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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홍개(紅蓋)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붉은색의 의장용 일산(日傘).
개설
‘노부’는 왕이 외부에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불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 소가(小駕)로 구분되었다. 왕 이외에 왕비·왕세자·왕세손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 부채, 덮개, 병기, 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홍개는 이러한 의장 용품 가운데 하나로, 노부에 참여한 군사들이 좌우로 나뉘어 들고 가는 붉은색의 일산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는 대가노부에 3개, 법가노부에 2개가 사용되었다.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 앞에 다른 의장과 함께 진열되었는데, 대가노부의 경우 홍문대기(紅門大旗) 다음에 2개, 좌우로 펼쳐진 작선(雀扇) 사이에 1개가 배치되었다. 홍개를 든 군사는 청의(靑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하였다. 한편 중궁(中宮) 즉 왕비의 노부에도 2개가 쓰였으며, 국장 의례를 거행할 때의 발인반차(發引班次) 행렬에는 6개가 편성되었다.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소가노부에도 1개가 포함되었다.
형태
개(盖)는 양산(陽繖)이나 당(幢)과 비슷한 모양의 의장물이다. 양산과 개는 모두 우산과 같이 나무통에 살을 붙인 후 그 위를 비단으로 덮는데 개가 양산에 비해 비단의 길이가 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홍개의 제작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나무통을 축으로 하여 원형으로 대나무 살을 붙이고, 그 위에 붉은색 비단 덮개를 씌운다. 덮개 하단에는 3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붙이고 용을 그린다. 덮개 상단은 도금하여 장식하고, 자루는 대나무를 사용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홍문대기(紅門大旗)
정의
조선 왕의 행차나 궁궐 내에서 진행되는 공식 행사에서 왕을 상징하기 위해 가장 앞에 배치되는 의장기.
개설
홍문대기는 왕의 의장에만 동원되는 대형 의장기이다. 행차 시에는 좌우에 하나씩 배치되어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의 선두에 선다. 궁궐 마당에 의장이 배치되는 경우에는 정전(正殿)의 문 밖에 좌우로 나누어 위치하였다. 역시 의장 중에 가장 앞쪽에 위치하였다. 홍문대기의 기본 기능은 신성한 구역의 구분이며, 왕의 상징 의장이 시작되는 표시 기능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부터 홍문(紅門)은 궁문(宮門) 밖에 설치하여 일반 건물과 왕의 주거지를 구분하는 표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경우에도 임시로 설치한 장전(帳殿)의 앞에 홍문을 세웠는데, 역시 특별한 공간을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홍문대기는 의장의 가장 앞쪽에 위치하여 왕을 상징하는 의장이 시작된다는 표시 기능을 하였다. 실제의 어가 행렬에서는 의장의 앞에도 다수의 시위 병력이 위치하고 병력의 지휘 목적에 따른 다양한 표기가 있었다. 홍문대기는 이들 표시 의장과 구분되어 본격적으로 왕의 상징 의장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장이었다.
홍문대기는 붉은색 바탕에 청룡 문양이 들어간 의장기로 기수 한 명에 두 명의 인도자와 두 명의 좌우 보조 인원이 배당되어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이동하는 대형 깃발이다. 기수는 청색 옷에 가죽 모자를 쓰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에서는 행차에 사용하는 노부(鹵簿)를 등급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하고, 궁궐 마당에 진설하는 의장(儀仗)은 대장(大仗)·반장(半仗)·소장(小仗)으로 분류하는데, 노부와 의장의 의물 구성은 동일하였다. 홍문대기는 대가와 법가, 대장과 반장에 각각 2기씩 사용되어 문반과 무반 의장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가장 작은 규모인 소가나 소장의 의장 구성에서는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 의장에서는 청룡을 그린 조선의 홍문대기와는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문(門)이라는 글자를 적은 문기(門旗)를 두어 홍문대기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형태
홍문대기는 이름과는 달리 홍문(紅門)이라는 글자나 해당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다. 『세종실록』「오례」에 의하면, 바탕은 적색이고, 청룡과 구름 모습을 그렸는데, 청색·적색·황색·백색의 네 가지의 빛깔로 채색하였다. 깃발의 세 바깥 면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각(火焰脚) 장식을 두었다. 깃대는 검은 칠을 하였는데, 깃대 머리는 둥근 모양에 붉은 칠을 하고, 아래쪽은 쇠로 장식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홍양산(紅陽繖)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붉은색의 의장용 일산(日傘).
