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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동서인문]에 실린 글을 다듬어 프닉스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발표하면서 더 다듬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글쓰기는 늘 어렵고 재미있네요.
적대적 지배관계 극복의 철학−[경제학 철학 초고] 읽기−
1. 들어가며
우리 사회는 온갖 적대관계들로 들끓고 있다. 정치집단들 간의 독한 비방전이나 크고 작은 집회들과 인터넷 게시판을 뒤덮고 있는 적대와 증오의 에너지를 접하면, 바로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거나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아도 우리의 일상 자체가 전쟁터임을 누구라도 쉽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득권을 건드리는 최소한의 개량조차 기득권 세력의 결사항전에 부딪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목격한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든 매우 다양한 인간관계들이 서로 얽혀 역동하면서 총체적으로 사회의 성격을 만들어가며, 따라서 순수하게 적대관계들만으로 모든 일이 생겨나거나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적대관계는 지속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며 심지어 생사를 결정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런 관계가 특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노동 쪽에 불리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맑스는 이런 사정을 경철초고(1844) 첫머리에서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가들의 승리는 필연적이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또 자본론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를 자본주의의 출발단계에서부터 19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세세히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맑스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후 혁명의 주요 문제들을 돌아볼 때에도 ‘박애’를 앞세워 현실적 계급적대를 흐려놓는 움직임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엥겔스의 입장 역시 다르지 않다.
이처럼 적대적 지배관계를 명확히 밝히려는 맑스와 엥겔스의 의도는 이 지배관계를 인간사회 혹은 만물의 궁극적 원리로 만들려는 데에 있지 않다. 그들은 자유와 공정과 질서의 이름으로 소수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를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관계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근본적으로 파헤쳐 드러내놓지만, 그러한 지배관계를 인간 삶의 영원한 조건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전제를 거부하고 자본주의적 지배관계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명확하게 포괄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이 지배관계를 은폐하거나 몽상적으로만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 한다. 지배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그 관계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인 반면에, 지배관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것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는 것은 지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세력에게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필요노동시간 축소는 전반적 노동시간 단축과 인류 전체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잉여 노동의 확대와 대량해고로, 소수 자본가를 위한 천국과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지옥으로 귀결될 수 있다. 자본은 후자를 택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자본축적의 위기가 증폭되어갈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이로 인한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지배관계 및 이와 밀접히 연루된 여러 형태의 지배관계들을 극복하는 것은 맑스 시대만 아니라 오늘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떤 해답을 내놓는지, 오늘날에도 들끓고 있는 적대관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자.
2. 양극화와 빈곤
맑스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서 볼 때 경철초고는 연구의 출발단계에 위치할 뿐 충분히 전개되거나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다. 경철초고에는 아직 명확한 잉여가치 개념도 없고,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조차 없다. 사적소유와 소외된 노동의 인과적 선후관계도 모호하다. 순환논리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이는 이 관계는 자본론 1권(1867)의 시초축적 장에서 비로소 정치적 폭력이라는 변수에 근거해 선명하게 밝혀진다. 제1초고의 핵심주제인 양극화 경향 역시 자본론에서는 다양한 논의를 통해, 특히 자본축적과 집중에 관한 상론을 통해 훨씬 더 구체화된다.
경철초고의 이러한 결함 내지 미발전상태의 근거를 독일철학 예컨대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영향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자본론에 이르러 풍부한 결실을 거두는 맑스의 장구한 연구과정을 감안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여겨진다. 이 경우 맑스가 자본주의를 자연상태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로 파악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 이후, 현실에 대한 자신의 기본입장을 바꾼 바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맑스 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이러한 일관성을 인정하면, 경철초고의 자구 하나하나를 상대로 시비를 가리고 그 불완전성 혹은 미숙성을 부각하기보다 그 기본논지의 현재적 의의를 따지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예컨대 경철초고에서 맑스가 슐츠, 스미스, 리카도, 세 등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해 자본주의의 본질적 경향으로서 제시하는 자본의 집중과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즉 양극화는 오늘날 얼마나 현실성 있는지 검토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다. 이 경우 맑스가 양극화 문제를 당대에 국한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임금과 자본과 지대의 작동방식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철되어 가는 경향으로서 파악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정 시점에 그러한 현상이 약화된다는 것만으로 이 경향 자체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실제의 경제적 운동법칙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구성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현실 이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양극화 문제의 현실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말하는 빈곤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절대 빈곤에 주목한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어떠한 인간적 욕구들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동물적 욕구들까지도 가지지 못한다. 아일랜드 사람은 오직 먹는 욕구, 그것도 감자를 먹는 욕구, 감자 가운데 가장 나쁜 종류인 쓰레기 감자를 먹는 욕구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모든 산업도시에는 작은 아일랜드가 존재하고 있다.”(경철135)
