기도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정규 관현악곡에 쓰이지 않는 대포소리와 조총소리가 제정 러시아의 승리를 알려주며 곡을 끝맺었다. 오늘날 우리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이런 음악조차도, 왠지 내 가슴을 더욱 쓸어내리게 했다.
비를 맞으며 이 음악을 듣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하고, 잠깐 생각에 잠긴 순간, 이태리 작곡가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에게 지휘자는 운집한 관중들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그는 재치 있게 세계 최고 수준의 관중이라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운집한 관중들을 위해 “거쉰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라는 곡을 신명을 다해 연주했다. 이 곡은 1920년대 예술 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새로운 시도로 관객을 사로잡은 바 있다.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도 훌륭한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여기저기서 ‘브라보, 브라보’를 연신 외치며 화답했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무대에서 이처럼, 비옷 입은 많은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본 것은 그도 난생처음인 모양이다. 관중들의 이런 모습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지,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은 후 무대를 내려갔다. 그도 오늘 밤의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무대의 피아노 소리가 잠잠해지자, 꽃미남 뮤지컬 배우 정동하가 ‘오페라의 유령’ 이란 곡을 부르며 깜짝 등장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율동에 관중들은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연이어 ‘사랑’이란 곡을 부르며 관중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함께 비를 맞으며 사랑의 분위기를 띄웠다. 관중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했다. 무대 앞쪽 일부 관중들은 일어서서 몹시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내도 소녀같이 함께 일어서서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무척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 밤 ‘내자’의 공연 행차에 동행하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부터는 내리는 비도 성가신 존재가 아닌 친구로 여겨졌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중들은 ‘앵콜, 앵콜’을 외쳤다. 앵콜 송을 부르기 전 그는 말했다. 서울서 내려와 노래 몇 곡 부르고 떠나기가 자기 자신도 몹시 아쉽다고 했다. 금년 대구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크나큰 은혜를 입은 도시가 바로 대구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관중을 배려하는 매너가 돋보이는 가수였다. 그의 앵콜 송이 끝나자마자, 무대는 순식간에 커튼으로 가려졌다. 무대 뒤편 나루터 쪽에서 불꽃이 연달아 솟아올랐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신호였다. 불꽃은 보슬비 내리는 회색 빛 가을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관중들은 ‘브라보, 브라보’를 연호하며 공연이 끝남을 아쉬워했다.
옛날 ‘귀신 통’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피아노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현재 화원동산에 있던 옛 사문진 나루를 통해서다. 1900. 3. 26.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 보탐이 아내를 위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 들어온 한 대의 피아노가 밀알이 되어, 오늘날 100대 피아노 공연장이 탄생하게 되었고, 관중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옛 이름 ‘귀신 통’이 이제는 관람객들을 불러 모우는 ‘효자 통’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주 좋은 징조가 아닐까 한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세계적인 훌륭한 공연장으로 성장하기를 고대한다.
세상사 사람 일이라는 게, 와불보견(臥不步見, 외출하고 걸어야 볼 수 있고, 누워만 있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이 아닌가 싶다. 작은 일도 부뚜막의 소금이 아니던가!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움직이며 나서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동시에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도 얻게 된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움직이며 집을 나섰더니 아주 보람된 시간이 되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접할 수 있는 뜻 깊은 무대에, 부부가 동참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감을 느꼈다. 100대의 피아노가 들려주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누구에게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닐 것이다.
가을밤에 내리는 비는 공연의 운치와 감동을 더욱 진하게 해 주었고, 비를 맞으며 보는 공연은 더할 나위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 빗줄기에 마음까지 촉촉이 적셔가며, 100대 피아노가 뿜어내는 밤의 향연을 만끽하고, 좋은 기운을 가슴에 가득 담아오는 밤이었다.
글동무의 매력
요즘 내 곁엔 은근한 매력을 지닌 동무가 하나 있다.
이 동무는 내가 부르면 아무런 조건 없이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동무다. 이 동무와 인연을 맺고 동행한지도 어언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 인연을 주선해준 곳은 바로 상록아카데미다. 부지런한 상록아카데미 까치팀 봉사단이 문작교(文鵲橋, 글 다리)를 놓아 수필창작의 길을 열어준 덕분이다. 이에 대하여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수필창작으로 인해 인생길 글동무(글쓰기)가 새로 생겼다.
