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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58. [역경의 열매] 이창우 (1-25) 인공관절 전문가 꿈 품고 美 유학길
“닥터 리, 당신 나라가 어렵다고 하던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 예, 괜찮을 겁니다.”
1997년 8월. 미국 볼티모어 항구가 보이는 존스홉킨스대학병원 도서관. 나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국과 우리 가정을 걱정해 준 미국인 지도교수님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내와 두 아들이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6달러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곳에 교환교수로 온 분들은 1달러에 1900원으로 환율이 치솟자 한국으로 대부분 떠났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돈은 반 토막이 났다.
주변에선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불과 6개월전 미국에 도착할 때만 해도 인공관절 분야의 세계적인 흐름을 익힌 뒤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미국 연수를 위해 우리 가족은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한 상태였다. 연세가 지긋하신 부모님께 힘들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경에 줄을 쳐가면서 말씀을 읽는 것이었다. 깨알 같은 주석까지 줄을 쳤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내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흰머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인생의 바닥이었다. 그때는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가난해졌다. 미국 의사들과 수술실에 들어가서도 집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2달러99센트 하는 햄버거를 시켜도 가족이 먹으려면 최소 12달러는 있어야 하는데….’ 미국에 오자마자 구입한 13년 된 혼다 어코드는 고장이 계속 나다보니 ‘돈 먹는 하마’처럼 목돈을 퍼부어야 했다. 결국 포기하고 장기기증단체에 기부했다.
간절한 기도의 힘이었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 올 때 1년 뒤에나 지급받기로 했던 장학금을 미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장학금을 지급해주는 곳이 하버드대병원이었다.
사실 내가 있던 존스홉킨스대병원은 하버드대병원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우리로 따지면 삼성과 엘지의 관계와도 같은데 담당 교수님이 하버드대병원에 ‘닥터 리의 고국 상황이 무척 어렵게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장학금을 미리 지급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자 답신이 왔다. ‘닥터 리가 당신 병원에 있는 동안은 어렵겠습니다. 그는 현재 당신 병원에서 의사로 육성하기 위한 과정에 있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우리 병원과 당신 병원은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인공관절 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헝거포드 박사는 나를 연구실로 불러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닥터 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교수님, 저희 가정은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편지를 한번 다시 보내보죠.”
우리 부부는 주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방값만 해도 매달 725달러가 나가던 상황에서 장학금 말고는 우리 네 식구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얼마 후 하버드대에서 연락이 왔다. ‘좋습니다. 우리가 당신 병원의 닥터 리에게 줄 장학금을 미리 지급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눈물의 간절한 기도는 문제를 해결한다. 특히 평생 눈물로 새벽제단을 쌓으셨던 어머니의 기도는 늘 위기상황에서 든든한 방패가 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창우 (1) 인공관절 전문가 꿈 품고 美 유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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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61년 인천 출생, 광림교회 장로, 1997년 한양대 의대 의학박사, 1997∼1999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박사연구원, 피츠버그대 의대 스포츠의학연구소 객원 연구원, 하버드대 의대 정형외과학 방문연구원, 2001년 서울 선한목자병원장, 2004년 라오스 파키스탄에 선교병원 설립, 2006년 네팔 병원 설립, 2009년 미얀마 병원 설립, 2011년 필리핀 병원 설립.
***[역경의 열매] 이창우 (2) 신실한 어머니, 유교집안에 신앙 심어
나는 1961년 인천 중구 신흥동 7번지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기도립병원 외과과장이셨다. 우리 집은 병원에 붙어 있는 방 2칸짜리 10평 미만의 다다미집이었다. 병원은 우리 5남매의 놀이터이자 삶의 울타리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은 우리 남매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
어머니는 양반 가문의 종손 가정에서 태어나셨는데, 53년 군의관이던 두 살 위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수많은 제사를 지내며 신앙생활을 못하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어머니를 기특하게 여기셨다.
“얘야, 시집살이를 하면서 집안일을 꼼꼼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니 참 갸륵하구나. 내가 널 위해 뭘 해줬으면 좋겠느냐?”
“저… 아버님, 죄송스럽지만 저는 교회에 꼭 나가야 합니다. 새벽예배를 가게 해 주십시오.”
“교회 가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느냐. 내일부터 당장 나가도 좋다.”
어머니는 하늘같은 시아버지의 허락에 따라 그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를 드렸고 철저하게 철야예배와 주일을 성수했다. 어머니는 믿지 않는 집안에 기도의 씨앗을 뿌렸다. 복음은 누룩 같이 퍼졌고 집안을 기독교 가문으로 변화시켰다.
대여섯 살 때의 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나를 깨워 교회로 향하셨다. 어린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갔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한 시간 이상씩 기도를 하시며 큰아들부터 막내까지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기도 말미엔 꼭 이런 간청을 하셨다. “주님, 세 아들 중 하나를 목회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형은 키도 크고 덩치가 좋아 운동선수나 건축설계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목사나 의사를 시키려는 부모님과 자주 충돌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우리 형제들은 밥상에서 식사하고 누나들은 저만치 떨어져 옹기종기 모여 양푼에 밥을 먹던 시절이었다. 동생과 나는 이불 속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가 자녀 중에 목회자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리고 계시잖니? 어차피 누나들은 시집 갈 사람들이니 해당되지 않고.”
“그럼 우리 남자 형제 세 명 중에서 하나가 되겠네.”
“그래, 근데 아무래도 형은 목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확률은 반반이다.”
“그럼 형하고 나하고 둘 중에서 하나가 목사가 되는 거야?”
“음, 그래야 될 것 같아. 근데 난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고 싶어. 어쩌지?”
“그럼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가 의사가 되고 형아가 목사가 되면 안 돼?”
어머니의 오랜 기도의 결과일까. 절대 의사나 목회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던 형은 오랜 방황을 마치고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16년째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동생도 복강경 수술의 권위자로 삼성의료원에서 외과 전임의를 거쳐 한양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 풀러신학교에 진학해 지난달 목회학 석사를 취득했다.
올해 81세 되신 어머니 김용화 장로는 지금도 새벽예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귀한 음식을 만드시면 반드시 목사님께 먼저 갖다 드리라며 나와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목회자 모시기를 하늘 같이 하고 평생 새벽제단을 쌓으신 어머니 덕분이다. 수술 집도 후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아버지를 주께 인도한 것도 신앙의 어머니였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3) 중보기도 응답에 아버지가 변화되다
1960년부터 경기도립병원 외과 과장을 맡으셨던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당시엔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환자가 많았다. 아버지는 외과 의사이셨지만 장을 잘라내 망가진 식도를 대체하는 수술을 포함해 산부인과 수술까지 모든 수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술환자뿐 아니라 경인지방에서 발생한 사고의 사체 부검까지 담당하셨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경찰관들과 새벽 한두 시까지 술자리를 갖고 경찰 지프차를 타고 집에 오시곤 했다.
68년 아버지는 인천에 이종찬외과의원을 개원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친구들과 술을 많이 드셨다.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지만 형식적인 참석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속만 태우셨다. 어머니는 새벽기도회에서 남편이 하루빨리 신실한 신앙의 길로 돌아오길 간구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하교 후 집에 오니 긴 나무 상자가 우리 집 마루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신이 들어있는 관이었다. “의사, 어디 있어! 내 아내 살려내란 말이야! 사람 살리는 게 의사지 죽이는 게 의사냐고!” 병원 업무도 마비됐다. 눈이 시뻘개진 사망 환자의 남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사건은 이랬다. 병원 근처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환자는 다른 병원을 몇 군데 거쳐 우리 병원으로 이송됐고 몇 분 뒤 과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사망 직전의 환자를 받아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졸지에 의료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사망자의 남편은 아버지의 실수라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돈을 요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별거 상태였던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통해 한밑천 잡으려는 것이었다. 병원 안에 아예 돗자리를 깔고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큰소리로 행패를 부렸다. 그런 상황이 일주일 넘게 지속됐다.
“여보,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사인 같아요. 이제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이키세요.” 초췌해진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주님께서 정말 이 상황을 극복하게 도와주실까?” “그럼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계세요. 여보, 힘내세요.”
인천 성산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사태 해결을 위해 중보기도로 힘을 보탰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그때부터 다른 사람이 됐다. “좋소. 이제부터 술을 끊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겠소.” 신기하게도 그렇게 행패를 부리던 환자 가족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게 마무리됐다.
충청도 양반이셨던 아버지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날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모든 공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예배도 정성을 다해 드렸다. 교회 재정부장을 맡아 회계 처리 중 모자란 금액마저도 당신의 호주머니에서 채워 넣으셨다. 연세가 많으셨던 최준옥 담임목사님을 친아버지처럼 정성껏 모셨는데 매일 아침 인사를 드리고 영양 주사도 놔 드렸다.
아버지는 88년부터 3년간 인천시 의사회장을 지내셨으며, 93년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을 맡으셨다. 97년부턴 인하대 부속병원 건강증진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다가 2004년 우리병원 고문으로 오셔서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파키스탄 네팔 등을 다니며 의료선교 활동을 펼치셨다. 그리고 2008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큰 시련을 통해 회개와 삶의 변화를 재촉하신다. 크리스천에게 고난은 숨겨진 축복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4) 죽마고우의 죽음… 그의 몫까지 헌신 다짐
“영석이가 간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인천시립병원으로 빨리 와줘야겠다.”
