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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1905년 5월, 동해 앞바다에서 벌어진 최후결전,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 일본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온전히 궤멸시킨다. 러일전쟁을 끝낸 역사적 현장, 그곳은 바로 독도 앞바다였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독도 이야기입니다. 독도와 관련된 특종들이 대거 준비되어 있으니까 기대해도 좋습니다. 한일강제 병합의 결정적 사건이 된 러일전쟁으로 문을 열어봤는데, 아시는 얘기였죠?
박상영/작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러시아의 발틱 함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이 그 유명한 함대를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지금 제가 막 알게 되어서 몹시 충격에 빠져 있는 상황이구요~
이시원/배우: 상영씨도 이 발틱 함대는 아는데 그 발틱 함대가 무너졌다면 굉장히 큰 충격이었겠어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유럽에서는 진짜 큰 충격이었어요. 러시아는 당시 만주와 한반도에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선언을 하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란거예요. 이게 무슨 일이지? 그걸 되게 많이 풍자 했거든요. 제가 그걸 유럽가서 가져 왔습니다.
이시원: 유럽에서 발굴해 오신 거예요?
다니엘: 맞습니다. 제가 유럽엘 가서 발굴해 온 겁니다. 자, 이 그림을 보세요. 러시아 말로 코사크 브렉퍼스트 인데요(러시아인이 아침 식사로 접시 안에 일본인을 먹는 그림). 독일 사람들도 러시아 사람들을 보통 코사크인 이라고 부르거든요. 그 당시에 러시아 사람이 일본 사람을 아침 식사로 먹고 있잖아요.
이시원: 한국말로 하면 한입 걸이~
다니엘: 그만큼 상대가 안된다는 의식이 깔려었죠. 그리고 또 하나 비슷한 그림도 있습니다. LE JAPAN MET LES PIEDS DANS LE PLAT 러시아 사람이 아침 먹을려고 하는데 일본 사람이 거기 접시 (COREE) 위에다 자기 발을 올려 놓으면서 잠깐만! 이런 표현이잖아요?
이시원: 저 접시에 음식이 한국(COREE) 이죠, 그럼 한국은 사람도 아니었던 거예요? (인격으로 묘사되지 않은 조선).
최원정: 음식도 맛있는 음식이 아니고 그냥 덩어리잖아요.
다니엘: 러시아 사람이 포크와 나이프 들고 먹을려고 하는데 일본사람이 잠깐만 할말 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데 이만큼 러시아에 대해서는 어른으로 유럽에서는 인식이 있었죠. 일본은 작은 아이처럼 생각했구요 (러시아=어른, 일본=아이).
이시원: 어른과 아이의 싸움처럼 보여졌나보네요.
다니엘: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최원정: 독일에도 그런 비슷한 속담 있어요?
다니엘: 아마 있을 거예요.
유동훈/하나고등학교 교사: 한국사회에서 러일전쟁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큰데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을 식민지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그러니까 침략을 노골화합니다. 1905.11.17에 을사늑약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을 체결합니다.
다니엘: 그러면 그때부터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겁니까?
유동훈: 그렇죠, 보호국이 되어 통감부가 설치돼죠.
최원정: 러일전쟁이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었군요.
이시원: 러일전쟁이 독도 앞 바다에서 벌어진 건 몰랐거든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러시아가 최후의 수단으로 발틱 함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긴 여정을 거쳐서 오게 됩니다.
최원정: 지구 거의 반바퀴를 돌아서 왔지요.
정병준: 장장 9개월에 거쳐서 오게 되었구요. (발틱해-아프리카서부-남아프리카 희망봉-아프리카동부 해안). 마지막으로 기항하는 곳에서 석탄과 물을 실었는데 이 소식을 바로 일본해군이 접수하게 됩니다. (상해에 정박한 러시아 발틱함대). 그 소식을 바로 일본 해군이 접수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시 일본 해군은 어디에 있었느냐 진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방향은 당연히 대마도(쓰시마) 해협을 지나서, 결국은 독도 울릉도 근처를 지나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러시아 발틱 함대를 잡을 수 있는 곳은 대한해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최악의 컨디션이었던 발틱 함대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준비되어 있던 일본해군이 정확한 정보로 일거에 타격을 가해서 전쟁을 승리하게 된 거죠.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독도와 울릉도 라고 하는 것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중요한 첫 희생지, 정보의 중심으로 부각되게 되는 것입니다.
최원정: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독도를 왜 중요하게 생각했을까요? 그 비밀을 알아 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날의 비화를 들여드릴 저는 이광용, 박금수입니다-----------------
이광용: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최초의 세계대전이죠.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였습니다.
박금수: 각본 없는 대반전 드라마인데요. 그런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승리하고서도 찜찜함이 남는 전쟁이었습니다.
이광용: 왜죠?
박금수: 왜냐면은요, 패전국인 러시아보다 (약5만명) 일본군의 사상자 (8만6천명)의 수가 훨씬 많았던 겁니다. 약1.7배, 이건 싸움을 이겨놓고 쌍코피 터지고 전치 12주 나오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죠.
이광용: 싸움을 많이 해보셨나요?
박금수: 아닙니다. 되게 당황스럽네요. 특히 뤼순에서는요 (뤼순 공방전(1904.8~1905.1)-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전투). 사상자수가 굉장히 많았는데요. 무려 8천명이나 되는 일본군의 병사들을 갈아 넣어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죠. 그 유명한 반자이~ 돌격이 이때 나오게 됩니다 (반자이(萬歲)-일본어로 ‘만세’를 뜻함).
이광용: 반자이 외치면서 목숨을 때려 박아 넣는 그런 일본군을 보면서 러시아 군은 치가 떨렸겠는데요.