그러나 경철초고에서 상대적 빈곤이 도외시되는 것은 아니다. 슐츠를 인용해 맑스는 빈곤의 상대성 문제를 명시한다. “예컨대 10년 동안 사회와의 관계에서 총생산이 3분의 1정도 증가한 선진국에서 10년 전이나 후나 똑같이 버는 노동자는 같은 정도로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3분의 1만큼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경철23) 뿐만 아니라 맑스는 스미스를 끌어들여 자본을 무엇보다 권력으로 파악한다. “자본은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지배력이다. 자본가가 이 권력을 갖는 것은 그의 개인적 또는 인간적 특성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소유자인 한에서이다. 그의 자본이 갖는 구매력,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이 권력이야말로 그의 권력인 것이다.”(경철30) 권력으로 파악할 때 자본은 사회적이고 상대적이며, 자본의 박탈상태인 빈곤 역시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절대 빈곤도 여전히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과학기술 내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상당 정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 및 체제변혁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미미해지는 실질적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절대 빈곤의 완화현상에도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 덕분에 한국의 상당수 노동자들은 이제 살 만큼 산다고 느끼기도 한다. 또 빈곤의 상대성은 자본가와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 상태나 타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성립된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더 가난한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 가난한 노동자들도 상대적으로 ‘잃어버릴 것’이 꽤 많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근거해 자본주의의 양극화 경향에 대한 맑스의 주장이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낡았고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 만큼 산다는 느낌은 노동자 모두가 아니라 주로 고소득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고, 대체로 OECD 최장수준의 노동일이 전제된다. 상대적 빈곤 문제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어느 정도 완화되기도 하지만, 자본축적의 위기가 심화되고 그 고통이 노동자들에게 전가되는 정도에 따라, 또 이에 맞서는 노동운동의 힘이 약화되는 데에 따라 절대 빈곤의 양산으로 귀결될 수 있다. 자본론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상대적 과잉인구 곧 실업자의 증대가 불가피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자본주의가 이 문제를 드디어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첨단 기술 도입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적극적 대응이 없는 한 대량실업과 이에 따른 절대빈곤의 폭발적 증대로 이어질 필연성을 띤다.
한편 외환위기 이후 양산된 비정규직과 정규직 차별정책은, 노동운동의 적합한 조직적 이론적 대응 결여와 맞물리면서, 상대적 빈곤에서 변혁 에너지를 제거하고 견고한 서열구조를 굳혀놓았다. 나아가 이 서열구조는 노동자들의 무의식적 욕구나 감각에까지 깊이 파고들어 효율적인 자본지배의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특권을 비판하고 공정과 정의를 요구하는 노동자계급의 젊은이들조차 흔히는 한국사회의 견고한 위계적 사다리구조를 당연시할 뿐, 이 구조 자체를 없애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러한 의식상태 역시 불변의 법칙이 만들어낸 영구불변상태가 아니라, 제반 조건 특히 자본권력의 공세에 노동운동이 적극 대응하지 못한 조건의 중간결과이며, 따라서 주체들의 노력 여하와 조건의 변화를 통해 바뀔 수 있다.
이 경우 맑스와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19세기 후반기 영국 자본이 세계시장 및 식민지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일부 노동자들을 매수하여 타락시키고 보수화시킨 현상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또 영국의 독점적 지위를 열강들이 나눠 갖게 된 시대, 즉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주아들이 식민지에서 얻은 초과이윤으로 상층부 노동자들을 매수함으로써 야기되는 문제에 대한 레닌의 다음 비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의 경제적 토대 위에서 “정부나 전쟁산업위원회, 의회나 다양한 의원들, ‘존경받는’ 합법 신문의 편집진,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존경받으며 ‘부르주아적 법률을 엄수하는’ 노동조합의 운영위원회에서의 수지맞는 편한 일자리−이것들이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적 노동자당’의 대표자들과 지지자들을 유인하고 매수하는 미끼인 것이다.”
한국 경제가 얼마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할 수 있으며, 맑스와 엥겔스 혹은 레닌의 주장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더라도, 그것이 한국 사회와 전혀 무관한 남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 자본이 기술발전 및 집중을 앞세워 중국과 베트남 혹은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등지로 진출하여 특별잉여가치와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을 얻고, 그 일부로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삶을 윤택하게 해줌에 따라 노동자들이 보수화되어가는 현상과 제국주의 시대 노동자당들의 우경화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한국이 민주국가임을 자처하지만, 전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 즉 ‘부르주아적 노동자당’이 아닌 진정한 노동자당은 대중들 속에서 아예 존재감조차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레닌의 비판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복합적 궁핍’ 개념을 통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노동자들의 궁핍을 자본주의의 발전 상태와 관련해 세 부류로 나눈다. 자본주의 발전이 쇠퇴할 때는 ‘누진적 궁핍’이, 발전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정체적 궁핍’이, 자본주의가 번영할 때는 ‘복합적 궁핍’이 나타난다. 복합적 궁핍은 그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태이다. 이 경우 “노동임금의 상승은,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치부욕을 노동자에게 불러일으키지만, 노동자는 이 욕심을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다.”(경철18) 나아가 번영을 위해 불가피한 자본의 집적 및 분업과 생산력 증대는 노동자들을 일면적이고 의존적인 상태로 만들고 경쟁으로 몰아가며 과잉생산을 초래한다. 이는 “다수 노동자들을 실직으로 내몰거나 그들의 임금을 비참할 정도로까지 끌어내리기에 이른다.”(경철19)
오늘날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절대 빈곤의 늪에서 탈출하더라도 ‘복합적 궁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거나 경제주의 내지 조합주의의 영역에 머무는 현상은 특별한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는 어떤 자연법칙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양극화로 치닫는 가운데 이를 안정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자본권력이 구사하는 매수와 분열책과 여론조작 등에 노동운동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현상, 즉 장기화되어 구조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나 엄연히 일시적인 자본주의적 역동의 산물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적대적 지배관계의 핵심인 이 양극화와 이에 따르는 전지구적 위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철칙인가? 만일 자본주의가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필요시 개별 기업들의 사적 이익을 억제하면서라도, 과잉생산을 막을 수 있도록 고도의 계획적 자원 배분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에 의거하는 기계사용, 분업 및 협업을 통한 생산력 증대의 성과들을 자본가들이 독식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소득분배의 차원에 머무는 과제가 아니라 합리적인 생산수단 관리와 노동시간 배분 및 노동일 축소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본증식을 경제활동의 절대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 중심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희생하면서 치부욕을 품을 필요성 자체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태어나면서부터 끌고온 자체의 본성을 바꿔 자본주의이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3. 소외된 노동