1981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영석이 어머니의 축축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 “예? 영석이가 죽었다고요! 아니,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영석이가 죽다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죽마고우로 평생 선교를 같이 하자고 다짐했던 영석이가 죽었다. 나는 그 당시 서울고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한양대 의대에 합격했다. 80년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했지만 그만 쓴맛을 봤다. 중·고등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는 서울의 모 대학 공대에 합격만 해놓고 종로학원에서 예비고사를 다시 준비했었다.
홍영석은 실력 있는 친구였다.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던 그는 내 앞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 사대에 한 번에 합격하고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던 영석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담하던 나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주님 일 하겠다고,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던 영석이를 그렇게 데리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병원을 향하며 나는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다. 그와 같이 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눈물만 펑펑 쏟아져 나왔다.
“네가 영석이랑 친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렴.” 영석이의 부모님은 내가 식구도 아니지만 염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둔탁한 분위기의 영안실에 들어섰다. 시체냉동고에서 나온 싸늘한 영석이가 차디찬 금속침대에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얼굴을 보니 흙빛이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영석이가 아니었다. 금세 의외의 안도감이 다가왔다. ‘영석이는 늘 밝고 환했다. 이건 내 친구 영석이가 아니다. 그는 이 땅에서 입고 있던 육신을 남겨놓고 분명 하나님께 가 있다.’ 확신이 들었다.
친구의 육체를 알코올로 닦고 수의를 입힌 뒤 정성스레 관에 넣었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영석아, 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가게 됐구나. 우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약속했잖아. 네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했던 만큼 나도 배로 열심히 주를 위해 섬길게.’ 입에선 찬양이 흘러 나왔다.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새찬송가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그때 영석이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비신자들은 죽음 앞에 통곡을 하며 소리친다. 조문객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친다. 하지만 교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건한 장례식장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 다음에 천국이 있는 기독교인의 삶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스무 살 때 겪은 친구의 장례와 재수생활은 교만했던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81년 3월 한양대 의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때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하지만 견고한 다짐만큼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5) 술로 유명했던 정형외과에서 금주 선언
의사 세계는 도제제도와 같다. 스스로 배우는 학문이 없겠지만 특히 의학이란 윗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 선후배 관계가 군대 못지않게 엄격하다. 특히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다 보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1992년 레지던트 생활을 앞두고 굉장히 고민스러웠던 것은 술 문제였다. 당시 정형외과는 술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곳이었다. 앞서 말했듯 대학 2학년 때 나는 이렇게 서원한 바 있다. ‘하나님, 의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술은 일생동안 마시지 않겠습니다.’
군대 이등병과 같은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급기야 ‘전주 예수병원으로 가서 레지던트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모두 뜯어 말렸다. 레지던트를 한양대 병원에서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결심했다. 하늘 같은 학과장 교수님을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한 것이다. 술을 못 마신다고 그만두라면 정말 그만둘 심산이었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정형학과에 합격한 이창우라고 합니다.”
“그래, 축하한다.” 환갑을 넘긴 교수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정형외과에 건의할 말이라도 있는가.”
“앞으로 정형학과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과장님께 성실하게 잘 배워서 교실에 절대 누가 되지 않고 자랑스런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제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장차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절대 마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음주를 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군 앞에선 이등병 신세였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선포해 버렸다.
“허허허. 알았으니 나가 보게.” 곧바로 집합이 걸렸다. 동기 6명이 일렬로 섰다. 수석 레지던트의 훈시가 있고 바로 밑의 3년차 레지던트들이 펄쩍 뛰었다. “이창우가 어떤 놈이야! 하늘 같은 과장님께 술을 안 먹겠다고 한 놈이 어떤 놈이냐구!” 이후 연차별로 줄줄이 집합이 걸렸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의자가 날아다니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건방지게….”
그날로 나는 100일 당직에 걸렸다. 말 그대로 100일간 외부출입 없이 병원을 지키는 것이다. 잠을 1∼2시간밖에 못 잤다. 그것도 호출을 대비해 신발을 신고 있어야 했다. 병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분명히 8층을 눌렀는데 깜박 잠들었다가 다시 1층에 서 있는 일이 반복되었다. 병원 기도실에서, 때로는 울퉁불퉁한 개인의자를 붙여서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성경읽기와 기도는 빠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험악하다는 입국식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말이 입국식이지 조폭처럼 일렬로 서서 선배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번에 들이키는 자리였다. “야 인마, 술을 먹는 척이라도 해!” “야, 쟤는 아예 술잔도 주지 마. 과장님도 술 먹이지 말라고 하셨던 독종이야.” 그날 이후 과장님과 교수님들은 신앙을 지키려는 나를 조금씩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정형외과 대리 운전기사 역할을 충실히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하나님과 약속했던 시간의 십일조, 서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다. 힘든 레지던트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양가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6) 서울생활 위해 옮긴 교회서 배필 만나
선교의 평생 동역자인 아내 김정신 권사를 만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1981년 한양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나는 인천성산교회의 청년부 회장을 맡게 됐다. 주일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 등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지냈다. 인천 집에서 서울 행당동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의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에 들어가면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해부학 실습과 시험 준비 등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취를 하니 교회까지 옮겨야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시작으로 소망교회 영락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등을 다니며 정착할 교회를 찾았다. 그러다 광림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김선도 목사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말씀을 듣는 순간 ‘이 교회다’ 싶었다.
교회는 83년 천막교회 시절을 마치고 건물을 완공한 상태였다. 근처는 개발이 막 진행되고 있었다. 현대아파트 건축이 끝났고, 높은 건물이라고 해봐야 영동백화점밖에 없었다. 강남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명동과 광화문이 문화의 중심지였다.
내가 김 목사님의 설교에 매료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설교 중에 미생물과 면역체계 등 의학전문 용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의대생이었던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목사님이 어떻게 의학전문 용어를 잘 알고 계실까.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인데.’
나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희망과 치료, 회복의 메시지에 점차 빠져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목사님은 해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신 의사 출신의 목회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의무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탈출한 뒤 국군에 투항해 의무장교를 지낸 드라마 같은 이력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84년 초 이종사촌 동생의 약혼식 자리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바이올린 축가를 연주했다. “바이올린 연주하는 저 친구가 누구죠?” 김 목사님이 외삼촌께 질문을 던졌다. “예, 제 이종조카인데 한양대 의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얼마 후 외삼촌이 광림교회 앞 빵집으로 나를 호출하셨다. “좋은 자매를 소개시켜 줄 테니 꼭 만나봐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말쑥한 외모와 의대 오케스트라 악장을 담당하며 여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누군데요?” “김선도 목사님의 따님이다.” “예? 목사님 친딸이라고요?”
상대는 연세대 교회음악과에 다니는 1학년 여학생이었다. “저, 이창우라고 합니다.” “아, 예.” “이름이 뭐죠?” “김정신이라고 해요.” “뭐 좋아하세요?” “그냥 책 읽는 것 좋아해요.” “저는 앞으로 선교에 헌신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해오고 있습니다.” “아, 네.”
대학 1년생인 그녀는 애송이처럼 보였다. 화장을 짙게 하고 성숙미가 물씬 풍기던 동기생들을 만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촌스러운 여학생을 만나니 별로 감흥이 오지 않았다. 목사님 딸이라 부담도 컸다.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만났다. 막상 만나면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84년 가을. 갑자기 그녀가 나를 만나자 했다.
“우리 그만 만나기로 해요.” “예?” “창우씨는 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그 말은 지금 저를 차겠다는 겁니까.” “예.” 주변의 여학생들로부터 한 번도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내말 잘 들어보세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손 위의 남자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겁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7) “의료선교 자신 있다” 어색한 프러포즈
“오빠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긴 거야?” 이종 사촌여동생이 다짜고짜 따졌다. “뭘 말이야.” “정신이 말이야.” “아, 그 자매가 며칠 전 나를 찼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오빠가 공부한다고 만나주지 않으니 그런 거 아냐. 정신이가 그렇게 무심한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고생한다고 그러던데.”
아차 싶었다. 나는 한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교만하게도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사실 그 자매를 만나면서 내심 나의 기도제목을 말하면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무엇보다 교회에 헌신하셨던 목사님 사모님을 보며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정신 자매에게 급히 연락했다. “미안합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광림교회 앞으로 다시 나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교회 대예배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사는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돈 많이 벌고 아내를 풍족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평생 헌신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런 나와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 기도해 보시고 내일 이 자리에서 답변해 주세요.”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얘기지만 참 기가 막혔다고 한다. 프러포즈라고 하기에 너무 비장하면서도 상황이 우스꽝스러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기 위해 확실한 비전을 가졌다는 게 끌렸다고 한다. 결국 ‘이 정도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다음 날이 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를 했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한양대 의대 도서관이었다. 공부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자매는 요점정리 된 선배들의 책을 보고 내 책에 형광색 펜으로 줄을 대신 그어 주었다. 우리는 1987년 10월 약혼을 하고 88년 4월 결혼에 골인했다.
아내는 정말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 딸 같지 않은 수수하면서도 따스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걸 신앙의 ‘온실효과’라고 말하고 싶다. 평생 새벽제단을 쌓으신 두 분은 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는 믿음의 대를 적극적으로 준비해 가는 것’이라며 생활로 신앙을 보여주셨다.