요즈음 글동무의 마력에 이끌려 틈나는 대로 이 동무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 동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지남철처럼 글의 소재거리를 끌어 모우기도 하고, 때론 영사기처럼 내 뇌리 깊숙이 잠들어 있던 유년의 잔상을 온전히 떠올리게 해준다. 어디 그뿐이랴!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문우’라는 글동무를 소개해주며 만남을 주선해 주는 역할도 한다. 즉 “글동무(글쓰기)”를 통하여 인생 제2막, ‘문우’라는 새로운 “글동무”를 만나게 된 셈이다.
세상사 인연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게 많은 것 같다. 글동무와의 인연도 그러했다. 우연한 기회에 수필창작 방을 노크한 게 이렇게 인연으로 이어졌다. 예전엔 글쓰기에 숙맥인 내가 글동무를 사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오로지 호기심과 도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도전정신을 가상히 여긴 글동무가 나의 무딘 감각을 일깨워 준 것 같다. 이제는 인생 제2모작을 시작하는 나에게 친구가 되어 나를 이끌어 주고 있다.
나와 가까운 글동무에는 ‘글 읽기 동무’와 ‘글쓰기 동무’가 있다. 어는 것을 선택하느냐는 내 마음에 달렸다. 하나, 둘의 관계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글은 읽는 데만 국한하지 않고 손수 좋은 글을 한두 줄 써보며 창작하는 일은 뭔가 새로운 맛과 매력이 있음을 느낀다. 나에겐 글쓰기 동무가 더 보람을 안겨 주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미국의 한 회장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지하철 천장에 글동무(글 읽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달려 있는 액자를 통해서다. 전동차의 진동을 타고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승객들에게 뭔가 중요한 말을 전하려는 듯했다.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회장님의 말씀이다. 그분은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고,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라는 글귀였다. 이 얼마나 글 읽기를 동무로 삼아야 하는지를 강조한 말씀이 아닌가!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좋은 책을 늘 가까이하라는 가르침이다. 인생길에서 글 읽기를 동무로 사귀면 자신처럼 크나큰 영향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빌 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글 읽기에 그치지 않고, 글 읽기의 소중함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이 분의 금언 같은 짧은 글 몇 줄은 꿈을 키우는 이 세상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도 남을 것 같다.
지난달은 새로 사귄 ‘문우’ 글동무들과 문학기행을 떠났다. 관광버스 안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학회 회장님은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한마디씩 해달라고 주문했다. 문우들의 자기소개 방식은 매우 다양했고 한 차원 높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나에게 진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여성 B문우는 글쓰기와 친해져 등단을 하게 되었고, 이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이전에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서 마음 한구석은 늘 허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또 초등학교 시절, 남자 친구와의 우정을 소재로 한 수필을 한 편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남편의 깊은 사랑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K문우는 가을 들녘을 바라볼 때면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우리 민요 ‘한오백년’ 한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자신의 심정을 노랫가락에 실어 인사를 했다.
또 H사무국장은 문우들에 대한 친근감과 사랑을 시 한수로 전했다. 그녀는 문정희 시인의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이라는 시를 한 소절 맛깔나게 읊조렸다. 문우들에게 넉넉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전하며 일행들을 푸근한 분위기로 안내했다.
K문우와 H사무국장에겐 민요 한가락과 시 한수면 족했다. 더 이상 인사말이나 글을 쓰게 된 동기에 관한 설명은 필요 없는 듯 했다. 그 민요와 시는 왠지 한 소절 소개하고 싶다.