박금수: 뭐 한마디로 아연실색이죠. 일본군의 시체가 태산처럼 쌓였구요. 그 악취가 너무 진동하여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군이 어떻게 했을까요?
이광용: 방독면을 썼을까요?
박금수: 너무 비쌉니다. (종이에 싼 걸 보여주면서) 이거 보세요 이거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합니다.
이광용: 아니 이것은 그 옛날 옷장 속에 하나씩 넣었던 나프탈렌~
박금수: (나프탈렌을 코에 대면서) 이 냄새를 맡으면서~
이광용: 시체 썩는 냄새가 얼마나 독했으면, 차라리 나프탈렌을 맡았을까~
다니엘: 전 나프탈렌을 몰라서~ 저도 맡아 봐도 돼요? 오!~ 지독한 냄새!~ (문화충격).
이광용: 이게 연구실 소독약 같은데~
최원정: 독일에서는 옷장에다가 저런거 안넣어요?
다니엘: 안넣었던 것 같애요.
최원정: 우리는 옛날에 옷장에다 나프탈렌을 넣었거든요.
이광용: 러시아군이 나프탈렌을 코에다 대고 다녔대요. 이렇게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세계 발틱함대를 일본군은 격퇴할 수 있었구요. 이로 인해서 러일전쟁의 승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여전히 아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와 언제 일전을 치를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일본군은 울릉도와 오키섬 사이 중간지점인 독도에 망루를 설치합니다.
이광용: 망루요? (망루(望樓)-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는 건물).
박금수: 전투에서는 망 보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망망대해를 가보시면 GPS가 없잖아요. 밤에는 별을 보고 갈 수가 있는데 낮에는 뭘 보고가느냐 섬을 보고 가는 거죠. 그래서 이 섬에다가 망루를 설치하면 적의 이동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설마 여기에 망루가 있었겠어요. 바로 해저 케이블이 일본 해군지휘본부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망루에서 본 적군의 이동정보가 실시간으로 최고 지휘부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일본이 러일전쟁을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이죠.
이광용: 얼마나 오래 준비했습니까?
박금수: 꽤 많이요~하~하~ 일본이 통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군과 스페인이 해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해군장교였던 아키야마 사네유키(1868~1918)를 이 전쟁에 참관하도록 파견합니다. 이 사람이 가서 보니까 미국전함에 무선통신장비가 실려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실시간 정보들을 취합해서 가장 적합한 지휘명령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 결과, 미군이 세계 최강의 스페인 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거죠.
이광용: 스페인을 중세 한때 무적함대라고 불렸잖아요.
박금수: 해전의 그런 어떤~ 그걸 뭐라 그러죠?
이광용: 패러다임이요.
박금수: 패러다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던 거죠. 이 아키야마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섬에다가 망루 설치를 제안한 거죠. 그때 제안했던 거점들이 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도였던 것입니다.
이광용: 왜 지네 땅 놔두고 우리 땅에다 설치를 하죠?
박금수: 그러니까요, 제네 땅 여기 있는데~ 사이에 딱 독도를 놓치지 않겠다~
이광용: 그러니까 발틱함대가 뤼순을 출발 해서 남해를 지나서 동해 쪽으로 오면서 거점(독도)를 지날 수 밖에 없네요.
박금수: 독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일본은 쓰시마 해전 직후에 1905년 7월부터 독도에다 망루, 통신장비의 감시원을 상주시키고요. 이 독도에서 얻은 정보를 취합해서 전략을 짤 수 있게 됩니다.
-------------이광용: 일본이 동해에 거대한 덫을 놓아서 러시아를 잡겠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그날의 비화를 전해드린 저희는 지금까지 이광용, 박금수 였습니다---------------
최원정: 오늘 정말 덫에 싹 걸린 느낌~ 대단하네요.
다니엘: 독도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잖아요. 날씨 때문에 망루를 설치하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만큼 중요했잖아요.
박상영: 러시아 입장에서 예네가 이렇게 까지 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애요.
이시원: 일본의 벤치마킹 능력에 정말 놀랐어요. 직접 참전해서 그걸 보고 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 이겠구나 해서 그걸 그대로 적용한 거잖아요.
최원정: 그걸 배우러 거기까지 간게 놀랍지않아요, 우린 안갔어요?
정병준: 그런데 전쟁 참관인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전쟁을 학습하는게 제일 중요했구요. 정보의 중요성을 일본 해군이 깨닫게 된 거죠. 해군전쟁을 보고 왔던 아키야마 사네유키 라는 해군장교 이 사람이 망루나 해저케이블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죠. 사실은 이렇게 일본 해군만 독도의 중요성을 파악한 게 아니라 일본 민간인도 있었습니다.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도 독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독도를 탐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1938년에 촬영한 독도강치의 모습입니다. 옛부터 독도는 한국토종 바다 사자 강치의 서식지였다. 하지만 1900년대초, 독도를 무단으로 침범한 일본 어부들은 총과 그물을 이용해, 매년 수천 마리의 강치를 닥치는 대로 포획했다. 백여년전 독도의 주인이었던 강치는 현재 이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니엘: 강치가 뭐예요?
이시원: 바다사자 같기도 하고, 귀엽게 왔다갔다 하는 강아지들 같기도 하고~
정병준: 바다사자의 일종입니다.
유동훈: 영어로 Sea Lion 입니다.
최원정: 독도에서 한동안 서식을 했다구요.
정병준: 굉장히 많이 서식했습니다.