양극화는 무엇보다 소외 문제로, 즉 노동자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하는 상태’로 나타난다.(경철66)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묘사한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노동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을 생산한다. 노동은 미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기형을 생산한다. 노동은 기계들을 통해 노동을 보충하지만, 그 반면에 일부 노동자들을 야만적 노동으로 몰아가고 또 다른 일부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든다. 노동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어리석음 내지 백치상태를 생산한다.”(경철67-68) 이러한 대조법을 특히 상대적 빈곤 문제에 초점을 두고 받아들이면 단순한 과장이나 선동적 이데올로기라고 보기 어렵다.
대상의 소외에서는 노동 활동 자체의 소외가 집약될 뿐이라는 맑스의 지적과, 소외된 노동과정 자체에 대한 다음 서술 역시 상당히 현실적이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중에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로이 발전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노동 중에는 탈아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 안심하고 노동할 때 불안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것,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 자체가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밖의 욕구들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경철68-69) 소외된 노동의 이러한 특성은 노동 영역 너머의 다양한 인간 활동에도 얼마든지 유효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에 대한 맑스의 설명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설명의 경우가 그렇다. 그에 따르면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우선 자연을 소외하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을, 즉 인간에 특유한 활동적 기능, 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유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을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경철70-71) 또 그는 사회주의를 전제로 한 새로운 생산의 의미를 ‘인간 본질력의 새로운 확인과 인간 본질의 새로운 풍부화’에서 찾기도 한다.(경철137) 이 경우 소외되지 않은 유적 삶, 혹은 인간의 본질(력)이라는 것이 전제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가 문제다. 맑스는 인간의 유적 본질, 곧 인간과 다른 동물의 변별적 특징으로서, 대상들을 보편적으로 대한다는 점, 자신의 활동을 의식한다는 점, 그래서 인간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점 등을 지적한다.(경철71-72) 이런 대목을 근거로 맑스가 인간의 본질을 불변의 상태로 실체화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맑스가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과학 등등의 분야에서 활동할 때, 즉 다른 사람들과의 직접적 공동체 속에서는 별로 수행할 수 없는 활동을 할 때에도 나는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으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활동의 재료가 −사상가가 활동하기 위해 쓰는 언어까지도− 나에게는 사회적 산물로서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현존재도 사회적 활동이다.”(경철97) 이 점에서 맑스는 사회를 추상적으로 개인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경철98) 뿐만 아니라 맑스는 오늘날 인간이 본능적 능력처럼 누리는 다양한 감성들조차 오랜 세계사의 산물임도 지적한다.(경철101)이처럼 인간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바꾸어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소외론을 근거로 인간 본연의 삶, 곧 ‘유적 존재’라는 것을 현재의 소외된 삶과 대립시켜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로 상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또 한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사적소유의 폐지와 소외된 노동의 극복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철초고에 따르면 “인간적 삶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사적소유의 긍정적 지양은 모든 소외의 긍정적 지양이며, 따라서 인간이 종교⋅가족⋅국가 등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인간적 현존재 곧 사회적 현존재로 복귀하는 것이다.”(경철96) 여기서 ‘사적소유의 지양’은 ‘소외의 지양’과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이때 사적소유와 소외된 노동 사이의 인과적 선후관계 문제는 시초축적에 관한 설명으로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사적소유 개념을 자본 문제에 한정한다면, 소외 문제는 자본주의의 지양과 함께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소유를 좀 더 일반적으로 파악하여, 자본권력의 독점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권력의 독점과 관련지을 경우, 정치권력⋅정보권력⋅문화권력 등 다른 사회적 권력 형태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속에서는 이러한 권력 형태들이 자본권력과 본질적 관계를 지니지만 자본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측면 또한 포함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권력이 지양된다고 하더라도 정치조직이나 정보 등의 독점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소외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사회주의는 자본권력을 타도하고 그 저항을 제압하는 데에 머물 수 없고, 정치권력이나 정보권력 등 모든 권력의 사회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단지 지배자의 얼굴만 바꾸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관계 자체를 없애고 그리하여 국가사멸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한에서 그렇다. 궁극적으로 소외된 노동의 실질적 극복은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인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4. 욕구와 적대관계
욕구 문제는 주관적인 문제로 간주되어 과학 영역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도 있고, 지배관계를 벗어나 있는 인간학 혹은 정신분석학 문제로서 끝 모를 논란의 영역에 넘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노예적 처지에 안주하려는 피지배자들의 욕구는 무엇보다 현재의 지배관계를 옹호하는 사고방식의 알리바이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맑스에게 욕구는 원천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충동이나 불변의 선험적 구조 등이 아니다. 그렇다고 욕구가 정신적인 것과 분리된 육체 영역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욕구는 감성과 더불어 현실적 대상들에 의존하여 형성되거나 발전한다. 따라서 감성과 마찬가지로 가변적인 사회적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며, 당연히 지배관계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욕구와 감성의 문제에서도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할 주요 근거를 찾는다.