개설
노부는 왕이 외부로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불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되었다. 왕 이외에 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부채·덮개·병기·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홍양산은 그러한 의장 용품 가운데 하나로, 붉은색의 대형 일산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대가·법가·소가 및 중궁(中宮) 노부에 1개씩 동원되었다.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 바로 앞쪽에 은마궤(銀馬机) 등과 함께 진열되었다. 홍양산을 든 군사는 청의(靑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하였다. 중궁 노부의 경우에는 군사 대신 내시(內侍)가 홍양산을 들었다. 국장(國葬) 의례를 거행할 때의 발인반차(發引班次) 행렬에는 2개가 편성되었다.
형태
나무통을 축으로 하여 원형으로 대나무 살을 붙이고, 그 위에 붉은색 비단 덮개를 씌운다. 덮개 하단에는 붉은색 모시실로 만든 3단 휘장을 붙이고, 용을 그려 넣는다. 유소(流蘇)라 불리는 매듭을 안에서부터 드리운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화개(華盖)
정의
왕의 의장물로 사용되는 여러 종류의 개(盖) 및 양산(陽繖)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
개설
중국 및 고려, 조선의 의장물의 구성에는 여러 종류의 병장기 및 기휘 등과 더불어 일산(日傘)이나 개와 같은 덮개류가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일산은 말 그대로 햇빛을 가리기 위한 양산이고, 개는 산(繖)과 비슷한 일산의 한 종류인데, 다만 산보다는 크기가 컸다. 조선에서는 청양산(靑陽傘)과 홍양산(紅陽傘), 청개(靑蓋)와 홍개(紅蓋) 등 네 가지의 덮개를 의장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화개라고 총칭하여 불렀다. 일반적으로 왕의 거둥 시에 함께 움직이는 의장물로 일산의 종류를 통칭하는 산과 부채 종류를 일컫는 선(扇)이 있었는데, 보통 이를 산선(繖扇)이라고 지칭하였다. 반면 화개 중에서는 왕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일반 의장물과 같이 배치되는 것도 존재하였다. 때문에 화개란 용어를 의장물 일반에 대한 용어로 사용하는 용례도 더러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중국 명대의 예법을 규정한 『명집례(明集禮)』를 참조해 보면, 화개는 황제(黃帝)가 만든 것인데, 황제와 치우(蚩尤)가 탁록에서 전쟁을 할 때, 항상 오색의 운기와 금지옥엽이 황제의 위에 머물고 있어서 이를 본떠 만든 것이 화개라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화개는 특정한 의장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후한대부터 황제(皇帝) 의장으로 양산과 개를 사용한 것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당송 시대 이후에는 황제 의장물에 항상적으로 여러 모양의 양산과 개가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의 황제 의장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화개라는 명칭을 가진 특정한 의장물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화개는 구체적인 의장물이 아닌 여러 종류의 개와 양산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홍양산과 청양산, 청개, 홍개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경우에 따라 명나라 황제를 표현하기 위한 황의장을 사용할 때에는 조선 왕 의장에 사용하지 않는 황개(黃蓋)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형태
조선의 의장물의 형태와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노부조에는, 양산은 모시[紵絲]를 사용하여 3개의 처마를 만드는데, 일산에 비하여는 짧게 만들고 안에 유소(流蘇)를 드리우도록 하였다. 청양산은 청색 모시를, 홍양산은 홍색 모시를 사용하였다. 개는 양산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나 양산에 비하여 길게 만들었으며 4개의 처마를 만들고, 술을 드리우지 않았다. 홍개는 홍색 생초를 사용하고, 청개는 청색 생초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황룡기(黃龍旗)
정의
조선시대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의장기.