유동훈: 1900년대초 보면 거의 1만 마리 이상이 있었다해요. 기름은 연료로 쓰이고 고기는 비료로 쓰이고, 어린 강치들은 잡아다가 서커스에다 팔아넘겼다고 해요. 강치 가죽이 소가죽보다 튼튼하고 질겨가지고 실제로는 고급가방이나 군용가방에 쓰였다고 해요.
이시원: 말가죽도 있는데 왜 바다 먼 곳까지 가서 강치를 잡아요?
정병준: 사육비용이 안드니까요. 실제로 1900년대, 나카이 요자부로 (1864~1934)라고 하는 일본 어부가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다음에 1930년대 경에 이르면 실제로는 남획으로 강치가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됩니다.
최원정: 멸종이 되었다는 말씀이세요?
정병준: 그렇죠
다니엘: 사켄트 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인간이 너무 많은 동물을 멸종시켰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 비극인 거같애요.
이시원: 거기가 일본 땅도 아니고 우리나라 땅에 와서 강치를 다 잡아가 버리면 너무 한데요.
박상영: 그거와 관련해서 제가 조사해온 바가 있습니다. 이쯤되면 등장하는 코너가 있죠. 사라질듯 사라지지 않는 코너~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위한 코너~박상영의 그날 상영회~
박상영: 독도 강치를 멸종시킨 그 주범이 누구인지 제가 밝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카이 요자부로 라는 사람인데요. 일본에서는 이 사람이 어업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때는 1903년 일본의 어부들은 강치들이 독도에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부들끼리 강치를 포획하기 위해서 경쟁을 벌입니다. 나카이는 독도 강치 잡이를 독점하기 위해서 여러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인데 어떻게 하면 강치잡이를 독점할 수 있을까?
최원정: 대한제국의 땅인 줄 알면서 강치를 독점하겠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인 거 같은데요.
박상영: 그렇죠.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정부에 청원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병합해 주십시오. 강치사업을 끝까지 보전할 수 있도록 앞으로 10년간 제게 독도를 대여해 주십시오 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다니엘: 자기 비즈니스를 위해서 누구한테 청원을 올렸다구요?
이시원: 반대의견도 있었을 것 같은데~ (<상영회>를 살리려는 몸부림), 제가 도와 드릴게요. 일본 내무성이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영토일지 모르는 일개 황폐한 불모의 암초를 취하면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만 살 뿐이오. 안되오! 라고 했어요.
다니엘: 그게 아닙니다. 일본 외무성 담당자는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좋지 않겠습니까 데스까.
박상영: 네,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내무성 대 외무성의 의견 중 과연 어떤 의견이 정부에서 채택이 되었을까요? 바로 다니엘의 의견대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어업의 독점권을 결국 획득하게 됩니다. 그 독도에 임시 막사까지 지어서 본격적으로 강치를 포획하기 시작했구요. 그리고 그 양이 한 해에 평균 수천 마리에 이를 만큼 어마어마한 살육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흔적이 백년도 넘은 지금까지도 아직 독도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독도에 두개의 섬 중에서 서도에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아직도 수천 마리의 강치 뼈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그런 비극이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원정: 굉장히 슬픈 영화네요. 강치 홀로코스트~
정병준: 어떻게 잡느냐 하면 먼저 새끼 강치를 포획을 합니다. 새끼 강치를 포획을 하면 암컷이 모성애 때문에 새끼를 보호하려옵니다. 그러면 암컷이 오면은 주변에 있는 숫컷이 또 달려오게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숫컷의 크고 좋은 가죽이기 때문에 그렇게 새끼를 잡아서 암컷과 숫컷을 함께 잡는 사냥법을 썼다고 합니다.
이시원: 두 가지가 큰 비극인 거 같애요. 첫째는 강치의 씨가 마른 것이고, 둘째는 민간사업을 시작으로 해서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유동훈: 탐욕스러운 일본 어민의 욕심과 제국주의의 열망이 같이 맞아 떨어져 가지고 독도를 일본이 차지할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영: 우리가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독도가 우리땅 이라는 걸 배웠지 않습니까. 혹시 독일 다니엘 형께서는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
다니엘: 저는 그거만 알고 있어요. 요새 오스카 4관왕 기생충 반응이 뜨겁잖아요. 거기서 제시카 송의 노래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네 친구~ 그렇잖아요? 한국 친구가 알려주더라구요. 원곡은 ‘독도는 우리땅’ 이라고요---러일전쟁 직후에 임자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이런 식으로 하더라구요.
최원정: 그게 5절인데 그걸 아세요? 한국 친구가 알려줬다구요.
박상영: 원래 1절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이거 정도까지만~
이시원: 기생충이 큰 상을 받았잖아요. 근데 저는 이 노래음을 일부러 넣은게 아닐까 아, 봉 감독님이 다 계획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니엘: 옛날에는 저도 한국학 처음으로 공부하기 시작하기 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사실 독도에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그게 점점 한일관계에 큰 논란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제가 지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여기 보시면 조선이 있고 일본이 있는데 여기 같은 노랑색 조선땅이라고 나와 있죠. 이게 독일 지도예요. 1832년에 발표된 독일지도인데, Carte des Trois Royaumes (1832)—독일학자 율리우스 클라프로트가 제작,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란게 여기에 분명히 보여 주잖아요.
이시원: 굉장히 중요한 지도네요.
최원정: 같은 색깔로 표시되었네요 (조선반도와 울릉도와 독도), 일본과 오키섬, 쓰시마는 녹색으로 표시,
이시원: 세종실록에도 섬과 섬 사이가 가까워서 날씨가 좋으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 권153. (1454)-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도 있다).
유동훈: 맞아요. 독도를 우리가 조선시대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라는 증거입니다.