그에 따르면 욕구는 본질적으로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음악적 감성은 음악에 의해 비로소 일깨워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인 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대상도 되지 않는다.”(경철101) 음악을 듣는 귀가 없는 사람에게 음악은 욕구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의 감성들은 비사회적 인간의 감성들과 다르다. 인간적 본질이 대상적 형태로 풍부하게 전개되면 비로소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풍부한 감성이, 음악적인 귀가, 형태의 미를 파악하는 눈이, 요컨대 인간적 향유의 능력을 가진 감성들, 즉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들로서 확인된 감성들이 완성되거나 생겨난다. 왜냐하면, 단순히 오감뿐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성들, (의지나 사랑 등의) 실천적 감성들, 한 마디로 인간적인 감성, 감성들의 인간성은, 그에 알맞은 대상의 존재, 즉 인간화된 자연에 의해 비로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산물이다.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사로잡힌 감성은 또한 편협한 감성만 가진다.”(경철101)
그런데 사적소유는 이 ‘조야한 실제적 욕구’와 ‘편협한 감성’을 부추긴다. “산업은 욕구들의 세련과 마찬가지로 조야함, 더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야함을 노리고 투기하기도 한다.”(경철139)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내는 욕구는 화폐에 대한 욕구로 집약된다. “화폐에 대한 욕구야말로 경제활동에 의해서 생기는 참다운 욕구이며, 경제활동이 낳는 유일한 욕구다. 화폐의 양이 점점 더 인간의 유일한 힘 있는 속성이 된다.”(경철133) 그 결과 “모든 육체적⋅정신적 감성 대신에 이 모든 감성의 소외, 즉 소유의 감성이 등장하게 되었다.”(경철99) 이런 이유로 맑스는 ‘사적소유는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인 욕구로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고 단언한다.(경철133-134)
그러나 소유욕에 봉사하는 자본주의 경제학은 금욕과 절약과 억압의 과학이기도 하다. “그 참다운 이상은 금욕적이면서도 폭리를 탐내는 수전노와 금욕적이면서도 생산하는 노예이다. 그 도덕적 이상은 자기 급료의 일부를 은행에 맡기는 노동자다.”(경철136) 자본주의 경제학이 요구하는 바에 따르려면 먹는 일 따위의 직접적 감각을 절약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당신이 경제적이고자 한다면, 환상에 빠져 몰락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공공의 이익에 참여한다거나 동정한다거나 신뢰한다고 하는 모든 것도 또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경철137) 맑스는 자본주의 인구론이 무욕의 원리를 극단화하여 ‘도덕적인’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생식의 절약’까지 요구한다고 야유한다.(경철139) 경제적인 이유로 공익과 동정과 신뢰, 심지어 생식까지 절약하는 것은 맑스 시대의 전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자본가의 경우 향락도 자본논리에 종속된다. “그의 향락에 드는 비용은, 그에 의해 낭비되는 것이 자본의 재생산에 의해 이윤이 붙어 다시 메워지는 액수만큼만 허용된다.”(경철144) 자본론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향락과 축적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밝힌다. 즉 자본주의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낭비는 부의 과시와 신용 획득을 위해 사업상 필요해지기도 한다. 또 수전노와 달리 자본가는 자신의 소비를 줄임으로써가 아니라, “남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짜내며 또 노동자에게 생활상의 모든 쾌락의 포기를 얼마나 강요하는가에 비례해 부유해진다.”(자본1,810) 따라서 자본가의 낭비 배후에는 “언제나 가장 더러운 탐욕과 세심한 타산이 숨어 있지만, 그런데도 자본가의 낭비는 자기의 축적을 결코 방해하지 않고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가의 심중에는 축적욕과 향락욕 사이에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된다.”(자본1,810-811)
따라서 절약과 쾌락의 포기는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몫이 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는 노동자의 욕구를 육체적 생존 유지에 꼭 필요로 수준으로 축소한다. “그는 노동자의 활동을 모든 활동으로부터의 순수 추상으로 만들 듯이, 노동자를 감성도 욕구도 가지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경철136) 노동자에게는 “빛, 공기 등과,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까지도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욕구가 되지 못한다. 불결, 인간의 이 타락과 부패, 문명의 오수 배출구가(이는 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환경이 된다. 완전히 비자연적인 황폐, 부패한 자연이 그의 생활환경이 된다. 그의 감성들 중 어느 것도, 인간적인 방식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방식으로도, 따라서 동물적인 방식으로도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경철135)
맑스는 대조법이나 과장법 등의 수사법에 능통하지만, 노동자들이 빛과 공기와 단순한 동물적 청결에 대한 욕구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턱없는 과장법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폭력적 과정과 그들이 처해 있던 극한상황들에 대한 공장감독관들의 공식적 보고서들은 특히 자본론의 수많은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욕구 문제에서도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는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살 만큼 살게 되었다는 오늘날에는 노동자들도 이제 풍부한 감성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압도적 다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힘겹게 유지하면서 대부분의 욕구를 절약하도록 강요받는다. 물질적⋅정신적으로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아예 싹부터 제거된다. 이 범사회적 욕구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자본주의사회의 적대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한 주요 전제조건이자 극복과정이며 이 과정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의 지배관계를 바꾸려는 욕구가 현실적으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할 뿐이므로, 그러한 욕구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인 귀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경우 음악적인 감각은 음악을 통해 비로소 일깨워진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배관계를 바꾸자는 논리는 노동자 대중의 현재 욕구를 절대화하기보다 풀어야 할 문제로 삼으며, 욕구를 만들어내는 대상적 조건들에 더 주목한다.물론 이 조건들에서 대중의 욕구도 간과해서는 안 될 요인이다. 