개설
황룡기는 중앙을 상징하는 의장기(儀仗旗)로 왕의 의장에서만 사용되고, 왕비나 왕세자의 의장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왕의 의장인 경우에도 가장 등급이 낮은 소가(小駕)나 소장(小仗) 등급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는 사신(四神)으로 통칭하는데, 중앙을 나타내는 황룡을 더하여 오방신을 구성한다. 황룡기는 왕이 외부에서 유숙할 때, 왕 처소의 앞에 세워 두는 의장기로서도 사용되었다.
황룡기는 왕 행차 시의 노부(鹵簿) 구성에서 대가(大駕)와 법가(法駕) 등급에만 사용되고, 소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노부(鹵簿)의 의장물 배치는 좌우와 중앙으로 구분되는데, 황룡기는 중앙에 위치하는 의장기이다. 궁궐 마당에 의장이 배치되는 경우에도 대장(大仗)과 반장(半仗)에 사용되고, 소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궁궐 마당에서는 노부의 중앙에 배치되는 의장물은 동서의 두 번째 줄에 배치되었는데, 황룡기는 동쪽 의장으로 분류되었고, 두 번째 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다.
형태
황룡기는 황색을 바탕색으로 하여 황룡을 그리고, 구름 모양을 주위에 그렸다. 청색·적색·황색·백색으로 채색하고, 둘레에는 불꽃 모양이 그려진 화염각(火炎脚)이 있다. 깃발에 사용되는 깃대는 공통적으로 검은 칠을 하며, 머리는 둥근 모양에 붉은 칠을 하고 하단은 쇠 장식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황이(黃彛)
정의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제기(祭器)로 몸체 표면에 황금으로 된 눈[黃目]을 새기거나 그려 넣은 술동이.
개설
황이는 고대로부터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6종의 의식용 그릇인 이기(彝器)의 하나로서, 몸체 표면에 황금으로 눈을 새겨 넣은 술동이를 말한다. 황이는 그릇 표면에 벼 이삭 그림이 새겨진 가이(斝彝)와 짝을 이루어 조선시대의 종묘(宗廟), 경모궁(景慕宮), 육상궁(毓祥宮), 저경궁(儲慶宮)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동지 뒤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 등에 올리는 오향제(五享祭) 중 가을 제사와 겨울 제사에 사용되었다. 가을 제사에서는 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이라고 하는 명수(明水)를 가이에 담고, 검은 기장에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이라고 하는 울창주(鬱鬯酒)를 황이에 담았으며, 겨울 제사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황이에 명수를 담고, 가이에 울창주를 담았다.
연원 및 변천
한국과 중국에서는 고래로부터 6종의 이(彝), 즉 닭 모양을 새긴 계이(鷄彝), 봉황 모양을 새긴 조이(鳥彝), 가이, 황금 눈 장식을 한 황이, 호랑이 모습을 새겨 넣은 호이(虎彝), 원숭이 모습을 새긴 유이(蜼彝)와 6종의 준(尊), 즉 희생을 새기거나 몸체를 희생 모양으로 만든 희준(犧尊), 코끼리를 그려 넣거나 코끼리 모양으로 만든 상준(象尊), 받침다리 없이 그릇의 면이 바닥에 닿도록 만든 착준(著尊), 음기(陰氣)가 사방을 둘러싸서 만물을 간직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호준(壺尊), 입구가 넓고 몸체가 불룩하며 문양이나 장식을 새기지 않은 밋밋한 모양의 대준(大尊), 산에 구름이 낄 형세의 문양이 있는 산준(山尊)을 각종 국가 제례에서 술과 맑은 물을 담아 두는 용도로 함께 상용해 왔다. 그중 6종의 이는 제례별로 각각의 수량과 조합을 달리하면서, 강신 절차에 사용되는 울창주와 명수를 담아 두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몸체 표면에 새기거나 그려 넣은 문양에 따라 명칭이 정해졌다.
이의 운용과 진설(陳設)에 관련된 규정은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인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당대의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북송대의 『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와 『예서(禮書)』, 명대의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을 거치면서 단계별로 수정·보완·확정되었다.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는 명대에 최종 확정된 위와 같은 내용과 원칙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외형과 제작 규격 등은 각각 독자적인 취사선택과 보완의 과정을 거쳤다.