박상영: 대한제국의 칙령에도 이 독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요.
최원정: 지금 지식들이 막 나오네요.
유동훈: 대한제국에서 울릉도에 군을 설치한다 (대한제국칙령 제41호(1900.10.25)-울릉도를 울도군이라 하고 관할구역은 울릉도 죽도 석도로 한다). 그리고 관할구역은 울릉도 죽도 석도 세개 섬을 설치하게 돼요. 석도가 뭐냐 돌섬이잖아요. 석도=돌섬 石島, 당시에 울릉도에는 의외로 전라도 어민들이 많았데요. 전라도 방언을 보면 돌을 독으로 발음한답니다. 그래서 “돌섬-돌도(석도)-독도”가 한자로 石島가 되는 거죠. 일본이 자기네 영유권을 먼저 말하기 전에 1900년 칙령 41호로 우리가 먼저 독도를 관할할려고 했다는 의사표시를 한 거죠.
다니엘: 일본측 주장이 궁금해서 일본 외교부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 봤어요. 거의 희한하게 논리가 없는 그런 표현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In the early 1900s, the Cabinet decided to incorporate Takeshima into Shimane Prefecture (1900년대초) 일본 내각은 독도(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기로 결정하였다.--------그러니까 이제 1900년에 incorporate(편입)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잖아요. 전에는 없었다는 뜻이고요. The Cabinet added Takeshima to the State Land Register 내각에서 독도(다케시마)를 관유지(토지) 대장에 포함했다—국토교통부의 register(대장)에 추가했다는 뜻이잖아요. 이건 말이 안돼요. 그럼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이죠.
유동훈: 일본은 독도와 울릉도 지역을 자기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본인이 독도와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도해면허를 발행합니다 (도해면허(渡海免許)-일본 어민이 외국에서 항해할 때 발부받는 조업허가서). 그러니까, 우리 영토가 아닌 곳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는 면허를 받아야 한다. 결국 독도를 해외로 인식했다는 것이죠.
박상영: 이렇게 까지 증거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초등학생부터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배우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화제가 된 것도 2020 도쿄올림픽 공식홈페이지에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더라구요.
최원정: 어머 우리 패널들 여기 저기서 조사들 많이 해오셨군요. 우리끼리도 증거를 이렇게 많이 찾아낼 수 있는데 일본은 왜 그러는 건가요?
정병준: 사실 前近代 일본 자료에서 독도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다 울릉도와 독도입니다. 일본이 노렸던 것 사실 울릉도인데 울릉도는 너무 명확하게 조선(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독도를 떼어내게 된 거죠.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구요. 그걸 사실 국제법적으로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내각 관보에 (1905년 2월 25일) 게재를 하고 그래야 되는데, 절차를 어떻게 하였느냐 하면 러일전쟁 중에 편입시킨 사실을 지방신문에 공고했구요. 그리고 1년 지나고 나서 (1906년 2월 24일) 시네마현 관리들이 울릉도를 방문합니다. 그래서 울릉도 심흥택 군수에게 다케시마는 우리 거예요 라고 해서 경악하게 합니다.
박상영: 그런데 이게 지방신문에 기사를 내고 그냥 1년뒤에 가서 알리고 그러는 거는 자기들 입장에서 슬쩍 한발 밀어넣는 거지요~
이시원: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그렇게 독도를 시네마현에 포함시켜버린 거예요?
최원정: 떳떳하지 않은 거죠. 캥기는 게 있는 거죠.
정병준: 울릉도 심흥택 군수가 중앙정부에 보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1906년이면 우리가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긴 이후였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보호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아까 2월 25일, 1905년에 시네마현에 포함되었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그게 다케시마의 날, 그날이 맞나요? 아니 그렇게 몰래 해놓고서 대대적으로 홍보한다는게 말이돼요?
정병준: 그게 제국의 모습인 거죠. 자기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합법적이다 합리적이다 생각하는 거구요. 당사국들의 입장 같은 것은 생각 없는 거죠.
최원정: 우리도 독도의 날 있어요. 10월 25일, 아까 대한제국 칙령 발표된 날 1900년, 우리가 10월 25일 더 강하게 밀고 나가야 되는데~ 그런데 일본이 자꾸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유동훈: 당연히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광복하면서 독도가 우리 땅이 됐다고 거의 확신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또 생각이 다릅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샌프란시스코 회의인데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9)-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그런 회의였죠. 그런데 거기서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조약 2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청원권을 포기한다. 그러니까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는 분명히 한국땅이다. 거기에 독도는 들어가 있지 않다.
최원정: 아니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섬을 다 썼어야지요. 우리나라 섬이 몇 개인데~
정병준: 회담 당시 독도문제는 참가국들의 의제에 올리지도 않았고 결정되지도 않았습니다. 또 사실 한국의 섬이 천여개가 넘는데 예를 들어서 가거도, 마라도, 독도 이런 섬들이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패전 이후에 영토문제에 대한 특히 독도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일종의 계략, 공작들을 펼친 결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업치락뒤치락 하는 과정들이 펼쳐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박상영: 일본은 정말 패전국이잖아요. 식민지배했던 것들을 다 반납하는 와중에서도 너무 뻔뻔하고 좋게 말해 외교적인 수완이지, 사실은 진짜 요기저기 빠져나가서 강탈을 되풀이하는 그런 행위가 아닌가요?
정병준: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했던 나라가 한국, 중국, 러시아 인데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초대받지 못한 한국, 중국, 러시아). 그 과정에서 인제 연합국 실무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럼 어떤 섬을 일본에 포함하여야 되느냐 섬들이 너무 많아요. 동경 몇도 북위 몇도에서 북서로 어디까지 간다. 그 다음에 또 어디까지 간다. 결국은 선을 긋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첨부지도를 만듭니다. 그런데 냉전이 벌어지게 되면서 일본이 주장을 하게 되는 거지요. 일본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다. 결국 일본 영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사라졌습니다.