장인어른인 김선도 목사님은 교회 건축이나 선교, 봉사 등에서 솔선수범하셨다. 당신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교회를 위해서라면 사례비 전부를 드렸던 분이다. 장모님도 짝이 다른 양말을 신으실 정도로 절약하셨지만 그 돈을 모아 장학금을 지원하실 정도로 품이 넓으셨다. 이런 모습을 본받았는지 아내는 대학 4년 내내 용돈을 직접 벌어 생활했다.
평생 선교에 헌신하셨던 두 분은 2남1녀의 신앙과 예절교육에 철저하셨다. 세 자녀의 각자 개성을 존중했지만, 인간의 도리나 예의범절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그렇게 자란 두 오빠는 현재 광림교회 담임목사(김정석)로, 명지대 교수(김정운)로 일하고 있다.
장인어른은 딸을 무척 아끼셨다. 해외선교나 지방 부흥회 때문에 집을 비우면 아내는 장모님을 대신해 두 오빠의 식사는 물론 뒤치다꺼리를 모두 챙겼던 순종적인 딸이었다. 78년 성전 건축을 위해 20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돌아오신 장인·장모님은 오빠들을 돌본 중학생 딸을 보고 기특한 마음에 용돈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는 그 돈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8) 의료선교 위해 인공관절 전문가 되기로
나는 1987년부터 90년까지 적십자사 병원선을 타고 인천 앞바다 섬을 다녔다. 88년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인천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당시 공중보건의는 박봉이었다. 장인어른은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였지만 자식에게 생활비를 대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 역시 평생 가난한 사람을 의술로 돌봤기 때문에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대학 4학년 때 전국교회음악회 총학생회장까지 지낸 아내는 88년 졸업 후 서울신대 음악대학원에 진학한 동시에 대학 강의도 맡았다. 아내는 2년간 시집살이를 군말 없이 잘해주었다. 89년 장남 상열이가 출생했고, 91년 상훈이가 태어났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한양대 의대 정형외과 레지던트 시절 술을 거부해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100일 당직 때는 양말을 갈아 신지 못해 발바닥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아내는 밤에 갈아입을 옷과 먹을 것을 싸와 병원 근처에서 무선호출을 했다.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으앙∼” 작은아들이 나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빠라고 하는 사람이 몇 개월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쳤으니 낯선 게 당연했다. ‘아내나 아이들에게 참 중요한 시기인데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감도 밀려왔다. 의자 몇 개 붙여 쪽잠을 자던 시기를 지나 병원 침대에 잘 때쯤 고달픈 레지던트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91년 정형외과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잠깐 시간을 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분야에서 일할 것인지 한국보다 앞선 미국 의료 현장을 보고 싶었다. 마침 현지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시는 재미교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제 꿈은 의료선교입니다. 병원을 세우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선교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선교 마인드를 갖고 있는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의료선교도 나갈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선교현지에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많으니 소아정형외과를 지원해볼 생각입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자네 뜻은 잘 알겠네. 하지만 내 생각엔 노인정형외과가 나을 것 같네. 한국은 앞으로 미국처럼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을 거야. 반면 고령화에 맞춰 노인들은 점차 늘어날 거고. 실제로 미국에선 노인정형외과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네.”
“노인 분들은 수술 위험부담이 크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한국의 장래를 보고 싶은가. 그럼 미국을 보게. 선교 사업을 하려는 자네 뜻은 좋아. 하지만 선교를 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해. 소아정형외과를 전공해선 돈을 벌기 힘들어. 노인정형외과 중 인공관절을 전문으로 해보게.”
당시 인공관절은 미국에서 연수를 받았던 의대 교수님들이 새로운 수술법이라며 국내에 도입, 늘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날로 나는 20년 대선배의 말씀에 따라 인공관절 수술의 대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최적의 장소에서 최고의 사람을 붙여주셨다. 최일룡 교수 등 한양대 의대 교수님들이 그랬다. 최 교수님은 당시 인공관절 수술의 대가로 대한정형외과학회장과 한양대 부총장까지 지낸 명의셨다. 교수님은 직접 나를 지도하시며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미국에 가기 전 한 해 동안 제천에 가서 근무하게.” 96년 2월 레지턴트 생활을 마친 뒤 곧바로 미국 유학을 꿈꾸던 나에게 교수님들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하늘같은 분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9) 유학 준비 위해 지방 병원외과장으로
“여보, 레지던트 기간 동안 아이 낳고 내 뒷바라지 해 주느라 고생 많았지. 이제 제천으로 내려가면 1년간은 지금보다 시간이 많아질 거야. 이번에 당신과 아이들에게 잃은 점수를 만회할 시간을 좀 줘.”
1996년 2월 충북 제천 제천서울병원 정형외과장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한양대 의대 교수님들의 명령 때문이었지만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누구는 장인어른이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이고 부친이 의사인데 무슨 엄살을 부리느냐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양가 어르신의 삶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장인이신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님은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라도 드리는 분이었다.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 생계를 위해 쓰여야 할 사례비가 교회건축과 선교현장, 신학생,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에 이미 ‘단련’된 상태였다.
의사이신 아버지도 5남매를 키우시며 지역 저소득층 환자가 오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가며 진료를 봐 주시는 분이었다. 당연히 미국 유학을 가려 해도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물론 양가 부모님께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도와 말씀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큰 그릇’으로 쓰임 받은 양가 부모님은 물질보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셨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마다 늘 옳은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미국 유학비를 놓고 기도 중 당시 미국계 의료기기 회사에서 의대 교수들을 대상으로 1∼2년간 유학비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학 교수가 대상자이지 나처럼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었다. 가능성은 없어보였지만, 하버드 의대 유학 지원 프로그램에 연수 계획서를 제출했다.
간절한 기도의 힘일까. 얼마 후 연락이 왔다. 회장님이 나를 뵙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회장님은 많은 돈을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내 놓을 정도로 신앙이 좋은 분이었다.
“이 선생은 개업하면 큰돈을 벌 수 있으면서 왜 유학을 떠나려는 것이죠? 그것도 의대 교수들만 갈 수 있는 의학 연수 코스를.”
나는 내가 왜 선교를 서원하게 됐고 인공관절 전문의가 되려 했는지 인생 스토리를 풀어냈다. “예, 물론 저는 교수를 할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미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의료선교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의사들이 선교지로 떠나기를 주저하는 것은 장단기 선교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병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료선교의 큰 울타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장차 의료선교사들이 마음 놓고 사역한 뒤 돌아올 수 있는 베이스캠프와 같은 병원을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습득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회장님은 나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교수가 아니지만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미국 의료연수에 2구좌를 지원해 드리죠.” 할렐루야! 1구좌는 2만5000달러의 큰 돈이었다.
그렇게 3년 미국 의료연수 중 2년차부터 장학금을 지원받기로 결정됐다. 우리 부부는 1년 생활비만 준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천에서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무릎관절 수술 환자가 쉴 새 없이 몰려들었고 레지던트 생활 못지않게 바쁜 생활이 지속됐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악착같이 모아 2000만원을 마련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0) 美 최고 병원 출근 첫 날부터 수술실로
1996년 2월 말. 드디어 우리 네 식구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곳으로 가는구나. 이제 몇 년 후면 모든 학업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한양대병원과 제천서울병원에서 바쁘게 지냈던 세월이 생각났다. 엄마 곁을 떠난 아기처럼 두려움이 앞섰지만 환자를 책임져야 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현지 한기덕 집사님 내외분은 처음 만난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자동차 운전면허부터 집 전화까지 세밀한 부분도 가족 일처럼 챙겨주셨다. 우선 월세 반지하 아파트부터 얻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3월 1일 미국 볼티모어시 존스홉킨스대학병원으로 출근했다. 병원 정문에는 ‘전미 대학병원 평가에서 금년에도 1위가 됐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7년째 관절수술 분야에서 1위를 달리는 명망 있는 병원이었다.
나의 지도교수가 되신 헝거포드 박사님은 60대 중반의 독일계 미국인으로 당시 인공관절 분야의 ‘원조’라 불리던 분이다. 키가 185㎝는 족히 될 박사님은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4가지 인공관절 기구 중 하나를 디자인한 분이셨다. 개발자이자 독창적 시술 방법을 만든 분이었기에 환자들이 첫 수술뿐 아니라 재수술까지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마치 포드자동차 운전자가 자동차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포드에게 자동차 수리를 맡기듯.
“잘 오셨소. 닥터 리.”
“서신으로 인사드렸던 이창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손을 닦고 들어오시오.”
첫날 가자마자 교수님은 나에게 수술실로 손을 닦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의료계에서 “손을 닦고 들어오라”는 말은 의술을 전수해 주겠다는 뜻이자 환자를 같이 돌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계셨던 모 대학 교수님이 수술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헝거포드 교수님께 강력하게 요청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수술 보조를 시켜보니 그 한국인 교수님이 잘하셨던 것 같다. 헝거포드 교수님은 그때부터 한국인 의사의 손재주가 꽤 좋다고 판단을 하셨고 곧이어 도착한 나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나는 존스홉킨스대학병원의 성인재건수술 및 무혈성괴사 센터의 책임자였던 박사님의 어시스트로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릎관절 수술을 진행했다. 교수님은 여러 개의 수술실을 다니며 하루 평균 2시간 인공관절 수술 4건 정도를 진행했는데 펠로들에게는 환자 무릎의 수술 부위를 열게 했다. 그리고 뼈를 자르는 중요한 수술부터 본인이 직접 맡으셨다. 재수술은 첫 번째 수술과 달리 4∼5시간이상 걸리는 고난도 수술이었다.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우주복처럼 생긴 특수 수술복을 입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복잡한 수술을 진행했다.