형태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전례서 등에 수록된 황이의 그림은 전기와 후기에 큰 변화 없이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고래로부터의 규정대로 황금으로 된 눈이 몸체 한 복판에 새겨져 있는데, 황색은 오방(五方) 중에서 중앙을 상징하며, 눈은 기(氣)의 청명(淸明)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를 통해 청명한 기운이 술동이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후전대기(後殿大旗)
정의
조선의 의장물 중 하나로, 의장의 가장 후미에 배치되는 두 개의 기.
개설
조선의 의장물은 전정(殿庭)에 배치되거나 혹은 노부(鹵簿) 행차 시 일정한 배열의 순서가 있었다. 이러한 의장물의 배열순서는 가장 앞에 홍문대기(紅門大旗)를, 가장 뒤에 후전대기를 세우는 것이었다. 왕의 행차 시에는 의장대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시위 병력도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시위 병력들 사이에서 의장물은 모두 홍문대기와 후전대기 사이에 위치하였다. 요컨대 왕 행차의 일반적인 모습은 ‘시위 병력-홍문대기-일반 의장물-왕-후전대기-시위 병력’의 순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후전대기는 보통 2기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가장 큰 규모의 대가의장(大駕儀仗)-대가노부(大駕鹵簿)와 다음 규모인 반장의장(半仗儀仗)-법가노부(法駕鹵簿) 시에 각각 사용되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소장의장(小駕儀仗)-소가노부(小駕鹵簿) 시에는 후전대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여타의 의장물들이 2기가 사용될 경우 그 모양새가 같았던 반면, 후전대기는 2기의 모양새가 서로 달랐다. 즉 하나는 청룡을 그려 넣었고, 또 하나는 거북과 뱀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실제 노부 규정에서는 모양이 다른 후전대기 2개 중 어느 것을 어떻게 설치한다는 특별한 규정이 보이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힘들다.
연원 및 변천
중국의 옛 의장제를 설명하고 있는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에서는 황제의 의장으로 홍문대기나 후전대기는 보이지 않는다. 또 의장물 배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旗)나 혹은 다른 의장물 역시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명집례』에는 명대에 사용되었던 문자기(門字旗)와 현무기(玄武旗)가 보이는데, 이들이 각각 의장의 맨 앞과 맨 뒤에 배치되고 있어, 이것이 조선의 홍문대기 및 후전대기의 역할을 수행한 의장기였다고 판단된다.
한편 고려시대의 의장을 전하는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의 의위조 및 노부조에는 각각 홍문대기 및 후전흑대기가 나타난다. 고려시대의 경우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의장물의 가장 앞에 홍문대기를, 가장 뒤에는 후전흑대기를 세우고 있었다. 다만 홍문대기의 경우 대개 2기를 사용한 반면, 후전흑대기는 의장 및 노부의 규모에 따라 달라졌는데, 2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4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후전흑대기가 조선시대 의장 정비 과정에서 후전대기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형태
후전대기는 사각형에 불꽃 모양이 그려진 화염각(火焰脚)이 달린 모양으로 바탕은 흑색이었다. 후전대기 2기는 서로 문양이 달랐는데, 하나에는 청룡과 구름 문양[雲氣]을 그려 넣었고, 청색·적색·황색·백색으로 채색하였으며, 또 하나의 기에는 현무와 구름 문양을 그렸다. 모두 청색·적색·황색·백색으로 채색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노부의 예2].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후직(后稷)
정의
인간에게 처음 농사를 가르쳤다고 알려진 농사의 신.
개설
인간들에게 농사를 처음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 신화적인 인물로서, ‘후직씨(后稷氏)’라고도 별칭된다. 고려시대부터 국가 제례인 사직제(社稷祭)에 편입되어 오곡(五穀)의 신인 대직(大稷)의 배위(配位)로서 제향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사직제에서 국직의 배위로서 제향되었다.
