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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여성]의 位置[위치]
을지로 네거리를 지나 진고개로 걸어 가면서 영훈은 또 영훈 대로 귀여운 인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흘러 버린 과거에서 녹쓰러 버린 낡은 행복을 힘들여 뒤적거려 보는 것 보다 현재 내 눈 앞에 던져진 이 싱싱한 귀여움을 행복의 절정에까지 끌어 올리는 노력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층 더 귀중한 것이다.』
백연숙을 단념하고 선뜻 둘아 서 온 자기의 생활을 영훈은 무척 귀여워 하 는 것이다.
『흘러 간 행복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 보는 데서 한 토막 시심(詩心)은 발 견할는지 모르나 그곳에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생활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앞으로 끊임 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되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의 성실한 생활인이 영훈은 되고 싶은 것이 다.
이윽고 두 사람은 진고개 입구 어떤 지하실 그릴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자배한테 점심을 얻어 먹는 것, 다소 명예롭지 못한 노릇인 걸! 벌써 여러번 째가 아니오?』
뒤를 돌아 보지 않은 덕택으로 맥주는 약속 대로 두 병이 들어왔다.
『그럼 어때요? 남자배만 내라는 법은 없을 테죠?』
은주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주객이 자꾸만 전도될 염려가 있는 걸.』
『누구가 주고 누구가 객인데요?』
『남자가 점심을 사야 할텐데……』
『영훈씨의 논법, 다소 곰팡이가 쓸었어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식사를 하 게 됨 계산은 으레 남자가 치르거니 하는, 그런 종류의 여자를 좋아하세 요?』
『좋아한다는 것 보다도 그것이 오늘 날의 상식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 오.』
『전차를 타도 표는 으례 남자가 사겠거니 영화관엘 들어 가도 입장권은 응당 남자가 사겠거니하고 시치미를 딱 떼는 것이 오늘의 여자들의 상식이 람 그러한 상식은 여성들 자신을 남성에게 예속시키는 결과를 손수 만들고 있는 것 뿐이지 뭐예요?』
『경제적 조건도 있을테니까……』
『노오!』
은주는 완강히 그것을 부인하며
『그것은 한낱 관념적인 관찰이예요.』
『그럴가?……』
『여자의 주머니가 남자의 주머니 보다 훨씬 더 배불러 있을 때도 시치미 를 곧잘 떼니까요.』
영훈은 웃었다.
『그러니까 남녀 평등이란 말 뿐이지, 좀처럼 실현되기는 힘들 꺼예요. 될 수만 있음 남성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생활 태도 만이 민주주의 적인 동등권을 부르짖을 수 있을꺼예요. 그렇지 않아요?』
『음 ——─』
은주의 그러한 지성이 영훈에게 있어서 커다란 매력의 하나가 이미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처럼 민주주의 사회 체제에 있어서도 왜 걸핏함 남성들이 월권 행위를 하느냐 하면 그건 모두가 다 경제적인 우월감이 뿌리 깊이 인백혀 있기 때문이지, 뭐 다른 거 있어요? 참된 자유주의를 여성들이 향유하려거 든 남성들의 덕을 보지 않고도 살아 나갈 수가 있어야 해요』
『다소 딱딱한데……』
『그 딱딱한 것이 결국에 있어서는 좋은 거예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돈 을 쓰지만, 아주 대범한 얼굴로 돈을 쓰지만요.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는 모두들 발란·씨이트 (貸借對照表[대차대조표])를 들여다 보면서 채산을 맞추고 있는 거예요.』
『허어, 은주가 언제부터 그처럼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었소.』
은주에게 다소 그러한 경향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남성들의 심리를 이렇듯 명확하게 분석해 낼 줄은 정말로 몰랐다.
『호호호……』
은주는 귀엽게 한번 웃어 보이며
『모두 다 마담·샹하이에게서 교수를 받은 거예요. 차 한잔 점심 한 그릇 을 남자에게 얻어 먹어도 그것이 성실한 여성일 것같음 그만큼 마음의 부채 를 느끼게 되니까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처럼 약해지기를 남성들은 발란·씨이트를 들여다 보면서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거라구요. 그 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남성들의 월권이고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위기(危機)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호호호……』
나이프를 놓고 은주는 입을 막았다.
음 마담 샹하이는 『 , · 확실히 나쁜 교사요. 재단법이나 가르칠 것이지, 그 런 쓸데 없는 말까지……이 다음 만나면 항의를 제출해야겠소.』
그런 농담을 영훈은 하며 유쾌히 웃었다,
『그래 제 말이 맞지 않아요?』
『음, 일리는 있지만……』
『왜 일리 만이야요? 이리, 삼리까지도 있을 꺼예요.』
『어쨌든 그러한 심리 해부는 남성들에게 일대 위협을 주는 좋지 못한 이 야기요. 남성들의 호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 놈의 호의가 무섭다구, 우리 집 마담이 그랬답니다. 하하하……』
입을 버리고 이번엔 웃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남성들의 덕을 봐야만 하는 경우가 꼭 한가지는 있다 고요.』
『그건 뭔데?……』
『체력상 어떨 수 없는 일이니까, 완력이 모자랄 때는 주먹을 좀 들어 달 라는 것, 그것 한가지 만은 덕을 봐야 한다구요.』
『아하하핫……』
『그 밖에는 덕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거야요. 호호호……』
커피를 마시며 둘이는 유쾌히 웃었다. 은주가 이처럼 흥미로운 화제를 연 거퍼 꺼내서 자기도 웃고 영훈도 웃기고 하는 데는 그 화제의 내용도 내용 이지만 그 이외에 또 한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식사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 나가려는 심산에서였다. 십 분이 라도 더 영훈의 시간을 잡아 먹어 주는 것이 은주에게는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여인을 은주는 쭈욱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은주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한 시간이나 되었다. 그 전화의 여자 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입때까지 한길 가에서 기다리고 섰지는 않을 것이라 고, 저으기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미심해서 은주는 화제를 좀더 끌고 나갔 다.