신앙심이 좋으셨던 헝거포드 교수님은 매일 오전 6시15분만 되면 젊은이들을 모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교재로 대화를 나누면서 2개월 코스로 젊은 레지던트의 소양을 키우셨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모인 수재들로 모두가 의대를 A+의 성적으로 졸업한 명문가 자녀들이었다. 이들은 관대한 성격에 남을 배려하는 기품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레지던트들도 세계 최고의 교수님 밑에서 몇 달 훈련받으니 정말 탁월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학식은 물론이고 수술에도 능숙해졌다. ‘나도 저 교수님처럼 누군가에게 훌륭한 멘토이자 스승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1) 2인의 스승, 신앙·삶의 멘토 역할
1997년 나는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서 5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무릎관절 수술을 진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정년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헝거포드 교수님은 참 정이 많은 분이었다. 동양에서 온 우리 가족을 무척 신경 써 주셨다.
“집으로 닥터 리를 초대하겠습니다. 가족들과 꼭 오세요.”
어느 주말 나와 아내, 두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교수님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까지 들어가는 데도 한참 걸리는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집이었다. 자택에는 낚시가 가능한 연못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저 멀리 숲길도 나 있었다.
‘세상에, 집이 얼마나 큰 거야.’ 그럴 만도 했다. 헝거포드 교수님은 당시 미국 정형외과 교과서를 집필한 학자였다. 특히 하우메디카라는 업체가 생산하는 인공관절을 개발한 분이었다. 전 세계에 공급된 인공관절 기구에 대한 로열티 5%만 해도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어서 오세요. 닥터 리. 잘 왔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의 자녀처럼 우리를 생각해 주셨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부활절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초대해 주셨다. 식탁에 둘러앉아 손에 손을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해 10월이 되니 한국에 IMF 구제금융이 시작될 것이란 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에서 준비한 돈은 집과 차를 구하는 데 대부분 써 버렸고 몇 푼 안 되는 돈마저 환율 때문에 반 토막이 났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장학금을 당겨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정말 미국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먼 이국땅에서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해 준 것은 헝거포드 교수님과 같은 인격적인 스승과 교회생활이었다. 토요일과 주일 우리 부부는 교회에 매달려 성경공부를 했다. 아내는 성가대 지휘자로 나섰다.
98년 3월부터 피츠버그의과대학 박사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획대로라면 피츠버그대에서 6개월을 마친 뒤 하버드의과대학 객원연구원으로 6개월을 있기로 돼 있었다. 피츠버그에선 생활비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나는 피츠버그대에서 내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인 후 박사를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인 후 박사는 나보다 15살 위였는데 십자인대 재건술과 연골재생술, 연골판 이식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후 박사는 수술 때마다 나를 찾았다. 내가 그분과 가까워진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눈에 콩깍지를 씌워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거물급 의사로 한국에서도 많이 시술하는 십자인대 수술법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매학기 세계에서 온 20명 이상의 교수들이 그의 수술을 참관하기 위해 다녀갈 정도였다. 후 박사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수술 전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나를 찾아 옆에 두고 수술을 진행했다. 어느덧 피츠버그대에서 6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닥터 리, 6개월간 더 있을 거죠?”
“박사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하버드의대로 가야 합니다.”
“좀 더 있는 건 어때요? 아예 내 밑에서 일하는 것도 좋고.”
“감사합니다. 박사님. 하지만 저는 연수를 빨리 마치고 한국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하버드의대의 루바시 교수에게 부탁을 하죠.”
“예?”
후 교수와 루바시 교수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정말 수화기를 들더니 루바시 교수에게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역경의 열매] 이창우 (12) 유학의 최대 성과는 ‘선교 열정’
후 박사님은 결국 하버드의대 루바시 교수님으로부터 내가 피츠버그대에 더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후 박사님과 나는 하루에 13건 정도의 수술을 했다. 약 2년 동안 십자인대 재건술과 연골재생술, 연골판 이식수술을 2000회 가까이 한 것 같다.
세계 정상급 명의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확실히 의술의 지평이 넓어졌다. 후 박사님은 의술 외에도 미국의 고급문화를 보여주고자 배려해 주셨다. 그는 백인 상류층을 위한 프라이빗 클럽으로 나를 불러냈다. 월세 565달러 짜리 반지하 아파트에 거주하며 몇 달러를 아끼기 위해 신문 쿠폰을 모으던 우리 부부가 집세보다 비싼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상류층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식사를 하고 있으면 발레리나들이 바로 옆에서 춤을 추며 자선 모금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박사님은 두 아들을 위해 야구와 풋볼 아이스하키 시즌티켓을 구해 자주 데리고 다녔다.
교회는 피츠버그에 있는 마운트 레바논 감리교회를 다녔다. 전부 백인들만 다니는 교회였는데 유색인종이라곤 나와 아내, 두 아들뿐이었다. 노인이 대부분인 교인들은 우리 가족이 교회에 들어서자 신기한 듯 쳐다봤다. 당시 장인어른인 김선도 광림교회 목사님은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내시고 1996년 5년 임기의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에 취임하신 상태였다. 담임목사님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미국 감리교대회에서 김 목사님을 뵌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하나도 쓰지 못할 게 없더라.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고 오너라.” 미국 유학을 그토록 꿈꾸셨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늘 이런 충고를 하셨다. 아버지 말씀대로 존스홉킨스대학병원과 피츠버그대학병원에 있으면서 골종양학과 줄기세포 연구에도 동참했다. 골종양학은 프라시카 교수님, 줄기세포 연구는 휴어드 박사님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공과목과 동떨어진 학문이었지만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적지 않은 통찰력을 준 자양분과 같은 시간이었다.
피츠버그 의대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히 하버드 의대 객원 연구원 기간이 줄어들었다. 나는 99년 9월부터 2개월간 짧게 메사추세츠 제너럴 하스피털 정형외과에서 객원 연구원 생활을 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해 12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내와 나는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미국 땅에서 많은 것을 배우도록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학문적인 것도 있지만 제일 크게 배운 것은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 돌아가면 선교에 열심을 내겠습니다.”
정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최선의 때에 최고의 사람을 통해 우리 가족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 우리 네 식구는 12월 31일 오후 10시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도착했다.
누구는 ‘강남 한복판에서 병원 간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판에 미국 명문 의대 연수 사실을 왜 적극 홍보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지금도 내 실력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은 분명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일에 나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목자병원 개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3) 선교병원 세우려 의대 교수직 사양
2000년 말 충북 제천서울병원에서 근무하며 선교병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서울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창우 선생 잘 지내고 있었는가. 해외 유학 다녀왔으니 이제 학교를 위해 일 좀 해야지.” 한양대 의대 정형외과 과장님이었다.
“아니 교수님, 어떻게 아시고 전화까지 해주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모교 교수자리가 쉽게 나는 게 아닌 건 알지? 정형외과 교수님들이 모여 의논을 했는데 자네를 교수로 선발하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네. 이제 학교로 들어오게.”
지금도 그렇지만 한양대 의대 교수직은 하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자리가 드물게 날뿐더러 외국대학 교환교수 프로그램 이수자, 타 의과대 교수만 지원할 수 있었다. 국제적 논문은 필수였고 무엇보다 교수 전원 만장일치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 서원한 게 있었다. 선교병원이었다. 선교를 위해 물질과 인력, 시간을 총동원하는 병원 말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교수직 제의가 들어와도 그 자리를 탐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했었다.
“교수님, 정말 무례하고 죄송한 말씀인 줄 압니다. 제가 조만간 선교병원을 설립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 지금 의대 교수직을 거부하겠다는 말인가?”
“예.”