이와 관련해 생산과 소비의 상호관계에 대한 맑스의 논의에서 주관적 변수와 객관적 조건 사이의 악순환을 깨뜨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맑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소비가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욕구는 대상에 대한 감지를 통해 창출된다. 예술 대상은−다른 모든 생산물도 마찬가지로−예술 감각이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공중을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바라는 대중적 욕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대상과 조건을 생산하는 주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존 지배질서를 바꾸는 운동은 지금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다수 대중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러한 생산 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 소수가 시작할 수밖에 없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당대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단결하는 모습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한다. “인간의 우애는 그들 사이에 헛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들로부터 인간성의 고귀한 빛이 나와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것이다.”(경철141-142) 이 ‘인간성의 고귀한 빛’은 1847~1852년의 공산주의자 동맹, 1848년 혁명, 1871년 파리코뮌, 20세기 현실사회주의 운동 등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 성과와 좌절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버릴 것인지는 인류의 미래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이때 운동의 역사적 실패를 근거로 운동의 불필요성이나 부당성 따위를 단언하기보다는,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함께 작성한 듯한 엥겔스의 다음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이라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 스스로가 변혁 과정에 참여하여, 그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야 하는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50년의 역사가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하려면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엥겔스의 주장에는 대중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이론적 감성적 대상들과 조직적 운동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변혁적 대중 주체를 양산하는 일이야말로 적극적 활동주체들이 해야 할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이다.
5. 공산주의
맑스는 자본주의의 적대적 지배관계로 인한 사회적 불행을 사적소유의 지양에 따르는 긍정적 상태와 대조한다. 사적소유는 ‘타인의 새로운 욕구를 이용해 타인의 새로운 희생을 강요하고 타인을 새로운 예속상태에 빠뜨리고 타인을 새로운 방식의 향락과 경제적 파멸로’ 몰아간다. 또한 새로운 생산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상호간의 기만이나 상호간 쟁탈의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더욱더 인간으로서 가난해지고 적대적인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더욱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하게 된다.’(경철133)
반면에 ‘사적소유의 지양은 모든 인간적 감성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이다. 이 해방을 위해서는 ‘이 감성들이나 속성들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인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눈은 인간적인 눈’이 되고, 그 ‘대상은 사회적인 대상, 즉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산출되는 인간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감성은 사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사태에 관여’하게 되고, 사태 자체도 그 자체 및 인간에 대해 대상적⋅인간적으로 관여하게 된다.(경철100)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사회적’이라는 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인간이 자신의 대상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 것은, 대상이 그에게 인간적 대상 내지 대상적 인간이 되는 경우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대상이 인간에게 사회적 대상으로 되고, 인간 자신이 자신에게 사회적 존재로 될 때, 그리고 사회가 이 대상에서 인간을 위한 존재로 될 때뿐이다.”(경철100)
이 단계에서는 풍부한 인간적 욕구를 가진 풍부한 인간이 나타나는데, “풍부한 인간이란, 인간적인 삶의 표현을 총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간이다. 즉 자기 자신의 실현을 내적 필연성 내지 필요성으로 삼는 인간이다.”(경철104) 이때 타인의 감각이나 정신도 내 것으로 만들게 되며, ‘다른 사람들과 직접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활동’도 ‘나의 삶을 표출하는 한 기관’이 된다.(경철100) 또한 부와 마찬가지로 ‘가난도 인간적인, 따라서 사회적인 의미를’ 얻는다. 즉 가난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부인 타인을 욕구로서 느끼게 하는 수동적 유대’인 것이다.(경철105) 나아가 이러한 사회는 “이와 같이 풍부한 모든 본질을 갖춘 인간을, 즉 풍부한 감성을 모두 갖춘 사려 깊은 인간을 그 사회의 지속적인 현실로서 생산한다.”(경철102)
이로써 가능해지는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 내지는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한다. 이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또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진정으로 해결하고,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확증, 자유와 필연, 개별과 유의 갈등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더욱이 자신이 이 해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경철95) 또한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완성된 본질적 통일이며, 자연의 참다운 부활이며, 인간이 관철된 자연주의이며 자연이 관철된 인간주의이다.”(경철97)