『우리 마담의 지론을 말함 말이야요.』
『응?……』
『마담의 말이, 여자가 애당초 어째서 결혼을 하게 되었나, 함 말이예요.
여자는 힘이 약하니까 이리 저리 물리우고 뜯기우고 하잖겠어요? 그래 혼자 서 살 수는 도저히 없으니까 남자의 보호를 받을 셈으로 결혼을 했다는 거 예요. 말하잠 주먹 힘을 좀 빈 것 뿐이죠.』
『그러니까 일종의 보스 (문지기 주먹 대장)로군요?』
『하하하핫……일어로 말함 요오짐보오가 되겠죠.』
『음, 그 쯤 되고 보면 남자의 시세가 아주 폭락인 걸!』
『왜 있잖어요? 다방 같은 데서 거지가 들어 옴 문깐에 지켜 섰다가 막 때 려 쫓는……하하하핫……』
『으와, 하핫……』
영훈은 완전히 백연숙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이 귀여운 약혼자가 발산하는 그윽한 분위기 속에 젖어 있는데 은주가 입을 또 열었다.
『암만 생각하두 삼십 분 가지군 잘 안될 것 같아요.』
『뭣이?……』
『아까 약속은 영훈씨의 시간 삼십 분만 절 달라구 했었지만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되잖았어요?』
『아, 그거 말이오?』
영훈은 후딱 제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삼십 분이 세 시간 돼두 무방하다니까 ——─』
『정말?……』
『글쎄 누가 거짓 말을 합디까?』
『은주 정말 행복해요?』
『왜 또 갑자기……?』
『흐응, 그럴 이유가 있대요.』
『그 행복, 내게도 좀 나눠 줘요.』
『아, 영훈씨는 그럼 행복하지 못하나 봐요.』
『아, 그런 의미에서 말이오?』
『암만 해두 약간 우울해 보이는데……내가 행복해 하는 고만큼 우울하나 봐요?……』
『허어, 어째 그럴가?……』
『암만 생각해두 모를 일인데……』
『거 참 모를 일이예요. 난 이렇듯 행복한데 영훈씨는 저렇듯 우울해 보이 는 게 암만 생각해두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 얼굴이 그렇게도 우울해요.』
그러면서 영훈은 바로 식탁 맞은 편 바람벽에 걸린 무슨 약방 집 마아크가 붙은 체경을 후딱 들여다 보았다.
『어디가?……이처럼 명랑한데……』
벙글벙글 영훈은 웃었다.
얼굴은 일견 명랑한 『 것 같지만두……마음은 암만 해두 어두울 거예요.』
『응?……』
『하하핫, 뭘 그리 놀래요?』
『놀래긴……?』
『그러기에 아까 내가 뭐라구 했어요? ——─ 죄가 있어두 관용을 한다는 밖 에……』
『또 죄인 취급이오?』
『아이, 웃어!』
은주는 익살 웃음을 하나 지으며
『자아, 인제 나가요.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됐으니까요.』
『괜찮소. 세 시간은 앉아 있어야 은주의 마음이 편할테니까 ——─』
『후훗 ——─』
은주는 그 말에 한두 번 쿡쿡 웃음을 깨물다가
『괜찮어요. 인제 그만 함 됐어요.』
『왜 좀 더 앉아 있읍시다. 하루 종일이라두……』
『아냐요. 필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서루가 다 불경제니까요.』
『어째 오늘은 아까부터 경제 문제가 그처럼 빈번히 나올가?……』
『그럴 이유가 있대요. 후훗 ——─』
『그럴 이유라니?……』
『두 시간 가까이나 한길 가에서 기다릴 그런 쑥은 아닐테니까 말예요.』
『응?……』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 졌다.
『누구예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다.
『누구라니?……』
『그이가 누구냐 말이예요.』
『그이?……』
영훈은 은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은주의 표정 없는 새침한 얼굴이 레지 뒤 먼 담벼락을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바라보면서
『아까 종각 앞에서 영훈씨와 만나자던 그 여자가 누구냐 말이예요.』
『………………?』
너무나 갑자기 달려 드는 토라진 질문이다.
『요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인제 나가요?』
냉큼 일어 서서 계산을 하고 총총히 걸어 나가는 은주의 뒤를 영훈은 허둥 지둥 따라 나섰다.
人生[인생]데코레이슌
그릴을 나서서 진고개 입구를 향하여 한은주는 또박 또박 걸어 나가고 있 었다.
오후 두시 ——─ 지하실 그릴에서 갓빠져 나온 영훈에게는 거리에 범람하는 오후의 태양이 눈에 부시다.
『같이 가요.』
한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은 채, 서편 하늘을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곧장 걸어 가고 있는 은주였다.
『화 났소?』
영훈은 따라 가서 나란히 걸었다.
『아뇨. 화는……』
절대로 영훈을 쳐다보지를 않는다.