다니엘: 제가 보니까 공산주의 공격을 막아야 되니까 그걸 신경 안썼던 것 같애요.
최원정: 1947년 이잖아요. 이때는 우리가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는 게~그게 결정적인 것 같애요.
이시원: 아버지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계약서를 볼 때에 꼼꼼하지 않는 계약서는 사기계약서의 확률이 높다고 하시거든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 분쟁이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그런데는 쉽게 사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건 우리가 사인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다는게 진짜 분하네요.
최원정: 일본은 아무튼 이걸 잘 이용 했겠네요. 47년 쯤에 아주 분주했겠네요.
정병준: 일본은 미국과 연합국을 상대로 일본이 자국령이라고 생각하는 작은 섬들을 설명하는 자료를 만들어서 홍보하고 배포했습니다.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Part IV. Minor Islands in the Pacific/Minor Islands in the Japan Sea,
Foreign Office, Japanese Government
June 1947.
일본의 부속도서들 (1946.6)
일본이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섬들에 대해 일본 외무성이 제작한 홍보자료
이시원: 이것 보세요. 여기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섬으로 나와 있는데요.
정병준: 근대시기 일본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섬은 울릉도였습니다. 울릉도 & 독도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령이 명백한 섬, 쓰시마, 오키 이런 섬은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분쟁이 있거나 논쟁이 있어서 일본령으로 인정받고 싶은 섬의 목록에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시킨 거지요. 제가 이걸 보면서 정말 경악했습니다.
이시원: 저도 경악할 것 같네요. 정말 객관적인 정보라기보다 내가 갖고 싶은 섬 목록아니예요? 이건 Wish List 예요.
다니엘: 여기에 보니까 다케시마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The latter, also called Iso-take-shima, is rich in bamboo, fish etc (독도가 다케시마로 불리는 이유는 대나무와 물고기가 풍부해서다). 대나무가 많아서 다케시마 라고 불러요?
유동훈: 실제로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어요!
최원정: 대나무가 아예 없어요?
박상영: 실제로 가보지도 않은 것 아닌가요?
최원정: 竹島(대나무 섬) 이라면 말이 안되네~
다니엘: 이 부분도 이상한데, It should be noted that while there is a Korean name for none exists for the Liancourts Rocks and they are not shown on map in Korea (독도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고 한국 지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일본의 부속도서들).
이시원: 이거 완전 거짓말이다.
다니엘: 한국명 독도 이름이 없다면서~
이시원: 지도에도 없고 한국이 인지하지 못한 섬처럼 쓰여 있어요.
정병준: 왜곡되고 거짓된 정보가 일본 외무성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거쳐서 미국무부, 호주 정부, 영국 정부 이런 외국 정부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게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미국무부의 지리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게 되는 거죠.
최원정: (정병준 교수에 대해) 참으로 얼핏 봐도 꼼꼼하게 잘 만들었네요!
정병준: 한가지 말씀 드리자면 이건 미국립문서 보관소에서 제가 찾은 거구요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나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는 이런 자료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만들었지만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것이죠.
유동훈: 패전 직후에 일본 외무성에는 만명 정도의 외교관들이 있었대요. 그리고 인원을 70% 정도로 줄여서 3천명 정도가 남았다고 하는데 이 3천명이 영토를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서 전력투구를 했다고 하구요. 반면에 우리 나라(대한민국)은 당시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되어서 외무부 직원이 160명 있었다고 하구요. 3000 대 160,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났지요
박상영: 어떤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네요.
최원정: 일본은 패전 후에도 우리나라에 대해서 거짓 뉴스를 많이 흘렸잖아요. 미국을 등에 업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독도도 그런 맥락에서의 작전이었다고 의심이 가네요.
정병준: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 있던 제일 중요한 높은 지위가 주일 미정치고문이란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윌리엄 시볼드 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시볼드(1901~1980)-미국무부 주일정치고문,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이 사람이 미국무부에 이런 전문을 보냅니다. 리앙코르 럭(Liancourt Rocks)에 대해서 재고가 필요하다. Recommend reconsideration Liancourt Rocks (Takeshima)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요청합니다(미국 정부에 보낸 시볼드의 보고서(1949.11.14). 왜 재고가 필요하냐면 그 이전에 미국무부가 만든 대일평화조약 초안에는 이 섬이, 즉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된 것이고 타당성이 있다. Japan’s claim to these islands is old and appears valid. Security considerations might conceivably envisage weather and radar stations thereon.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된 것이고 타당성이 있다. 기상 관측기지나 레이더를 설치 할 수 있어 안보에 유리하다.”—미국 정부에 보낸 시볼드의 보고서(1949.11.14)—
이시원: 이거 계속 일본이 주장했던 거랑 똑 같잖아요?
정병준: 일치감이 있죠. 일본 외교가 한번 계획을 세우게 되면 그게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재현되는 거죠. 사실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7년부터 49년 까지는 독도가 리앙코르락이 한국령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윌리엄 시볼드가 개입하고 난 다음에는 일본령으로 표시가 되었구요.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바뀌게 되면서 최종 조약문에서는 독도가 빠지게 되는 겁니다.
유동훈: 시모다 다케소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글을 남겼어요. “나는 주일 정치 고문이었던 윌리엄 시볼드의 사무실을 늦은 밤 비밀리에 수없이 방문해 여러 차례 보고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자료가 충분히 전달돼 당연히 미국측이 참고했을 것이다.” 라고 회고 했습니다—(시모다 다케소 회고록 1984).