내용
후직의 성(姓)은 희(姬)이고 이름은 기(棄)이다. 어머니인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은 후 후직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농사를 가르쳐서 널리 보급시킨 공로로 후직(后稷)이라는 벼슬에 올랐으며, 후대에는 농사를 다스리는 신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후직이 국가 제례의 봉행 대상이 된 것은 당대(唐代)부터로 추정되는데, 후토(后土)를 토지의 신인 대사(大社)의 배위로, 후직을 오곡의 신인 대직의 배위로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수용·참조하여 고려초기인 991년(고려 성종 10)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사직 제례를 거행하면서 후토와 후직을 대사, 대직의 배위로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5년(태조 4)부터 사직 제례를 시행하면서 후토, 후직을 계속해서 대사, 대직의 배위로 제향하였다. 또한 후직은 중사(中祀)인 선농(先農) 제례에서 신농씨(神農氏)의 배위로도 제향되었고, 역시 중사로 비를 기원하는 제사인 우사(雩祀)의 여섯 신령, 즉 구망(句芒)·축융(祝融)·욕수(蓐收)·현명(玄冥)·후토·후직 등에도 포함되어 다른 다섯 신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대한예전(大韓禮典)』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후토(后土)
정의
오행(五行) 중 토(土)를 다스리고, 오방(五方) 중 중앙을 관리하는 신령.
개설
후토는 오행 중 토를 관리하는 신령이기 때문에 ‘토정(土正)’으로 별칭되었는데, 이때 ‘정(正)’은 관장(官長)을 의미하였다. ‘후토씨(后土氏)’로도 칭해진다. 고려시대부터 국가 제례인 사직제(社稷祭)에 편입되어 토지의 신인 대사(大社)의 배위(配位)로서 제향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사직제에서 대직(大稷)의 배위로서 제향되었다.
내용
후토의 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그중의 하나는 후토는 본래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句龍)으로 공공이 천하 구주(九州)를 제패한 후 그를 이어받아 구주를 평정했다고 하며, 구주를 평화롭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토라는 관직을 얻고 후대에 신령으로 승격되어 제향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오제(五帝)의 첫 번째 군주이자 중앙의 신인 황제(黃帝)를 보좌하여 토와 중앙을 관리했다고 한다. 혹은 오제의 세 번째 군주인 제곡(帝嚳)을 보좌하는 오행관(五行官)의 하나로서 토와 중앙을 다스렸다고도 한다. 제곡을 보좌한 오행관은 목(木)과 봄·동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목정(木正) 구망(句芒), 화(火)와 여름·남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화정(火正) 축융(祝融), 금(金)과 가을·서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금정(金正) 욕수(蓐收), 수(水)와 겨울·북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수정(水正) 현명(玄冥), 토(土)와 중앙을 다스리는 관리인 토정(土正) 후토 등이었다.
후토가 국가 제례의 봉행 대상이 된 것은 당대(唐代)부터로 추정되는데, 후토를 토지의 신인 대사(大社)의 배위로, 후직(后稷)을 오곡(五穀)의 신인 대직(大稷)의 배위로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수용·참조하여 고려초기인 991년(고려 성종 10)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사직 제례를 거행하면서 후토와 후직을 대사, 대직의 배위로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5년(태조 4)부터 사직 제례를 시행하면서 후토, 후직을 계속해서 대사, 대직의 배위로 제향하였다. 또한 후토는 중사(中祀)로서 구망·축융·욕수·현명·후토·후직의 여섯 신령에게 강우를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례인 우사(雩祀)에서도 다른 다섯 신령과 함께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대한예전(大韓禮典)』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희준(犧尊)
정의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제기(祭器)로, 몸체 표면에 희생(犧牲)을 새기거나 몸체 자체를 희생의 모양으로 만든 술동이.
개설
희준(犧尊)은 고대로부터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6종의 준(尊) 중 한 종류이다. 6준은 몸체의 외형이나 몸체 표면에 새겨 넣는 문양에 따라 희준과 코끼리 문양의 상준(象尊), 받침이 없는 착준(著尊), 몸체가 불룩한 호준(壺尊), 산에 구름이 낄 형세의 문양이 있는 산준(山尊)과 입구가 넓고 몸체가 불룩하며 문양이나 장식을 새기지 않은 밋밋한 모양의 대준(大尊) 등으로 구분되었다.