『어떻게 알았소?』
『그 녀석이 묻지도 않는 말을 알으켜 줘서 알았죠.』
『그 녀석이라니?』
『유둘유둘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 말이예요.』
『아, 영업부장! 뭐라고 그래요?』
은주는 들은 이야기를 솔직히 말했다.
『왜 입때까지 잠자코 있었소?』
『그건 누가 할 말인데요?』
영훈이 이내 대답을 못했다. 못하고 얼마 동안을 묵묵히 걷다가
『어쨌든 은주와 세 시간 동안을 허비할 결심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전 행복했었죠.』
『안 됐소.』
『누가 안 됐대요?』
『대답이 자꾸만 까다로워 지는 걸!』
『아냐요. 나 어지간히 허심 탄회할 수 있는 성미예요. 영훈씨와 점심을 나누겠다는 내 풀랜은 적어도 내개 있어서는 중대사니까요. 그래서 그 중대 사를 나는 예정대로 실행한 것 밖에 없어요. 다소의 난관은 있었지만요.』
자기 행동에 대하여 추호도 두리번거릴 줄을 모르는 은주였다. 그러한 은 주에게서 영훈은 기 보다 한 걸음 먼저 새로운 세대의 공기를 호흡 하고 있 는 한 여성의 생태(生態)를 눈 앞에 보는 것이다.
『어떤 여자예요?』
『어떤 여자라구……』
『나이가 몇이예요?』
은주는 우선 나이부터 묻는다. 그것이 제일의 관심점이다.
『자아, 며칠가?……』
『나이두 몰라요?』
『헤어진지가 하두 오래니까, 스물 여덟? 아홉?……』
『직업은?……』
둘째가 직업이었다. 마치 피고에게 대하는 재판관의 질문과 비슷하다.
『무직업 ——─』
『세상에 직업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 부인이니까 ——─』
『가정 부인은 직업이 없는가요?』
『……?』
『가정이라는 직장에서 아내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어요?』
영훈은 웃었다.
『남편은 뭘 하는 사람이에요?』
『대부호의 아들……』
『그럼 취직은 곧잘 했군요.』
『그렇지만 이북 지주니까 몰락을 했을 거야.』
『그래서 전직(轉職) 운동 때문에 찾아 온거 아냐요?』
『전직 운동?……』
『실직(失職)을 했음 재취직 운동이구요.』
『아직 만나 보지 못 했으니까 알 수 없지.』
해골과 같이 시뻘건 뼛대만 남은 우체국 앞으로 둘이는 빠져 나왔다.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가면서
『이뻐요?』
은주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것을 물었으나 사냥 개의 두 귀박죽처럼 신경을 오뚝 세우는 것이다.
『밉고 곱고는 주관적 문제니까……』
『그러니까 그 주관이 어떠냐 말이예요?』
『약간 ——─』
『흥!』
하고 은주는 콧 소리를 가볍게 내며
『도대체 만나자는 건 어느 편이예요?』
『저 편 ——』
『향수병(鄕愁病) 환자군요.』
『모르지.』
『어쨌든 영훈씨의 심장이 다소 들뜬 것만은 사실인데……』
『들뜨긴……』
『괜찮어요. 애정의 속박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니까요.』
그 때 동대문 행 전차가 우루루 들어 닿았다.
『영훈씨는 사무실꺼정 걸어 가시죠?』
영훈이가 머리를 끄덕이는 동안에 은주는 여학생처럼 경쾌한 포오즈로 전 차에 올랐다.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안전 지대에 멍하니 서 있는 영훈의 귓 전에다 입술을 갖다 대듯이 하며
『애정은 자유에요. 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 요.』
『그런 말은 왜 새삼스럽게……』
그러나 은주는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전자가 막 떠나려는 무렵에
『암만 해두 영훈씨,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칠 것만 같애요. 종각 앞에 서 두 시간 동안이나 영훈씨를 기다리는 로맨쓰! 호호홋……』
전차가 한국 은행 앞에서 커어브를 할 무렵에 핸드·빽을 들창 밖으로 흔 들어 대는 은주의 쌔하얀 손목이 눈부신 햇볕 속에서 조그맣게, 조그맣게 나불거리며 사라졌다.
『귀여운 사람!』
영훈은 입 속 말로 중얼거렸다.
영롱, 구슬과 같은 존재 한은주! 질투심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 는 한은주의 애정의 포오즈가 그의 세련된 회화와 함께 영훈의 다소 들떴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 주는것이다.
『잘 했다!』
백연숙을 버리고 은주를 따라 온 자기 자신이 영훈은 추호도 뉘우쳐 지지 가 않았다.
『귀여운 여자! 내 아내!』
소리를 내어 그렇게 되씹어 봄으로써 들떴던 감정이 아직도 다소의 꼬리를 물고 있던 자기 자신을 영훈은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었다.
영훈이가 걸어서 을지로 사무실로 돌아 온 것은 두시 반이 넘었을 무렵이 었다.
사원들은 거지반 외출을 하고 영업 부장 최씨와 여기자 한 사람이 남아 있 었다.
『아니 고선생,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던 영업 부장이 얼굴을 불쑥 들면서 하는 말이다.
『왜요?』
걸상에 털썩 걸터앉으면서 고영훈은 시선을 던졌다.
『왜요가 뭐요? 그처럼 철석 같은 약속을 해 놓고서 슬쩍 빠지는 법이 어 디 있소?』
영업 부장 최성진은 일부러 정색을 했다.