이때 자연과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과 하나가 되며, 산업을 통해 생성되는 자연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적 자연’으로 파악된다. 또 역사는 자연사의 일부로 파악된다.(경철103-104) “사회주의적 인간에게,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적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인간을 위한 자연 생성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므로, 사회주의적 인간은 그 자신에 의한 그 자신의 탄생과 생성과정에 대한,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경철106) 이제 사회주의는 신의 부정이나 사유재산의 지양에 의해 매개될 필요도 없다.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종교의 지양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긍정적인 자기의식이며, 그 현실 생활도 더 이상 사적소유의 지양인 공산주의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긍정적 현실이 된다.”(경철107)
궁극적인 단계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 개념과 관련해서는, 분업의 폐해를 극복한 공산주의사회의 모습을 그려놓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목가적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고, 자본론에 잠시 등장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본1,102)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을 연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그려놓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를 떠오르게 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이처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소유관계나 생산력 발전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욕구의 근본적인 변화와 더불어 구현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실적으로 정치혁명을 통해 사적소유의 지양이 일시에 이루어지더라도 즉각 인간의 욕구가 그에 부합하는 성격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초기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직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도 아직도 들러붙어”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욕구의 근본 변화를 위해서는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장구한 갈등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실사회주의의 도래가 임박한 시점에 레닌은 그러한 욕구 변화 문제를 미래의 국가사멸과 묶어서 습관의 문제로 설명한다.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주요 특징으로서 연속혁명 및 세계혁명과 더불어 사회주의혁명 자체의 항구적인 내적 투쟁의 측면을 명시한다.
현실사회주의 운동은 이 장구한 과정의 출발선인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내외의 자본권력과 치른 전쟁에서 패배한 셈이다. 이를 거울삼아 생각하면, 욕구와 습관의 문제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말끔히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수준에서부터 기존의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욕구구조를 바꾸는 운동들을 확대해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의미 있어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일컫는다”(독일75)는 테제는 무엇보다 현재의 지배적인 의식 및 욕구의 변화 문제와 관련해 절실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의식과 욕구의 변화를 강조한다고 해서, 국가권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가 불필요하다거나 건너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맑스는 최초 형태의 공산주의를 사적소유의 보편화 내지 완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선, 물적 소유의 지배가 너무 크게 공산주의에 맞서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사적소유로 만인이 차지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능 등을 무시하려 든다. 여기서는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소유가 생활과 생존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겨진다. 노동자라는 규정은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에게 확장된다.”(경철93)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은 여성을 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형태로까지 나타난다. “이 공산주의는−인간의 인격성을 도처에서 부정하는 것이므로−다름 아닌 이 인격성의 부정인 사적소유의 철저한 표현밖에 되지 않는다.”(경철93) 맑스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에서 인간의 욕구가 얼마나 인간적인 욕구로 되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본다.(경철94) 그는 이 최초 단계의 공산주의는 사적소유를 넘어서기는커녕 아직 사적소유에 도달하지도 못한 것이라고 규정한다.(경철93)
그 다음 단계로서 맑스는 민주주의적이든 전제주의적이든 어떤 정치적 성격을 지니는 공산주의와, 국가를 지양하되 사적소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욕구의 인간적 본성을 이해하지 못해 여전히 사적소유에 사로잡혀 오염되어 있는 공산주의를 설정한다.(경철95) 최초의 조야한 공산주의보다는 이 둘째 단계의 공산주의가 현실사회주의 내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이 두 단계의 공산주의는 궁극적인 단계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경철초고의 시대, 1848년 혁명이 다가오던 시대의 현실적 공산주의 운동은 최초의 단계와 둘째 단계 사이에 걸쳐 있었다고 여겨진다.
맑스는 이 공산주의 자체가 인간 발전의 목표는 아니라고 보면서도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공산주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긍정이며, 따라서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역사적 발전에 필연적인 인간의 해방과 회복의 현실적인 계기이다. 공산주의는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미래의 필연적 형태이며, 활동적 원리이다.”(경철107) 1848년의 6월 학살과 혁명의 좌절 이후 ‘장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에 몰입하던 맑스는 1871년의 파리코뮌에서 그 필연적 형태와 활동적 원리가 현실적으로 출현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엥겔스는 파리코뮌을 이렇게 평가한다. “사회민주주의 속물들은 최근 또 한 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에 대해 건강상 유익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좋다. 신사 여러분, 이러한 독재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으신가? 파리 코뮌을 보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파리코뮌은 코뮌전사들에 대한 학살로 끝났지만,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 즉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를 향해, 총체적 인간해방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구 지배세력의 반격에 대응하는 전쟁이 불가피함을 보여주었다.