연원 및 변천
희준은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사용된 술동이로서, 희생 중에서도 대생(大牲)인 소를 새기거나 그려 넣거나, 혹은 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희준은 주로 상준, 산준과 짝을 이루어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동지 뒤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 등에 지내는 오향제(五享祭)의 큰 제례에서 봄·여름 제사에 2병씩 진설되었다. 그중 1병에는 신령에게 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다섯 가지 술로 탁주인 범제(泛齊), 단술인 예제(醴齊), 흰 빛이 도는 앙제(盎齊), 붉은 빛이 도는 체제[緹齊], 찌꺼기가 가라앉는 침제(沈齊) 등의 오제(五齊) 중 두 번째로 빨리 익는 비교적 탁한 술인 예제를 담았고, 다른 1병에는 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이라고 하는 명수(明水)를 담았다. 또한 이보다 작은 제례에서는 산뢰와 짝을 이루거나, 희준만 1~2병 진설되었는데, 이 경우에도 예제와 명수를 담았다. 다만 드물게 상준 외의 준과 짝을 이루거나, 예제 대신 범제, 울창주(鬱鬯酒), 청주(淸酒) 등을 담기도 했다.
즉 성종대 이전까지 시행된 종묘의 협제(祫祭)에서 대준, 상준, 착준, 호준, 산뢰와 짝을 이루고 범제와 명수를 각각 담았으며, 대한제국 시기에 설행된 환구제(圜丘祭)에서 대준, 착준, 산뢰와 짝을 이루고 울창주와 명수를 담았다. 또한 문묘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문선왕(文宣王)인 공자(孔子)에게 올리는 삭망제(朔望祭)와 작헌례(酌獻禮)의 정배위(正配位)에는 희준 1병만을 진설하였는데, 이때에는 청주를 담았다. 6준 중에서도 희준과 상준은 착준, 호준, 대준 등에 비해 보다 많은 제례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형태
소는 희생 중의 으뜸이며 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봄에 어울리기 때문에, 소를 본뜬 희준을 제작하여 봄의 제사에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서에는 2종류의 희준의 그림과 규격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세종실록』 「오례」 길례서례 「제기도설(祭器圖說)」에는 표면에 소의 그림을 그린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북송대의 『사림광기(事林廣記)』에 수록된 내용을 계승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 유형의 희준은 기구(器口)의 지름이 1자 2치(약 36㎝), 밑바닥의 지름은 8치(약 24㎝), 위아래의 구멍 지름[空徑]은 1자 5푼(약 32㎝), 기물의 받침다리[足]의 높이는 2치(약 6㎝)라고 한다. 한편 성종대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와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소를 본뜬 희준의 그림과 규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남송대에 주희(朱熹)가 지은 『소희주현석전의도(紹煕州縣釋奠儀圖)』에 수록된 내용을 계승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 유형의 희준은 무게가 9근 11냥(약 5.8㎏), 희생인 소의 발까지 합한 높이는 6치 1푼(약 18㎝), 기구의 직경은 2치 4푼(약 7㎝), 소의 머리부터 발까지 합한 높이는 8치 2푼(약 25㎝), 소의 귀의 높이는 2치 1푼 5리(약 6.5㎝), 귀의 너비는 8푼 5리(약 2.5㎝), 몸체 내부 공간의 깊이는 3치 7푼(약 11㎝)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능·원·묘/가가(假家)
정의
특정 목적을 위해 임시로 지은 시설물.
개설
가가(假家)는 임시 건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건축과 철거가 쉽도록 초석이나 기와 등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건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도로를 침범하여 상업적인 행위를 하는 난전 건물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가나 왕실에서도 일시적으로 공간을 조성하여 행사를 해야 할 경우나, 국가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짓기 어려울 경우 일시적으로 가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왕실에서 대규모 잔치를 벌이는 등 궁궐 내에 행사가 있을 때면 일시적으로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했다. 겨울이 되면 이때 궁궐에 숙직하는 군사들이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가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또 왕실에 국상이 발생할 경우 궁궐과 산릉에 가가를 조성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가가가 가장 크고 다양하였다.