『빠지다니요?』
『아무튼 과복자는 다르구려. 그처럼 어여쁜 여인을 슬쩍 따 버리다니, 아 까운 일이오』
그제서야 고영훈도 반색을 하며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라구……종각 앞에서 만나자던 미인이 여기로 찾아 왔었답니 다.』
『옛, 찾아 왔었다고요?』
뭉클하고 가슴에 무어가 하나 왔다.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 시간쯤 전이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고선생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떻 게 된 셈이냐고요.
그래 고선생은 분명히 당신을 만나려고 열두 시 전에 나갔다고 했더니, 그 것이 정말이냐고, 수차 따지다가 돌아갔답니다. 원 그런 미인을 따 버리다 니, 고선생두 참…….』
가슴이 차츰차츰 설레어 온다. 은주와 헤어질 무렵에는 완전히 가라앉았던 감정의 들뜸이었다.
『그래 그 밖엔 다른 말은 없이 돌아갔읍니까?』
『무슨 말이든 고선생께 전해 드리겠노라고 했더니, 다소 망서리는 표정으 로 섰다가, 별로 전할 말은 없노라고 하면서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 갔지요.』
물론 과장인 줄은 알면서도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는 이 마지막 한 마디가 영훈의 가슴 한 복판에 조그만 못 하나를 박아 주었다.
지금이 세시 그리고 ——─ 백연숙이가 한 시간 전에 찾아 왔었다니까, 그는 열두 시부터 자그만치 두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리다가 찾아 온 계 산이 된다. 오주주하니 달려 드는 일종의 스릴 같은 것을 영훈은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이유 모를 신비로운 전률이었다. 이것이 대체 어디서 무엇 때 문에 오는 것일가?……
『나는 지금까지도 연숙을 사모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훈은 자기의 감정의 풍경을 자기 자신 측량할 도리가 없었다. 영훈의 성 실한 의욕은 한은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신비로운 한줄기의 전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훈은 갑자기 백연숙이가 만나고 싶어 졌다. 만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돌이돌이를 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감정이 앞장을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필수품은 아니다. 생활의 데코레이슌(裝飾物[장식물])이요, 악세써리(附帶物[부대물])일 따름이다.
앞장을 서는 감정의 부풀음을 영훈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무자비하게 억 눌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노예로부터 벗어 나려는 듯이 한두번 머리를 휙휙 흔들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바깥 공기가 마시고 싶어 영훈은 다시 모자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영훈의 집은 사직동 공원 뒤에 있었다. 영훈은 종로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끊임 없 는 움직임 속에서 도회의 생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영훈도 움직이었다. 시간이 이르니까 어느 때 같으면 명동 쪽으로 움직여 야 할 영훈이가 종로 쪽을 택했다. 백연숙이가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종 각 앞 한길이 그리워 졌는지도 모른다.
광교 다리 목에서 영훈은 종각 쪽으로 건너 갔다. 건너 서서 두리번거리며 연숙이가 아직도 한길 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자기를 기다릴는지도 모를 일 이라고, 꿈 같은 공상을 영훈은 하여 보았다.
『행여나?……』
하는, 무슨 기대 같은 것이 역시 영훈의 의식 세계에 있는 것일가?……생활 필수품이 될 수 없는 일종의 악세써리를 인간은 역시 욕구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사치품!』
영훈은 그것을 명확히 느끼며 네길어름으로 걸어 가면서 후딱 시선을 종각 쪽으로 던지다가
『앗 ——─?』
하고 가는 외침과 함께 걸음을 탁 멈추었다.
단청도 새롭게 개축된 종각 앞에 백연숙은 서 있었다.
鄕愁病患者[향수병환자]
옅은 회색 양단 저고리에 자지빛 베르벹 치마를 백연숙은 입고 있었다. 거 지반 십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백연숙의 젊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 영훈씨!』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연숙이가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애처럼 뛰 쳐 왔다.
뛰쳐 오다가 그러나 연숙은 영훈의 앞까지 다다르지 못한채 오뚝 걸음을 멈추고 무슨 기적이나 눈 앞에 보는 것처럼 덤덤히 영훈을 바라보았다.
옛날 그대로의 영훈의 모습이었다.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감정 대 로 곧장 달려 가서 영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연숙은 깨닫는 것이다.
『안 오시는 줄……영영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닥아오는 영훈을 빤히 쳐다보며 연숙은 말했다.
『………………….』
영훈은 묵묵히 연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환영 보다는 훨씬 풍부해 보이는 연숙의 얼굴이었다. 세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린 연숙의 얼굴을 영훈은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다소 지나친 학대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그러한 학대를 달갑게 받고 있는 것이다.
『와 주셨네요! 영훈씨가…….』
표정 없는 영훈의 모습을 꿈꾸는 사람 모양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어요. 꿈 길에서 보던 모습과 꼭 같으셔요.』
그러나 끝끝내 대답이 없는 영훈을 발견하고 연숙은 후딱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톡톡톡……말간 눈물이 몇 방울, 옥색 고무신 코 끝을 적시었 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둘이의 모양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영훈씨가 저를 반갑게 맞아 줄 줄 알고 찾아 온 건 아니예요. 그저……
그저 제가 영훈씨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봅니다. 눈물을 거두시오.』
연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꼭꼭 찍어 내며
『과히 바쁜 일 없으시면 같이 좀 걸어요.』
둘이는 광화문 통으로 걸어 갔다.