이시원: 시볼드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유동훈: 제가 듣기에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들었어요.
정병준: 일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해군장교였는데요. 일본에 어학장교로 파견되었는데 언어만 만난게 아니라 사랑을 만나서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사진에서 기모노를 입은 미국대표단 부인들). 저 사진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도쿄에 갔을 때 일본여자의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이 시볼드 부인입니다(6명 중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러니까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가서 대표단의 부인이 같이 따라가서 적국이었던 일본의 기모노를 같이 입고 사진을 찍은 겁니다.
박상영: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은 거잖아요. 사실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 귀빈들의 부인들이 한복을 입고 같이 사진 찍었다는 얘기는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최원정: 서양인들이 저 당시만 해도 일본에 대한 어떤 동경, 이런게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굉장히 일본을 좋아했다, 일본에 매료됐다는 증거자료인 것 같애요.
정병준: 시볼드가 진주만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주만 폭격 때에 2천명 이상의 수병이 죽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진주만 공습(1941.12.7)-미국 진주만 기지를 일본해군이 기습공격, 미군 약 2400명 사망). 이 부부가 끌어안고 펑펑 우는 거예요 (뉴스를 듣고 펑펑 운 윌리엄 시볼드).
최원정: 우리 어떻게 돼! 이제 당신 어떻게 돼!
정병준: 해군 출신이니까 우리 해군들이 불쌍하다 가엽다 이런 생각을 했을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을 하였느냐 아! 가여운 일본인! 전쟁의 참화에 근면 성실한 일본인들이 끌려들어간다 (시볼드 회고록, 1965년) 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경악을 했습니다.
박상영: 이건 감정이입을 넘어서 일본과 동일시하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시볼드가 한국에 대해서 평가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 대한 나의 인상은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을한 민족이다(시볼드 회고록 1965) 라고 기술했다고 하더라구요.
다니엘: 난 시볼드에 동의할 수 없어요! 한국 사람들이 흥이 많고 끼가 많고 정이 많고 잘 놀고 회식도 얼마나 잘 하는데!
박상영: 딴 건 몰라도 조용한 건 진짜 아녜요.
이시원: 시볼드가 굉장히 여러가지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데 혹시 스파이 아니었나요?
정병준: 그렇진 않구요. 사실은 1차대전 이후에 미국의 주류적인 분위기가 일본에 우호적이었습니다. 군인이나 학자나 다 일본에 공부하러 가서 일본에 매료되서 일본에 대한 대일정책을 세우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원자폭탄을 투하할 때도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는 이유가 있는 거죠. 교토나 나라 이런 데는 떨어뜨리면 안돼요. 왜, 여기는 문화적인 유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
최원정: 독도는 우리와 일본만의 분쟁인 줄 알았는데 이게 한국, 일본, 미국 간에 얼키고 설키고 복잡하네요. 다케시마의 날 아까 2월 25일 지정됐던 해가 2005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그걸 KBS 9시 뉴스에서 특종을 했거든요. 화면을 준비해 보왔습니다.
------------KBS 뉴스9/임장원, 최원정 아나운서------------------
최원정: (2005년) 2월 27일 일요일밤 KBS 9시 뉴스입니다.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확히 표시한 영국정부의 지도가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직전 유일하게 작성된 공식문서입니다.
임장원: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직전 영국정부가 작성한 공식지도입니다. 패전국 일본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선으로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The Territory under Japanese Sovereignty as defined in Art. I of Peace Treaty. 평화협정에 규정되는 일본의 영토.
동해 한 가운데 독도와 오키섬 사이에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어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지도를 미국에 보내 일본의 영토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정병준 교수: 독도가 일본 영토영역에서 배제된 한국령으로 묘사된 지도입니다.
최원정: 오! 교수님! 우리 한 날 15년전 KBS 9시 뉴스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네요.
정병준: 이게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하기 직전에 영국 외무성이 1951년에 이렇게 규정한다는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으면서 이걸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독도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한국정부나 학자들이 많이 연구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이런 것도 있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사실은 지도를 찾았는데 이 지도가 어디에 첨부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도 밑에 보면 F.O.라고 되어 있지요, Foreign Office=영국 외무성, 이거 딱 보고 이건 영국 외무성이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서를 찾아보니까 영국외무성이 만든 문서는 없어요. 그리고 더 샅샅이 찾아 보니까 “영국외무성이 만든 조약초안이 비밀로 분류되었다 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래 제가 영국 런던에 있는 후배한테 부탁을 해서 이 당시에 영국 외무성이 만든 조약초안을 찾아달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도는 미국에서 찾았고, 문서 조약초안은 영국에서 찾아서 두 개를 맞추어 보니까 아, 영국외무성이 대일평화조약초안을 만들고 그 부속지도로 만든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시원: 크로스체크를 통해서 밝혀내신 거에요?
정병준: 네, 네,
최원정: 그야말로 교수님이 해내신 겁니다.
이시원: (영국외무성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서) 진짜 감동적인 게 여기 독도가 딱 보여요.
정병준: 그렇게 표시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사실은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있고 한국령으로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혹시 이 자료를 일본에서 반박한다거나 어떤 반응을 보인 일은 없었나요?
정병준: 없었습니다.
최원정: 어떻게 반박을 해요?
정병준: 일본학자가 문서를 봤습니다. 문서를 보고 각주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문서는 영국문서 보관소에서 확인했고 지도는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확인했다. 그렇지만 지도는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자료이기 때문에 공개는 하지 않고 난 봤어 라고 각주에만 써 놨습니다.