산릉에서 국장(國葬)을 행하기 위해 조성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가가의 형식이다. 왕이나 왕비 등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임시 봉안하기 위해 마련하는 영악전(靈幄殿), 왕이나 왕비 등의 분묘(墳墓)인 능상(陵上) 위에 봉분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하는 능상각(陵上閣)과 수도각(隧道閣)도 가가의 일종이다. 국장 의례에 참여하기 위해 대여(大輿)를 이끌고 산릉까지 따라온 문무백관 및 종친, 내관과 나인 등의 숙소도 가가로 만들었다. 국장 행렬에 갖추고 온 길흉 의장(儀仗)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 상례 기간 동안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하는 가재실 등도 가가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인 세종 연간에는 국가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가가를 조성하기도 했다. 세종은 농토를 잃고 방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주요 도로에 임시 건물을 짓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겨울이 되면 떠도는 백성들이 얼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가를 지어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이후 1469년(예종 1)과 1470년(성종 1)에는 궁문을 지키는 숙직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영추문 안에 가가를 짓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10월 6일].
연산군은 궁궐 안에서 잔치를 열 때 가가를 지어 공간을 확보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6월 7일, 창경궁 인양전(仁陽殿)에서 왕후 족친의 잔치를 베풀 때 인양전 주변으로 가가를 지었다[『연산군일기』 10년 6월 7일]. 다음 해에는 단오 진연을 위해 명륜당(明倫堂) 재실 안뜰에 자리를 베풀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가가를 지었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5일]. 1506년(연산군 12)에는 경복궁에서 산디놀음을 하는 곳에 가가를 지었는데, 누(樓)·방(房)과 온돌도 설치하였다.
조선후기에도 가가는 계속 만들어졌다. 광해군은 궁궐 영건에 사용하고 남은 목재를 보관하기 위해 인왕산 아래에 가가를 지었다. 그 외에 빈전을 정할 때 빈전 주변으로 가가를 설치하여 공간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가로 인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에 인화문(仁和門) 내 가가에서 불이 나 인정전 처마까지 화재가 번진 사건이 있었다. 이는 선정전(宣政殿)에 빈전을 정하기 위해 그 주변으로 가가를 가설했기 때문이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21일]. 1857년(철종 8)에도 밤 3경(三更)에 불이 빈전도감(殯殿都監)의 가가에서 일어나 선인문(宣仁門)과 동북소(東北所), 부장청(部將廳), 위장소(衛將所), 주자소(鑄字所)의 대청(大廳)과 판당(板堂)을 합하여 62칸에 번져 소실된 사례가 있었다[『철종실록』 8년 10월 15일].
가가의 특징은 그 조성법에 있다. 가가를 조성할 때는 땅의 다짐을 간결하게 하고 초석을 두지 않으며, 얇고 다듬지 않은 기둥을 땅에 박아서 세운다. 상부의 구조는 매우 간결하게 하여 갈대 등으로 성글게 덮고 그 위에 짚을 엮어 올려 초가를 형성한다. 예컨대 산릉에 가가를 조성할 때는 일시에 수백여 칸의 규모를 조성하기 때문에 공역과 재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으로 각 용도에 따라 구분되는 공간을 연접하게 건축하여 기둥과 벽체를 줄였다. 그러나 화재에 약한 목재와 불이 잘 붙는 짚으로 만들어진 가가를 연접해서 건축하였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길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1600년(선조 33) 산릉에서, 나인이 있던 가가에서 불이 붙어 영악전까지 불길에 휩싸여 긴급히 재궁을 들고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선조실록』 33년 12년 22일 6번째기사].
참고문헌
『[효종]국장도감도청의궤([孝宗]國葬都監都廳儀軌)』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우동선, 「가가(假家)에 관한 문헌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19권 제8호, 2003.