『지금도 댁이 사직동인가요?』
『네.』
『아까 사무실로 찾아 갔댔어요.』
『알고 있읍니다.』
『왜 안 오셨어요?』
『……………….』
『일·사 후퇴 때부터 지금꺼정 쭉 영훈씨를 찾고 있었어요.』
『……………….』
『그러다가 바루 어저께 잡지「신여인」을 우연히 펄쳐 보았아요. 거기서 편집 책임자로 있는 영훈씨를 발견했어요.』
대꾸 없는 말을 연숙은 혼자서만 했다.
『어찌나 기쁜지, 어제 하룻 밤 저는 통 잠을 못 잤어요.』
『……………….』
『영훈씨!』
『……………….』
영훈은 얼굴을 돌려 나란히 걷고 있는 옛 날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영훈씨가 그처럼 아무런 말도 건너 주지 않는 것이 제게는 무척 좋아 요.』
『무슨 뜻입니까?』
『영훈씨의 감정이 지금까지도 저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저를 지금 무척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연숙씨는 소설의 히로인 이군요』
『십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인사 말 한 마디 없이……그처럼 무뚝뚝하게 대해 주는 영훈씨가 제게는 한 없이 좋아요. 좀더 경쾌하게, 좀더 반갑게 대해 주었던들 제 행복은 훨씬 덜했을꺼야요.』
『마음대로 좋아 하고 마음 대로 행복하세요. 옛 날부터 당신은 제멋 대로 슬퍼하고 제멋 대로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흐응 ——─.』
백연숙은 비로소 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훈의 한 마디를 자 기 자신 그대로 승인하는 웃음이기도 했다.
『연숙씨가 어째서 나를 그처럼 찾았읍니까?』
『보고 싶으니까, 찾은 거 아냐요.』
연숙의 어조가 차차 생기를 띠우며 옛 날의 그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 다. 대꾸 없는 독백을 하던 아까 와는 차츰차츰 달라져 왔다.
『보고 싶을 때는 찾아 오고 보기 싫은 떄는 버리고 가고……아주 마음이 편해서 좋겠읍니다.』
『……………….』
둘이는 이윽고 광화문 네거리까지 왔다. 네거리를 건너 그냥 곧장 걸어 가 며
『결혼 생활이 불행했읍니까?』
영훈이 물었다.
『그렇지만 영훈씨를 늘상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별반 불행한 삶은 아니 었어요.』
『흥 ——─.』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숙씨는 옛 날부터 배우의 소질이 풍부했었지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살아 왔어요.』
연숙도 쓸쓸히 웃었다.
『소생은 몇이나 되지요?』
『둘 낳았다가 둘 다 잃어 버렸어요.』
또 잠자코 얼마 동안 걷다가
『그래 결혼 생활이 왜 불행했읍니까?』
『바람을 수없이 피웠으니까요. 계집 한둘은 늘 끼고 돌았지요. 해방이 되 자 토지는 송두리채 몰수를 당하고 반동 분자로 몰리워 다니다가 단신 삼팔 선을 넘어 월남해 왔어요.』
『그게 언젠데요?』
『그러니까 그것이 해방 후 삼년째 잡히는 해 봄이었어요. 소문을 듣자니, 처음엔 고생도 한모양이지만 무역인지 뭔지를 해서 돈도 착실히 빌었다구 요. 그래 이번 일·사 후퇴 때 제가 이리로 밀려 나와 보니까, 벌써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래 어떻게 했읍니까?』
『잘 살라고 내버려 뒀지요. 그랬더니 이 즈음 와서는 그 여자와는 곱게 헤어질테니 다시 살자구요.』
『다시 살면 되지 않습니까?』
『누가 영훈씨더라 그런 말 해 달랬어요?』
그것을 계기로 둘이는 또 잠자코 걸었다. 동양극장 앞까지 와서
『영훈씨, 놀래지 마세요.』
『무얼 놀래요?』
『일한(一韓)무역 사장 김석호(金石豪)를 영훈 씨는 잘 아실 꺼야요.』
『아, 김사장?……』
백연숙의 말투로 보아 김석호가 그의 남편인 것을 영훈은 짐작했다. 일한 무역의 김석호는 동시에 영훈이가 봉직하고 있는「신여인」사의 사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놀래시는군요.』
『그랬읍니까?……』
『그 사나이, 해방 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태양신보라는 주간 신문을 경영한 적이 있답니다.』
『잘 알고 있읍니다.』
실로 뜻 밖의 일이었다.
일한 무역에서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는「신여인」을 맡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은 환도후부터의 일이었다. 사장 김석호는 영훈 보다 오륙년 연장자였으나 채림 채림이 화려한 탓인지 그런 연세로는 통 보이지 않았다.
태반은 일한 무역에 들어 배겨 있었고「신여인」사에는 한 주일에 한번 정 도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장의 신임이 아주 두터운 영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편즙만을 맡아 보고 있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는「신여인」
의 운영 책임자로 등용할 단계에까지 다달아 있는 영훈이었다.
『그래 그 동안 연숙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혼자 지냈지요. 쭉 대전에 있다가 환도하면서 집한채 사 주길래 거기서 먹구 자구…….』
『집은 어딘데?……』
『아현동이예요.』
연숙은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환경의 변모를 옆에 서 생각하는 것처럼 괴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제 운명이예요.』
그리고는 영훈을 핼끔 쳐다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말과 태도는 침울에 가 까우리 만큼 고요한 연숙이었으나 그러나 어딘가 마음의 여유가 엿보이는 것 같아서 영훈의 적지 않게 안도의 염을 품는 것이다.