며칠간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지만 그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무릎관절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헝거포드 존스홉킨스의대 교수님과 십자인대 수술의 세계적인 거장 후 피츠버그의대 교수님 밑에서 배우면서 후학을 길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면 학교 일정대로 움직여야 했고 연구에 집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선교를 위해선 시간뿐만 아니라 자금도 많이 필요했다. 교수를 맡게 되면 적극적인 선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선교병원을 존스홉킨스대 메이요 클리닉처럼 세계적인 인공관절 전문병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천과 서울을 오가며 병원의 최적지를 찾았다. 10여 곳을 돌아봤지만 마땅치 않았다. 결국 서울 역삼역에서 가까운 오피스텔 2층 826㎡(250평)를 찾아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고 장충단성결교회에 출석하는 국민은행 지점장님이 선교병원의 취지를 듣고 좋은 조건으로 대출해 주셨다. 기적적으로 돈이 마련됐다. 큰 빚을 안고 시작했으니, 초창기엔 잠이 제대로 오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우리 부부는 1988년 결혼 이후 지금까지 마이너스 통장을 벗어난 적이 없다. 많은 돈을 선교와 헌금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갔다고 하겠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종신보험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병원 이름을 공모했는데 장모님이 ‘선한목자’를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지금이야 선한목자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와 병원이 많이 생겨 평범해졌지만 그때는 아주 신선한 이름이었다. 병원 마크에도 양을 돌보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넣었다. 제일 신경 쓴 곳은 기도실과 수술실이었다. 기도실은 하나님의 처소였고 수술실은 병원의 기관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고민 끝에 병원 한가운데 6.6㎡짜리 기도실을 만들고 십자가와 강대상, 의자를 설치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같은 무균 수술실을 갖춘 곳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미8군 병원이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벤치마킹했다. 29개의 병상도 갖췄다. 드디어 2001년 12월 22일 개원예배를 드리고 진료에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4) “예수님 따르자” 선한목자병원 명명
2001년 말 120여명이 참석한 개원예배를 마치고 나니 첫날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환자가 찾아왔다. 아마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창립 예배 다음날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주변에선 장인어른이 병원을 많이 도와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광림교회 성도 중 의사만 해도 수십 명이다. 너희들만 병원을 운영하는 게 아니다. 너무 티내지 마라.”
장인어른은 어떤 면에서 자식 문제에 있어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셨다. 결혼 후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을 얻을 때도, 반지하방에서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내복을 몇 겹으로 껴입은 미국 유학생활에서도, 개원 후 매달 적지 않은 대출이자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재정적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 대신 집중적인 기도로 후원해 주셨다. “선한목자라는 이름처럼 너희들이 목자 되신 예수님을 잘 따르며 병원을 운영했으면 좋겠다. 잘 하리라 믿는다.”
실제로 환자 중엔 광림교회 성도가 드물다. 충현교회에 출석하는 환자가 많다보니 내가 그 교회 교인인 줄 아는 분도 많다. 아내를 포함해 김정석 광림교회 목사, 김정운 명지대 교수가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 목회자 자녀임에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병원을 개원하고 첫 2년간은 국내선교만 집중했다. 해외선교를 위해선 병원 규모를 하루빨리 키우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첫 환자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마음으로 2명의 환자를 무료로 수술해 드렸다. 충북 제천 서울병원 시절 출석했던 제천제일감리교회에 부탁해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두 분을 추천받았다.
개원 이래로 우리 병원이 철저하게 지키는 원칙 두 가지가 있다. 매일 오전 8시30분 아침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술 전 반드시 환자와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최선의 서비스는 친절교육만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오늘 병원에서 어떻게 환자를 돌볼 것인가, 어떻게 내 신앙을 적용할 것인가 사명감을 찾는다면 자연스럽게 환자를 대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돼 있다.’
그래서 개원 후 지금까지 간호사와 직원이 하루도 빠짐없이 예배의 제단을 쌓고 있다. 주일엔 광림교회 주일 예배를 방영하거나 온누리교회와 광림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다.
수술 전엔 반드시 환자와 함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오늘 환자가 원하지 않는 질병으로 수술을 받게 됐지만 성공적으로 마쳐지길 소원합니다. 이제 수술을 시작합니다. 저희 의료진도 최선을 다하겠으니 합병증이나 후유증 없이 수술을 잘 이끌어 주소서. 특히 환자가 수술을 잘 마치고 건강을 되찾아 기쁨을 회복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직 폭력배를 제외하고 종교와 상관없이 환자 대부분은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의사에게 고마운 감정을 나타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사역을 돕는 데도 힘썼다. 어떤 면에서 농어촌지역 목회자들은 친자식보다 지역 어르신의 상태를 더 잘 아는 분들이다. 목회자가 현장에서 사역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뜻에 동감한 광림복지재단에서 절반의 재정을 댔고 우리 병원에선 시술과 인공관절 기구비를 댔다. 수술을 할수록 병원 입장에선 적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10년 동안 400여분에게 인공관절 수술을 해 드렸다. 2004년 드디어 우리 병원은 꿈에도 그리던 첫 번째 해외선교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5) 병원 개원 3년 만에 해외 의료봉사
지금 생각해보면 병원 개원 3년 만에 주저함 없이 해외선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받은 선교 DNA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CCC를 만난 것은 동인천중학교 2학년 때다.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플로 74대회였는데 100쪽이 넘는 A4용지 크기의 전도훈련 교재에는 ‘사영리를 아십니까’ ‘성령충만의 비결을 아십니까’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서울 대방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간 전도훈련을 받고 거리에 나서 전도활동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양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CCC 활동을 했는데 의과대나 간호학과 학생들은 아가페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매년 여름수련회와 원단금식기도회에 참석했고 민족복음화의 꿈을 담은 ‘그리스도의 계절’을 불렀다.
드디어 2004년 1월 설 연휴 태평양 서북부에 위치한 미크로네시아라는 섬나라로 향했다. 이곳은 괌 옆에 위치한 나라로 필리핀 동쪽에 위치해 있다. 76세의 아버지가 의료고문으로 같이하셨으며, 아내 김정신 권사와 물리치료사, 간호사 등 11명이 동행했다. 병원에서 선교대원의 왕복항공료와 체류비 등 일체를 지원했다. 항공료까지 부담시킬 경우 선교에 나설 수 있는 인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괌에 내려 경비행기로 1시간 걸려 추크(chuuk)라는 섬의 소형 비행장에 도착한 다음 보트로 한참을 들어갔다. 이 나라는 4개의 큰 섬과 607개의 작은 섬들로 동서 방향으로 펼쳐져 있는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페팬섬과 모엔섬이었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있는 교회를 향하는데 원주민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일렬로 서서 환영을 해 큰 감동이 있었다. 그곳은 생산활동이 거의 없어 국민소득이 2000달러 수준이었는데 미국의 원조만 받아서 그런지 햄버거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비만으로 인한 고혈압과 당뇨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선교대원이셨다. 요즘 젊은 의사들이야 자신의 전공분야밖에 볼 수 없지만 아버지 시대만 해도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부인과와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을 모두 도맡았다.
이 나라는 수도시설이 열악했다. 국립병원이라고 하는 곳도 양철지붕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 시멘트로 된 공간에 모아 그걸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염증 부위의 고름을 짜내고 찢어진 살을 꿰매는 수술이 많았다. 괌 늘푸른장로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이처럼 성과도 있었지만 금세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일회성으로 선교 현지를 다니는 게 과연 도움이 될까. 간단한 약만 있어도 치료가 될 병이었는데 그냥 방치했다가 큰 병으로 확대된 사례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매년 와서 수술을 해준다는 것도 무리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진료소다. 굳이 의사가 상근하지 않더라도 간호사가 약이라도 꾸준하게 지급할 수 있다면 현지 주민은 물론 선교사의 선교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해 4월 3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라오스 선교는 무료 진료소로 방향을 틀었다. 현지 간호사 한명을 고용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인건비와 약값을 우리가 대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저개발국 주민에겐 약만 잘 지급해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연휴를 이용해 나와 아내, 간호사 등 6명이 수도 비엔티안에서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치료했다. 5월에는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비엔티안 선한목자병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렇게 선교를 다니기까지 병원 내적으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6) 저소득층 무릎관절 환자 시술에 온 힘
병원 개원 후 2년간은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갔던 것 같다. 무릎관절 수술 환자가 대부분 65세 이상의 노인인 데다 심장병 고혈압은 기본적으로 갖고 계셨기에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수술 부위를 열어보면 대부분 연골은 닳아 없어지고 뼈끼리 부딪혀 극한 통증을 호소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양쪽 엉덩이 연골이 모두 마모돼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환자도 있었다. 게다가 광림복지재단과 손잡고 전국 미자립교회 목회자나 생활이 힘든 저소득층 어르신을 추천받아 수술을 진행하다 보니 29개의 병실은 금세 상태가 심각한 노인들로 가득 차게 됐다. 순식간에 병원은 커다란 중환자실이 됐다.
“이곳은 저 이창우 개인의 병원이 아닙니다. 나와 아내는 병원을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목자병원은 예수님이 주인이신 병원입니다. 우리는 선교를 할 사람들입니다. 부디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가는 시간을 가지세요.”
초창기 직원들은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할 정도로 사명감에 불탔다. 나 역시 존스홉킨스대학병원과 피츠버그대학병원에서 배운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환자들을 맞이하다 보니 피로감이 누적됐다. 개원 8개월째 되던 어느 날 간호사 한명이 찾아왔다.
“원장님 상담을 좀 하고 싶습니다.” “예, 무슨 일이죠.” “3교대 근무가 힘들고, 중환자들이 많다 보니 힘에 부칩니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다른 배려를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병원장인 저도 월급을 받지 않고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정상화가 되면 그때 성과에 대한 배분을 반드시 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럼 그만두겠습니다.” “예?”
그렇게 한 시간 간격으로 8명의 간호사가 연속으로 상담을 요청해 왔다. 한두 명이면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였겠지만 이건 선전포고와 같았다. 15명의 직원 중 8명이 빠져나가면 사실상 병원 업무는 마비된다. 사실 중소형 병원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병원장들은 마지못해 임금을 올려주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간호사들이 하자는 대로 가게 된다. 곧바로 병원 내 기도실로 향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병원이 그들의 요구사항대로 끌려가다간 선교 사명이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수술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간호사가 많지 않아 병원 운영에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장시간 기도 후 결심을 했다. 직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물론 병원 업무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눈앞의 힘든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렇게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선교병원으로 가기 위해선 조금씩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두 신앙으로 모인 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직원들의 눈이 모두 내 입술로 향했다.