『한오백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 중략 -
(후렴)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고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똑같은 해와 달 아래
똑같은 주름을 만들고 산다는 것이라네
- 이하 생략 -
위의 민요와 시는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애절한 가락에는 K문우의 모정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고, H사무국장 문우가 읊어주는 시는 푸근한 사랑의 메시지가 되어 들려왔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 문우들의 ‘가락’과 ‘시’에는 뭔가 특별한 사랑과 행복 바이러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문우들의 마음은 항상 따뜻하다. 글 한 자 한 자에다 ‘사랑의 가루’를 솔솔 뿌려 세상에 내어 놓기 때문일 것이다. 문우들은 평소에도 쉴 틈이 없다. 창작에 늘 마음을 쓴다. 좋은 글로 우리 사회에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할 의무감도 스스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청량한 소슬바람이 볼을 스치는 만산홍엽의 계절이다. 문자로써 이 아름다운 계절을 노래할 수 있는 것도 글동무가 주는 매력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할 때도 글동무의 도움은 큰 힘을 발휘한다. 글동무가 매혹적인 글귀로 선사하는 사랑의 세레나데는 상대방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인류의 찬란한 기록유산도 알고 보면 글을 늘 가까이 한 선현들이 빚어 놓은 소중한 정신적 산물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는 그분들의 크고 작은 지혜가 모두 고스란히 녹아 숨 쉬고 있다.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문우들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을 알리는 독특한 매력 하나쯤은 달고 살아야 함을 느꼈다. 자신이 지닌 독특한 한 가지의 매력은 경쟁사회에서 훌륭한 콘텐츠 역할을 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할 것이다. 겉모습에만 치중한 화려한 의상이나 화장보다는 작은 매력 하나가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한다.
글동무(문우)들의 겉모습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상하게 물든 가을 단풍잎 같은 매력을 지닌 분들이다. 나도 그분들을 닮아 가고 싶다. 가을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샛노란 은행잎은 점점 더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나도 작은 매력 하나쯤은 찾아 나서고 싶다.
닭 이야기
장닭이 홰를 치며 ‘꼬끼오. 꼬끼오!’ 하는 소리와 함께 정유년 닭의 해가 밝았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는 평소에 듣던 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건 아마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태양을 부르는 새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매년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보다 훨씬 더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소리였다.
아마 반백 년 전 쯤, 내가 시골 고향집에서 살던 때의 일이다. 우리 집 장닭이 가장 먼저 새해가 밝아오고 있음을 알리며, ‘꼬끼오, 꼬끼오!’ 하고 울면 잠시 후 앞집, 뒷집을 비롯한 온 동네 장닭들이 여기저기서 따라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약간 잠잠해질 무렵, 저 멀리 외딴집 김씨네 장닭의 ‘꼬끼오!’하는 가느다란 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다. 동네 장닭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며 목청을 높여 우렁차게 새해 여명을 재촉하는 듯 울었다.
추운 엄동설한 이른 새벽, 제일 먼저 잠에서 깨어나 새벽을 알리는 닭이야 말로 희망을 상징하는 영물이 아닐까 한다. 옛날에는 그 ‘꼬끼오!’ 소리를 요즘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 소리 마냥 매일 들었다. 그 시절은 닭 울음소리에 따라 시간을 가늠해 가며 살았다. ‘계명 축시 인일 출(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에 닭 울고 인시에 해가 뜬다.)’이란 말이 있다. 새벽의 시작은 닭 울음소리를 표준시로 삼았고 문살에 비치는 여명의 정도에 따라 기상시간을 조정하곤 했다. 첫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잠깐 눈을 붙이다 보면 금세 여명이 찾아와 문구멍 사이로 잠을 깨웠다. 부모님은 시골 오일장이 있는 날이나 농번기에는 첫닭이 울자마자 기동하시며, 장 꾸러미를 챙기시거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며 하루 일과를 서두르셨다.
추운 겨울철에는 첫닭이 울고 얼마간 지난 후 두 번째 닭이 울 무렵,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다. 그 시절은 시계도 참으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닭울음소리가 시계 역할을 대신했다. 한 밤중에 아기가 태어날 경우 산모와 가족들은 정확한 출생 시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닭울음 시간을 어림잡아 태어난 시간을 정했다. 우리 속담에 “장닭이 울어야 날이 새지”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장닭은 새벽을 알리는 시계의 ‘알람음’ 역할과 밤중에 태어난 아기의 ‘사주 시간’을 알려 주는 역할도 동시에 했다. 그땐 닭 울음소리와 닭의 존재가치를 예사로이 여기며 살았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닭이란 동물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많은 이바지를 하며 함께 살아온 고마운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예로부터 닭은 문(文), 무(武), 신(信), 인(仁), 용(勇)의 오덕(五德)을 모두 갖춘 길조로 여겼다.