서대문 네거리에 둘이는 다달았다.
네길어름을 건너 마포 쪽으로 조금만 걸어 가면 오른 편으로 깨끗한 중국 요릿집이 하나 있다 둘이는 . 무슨 약속이나 하고 온 사람처럼 그리로 들어 갔다.
『어서 오십쇼』
목소리가 낯익어 바라다보니, 이집 주인 장서방이 옛날 그대로의 그 무뚝 뚝한 얼굴로 둘이를 맞이했다.
『아, 장서방!』
연숙은 억제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가지고 다소 늙어져 보이는 장서방을 향하여 외치듯이 불렀다.
『오오, 난 또 누구시라구?……옛날의 학생 아가씨 아니오?』
오십이 훨씬 넘은 장서방이었다. 그 장서방이 십년 전의 연숙과 영훈을 알 아 주었다.
사람이란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만나면 누구나가 다사로워 지는 것일가 ?……장서방까지도 이처럼 반가히 맞아 주는 십년이란 세월의 흐름이었다.
그렇건만 마음의 애인 고영훈은 아직까지 단 한 마디의 다정한 말도 건너 주지 않았다.
『장서방, 좀 늙었네요.』
『아가씨는 조금도 늙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다 더 이뻐졌는데…….』
연숙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장서방이 반가워하면 할수록 연숙은 서글 퍼 진다. 영훈은 자기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통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연숙은 자꾸만 서글퍼 지는 것이다.
지나간 시절, 이북서 청요리를 먹을 때마다 부처님처럼 표정이 없는 이집 주인 장서방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 보던 연숙이가 아니었던가. 남편 김석호 가 기생 오입을 하면서부터는 한층 더 자주 연숙의 기억에 오르내리던 장서 방의 얼굴이었다.
『그 장서방은 옛날과 변함 없이 나를 맞아 주건만…….』
영훈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면서 연숙은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男性[남성]의 貞操[정조]
지나간 날, 영훈과 둘이서 여기 저기로 싸돌아 다니다가 시장끼를 느끼면 이 청요리 집으로 들어 와서 짜장면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어 대던 그 시 절의 왕성하던 식욕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는 청춘의 심볼인 양 연숙은 쓸 쓸히 회상하며 방으로 들어 섰다.
옛날과 다름 없는 어둑 컴컴한 골방이었다. 이 방에서 연숙은 눈물을 흘리 면서 최후의 작별을 했었고 그러한 연숙의 따귀를 보기 좋게 내갈기고 영훈 은 영원히 연숙의 옆을 떠나 갔던 것이다.
『생각하면 정말 감개 무량해요.』
식탁 앞에 마주 앉으며 연숙은 깊은 감회가 서린 목소리를 내며 방 안을 한번 휘이 둘러 보았다.
『이 방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변해 버린 자기의 신세를 연숙은 푸념하고 있는 것이다.
『뭐 잡수십니까?』
장서방이 우선 김이 문문 나는 보리 차를 두 사람 앞에 따라 놓으면서 물 었다.
연숙은 영훈을 쳐다보았다. 옛날부터 음식점엘 들어가면 영훈은 손님이 되 고 연숙은 주인이 되었다.
『짜장면을 먹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영훈은 말했다.
연숙은 기뻤다. 역시 영훈의 미각(味覺)에도 추억을 그리워 하는 데가 남 아 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그래서 연숙은 짜장면과 그 밖의 안주 감이 될만 한 몇 가지를 칭하고 나서
『그리구 술도 주세요. 일주 있죠?』
『있읍니다.』
장서방은 사라져 갔다.
『연숙씬 약주 잘 하십니까?』
술상 앞에 앉은 연숙의 포오즈가 어딘가 모르게 그럴 듯이 어울려 보인다.
어린애를 둘이나 낳았다는 백연숙의 결혼 생활의 연륜(年輪)이 그렇게 만드 는 지도 몰랐다.
『그래두 남자 분네들은 저녁을 자실 때, 반주를 하지 않어요?』
연숙은 다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한 백연숙에게서 결혼 생활의 비밀을 엿보는 것 같아서 이 편의 얼굴 이 도리어 간지럽다.
『그이는 항상 반주를 했었군요.』
영훈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네. 술과 계집은 떨우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서 교태 있는 웃음을 웃었다. 요염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연숙씨도 한두 잔의 약주는 사양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지요?』
『책망하시는 말씀이세요?』
『책망은 내가 왜 해요?』
『그렇지 않으면 놀리시는 거구요.』
『놀리긴 또 내가 어째서……?』
『그럼 왜 빙글빙글 웃기만 하세요?』
『연숙씨의 성장(成長)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슬프기도 하실 거야요.』
만났을 때와는 딴판으로 연숙은 점점 능변(能辯)해가는 것이다.
음식이 들어 왔다. 접시가 주루루 식탁 위에 버러지자 연숙은 술병을 들었 다.
『한잔 드세요. 정말 십년 만이야요.』
그러면서 연숙은 영훈의 잔에도 조심성스럽게 한 잔을 따랐다. 그러나 영 훈은 연숙의 잔에 술을 따라 주지 않았다. 남의 집 부인을 모욕하는 것 같 아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먹을 줄 안다면 제 손으로 따라서 먹었으면 했 다.
그러나 연숙은 제 잔에는 따르지 않고 병을 식탁에 놓으면서 영훈을 바라 보며 귀여운 듯이 빙그레 웃었다. 추억과 동경에 찬 웃음임을 영훈은 안다.