“병실을 폐쇄하겠습니다. 이곳을 떠나실 분은 떠나셔도 좋습니다.” 전혀 의외의 반응이라 생각했는지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날로 8명의 간호사가 병원을 떠났다.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서운했다. ‘선교병원이 이렇게 망하나 보다’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한목자병원을 망하게 두시지 않았다. 주님은 준비된 간호사를 한두 명씩 연이어 보내셨다. 남은 5명의 간호사와 신입 간호사에게 미국 유학 중 경험한 선진 의료 시스템을 전수시켰다. 그렇게 훈련된 간호사들이 병원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2004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의료선교에 같이 뛰어들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7) 기독인·무슬림 사이에 진료소를 세우다
2004년 8월 우리는 광림교회 산하 광림의료선교회와 함께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의료선교를 다녀왔다. 그리고 1개월 만에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파키스탄은 선교사로 활동 중인 친형이 있는 곳이었다. 형님은 1996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파송을 받고 선한사마리아병원 건립 과정에 관여했다. 부지 확보부터 건물 건립, 5∼6년을 현지에서 운영했고 한국에서 안식년을 포기한 채 다시 파키스탄 K시로 들어가 학교 건립에 주력했다. 형은 인천성산교회가 지원한 5만 달러를 종자돈으로 해서 16만 달러 이상이 투입된 학교건립에 매달렸다.
어느 날 형님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창우야, 여기는 무슬림과 크리스천이 공존하는 곳인데 양쪽 마을이 만나는 곳에 진료소를 세우면 복음전파에 더없이 좋겠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의료 혜택을 줬으면 좋겠고.”
“좋습니다. 그럼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학교 내에 공간을 내줄 테니 그곳에 무료진료소를 세워줬으면 좋겠다.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학교에 대한 평판은 무척 좋다. 교육과 의료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도 무료진료소가 단발적인 의료선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맞다. 이곳에서 천민계층에 속하는 무슬림은 교육과 의료혜택을 못 본단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달래준다면 복음 앞에 훨씬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될 거야.”
“그렇다면 형님은 초·중·고등학교와 직업훈련원, 병원이라는 복음의 삼각구도를 통해 파키스탄을 변화시키려는 계획이군요.”
“그래, 그게 내가 꿈꾸는 선교 모델이야.”
우리는 무료진료소 건립에 필요한 적지 않은 비용을 가방에 담아 9월 26일 파키스탄 K시로 향했다. 훌륭한 의료선교 대원이신 아버지와 병원 기획이사로 일하게 된 아내 김정신 권사, 간호사 등 10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그곳에 무료진료소를 만들고 ‘파키스탄 선한목자병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형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의료보험 증서를 만들어 배부했다. 그 증서를 갖고 있으면 진료소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 학교는 경쟁률이 7대 1을 넘을 정도로 지역에서 평판이 좋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과정을 운영 중인데 전교생이 400명가량 된다. 정부에서도 교육부 허가를 내줬다.
무료진료소에도 현지인 간호사가 상주하고 있으며, 주 2회 치료를 한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는 성산학교 보건교육까지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선한목자병원은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값과 간호사 월급, 의사 방문비용 정도만으로 수천 명의 지역주민에게 의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서울의 광림교회는 의료선교회가 주기적으로 그곳에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친다. 청년선교국도 그곳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여름성경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라오스에 이어 파키스탄에 두 번째 무료진료소를 세우면서 우리 병원은 의료선교의 확신을 갖게 됐다. 그것은 약만 제대로 나눠줘도 예방 차원에서 60∼70%의 질병이 치료되더라는 것이다. 의사가 1년에 한 번 선교지를 방문해 하루 종일 수술을 하는 것보다 염증이 생겼을 때 간단한 약을 처방해주는 게 선교지 주민 입장에서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선교지 현실에 맞는 3단계 전략을 희미하게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기적인 선교만 다닌 것은 아니다. 2005년 1월엔 쓰나미로 폐허가 된 인도네시아 아체주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하나님의 놀라운 준비하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8) 인니 쓰나미 피해 지역서도 의료 봉사
2005년 1월 20일 나와 아내, 아버지, 한양대 의대 외과과장이던 동생, 간호사 등 11명의 선교대원이 인도네시아 쓰나미 피해 지역으로 향했다. 현지 감리교회 감독이 기독교대한감리회에 긴급 구호요청을 한 것이다. 광림교회는 5만 달러의 구호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장인어른은 “이왕 도와주는 김에 수재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도와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우리 부부는 정기적인 선교뿐만 아니라 구호 활동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확신하고 흔쾌히 결정했다.
우리는 싱가포르를 경유해 인도네시아 메단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군용 특별수송기를 타고 기아대책 구호팀과 함께 록셈마웨로 향했다. 군용기에서 내리고 보니 나무와 집이 뒤엉킨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약품을 찾아 피해지역으로 향하려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짐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가져온 약품 꾸러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잘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비행기 탑승 때 짐을 싣는 게 상식 아닙니까?” 사람만 탑승시키고 짐은 하나도 싣지 않았던 것이었다. 2시간 동안 공항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짐꾼이 깜박 잊고 싣지 않았나 봅니다. 내일까지 기다려 보세요.” “이보시오! 우린 당신네 국민들을 도와주기 위해 24시간 넘게 이곳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별 수 없어요.”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냥 기다리세요.” “지금 촌각을 다투는 환자들이 있어요. 그 약품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겁니다.”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고요.”
공항 근무자들이 비협조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강성 이슬람 지역으로 반정부군들이 활동하는 곳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마지못해 이곳을 지원해주는 분위기였다.
약품이 없으면 선교대원이 이곳까지 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일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제시간에 약품이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우리 일행은 풀이 죽어 숙소로 이용하기로 약속한 비륀감리교회로 향했다. 피로감과 허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세상에, 원장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뭐죠?” 교회 사택에 들어갔던 간호사가 뛰쳐나왔다. “뭔데 그래?”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약품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의료품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섬마을 오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입이 딱 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동족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만에 거주하던 의사가 약품을 한 트럭 싣고 온 모양이었다. 혼자 치료하다가 한 박스만 쓰고 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웬만한 종합병원이 사용할 양이었다. 우리가 가지고 간 것에 비해 20배는 족히 넘어보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군요. 몇 시간 전에 공항에서 화를 냈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들이셨군요.’
의료선교팀은 곧바로 주사기와 고무장갑 수액 소염제 항생제 등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야, 이건 정말 하나님의 종합선물 세트다! 하하.”
저녁식사 후 선교대원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회개의 기도를 했다. 다음날 우리는 이재민들이 모여 있는 캠프로 달려갔고 이슬람 회당 처마 밑에 간이 진료소를 차렸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19) 3개월새 파키스탄·네팔서도 의료선교
2005년 1월 인도네시아 이슬람 회당 처마 아래 차려진 간이진료소에서 3일간 600명 이상의 쓰나미 피해 환자를 돌봤다. 상처가 곪은 환자가 대부분이었는데 나와 아버지, 동생은 환자들의 고름을 짜내고 살갗을 꿰매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이한 사실은 환자 10명 중 9명이 하나같이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 것이다.
“가슴이 아픕니다.” “어디 봅시다. 이상은 없는데요.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했나요?” “아뇨. 쓰나미 이후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네요.” 두려움 때문에 온 공황장애였다. 눈앞에서 자기 가족이 파도에 휩쓸려가고 썩은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상황 속에서 나타난 피해의식이었다. 반군의 탱크가 길거리를 오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은 더욱 공허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대부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아, 하나님이 안 계신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체 썩는 냄새는 진동하고 주변에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의 처지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인 현지 교회 목회자는 주민들의 어려움 앞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부나 현지 목회자나 비슷했던 것이다. “저들이 무슬림인데 굳이 우리가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코앞에 있지만 구원을 얻었다고 뒷짐만 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했다. 처음엔 비협조적으로 통역만 해주다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현지 사역자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지막 날 우리는 교회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약품을 일일이 분류해 일반인도 손쉽게 쓸 수 있도록 메모를 남겨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소중한 약품들은 한낱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일간의 의료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광림교회에서 전해준 5만 달러의 구호금은 현지 감독에게 전달했다.
그해 7월에는 파키스탄 의료선교를 다녀오고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네팔 치투완에서 진료활동을 펼쳤다. 이곳은 감리교 소속 이해덕 선교사님이 선교활동을 펼치는 곳으로 수도 카트만두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이 선교사님은 400명의 고아들을 모아 ‘소망의집’이라는 보육원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곳에서 한 일은 염증을 치료하고 종양을 떼어내는 일이었다. 수백명의 환자를 돌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항생제 하나만 제대로 처방받아도 이렇게 심각한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무료진료소를 세우고자 기념식수를 했다.
이처럼 선교지역을 돌보고 돌아올 땐 뿌듯했지만 한편으론 왠지 모를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국의 병원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강남 한복판에서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에 직원 10명이 선교를 한다고 일주일간 빠져나갔다면 그 병원은 조만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한목자병원은 달랐다. 무모한 짓 같아 보였지만 매번 선교를 다녀올 때마다 하나님은 그때 그 상황에 맞게 더 좋은 것으로 주셨다. 병원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고 무릎수술 환자도 끊이지 않았다.