그런 이유로 전통혼례식 때 암수 한 쌍을 초례상에 올려 경사에 악귀를 물리치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는 혼례를 거쳐 제2의 인생이 시작됨을 알림과 동시에 자손 번창, 입신출세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또 새해의 운수를 점치는 청참(聽讖)을 할 때에는 힘차게 우는 닭소리가 들리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처럼 닭은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는 동물이다. 서양에서도 상서로운 수호신으로 여겼다고 한다.
계유 오덕(鷄有 五德) 중, 상징적인 문(文), 무(武) 덕을 제외하더라도, 밤을 지켜 때를 놓치지 않고 시간을 알려주는 신덕(信德), 먹이가 있으면 서로 불러서 함께 먹는 인덕(仁德), 적과 싸울 때 물러서지 않는 용맹성을 지닌 용덕(勇德)은 다른 동물과는 비교되는 한 차원 높은 동물이라 생각된다. 이런 삼덕(三德)은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 늘 보고 느낀 점이다. 닭은 위의 오덕뿐만 아니라 계란을 낳아 주인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충덕(忠德), 암탉은 장닭의 외도를 눈감아주는 순덕(順德), 장닭은 무리의 질서를 유지하는 솔덕(率德) 등 많은 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장닭은 용맹성이 지나쳐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랫마을 신작로 옆 성황당 근처 외딴집에는 닭을 많이 키웠다. 그 집에는 오래 묵은 사나운 장닭이 두어 마리 있었다. 그 장닭들은 하굣길 동네 친구들과 그 집을 지나칠 때면 갑자기 날아와 우리들을 공격하곤 했다. 우린 그 집을 지날 때면 지레 겁을 먹고 장닭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면서 신속히 지났다. 어떤 날은 두려움의 대상인 장닭을 피해 논둑길을 우회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장닭의 용맹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겨울방학 때는 뒷집에 사는 동네 형이 자기 집에 기르던 장닭을 잡아와서 이웃집 장닭과 싸움을 곧잘 시키기도 했다. 날렵하고 민첩함으로 서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다른 동물들의 싸움보다 훨씬 치열했다. 닭벼슬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볏을 서로 물고 늘어지며 물러서지 않았다. 싸움에 임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은 임전무퇴 정신으로 무장한 화랑의 후신 같기도 했다. 한참 후 닭이 탈진하고 피를 많이 흘리자, 뒷집 형은 “계속하다간 우리 집 장닭이 죽겠다.”라고 하면서 싸움을 말렸다.
용맹스러운 장닭도 싸움에 패하거나 비를 맞고 횃대에 앉아 있는 모습은 초라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비 맞은 장닭 같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현재의 우리 국민들의 모습, 즉 정유년 대한민국의 모습과도 흡사한 것 같았다. 장닭이 닭벼슬을 꼿꼿이 세우고 ‘꼬끼오!’ 하며 우는 모습과 입춘이 지난 뒤뜰에서 장닭이 암탉들을 거느리고 사이좋게 먹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 바로 그게 진정한 아름다운 닭의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정유년 새해 첫 닭이 운지도 보름 가까이 되었건만 우리 사회는 아직 계유 오덕의 기운을 느끼기는 이른 것 같다.
지난해 조류 독감의 영향으로 많은 닭들이 수난을 당했다. 결국 계란 파동까지 몰고 왔다. 닭의 역할과 계란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 준 한 해였다. 뭐든지 귀한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게 우매한 우리 인간들이 아닌가 한다. 지금 우리 식생활에서 계란과 닭고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서민 식생활에 기본이 되는 계란에서부터 닭고기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된다. 뜨거운 기름에 튀긴 치킨의 형태로 인류의 식생활에 기여해 온 지 이미 오래다. 닭이야 말로 작은 몸집으로 온몸을 바쳐 인류에게 크게 공헌하는 동물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해마다 12지 중 그 해를 상징하는 동물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며 설을 쇠고 있다. 각각의 동물은 나름 우리 인간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12지의 동물들로부터 지혜를 얻고 삶의 이정표로 삼기도 했다.
해마다 그 해를 상징하는 동물의 가르침을 교훈으로 삼아 한 해를 살아간다면, 보다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한다. 새해는 여러 가지 덕(德)을 상징하는 닭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자세로 한 해를 살아갈 작정이다.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며 헌신하는 닭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유년 닭의 해를 겸허히 맞이한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