6. 실천적 유물론
경철초고는 서구 맑스주의에서 동구 맑스주의에 맞서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데에 활용되었고, 이때 소외 개념이 각별히 강조되기도 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흐름에 맞서, ‘문제설정’ 및 ‘인식론적 단절’ 개념을 동원해 청년기 맑스의 이데올로기적 이론과 독일이데올로기 이후 맑스의 과학적 이론을 구분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에 따르면 경철초고는 이데올로기 단계에 머물며, 과학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단절이 필요했다. 특히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맑스로 하여금 아카데믹한 헤겔주의적 연구로부터 칸트-피히테적 문제설정으로, 그리고 나서 포이어바흐적 문제설정으로 넘어가게 한 운동을 파악하려 한다면, 맑스는 헤겔에 접근하기는커녕 부단히 헤겔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또한 알튀세르는 경철초고를 비롯한 1841~1844년의 맑스 저술들의 수많은 구절들이 “포이어바흐의 논지전개들을 직접 재생산하거나 표절하고”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서도 경철초고의 의의를 폄하하고 헤겔 연구를 소홀히 하는 연구풍토를 조장했다.
물론 헤겔 관념론을 유물론적으로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포이어바흐가 기여한 바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적 혁명을 인정하며, 또한 그의 이론에 의거해 감성적 욕구와 감성적 의식에서 출발하는 과학만이 현실적 과학이라고 단언한다.(경철104) 뿐만 아니라 맑스는 자신이 강조하는 인간주의와 자연주의의 저작권자가 포이어바흐임을 분명히 밝힌다.(경철12) 하지만 경철초고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포이어바흐 테제」(1845)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벌써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주체의 실천적 활동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직관적 유물론’ 혹은 ‘구태의연한 유물론’이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유물론을 ‘실천적 유물론’ 내지 ‘공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한다. 또 그들은 포이어바흐가 말하는 유적 인간도 고립된 추상적 개인에 머문다고 비판한다.(독일90-91)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경철초고에서도 맑스는 인간을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한다. 또 맑스는 헤겔 변증법의 관념론적 성격을 철저히 비판하지만 동시에 헤겔이 인간의 주체적 활동적 측면을 강조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경철115) 예컨대 다음 구절에서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보다 오히려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격을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소재도 주체로서의 인간도,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출발점이기도 하다. (…) 사회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활동과 향유는 그 내용으로 보나 그 존재 방식으로 보나 ‘사회적인’ 활동이며, 사회적인 향유이다.”(경철97)
이런 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는 인식론적으로 헤겔 및 포이어바흐와의 단절보다 비판적 종합 내지 지양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철초고도 포이어바흐에 대한 인정 및 헤겔에 대한 명시적 비판과 별개로, 이미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후 맑스는 유물론과 변증법을 버리지 않았고, 특히 헤겔에게 빚진 바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본론 1권 2판 후기에서 맑스가 말하는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은 이미 경철초고에서도 미숙한 상태로, 그래서 나중에 수정⋅보완되어야 하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으며, 추후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전제되기도 한다.
‘과잉결정’ 개념으로 헤겔 변증법을 대체하고 맑스와 헤겔을 분리하려는 알튀세르의 ‘과학적’ 논의 자체에서도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맑스의 이론 전체에서 실천적으로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알튀세르가 역설하는 ‘인식론적 단절’이라기보다 청년기 맑스가 이론적으로 수행한 ‘세계사적 전제전환’이다. 즉 자본주의를 불변의 자연상태 내지 절대 상수로 전제하고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일시적인 역사적 산물로서 받아들이고 그 근본문제들을 밝혀 극복하려는 기본입장의 전환이 결정적인 것이다. 이 세계사적 전제전환은 이미 경철초고에서도 확인된다. 그 후 맑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자신의 전제를 바꾼 적이 없다. 이때 헤겔의 변증법은 단절이 아니라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었다.