최원정: 교수님이 만일 일본학자와 면대면 붙어서 이 논의를 하면 100% 이길 자신이 있으신거죠?
정병준: 학문의 세계에 100% 이긴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합리적이고 종합적인 의견을 꾸준하게 개진할 수 있는 자신은 있습니다.
다니엘: 이긴다고 해 주세요~
정병준: 영국정부가 이 싯점에서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이건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죠.
최원정: 당시에 우린 어떤 움직임이 있었나요? 일본은 팜플레도 찍어내고 그랬는데~
정병준: 한국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947년 한국은 당시 미군정 치하에 있었습니다. 남조선 과도정부가 만들어져서 民世 안재홍 선생이 민정장관이었습니다. (안재홍(1891~1965)-남조선 과도정부 민정장관, 독립운동가), 안재홍은 일제 시기에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보내신 분인데요. 이 분이 어떻게 했느냐 독도학술조사단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1947년에 독도학술조사단을 보내게 되는데요. (사진) 이 분이 민세 안재홍 선생입니다. 어떻게 보냈느냐 하면 공무원들을 보냅니다. 어떤 공무원들을 보냈느냐 이 분은 국사관 관장 신석호 라는 분입니다.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역사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임무를 맡았고요. (국사관 관장-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증거확보), 두번째는 지금의 외교부입니다.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을 보냅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독도 영유권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내는 겁니다. (외무처 일본과장-독도 영유권 해결방법 모색), 세번째는 문교부 편수사인 이봉수를 보냅니다. 왜, 교과서에 써야 되잖아요 (문교부 편수사-지리 교과서에 실을 정확한 방위, 좌표, 지형 파악), 방위좌표 이런 것들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고요. 그 다음에 수산국 기술사인 한기준이란 분도 같이 따라 가게 됩니다. 일본의 불법어로를 감시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가게 되는 거죠. (수산국 기술사-일본의 불법점거 실상파악).
이시원: 네 분이 누구 하나 뺄 수 없게 알차게 구성되어 있네요.
정병준: 그리고 여기 80 여명에 달하는 조선산악회 회원들이 가게 됩니다. 이 분들이 서울역에서 떠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1947.8.16). 굉장히 희귀한 사진입니다.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상북도 도청직원들도 포함되어 있고요. 경찰과 해안경비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민제 안재홍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에 의해서 미군정 치하였지만 한국 행정부의 주력이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파견된 것입니다.
이시원: 산악회가 보통 산악회가 아니네요.
유동훈: 산악회 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친목단체가 아니고요. 국토조사탐험단체입니다. 독도조사단이라고 말을 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미군정 시대니까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예민한 게 있었던 것 같애요.
정병준: 조선산악회 회원들은 역사학, 국어학, 사회과학, 동물학, 식물학, 광물학, 의학, 보도, 전기, 통신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다 따라가게 됩니다. 한국이 해방되고 난 다음에 국토조사를 갔는데 이 정도의 초엘리트들이 대규모로 파견된 것은 이게 처음이었습니다.
최원정: 이 분들의 면모를 보니까 사실 우리 영화에서 볼만한 정말 어벤져스 같은 총력을 가진 분들인데 딱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할 일을 위해 간 거예요. (식민지 시대부터 국토수호에 앞장선 조선산악회-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낸 최초의 독도조사단), 최초로 파견된 독도조사단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이 안에 있다고 합니다 (둥근 철제 뚜껑에 덮힌 용기등장). 이게 독도에서 발견한 뭘 것 같애요?
박상영: 독도 새우?
이시원: 독도에서만 피는 꽃?
최원정: 열어 볼게요. 아! 사진이 있었군요.
정병준: 서도 인근에서 강치 새끼 세 마리를 잡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윤병익 이라는 하는 분이 해부를 해서 이게 어떤 동물인가를 연구를 했구요. 그래서 가재다 이게 한국말로는 강치이고, 가재라는 글을 쓰신 바가 있습니다. 또 한국에만 살고 있다고 하는 나비의 종류를 당시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대만흰나비-독도에서 서식하는 나비). 이게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나비 종류라고 하는 것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이시원: 독도 나비인가요?
정병준: 네, 네,
최원정: 독도가 희귀한 동식물의 보고잖아요. 그 이후로 굉장히 많은 조사들이 이루어졌겠네요. 독도 새우가 없어서 좀 실망했지만~
정병준: 산악회 회원들이 간 이유가 또 있습니다. 부서진 암석이기 때문에 등반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전문등반가의 노하우도 필요했던 거죠. 이 분들이 첫날 제일 중요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시원: 뭘까요?
정병준: (독도에다 두개의 표지 말뚝을 꽂다) 朝鮮鬱陵島南面獨島 와 鬱陵島獨島學術調査隊 (Aug 20, 1947, Korea Alpine Association) 이라고 썼습니다.
최원정: 지금도 역시 사진으로 보고 계시는데 이 표말이 꽂혀졌다는게 소문으로만 돌았는데 이 사진을 직접 누가 발견하셨게요?
정병준: 47년에 이런 활동을 하신 분들이 있었고 그것이 잊혀졌다가 사실은 제가 재발견하게 된 거죠. 제가 만든 건 아니니까~
박상영: 재발견한 큰 공을 세우셨으니까~
이시원: 독도 수호령(?) 같은 분이시네요. 이렇게 중요한 자료들을 발견하셨는데~ 저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병준: 사실은 한국 사람들이 독도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47년에 민정장관 안재홍과 조선산악회와 한국의 학계 여러 엘리트들이 독도를 방문하고 나와서 그냥 끝난 게 아닙니다. 이분들이 이걸 가지고 일종의 보고회, 전람회 같은 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시작해서 대구를 거쳐서 부산을 거쳐서 울릉도 까지 가서 전람회가 끝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봤느냐, 약8만 5천명 가량이 와서 이걸 보았습니다.