강릉(康陵)
정의
조선 명종과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
개설
명종은 1567년(명종 22) 6월 28일에 창덕궁의 양심합(養心閤)에서 승하하였다. 양주(楊州)에 위치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강릉(康陵)을 조성하고 그해 9월 22일에 장사지냈다. 1575년(선조 8) 2월에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의 능 동쪽에 나란히 합부하여 쌍릉으로 능침을 마련하고 4월 28일에 장사지냈다. 강릉의 두 능침은 해방(亥方)을 등지고 사방(巳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봉분 주변은 병풍석 12면으로 둘러싼 뒤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20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봉분의 동·서·북 삼면은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혼유석은 각각 설치하여 2개가 놓였다. 혼유석을 제외한 나머지 석물은 모두 합설하여 하나의 능침 제도로 조성하였다. 따라서 중앙에 장명등을 하나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을 놓았다. 그 남쪽으로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문·무인석에 각각 마석 1쌍을 두었으며, 봉분의 둘레에 양석과 호석을 2쌍씩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정자각은 능 아래 59보 정도에 위치하며, 정자각 남쪽으로 74보 정도에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표석이 있는데, 1753년(영조 29)에 비각을 세웠다. 정자각의 남쪽으로 수라간 3칸, 동쪽으로 수직방 3칸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춘관통고(春官通考)』가 기록된 1788년(정조 12) 무렵에는 홍살문의 서쪽 300보 정도에 전사청이 8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그 곁에 제기고가 있고, 안향청 6칸, 재실 10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조성 경위
1567년(명종 22) 9월에 강릉이 완성되고 그달 22일에 장사를 지내고 신탑을 정자각에 모시고 안릉전(安陵奠)을 지낼 수 있었다. 3년간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71년(선조 4)에 정자각이 화재로 소실된다. 소실된 정자각을 새로 중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 못했으나, 1578년(선조 11)에 강릉의 정자각을 지은 지 7∼8년도 못 되었는데 추녀와 선자연이 모두 빠졌으므로 공장(工匠)과 감동제조(監董提調)를 추고하고 도청색(都廳色) 낭(郞)은 파직하였다는 기록[『선조실록』 11년 1월 11일]을 통해 정자각이 중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를 합부할 때는 이미 명종의 신탑을 모시고 있던 정자각이 있으니, 가정자각(假丁字閣)만 조성하여 왕후의 상례를 지내고 철거하였다. 이후 명종과 인순왕후의 신탑을 기존 정자각에 합하여 모신 것이다. 능을 구성하는 건축물 중 봉분을 제외하면 정자각이 가장 중심이 된다. 정자각은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와 물에 취약하다. 강릉의 정자각도 여러 차례 소실되고 재건되면서 1567년에 조성된 모습과 다른 형태로 유지 보수된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적에 의해 조선의 왕릉을 도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로 인해 대왕릉의 여기저기에 불탄 흔적이 있고, 왕후릉은 모두 불에 탔으며 정자각 또한 소실되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20일]. 또 1695년(숙종 21)에 중건공사가 있었는데, 당시 예조 판서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박태상(朴泰尙)이 지은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이 최근 발견되었다.
오늘날 강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3칸으로 총 6칸이다. 조선시대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조성한 8칸 규모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으로 5칸 규모로 조성되었다. 8칸으로 조성된 정자각 중에서 일부 수리과정에서 정전의 좌우 익각이 제거된 채 6칸으로 남겨진 사례가 있는데, 강릉의 정자각이 그러한 사례로 보여진다.
1706년(숙종 32)에 선릉(宣陵)의 정자각을 중건할 때 1695년(숙종 21)에 있었던 강릉 정자각의 중건 사례를 살펴보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강릉 정자각의 본래 규모는 8칸으로 조성되었으나, 1695년에 중건과정에서 익각이 사라지고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유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53년(영조 29)에 정자각 동쪽에 세워진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강릉개수도감의궤(康陵改修都監儀軌)』
『강릉지(康陵誌)』
『춘관통고(春官通考)』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0.
김왕직, 「조선왕릉 8칸 정자각 고찰」, 『한국건축역사학회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