‘아, 선교는 우리의 결단이고 모험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에 당장에 무모하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는 구나. 그렇다. 의료선교를 다니면서 우리가 베풀러 다닌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해외 의료선교 활동을 펼치던 중 몇몇 사람은 한국으로 초청해 치료해 주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0) 네팔에 뿌린 작은 씨, 목회로 피다
의료선교 활동 중 인연이 되어 한국에서 치료를 받게 된 경우도 있었다. 2005년 만난 네팔 치투완의 가겐드라 교장과 비멀라 사모, 2006년 라오스에서 만난 조이가 그렇다.
당시 30대 후반의 가겐드라 교장은 한국의 외국인 근로자 출신으로 우리말 구사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한인선교사가 세운 고아원에서 정성을 다해 일했다. 2005년 9월 의료선교 차 네팔을 방문했을 때 그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저, 선생님. 제 아내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허리 디스크가 있군요. 수술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한국 선교사를 도와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나와 아내는 그 부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님, 한국에 와서 수술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실은 저희 병원을 이용하면 되고 제가 잘 아는 분을 통해 수술을 받게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약을 주시고 증상을 봐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도우라는 마음을 주시네요.”
“그…그래도 되겠습니까.”
2005년 11월 우리 부부는 그분들이 한국에서 치료받는 경비 일체를 지원했다. 지인을 통해 피부 절개를 않고 척추 수술을 받았는데 결과가 아주 성공적이었다. 늘 통증을 호소하던 비멀라가 말끔히 낫자 부부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은 선행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교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네팔에서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원장 선생님 가겐드라입니다.”
“아, 교장 선생님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사모님의 허리는 괜찮고요?”
“네, 아주 좋습니다. 아내를 고쳐주신 그 은혜를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이 저희 부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참, 내년에 제가 한국을 가려고 합니다.”
“오, 그러세요? 무슨 일 때문이죠?”
“신학교에 진학하려 합니다.” “예?”
그렇게 네팔로 돌아갔던 가겐드라 선생 부부가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2008년이다. 협성대 목회학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는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현재 네팔 나랑가드라는 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여보, 정말 하나님께선 작은 배려를 통해 엄청난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 맞는 말이야.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의 일이지만 백배 천배 키워주시는 건 정말 주님이시네.”
우리는 2007년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비엔티안엔 2004년 5월 무료진료소인 라오스 선한목자병원을 개원했다. 선천성 심장병에 희귀병을 앓고 있던 스무 살의 조이를 만난 건 그때다.
“어디가 아파서 왔죠.”
“심장병이 있어요. 날 때부터 그랬다고 해요.”
처음 그를 봤을 땐 10살 정도 되는 소년인 줄 알았다. 친구들은 대학교에 다니거나 외지로 나갔지만 10m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그는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이나 먹이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 800여명을 진료하고 한국으로 향하는데 조이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여보, 심장병을 앓고 있던 앙상한 조이가 자꾸 마음에 밟혀.”
“나도 그래요. 우리가 그 청년을 찾아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한국에 돌아온 우리 부부는 현지 한인회에 부탁을 해 조이의 출국 절차를 밟았다. 여권은 물론 출생기록조차 없던 그를 데리고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개월 후 나는 조이를 데리러 라오스를 향했다. 집에서 조이와 그를 돌봐줄 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온 가족이 울음바다가 됐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1) 사람 살리니 또 다른 선교의 열매가…
조이도 라오스 집을 나설 때 눈물을 흘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족들은 동네 먼발치까지 따라왔다.
문제는 공항에서부터 생겼다. 베트남 항공을 타고 서울로 향하려는데 그만 제지를 당한 것이다. 조이의 몸이 좋지 않으니 편한 자리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승무원이 그만 매니저에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세 분은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 비자가 발급된 여권도 있고 비행기 티켓도 있지 않습니까.”
“무조건 안 됩니다. 가다가 동행자가 만일의 사태라도 벌어지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보시오! 이 사람은 라오스 사람입니다. 당신네 국민이란 말입니다. 치료받기 위해 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데 그걸 막는 게 말이나 됩니까.”
결국 나는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고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조이의 상태는 무척 좋지 않았다. 열이 나고 토하고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귀에서는 고름까지 나왔다.
어렵게 우리 병원에 도착했지만 조이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주한 라오스대사관에 연락해 통역자 K자매를 소개받았다. 한양대병원으로 조이를 옮겼는데 심장병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살라세미아라는 희귀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간이 붓고 적혈구가 파괴되는 병이었다.
“이 원장, 이 친구를 치료하겠다고 욕심을 내면 끝도 없어. 심장병만 치료해 주는 게 어때?”
“그러면 선천성 삼천판 폐쇄증만 치료하는 게 나을까요?” “희귀병을 고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결국 조이는 심장병 수술만 하기로 했다. 사타구니에 특수기구를 넣어서 심장의 삼천판을 여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효과는 하루 만에 나타났다. 10m도 걷지 못하던 조이가 쉴 새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롯데월드와 서울시내를 구경시켜 줬는데 언제 심장병을 앓았냐는 듯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며칠 후 나는 조이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라오스로 향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조이의 모습을 보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의 누나들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동생이 돌아오자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년의 시간이 흘러 의료선교차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조이를 찾기 위해 학교로 갔다. 학생들은 이미 조이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의료선교 대원들이 운동장에 들어서자 전교생이 일렬로 서서 반갑게 맞이해 줬다. 우리는 축구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아진 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이를 돌봤던 우리의 작은 선행이 또 다른 선교의 열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라오스어 통역자 말이다. K자매는 라오스에서 아버지가 정보국장으로 재직할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한국 국적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한 아픔이 있었다.
게다가 한국 생활마저 힘들었다. 한국 귀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리고 라오스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했다.
“저의 간절한 소망은 라오스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나는 그녀의 앞날을 위해 학비를 지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은 정성을 보탰다. 그녀는 A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J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조만간 K자매가 라오스 선교의 새 장을 열 첫 열매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2) 고액 들고 해외 출입 세무조사 받기도
선교활동이 늘 평탄한 길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다. 때론 귀국길에 공항 검색대에서 모든 짐을 풀어놓기도 하고, 해외에 정기적으로 고액의 달러를 갖고 나간다는 이유로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라오스병원의 경우 정부 관료들이 돈을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 해외 의료선교를 다니면서 곤혹스러운 것 중 하나가 인천공항 입국심사였다. 현지 의료선교를 마치고 남은 소독약품과 수액이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찾을 때면 매번 멜로디가 나오는 노란색 자물통이 붙어 있었다. 그게 붙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검색대로 가서 모든 짐을 풀어놔야 했다. 2007년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선생님, 짐을 풀어주십시오. 아니, 웬 약을 이렇게 많이 갖고 다니십니까. 보따리 장사라도 하십니까?”
“저희는 의료선교를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후진국의 환자들을 무료로 돌보고 있습니다. 명품 백이나 골프백을 들고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우리 같은 봉사자들을 들어올 때마다 검색대로 부르니 마음이 아주 불편하네요.”
“죄송합니다. 규정상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는 여권에 라오스 파키스탄 네팔 출입국 도장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유명 관광지도 아닌 곳에 약품을 갖고 수십 차례 다녀온 우리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공항 직원을 탓할 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6월엔 세무조사를 받았다. 병원마다 한번쯤은 세무조사를 받는데 탈루 혐의로 보통 3억∼5억원의 추징금을 물기 일쑤였다. 중소형 병원이 한 번 세무조사에 잘못 걸리면 아예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병원의 경우 신정이나 구정, 추석을 끼고 1년에 네 차례 이상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니 세무서에서 의심을 할 만했다. 병원 규모에 비해 현금 보유액이 턱없이 적은 것이나, 잦은 해외 방문과 함께 고액의 외화를 보낸 것도 이유가 됐다.
나는 투명하게 기록해 온 모든 장부를 내놓았다. 십의 일조를 넘어 삼, 사조 이상 드리는 헌금 명세서도 내놓았다. 우리의 신조는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선교비와 헌금을 드리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게 없다시피 했다. 완벽한 자료 앞에 세무서 직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수익을 모으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직원들을 동원해 외국 방문까지 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 이 말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입니다. 선교를 위해 세워진 병원이니만큼 그곳에 많은 돈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 한다고 이렇게 자주 나가면 도대체 병원은 언제 운영합니까?”
“허허, 하나님이 지켜주시네요.” 결국 세무서 직원들은 선교방송에 투입된 일부 비용 문제를 제기하고 세무조사를 마무리했다.