영훈도 따라 웃으며
『한잔 쯤 못 하시오?』
했더니
『술은 제 손으로 따라 먹으면 맛이 안 난다죠?』
야아, 요것 봐라?……제멋 대로 생각하고 제멋 대로 해석 하던 영훈의 소 박한 감정이 눈을 번쩍 떴다.
영훈은 웃으며 백연숙의 그러한 변모를 다소의 생리적인 질투를 가지고 묵 묵히 상대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자아, 같이 들어요.』
연숙은 눈 꼬리로 곱게 웃으며 자기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영훈은 한 모금에 잔을 쭈욱 냈다. 굳어졌던 감정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 다.
그러나 연숙은 일단 들었던 잔을 다시 식탁에 놓고 영훈의 잔에 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또 제가 먼저 놓았던 잔을 들고 영훈이가 마시기를 기다 리고 있다가 다시 잔을 식탁 위에 내려 놓았다.
제멋 대로 생각하고 제멋 대로 불유쾌한 하던 영훈의 유치한 감정이 또 한 번 눈을 비볐다. 과거 십년 동안 품고 있던 연숙에의 환영이 어제 오늘처럼 영훈의 감정 속에서 알뜰히 살아 나기 시작 하였다.
『왜 한 잔도 못 해요?』
『한두 잔 억지루 먹음 먹기두 하지만……그이에게서 배웠어요. 그인 반주 를 하면서 자꾸만 제게 술을 권했지요.』
『그럼 조금 들어요.』
『오늘은 그만 두겠어요. 그이에게서 배운 술을 영훈씨 앞에서 먹다가 는……영훈씨가 무서워요. 그 술잔으로 제 면상을 내갈길 것만 같아서 무서 워요.』
연숙은 후딱 고개를 숙였다. 눈물 한두방울을 초간장 접시에 톡톡 떨어뜨 리며
『나 조금만 울겠어요. 울고 싶을 때는 빨리 울어 버려야 시원해요.』
간장 접시를 밀어 놓고 연숙은 식탁 위에 엎드러져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껴 울었다.
『영훈씨를 만나면 이렇게 한번 싫건 울어 볼려고…… 그것이 결혼 뒤에 온 제 꿈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놈의 삼팔선 때문에……』
저녁 전등이 들어 왔다. 허벅지게 쌔하얀 연숙의 목덜미가 전등 밑에 눈부 시다. 애욕의 경험을 쌓은 목덜미라고, 요염에 가까운 분위기를 느끼며 사 장 김석호의 얼굴 모습을 영훈은 불현듯 연상하였다.
보리 차를 쏟아 버리고 찻 종지에 영훈은 될될될될 술을 따라 약을 마시듯 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얄밉기 짝이 없는 연숙이었으나 여위었던 감정이 차 츰차츰 사라 지면서 영훈의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 졌다.
『그만 하고 인제 얼굴을 들어요.』
한 고뿌 들이킨 술 기운이 화악 몸에 퍼지면서 영훈의 마음은 부드럽게 누 그러져 가고 있었다.
『영훈씨가 그저 보고 싶어서……그래서 찾아 온 것이지, 나 다른 생각 아 무 것도 없어요. 보고 싶은 사람, 한번 보러 온 것이 뭐가 그리 나빠요?』
그러면서 연숙은 머리를 들고 눈물 젖은 얼굴로 영훈의 눈동자를 원망스럽 게 쏘아 보았다.
『누구가 나쁘다긴……?』
『나쁘다지 않음 왜 두 시간씩이나 사람을 한길 가에서 기다리게 하는 거 야요? 누가 영훈씨를 잡아 먹으러 왔대요?』
삐쭉 삐쭉, 연숙의 빨간 입술이 한두번 경련을 일으켰다. 영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지탕해 오던 감정이 어린애처럼 와락 울상을 지었다. 영훈은 은주 를 생각했다. 일부러 새롭혀 보는 은주에의 기억이었다. 은주를 생각함으로 써 영훈은 허무러지려는 감정을 부축해야만 하였다.
『왜 대답은 없구, 잠자코만 계세요?』
『………………』
『자아, 제 술 한 잔 받아요.』
다 식어 버린 술을 연숙은 훌쩍 마시고 나서 그 잔을 영훈에게 권해 왔다.
영훈은 잠자코 잔을 받아 쥐고 따르는 대로 마셨다.
『제게두 한 잔 줘 봐요.』
영훈은 술을 따라 주었다. 또 훌쩍 연숙은 마셨다.
『아이, 요건 귀찮어!』
연숙은 그러면서 잔을 던지고 찻 종지를 들었다.
『자아, 이걸루 한 잔 해봐요, 나두 이걸루 받을테니까요……』
영훈은 찻 종지로 마셨다. 연숙도 찻 종지로 절반쯤 내고 나서
『아이, 오늘 술 맛 나네요. 나 변했죠?』
『아, 약간……』
『인제부터는 더 자꾸만 변할테야요. 술을 한 독쯤 먹고 영훈씨 앞에서 죽 어 버릴테야요.』
영훈은 웃었다. 그것이 취기가 돈 연숙의 신경을 몹시 자극했다.
『웃긴……웃긴 왜 웃어요? 아주 냉정하시군요!』
연숙은 그러면서 무릎 걸음으로 닥아와서 영훈의 손목 하나를 가만히 잡아 쥐며
『누구야요?』
하고 물어 왔다.