아도르노는 헤겔 변증법과 맑스 변증법의 공통점이 유물론과 관념론의 차이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그의 논지에 따르자면, 현실의 본질적 가변성과 함께 개념의 운동에 주목하는 점, 도식이 아니라 사태 자체에 충실코자 하는 점, 주체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한 점,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이 타당하다고 보는 점, 내재비판을 적극 활용하는 점, 현실의 제반 모순과 적대관계들을 은폐하지 않는 점, 대립물의 통일과 상호이행 및 전도를 주시하는 점 등이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받아들이는 합리적 핵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맑스의 변증법은 관념변증법이 아니라 유물변증법이다. 유물론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고무하는 데에 있다. 또한 실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온갖 미몽과 환각으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은 변혁의 주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양극화 및 계급적대의 중요성, 소외된 노동, 욕구에서 드러나는 적대관계 등에 대한 가차없는 서술은 과학적 현실인식으로서 가치있다. 물론 현실의 어떤 부분에 어느 각도에서 접근해가느냐에 따라 현실인식의 내용과 성격은 달라진다. 모든 유물론이 변혁적인 것은 아니다. 맑스의 유물론은 자본주의 현실의 근본적 발전 경향들을 변혁적 관점에서 드러내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유물론은 변혁적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변혁이론은 두 계기를 결합한다. 지배관계가 만들어내는 환각을 파괴하고 냉철하게 실제 사태에 접근하려는 과학적 계기와 실제로 현실을 바꾸려는 변혁적 계기가 그것이다.그 둘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는 있으나 각각을 분리하여 예컨대 전자를 과학에 후자를 이데올로기에 귀속시키는 것은 변증법적이지 않다. 과학적 계기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객관적 기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변혁적 계기도 유토피아로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될 것은 아니다. 변혁적 계기는 과학적 계기와 결합됨으로써 의미 있게 구현된다. 또 특정한 변혁적 계기와 결합된 과학적 계기가 구현되는 양태와 결과는 그와 다른 상태로 이루어지는 과학적 결과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경철초고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양극화⋅소외⋅사적소유⋅공산주의에 대한 진술은 국민경제학자들의 자료들을 활용하는 냉철한 현실 기술이면서 또한 변혁의 불가피성⋅가능성을 전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증적 과학 너머의 인식 산물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변혁적 계기를 제거하더라도 특정한 진리치와 유용성을 지니는 이론이 산출될 수는 있다. 또 변혁의 이름으로 과학적 계기를 잠시 눌러놓더라도 일정한 성과 내지 실패를 수반하는 실천이 이루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과학의 충분한 뒷받침 없이 변혁적 계기만을 강조할 경우, 좀 더 철저한 과학으로 무장된 지배권력의 조롱거리가 되고 필요 이상의 희생을 초래하기 쉽다. 현실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필수적이다. 이때 변혁적 계기는 기초자료의 선별, 자료 배열상의 강세 설정, 단순한 사실 기술들로부터 복합적 결론의 추론 등 과학활동의 본질적 영역 모두에 개입한다. 변혁적 관점 없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상당히 타당한 법칙들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변혁보다 지배의 도구로 기능할 가능성이 더 크다.
변혁이론은 그 법칙들이라는 것도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실천을 통해 개조될 수 있는지 따지고 개조 방법을 찾기도 한다. 사적소유를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하면 소외된 노동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적소유의 필연성을 부인하고 다른 생산관계가 가능하다고 전제할 경우, 소외된 노동의 필연성에도 의문을 던질 수 있고, 그 다른 생산관계의 구현방법에 관한 인식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과학적 계기와 변혁적 계기의 성공적 결합 없이는 성공적 변혁이론도 없다.
어떤 가치판단이나 전제조건도 없어야 하는 것이 과학의 자질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과학적 변혁이론에도 논증이 어렵거나 논증이 불필요한 가치판단과 전제들이 포함된다. 경철초고에서 인간이 동물적 욕구충족만으로, 그것도 불충분한 충족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점(경철135), 매음과 인신매매 따위는 국민경제학에서 묵인될지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138), 소외된 노동은 현실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 등은 논증되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전제 없이 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를 불가피한 현실로서 전제하는 국민경제학과 맑스의 이론이 각각 비참한 당대의 현실에서 선별해내는 자료의 종류와 그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 이로부터 추론되는 실천적 결론도 당연히 달라진다.
7. 나가며
맑스의 변혁이론은 적대적 지배관계를 바깥에서 굽어보는 초월적 입장의 산물이 아니라, 적대적 지배관계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으로 지배관계 극복을 위한 전쟁의 전략을 제공한다. 이 장기전을 위한 포괄적 전략 가운데 경철초고는 특히 이 전쟁이 불가피한 이유와 그 궁극적 지향점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반인간적 욕구와 감성을 만들어내고 소유의 감성만 남긴 채 특히 노동자들의 욕구를 끝없이 절약하도록 강요하면서 무한증식을 추구하는 사적소유의 근본적 지양, 풍부한 인간적 감성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 자기실현을 내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사회적 양성, 단순한 유용성 차원이 아닌 자체목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및 인간 파악,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 인간⋅자연⋅산업의 역사를 대립관계가 아닌 인간화된 자연 내지 자연화된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관 형성,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이나 사적소유의 지양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에 의한 인간 산출 및 인간을 위한 자연 생성으로서 세계사 이해 등을 추구하면서, 그 필연적 단계인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것 등등이 그 주요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오늘의 계급적 적대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계급해방운동만 아니라 그와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제반 해방운동들을 위해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들이다.
자본권력은 현실적 적대관계의 주요 원천으로서 오늘도 맑스의 시대와 다름없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힘에 압도되어 자본을 절대적 불변요인으로 전제하고, 실재하는 적대관계를 은폐하거나 인류사회의 필연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의식구조가 굳어져 갈수록 맑스와 함께 무수한 노동자 민중이 추구해온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 혹은 풍요로운 평등사회는 우리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패배를 고스란히 되풀이하지 않고 오늘의 적대관계를 극복할 실천방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풍부한 문화유산과 생산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사유방법, 즉 변증법적 사유방법이 유용할 것이다. 이때 경철초고의 합리적 핵심들 역시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로 하여금 이러한 준비작업을 발판삼아 미래의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도록 부추기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모순과 이로부터 야기되는 재앙들이다. 전 지구를 당장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생산력으로 적대관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대량해고⋅환경재앙⋅제국주의전쟁 등의 범인류적 파국을 예비하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 자체가 그 너머의 대안 사회를 찾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미 진행중인 파국 앞에서 무기력한 방관자로 머물 것인지, 그 극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라도 할 것인지, 우리는 매일 매순간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