세무서 직원처럼 우리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선교에 투입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병원이 두려워하는 게 의료사고다. 아무리 운영을 잘해도 의료사고가 한 번 터지면 병원 운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다. 병원마다 사무장을 두는 이유는 사고 수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 병원은 개원 이후 이렇다 할 의료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다른 병원이 의료사고를 수습하는 데 막대한 돈을 쓴다면 우리는 선교지의 무료진료소를 운영하고 약품을 지원하는 데 헌금을 드린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나님은 사무장도 없는 선한목자병원을 눈동자같이 지켜주셨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3) 부친 별세… 의료선교 최대 위기 맞아
선한목자병원이 선교활동을 펼치는 데 가장 큰 위기는 2008년에 닥쳤다. 그것은 돈 문제도, 세무조사도, 사회주의 국가의 법적 제재도 아니었다. 삶의 모델과도 같았던 아버지 이종찬 장로의 소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병원 고문으로 계시면서 2004년부터 시작된 선교활동에 동참하셨다. 앞서 말했듯 모든 과목의 진료가 가능하셨던 아버지는 네팔 라오스 파키스탄 미크로네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등 선교 현지에서 훌륭한 의료선교대원이었다. 아버지는 신앙과 의술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원칙적이었고 정도를 걸으셨다.
2007년 9월 중국 선양 의료선교를 마치고 통화라는 곳에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해 진료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산악지역이다 보니 날씨가 쌀쌀했다. 음식마저 기름져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선교대원은 새벽 1시까지 진료활동을 펼쳤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안색이 안 좋아지셨던 것 같다.
귀국 후 며칠이 지나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창우야, 아무래도 내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구나.”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가 어떠십니까?” “식도에서 출혈이 있는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내 꿈이 선교하다가 죽는 것 아니니.” “아휴, 아버지. 절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 일이 있은 뒤 아버지의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했는데 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몸 상태는 점차 나빠졌다. 말씀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상황을 거쳐 혼수상태가 지속됐다.
2008년 9월 1일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인천의 인하대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오랜 기간 인하대병원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8일 후 아버지는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은 간단했다. “고맙다. 감사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버지, 당신의 유업에 따라 평생 의료선교에 헌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신 그 길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어머님 잘 모시겠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인하대 병원에선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셨다. 장례식장 리모델링을 마친 지 한참 지났지만 아버지의 빈소를 차리기 위해 특실 접수를 받지 않았다.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수술비를 대신 내줬던 환자부터 의대 교수, 의사협회, 학회 관계자, 대한적십자사 지도부 등 그루터기 같았던 아버지의 삶을 기리고자 많은 분이 찾아왔다. 조화가 장례식장 계단을 타고 위층까지 가득 찼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한동안 현지를 직접 방문하는 의료선교는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다. 하지만 선교 현지의 무료진료소 5개는 그대로 운영했다. 하지만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듯 했다. “세상에 하나도 쓰지 못할 게 없더라. 하나님은 내 인생에 배운 것을 모두 쓰게 해 주셨다. 너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 봉사해라.”
그렇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과 피츠버그의대 병원, 하버드의대 병원에서 세계 최고의 의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의 삶이 마이너스가 될지라도 믿음의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아버지가 원하셨던 삶이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은 나뿐만 아니라 두 손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할아버지와 함께 선교 현장을 누볐던 두 아이가 조부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4) 미얀마에 선교 위한 영리 병원 개원
2008년 9월 아버지의 소천 이후 선한목자병원 의료선교팀은 국내 선교와 미얀마 선교에 주력했다.
국내는 서울 광림교회와 함께 미자립교회 의료선교에 힘썼는데, 단양 제천 이천 서산 횡성 등지를 다니며 저소득층 어르신들을 돌봤다. 또 노숙인들을 살피는 데도 힘썼다. 소중한사람들과 함께 월 2회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을 위해 무료진료 활동을 펼쳤는데 이 사역은 4년째 이어지고 있다.
국내 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해외선교사를 위한 수술이다. 선교지역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활동하다가 무릎 엉덩이 관절과 십자인대를 다친 선교사들을 돕는 데도 힘썼다. 그들을 치료하는 것은 해외에서 수천명을 돌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역이었다. 현재 몽골로 파송된 이채욱 선교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양측 슬관절과 우측 고관절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인공관절 수술을 했는데 앙상한 몰골로 휠체어를 타고 겨우 병원에 들어왔다가 당당하게 걸어서 나간 케이스였다. 이 선교사는 인공관절 수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했던 자매와 결혼식을 올렸다. 양가 어른께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릴 때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이자 후원자로서 큰 감동이 느껴졌다.
해외 선교는 미얀마에 집중했다. 2004년부터 4년간 무료진료소를 설치하고 간호사를 상주시켜 주민들의 질병을 초기에 치료하는 데 힘썼다면 2009년부터는 초창기 한국의 의료선교사처럼 병원을 세우고 의료 전문 인력을 배출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소문 끝에 현지선교사로부터 미얀마 양곤에 산다틴이라는 신앙 좋은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0대 중반의 산다틴은 미얀마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받아들인 가문 출신의 의사였다. 현지 순복음교단 총회장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선교병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얀마에 병원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굳이 우리나라에 병원을 세우려는 이유는 뭡니까?”
“의료선교는 크게 3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현지에 가서 무차별적으로 진료하고 수술을 해주는 것입니다. 부정기적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에게는 잠깐의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뭐죠?”
“선교사들이 관여하는 무료진료소를 세우는 것입니다. 현지 간호사를 채용하고 약만 제대로 처방해도 70% 이상의 주민들이 초기단계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온 방식입니다.”
“결국 세 번째 단계를 미얀마에서 하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영리 병원이 스스로 돈을 벌어 미얀마 전역에 선교병원을 세우도록 하는 게 저의 꿈입니다.”
나는 머릿속에 한국의 세브란스병원 같은 자립병원을 꿈꾸고 있었다. 현지 의료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선 시범적으로 병원운영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2010년 6월 우리는 드디어 미얀마 양곤에 클리어 스카이병원을 출범시켰다. 조그만 개인병원의 지분 3분의 1을 사서 병원운영에 직접 참여했다. 1개월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관절과 성장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수익의 많은 부분을 책임졌다.
또 다른 전략은 인재양성이었다. 미얀마 순복음교단 총회본부의 4층 건물을 빌려 선한목자 간호조무사 양성학원(Good Shepherd Nurse Aid Training Center)을 개원했다. 3개월 코스로 간호사 양성에 주력했는데 120명가량이 졸업했다. 현지 간호대 은퇴 교수들이 자원봉사자로 도움을 줬다.
짧은 기간이지만 병원과 간호학원 운영 경험 속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미얀마 굿 쉐퍼드 메디컬센터(Good Shepherd Medical Center) 건립을 위한 닻을 올렸다.
***[역경의 열매] 이창우 (25·끝) “늘 부족함 느껴… 의료선교 현재진행형”
미얀마 양곤에 굿 쉐퍼드 메디컬센터(Good Shepherd Medical Center)를 세우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매달 현지를 방문했다. 현지 감리교단 관계자들을 만나 긴 시간 회의를 가졌다. 협의 끝에 드디어 지난해 12월 6층 높이의 감리교 백주년기념관을 5년간 임대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올해 1월부터 건물 리모델링을 위한 회의를 갖고 최근 수억원이 투입되는 공사에 착수했다. 조만간 연면적 2300여㎡의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면 이곳은 35개 병상 규모의 현대식 선교병원으로 거듭날 것이다.
물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문화적 차이로 일이 벽에 부닥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병원 스태프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실수는 하지만 실패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우리의 중심이 주님께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선한목자병원의 목표는 수많은 의료선교사들이 선교 현지에서 활동하다 한국에 돌아와 재충전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목자병원의 선교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8년간 수많은 선교 현장을 방문하고 네팔과 필리핀, 파키스탄 등에 5개의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미얀마 양곤에 대형 병원 개원을 앞두고 있지만 나와 아내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 8년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선교지에 병원과 수많은 무료진료소뿐만 아니라 의과대, 간호대, 약학대의 꿈까지 보여주신다.
결국 선교의 핵심은 동역자, 즉 헌신된 사람이다. 보통 선교에 3M이 필요하다고 한다. 돈(Money)과 방법(Method), 사람(Man)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돈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방법은 그동안의 선교활동을 통해 쌓아왔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헌신되고 준비된 사람, 우리와 뜻을 함께할 사람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가 이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된 부모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강남의 대형 교회를 맡고 계시지만 여전히 새벽제단을 쌓으시고 복음의 보따리를 들고 중국 러시아 등지로 떠나시는 장인 장모님, 저소득층 환자의 진료비를 남몰래 대신 내주고 천국으로 가시기 전까지 의료 선교를 다니셨던 아버지와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예배에 참석하시는 어머니…. 부모님은 우리에게 수백억원의 재산보다 더 값진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신 ‘영웅’이다.
나와 아내는 선친께서 건네주신 믿음의 유산을 두 아들뿐만 아니라 광림교회 청년들에게 전수하고자 6년째 청년위원장과 청년회 부장으로 섬기고 있다. 우리 부부는 새벽예배와 주말 청년부 소그룹 모임, 주일 대예배, 저녁예배 등으로 쉬는 시간 없이 바쁜 생활을 계속하고 있지만 청년 선교를 통해 꿈을 본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는다면 분명 이 나라를 살릴 보석 같은 인생이 될 것이다.
한국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국가에선 말라리아, 콜레라의 위협 속에 고름투성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조금 더 낫다고 내려다보기보단 똑같은 눈높이에서 수십년간 복음으로 사회·문화를 바꿔온 현지 선교사님과 발을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우리 부부의 심장을 쿵쾅쿵쾅 울리는 음성이 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