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지음 _ 피천득 문학세계 / 1. 시의 세계
첫 시조 <가을비>(1926)
필자는 피천득의 최초 발표시 또는 시조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출간된 일조각, 범우사, 동학사, 샘터사, 민음사 등의 작품집에 나오는 피천득 작가 소개는 “1930년 《신동아》 등에 시를 처음 발표하였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럼에도 수십 년 동안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되어 왔다. 필자가 1930년대 전후 신문, 잡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피천득의 첫 시는 《동아일보》 1930년 4월 7일자에 실린 〈차즘>(찾음)이다. 그리고 《신동아》지에 시가 처음 실린 시 작품 〈선물〉과 〈달무리 지면>은 1932년 6월호였다. 따라서 1930년에는 《신동아》에는 시나 수필 등 어떤 작품도 실리지 않았 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1930년 《신동아》 설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2021년 봄 필자는 1985년에 한준섭, 박병순, 리태극의 책임 편집하에 발간된 《한국시조 큰사전》(을지출판공사) 97쪽에서 피천득의 표제어 기사에서 피천득의 첫 시조를 찾아냈다. 시조 작품 이름은 <가을비〉였고 《신민》(新民) 1926년 2월호(제10호)에 실린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1926년이면 피천득이 16세 되던 해이고 경성고보 재학 중이었다. 이 시조는 아마도 등사판 동인지 <첫걸음>에 실렸던 것일 수도 있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어머니마저 잃었던 천애고아 피천득은 당시 종로구 화동에 있던 경성고보(현 경기고) 길 건너편에 사옥이 있었던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 집에서 3년간 살고 있었다. 이때 이광수 집을 드나들던 노산 이은상을 만난 후 시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조를 쓰기 시작했을까? <가을비〉라는 시조는 아마도 1926년 8월 상하이 유학을 위해 출국하기 전에 써서 잡지 《신민》에 투고한 것 같다.
이제 첫 시조 <가을 비>부터 읽어보자
고요히 잠든 강 위 하염없이 듣는 비의
한 방울 두 방울에 벌레소리 잦아진다.
아마도 이 비는 (정녕) 낙엽의 눈물인가.
16세의 나이에 쓴 이 시조는 완성도는 좀 떨어진다 해도 피천득 특유의 서정성은 들어있다. 조용한 강 위로 내리는 비가 벌레소리와 연결되고 이 비는 다시 낙엽의 '눈물'로 변신(의인화)하면서 점층적으로 가을 비의 애상이 독자들의 마음에서 파문을 일으킨다. 피천득은 그 후에도 시조를 여러 편 써서 발표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일생 동안 이어졌다.
그 후 <만나서〉, 〈벗에게〉, 〈산야〉, 〈이 마음〉, 〈진달래> 등의 시조를 꾸준히 써왔다. 피천득은 인생 후반기인 1977년에 14행의 정형시 셰익스피어 소네트 104편을 3행의 평시조 형식으로 개작하여 《시조문학》(제12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