『뭐가, 누구라니?……』
『영훈씨를 그처럼도 냉정하게 만들고 있는 여자가 누구냐 말이야요. 부 인?……』
『나는 아직 독신이오.』
『독신?……어머나?……』
연숙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나는 정말 아들 딸 낳고 그럴듯이 사실 줄만 알았어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영훈씨, 용서하세요?』
연숙은 탁 영훈의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들먹거리는 연숙의 어깨를 영훈의 손길이 가만히 쓸어 주며
『결혼 생활이 행복했으면 찾아 오지 않았겠지요.』
연숙은 한 동안 격렬히 울다가
『결국……결국 그랬을는지 몰라요.』
솔직한 대답을 연숙은 했다.
연숙의 그 어린애 같은 솔직한 심정이 더할 나위 없이 얄미우면서도 한편 영훈은 그저 없이 가엾어 졌다. 워낙이 연숙을 좋아했던 영훈이기에 허무러 지는 감정의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불행하면 찾아 오고……인제 또 행복한 데가 있으면 또 그리로 찾아 가 야지.』
그 말에 연숙은 무릎 위에서 가만히 돌이돌이롤 어린애처럼 하며
『인제 나는 아무런 데도 갈 데가 없어요. 인생의 계산을 애당초 잘못 했 었으니까요.』
영훈은 연숙의 폭 넓은 어깨 둘을 무심히 쓸어 보며
『갈 데가 없어도 연숙은 가야 돼! 시기가 너무 늦었어!』
『가래면 가지만……안 가두 된다면 난 안 갈테야요.』
『가야만 돼.』
『어디로 갈 데가 없어요.』
『없어도 가야만 돼.』
『독신이라면서……?』
『약혼자가 있지요.』
『…………?』
연숙은 얼굴을 들고 영훈을 찬찬히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저 만나기를 망서렸군요.』
『그렇소.』
영훈은 쓸쓸히 웃었다.
『당연한 일이야요. 난 아들 딸꺼정 있을 줄 알았는데요.』
연숙의 어조가 갑자기 조용해 졌다.
결혼 생활 십년 간은 확실히 백연숙의 그 찬란하던 꿈을 정리해 주었고 연 애 소설의 주인공처럼 다양(多樣)하던 성품을 고요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 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백연숙의 성장을 의미하는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이를 사랑하세요?』
『사랑하지요.』
연숙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측은해서 영훈은
『자아, 인제 돌아가요.』
하며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나는 갈 데가 없어요.』
『아현동 집으로 돌아가요.』
『그이가 와 있을 것 같애서 싫어요.』
『그이라니……김사장 말이오?』
연숙은 고개를 끄떡끄떡 했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어떻게 해요?』
연숙은 고개를 후딱 들며
『싫으시겠지만……옛날처럼 한번만 안아 주고 가세요.』
『……?……』
영훈은 대답을 상실한 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눈물젖은 얼굴로 말끄럼이 쳐다보는 연숙의 처량한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한번만……한번만 안겨 보고 헤어짐 한이 없겠어요.』
그러면서 연숙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가지고 영훈의 양복 저고리 앞 자락 을 어린애 모양 만지적거렸다.
『내게는 약혼자가 있소.』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야요.』
영훈은 시선 둘 곳을 잃은 채 당황한 어조로
『연숙씨, 나를 괴롭히지 말고 어서 돌아갑시다!』
『그이를 사랑한다면 괴로울 거지만, ……그렇지만 포옹 한번쯤 뭐가 그리 괴로울가요?』
『아아, 연숙씨는……』
영훈은 돌부처모양 우뚝 서서 후딱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월남해서 삼년 동안이나 찾았는데……』
연숙은 두 손바닥으로 영훈의 가슴패기를 자꾸만 쓰다듬고 있었다.
『제 잘못을 내가 모른다면 모르지만……텅 비인 이 마음 속……거지처럼 초라해진 제 감정이야요. 오만하고 화려했던 옛날의 연숙은 이미 아니지 요.』
그래도 영훈은 그대로 눈을 감은채 꼳닥 서 있었다. 꼳닥 서서
『연숙씨!』
『네?……』
연숙은 시선을 들어 눈을 감은 영훈의 모습을 말뚱히 쳐다보았다.
『서글픈 말을 해서 나를 울리지 말아요! 내 감정은 당신을 용서하여도 내 이성은 당신을 안아 줄 수가 없소.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대로 돌아갑시다.』
『어쩌면……?』
연숙은 삐죽삐쭉 입술을 깨물면서
『냉혹한 분이야요 당신은……내 마음은 이처럼도 초라하고 가난해 졌는 데……모두가 내 탓이지만……조금이라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지나 가 는 거지에게 동냥 한 푼 주는 셈 치구……』
『내 감정은 이미 당신을 용서했소.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한 사람의 성실 한 애정을 배반하게 만들지 말아 주시오.』
영훈은 후딱 눈을 떴다. 연숙은 쓸쓸히 웃으며
『인제 울지 않을테야요. 그리고 무리한 청 인제 아예 안할테야요. 저는 인제 자존심도 아무것도 없어진 사람이 됐어요. 영훈씨는 역시 성실한 분이 었어요. 가혹하리 만큼 성실하셔요. 나로서는 인제는 어쩌는 도리가 없어 요.』
그리고는 핸드·빽을 주워 들며
『자아, 인제 가요.』
둘이는 이윽고 요정을 나섰다. 캄캄한 밤 하늘에 별들이 아롱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