박상영: 요즘 전시회도 8만명이면 초대박이 난건데 진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겠네요.
정병준: 많은 사람들이 독도와 울릉도의 존재, 그 가치의 중요성 이게 한국령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첫번째 계기가 된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예나 지금이나 독도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게 분명히 있었군요.
-----------------1948년 6월 8일, 의문의 폭격사건이 발생한다. 평화로운 독도 상공에 나타난 스무대의 B-29 폭격기는 독도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은 포탄에 맞아 숨졌고, 어부가 타고온 어선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그날 독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동훈: 언론에서는 당시 어민 14명이 숨지고 어선 10여쳑이 침몰했다(동아일보 1948.6.14)고, 밝혔는데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실제로는 사상자가 백여명 이상이라고 추산(한국외대 독도연구회 1995)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이게 사실이에요? 이런 얘기 처음 들어 보는데~
이시원: 1948년이면 그때 어떤 전쟁이 있었길래?
유동훈: 전쟁은 아니고요, 미군의 폭격연습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B-29, 도쿄를 대공습했던 폭격기가 450 킬로그램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고 합니다.
박상영: 미군 공군 사격장으로 이용됐던 매향리는 폭격으로 인해서 섬이 아예 사라질 정도라고 하는데~말이 폭격연습장이지 사실상 전쟁터를 방불케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왜, 여기서 폭격연습을 했어요?
정병준: 이유가 있습니다. 독도는 불행하게도 1947년 미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 1778호 (1947.9.16)-독도를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다). 그래서 오키나와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15공군 비행단이 폭격훈련을 했습니다.
이시원: 질문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폭격연습장으로 지정이 되었는데 왜 어부들이 근처에서 위험하게 어업을 했죠?
정병준: 당연히 어민들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금지명령은 시마네현과 일본 어민들에게만 내려졌습니다.
이시원: 우리나라 어부들에게는 안알려주었다는 거예요?
정병준: 안알려졌습니다.
다니엘: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박상영: 의도적인가요?
정병준: 폭격사건이 벌어졌을 때 죽고 다친 사람들은 다 한국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한미군 사령부가 맥아던 사령부에 항의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가 폭격연습장으로 사용된 것을 몰랐다. 그러니 2주전에 우리에게 통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
박상영: 백여명 사망자를 낼 정도면 진짜 무고한 사람이 많이 돌아가신 것인데~ 그리고 피해규모도 상당했을 것 같은데~ 혹시 그 이후에 미군에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긴 했나요?
정병준: 주한미군이 사건조사를 했구요.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관련된 비행사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구요. 그렇지만 피해를 입은 한국 어민들에게는 배상을 실제로 했습니다.
최원정: 어느 정도 규모로 배상이 이루어졌나요?
유동훈: 한 910만원 정도를 요청을 했는데 실제로 배상한 것은 630만원 정도, 3분의 2 정도 라고 하네요. 사실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지만 모든 사과와 책임, 배상은 모두 미군이 했습니다. 충분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군은 우리 정부에 대해서 사과하고 가장 불행한 유감스러운 사고라고 하면서 애도를 표합니다. “Most unfortunate and regrettable accident” 가장 불행한 유감스러운 사고 (Stars & Stripes-1948.6.17). 그리고 당연히 독도 폭격훈련도 중지가 되었구요.
이시원: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인들에게 통보룰 안한게 혹시 의도성이 있지는 않았나? 의심이 많아서요.
정병준: 의문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1947년 일본 외무성이 독도가 한국 이름도 없고 한국지도에도 안들어있다 라고 하는 팜플렛을 만들었구요. 그리고 나서 47년 9월에는 독도가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독도가 폭격연습장이 되었는지는 지금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분들과 인터뷰를 위해서 문의를 해봤지만 그거와 관련된 회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최원정: 역시 많은 미스터리를 남긴 사건인데 교수님께서 또 열심히 발굴을 위해서 애써 주셔야겠네요.
정병준: 네~
최원정: 할 일이 많으신 거야
정병준: 한국 어민들이 죽고 다친 것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태풍이나 대재난 때 같은 동포를 위로하고 성금을 모우고 성원하는 것처럼 그런 전국민적인 행사가 열렸습니다. 독도폭격사건이 있게 되자 모든 신문들이 독도가 어떤 곳인지 왜 중요한 지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국민적으로 독도에 대한 인식이 재고된 것이죠.
최원정: 희생이 헛되지않게 그래도 독도는 우리가 지켜야 된다. 어떤 전국민적인 각성의 계기는 되었단 말씀이죠.
정병준: 그렇죠, 그래서 1948년에 제헌헌법을 만들 때도 사실은 독도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됩니다(1948년 제헌헌법제정 당시-독도문제논의). 국회의원들이 논의하는 과정에서 독도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외적의 침략이나 침범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거 국유로 해야된다 (제헌헌법 제84조-광물, 수산자원,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원력은 국유로 한다). 이런 논의가 일어났구요. 그 조항이 통과되었습니다. 우리 제헌 헌법에 독도수호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상영: 그런 계기가 되어진 중요한 사건이겠네요.
정병준: 그래서 60년에 독도에 위령비를 세웁니다(독도조난어민 위령비(1950)-정부가 독도 폭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위령비). 조난당한 한국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세우는 거죠.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일본신문에는 보도돼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은 어떠한 관심이나 이의제기나 항의를 한 적도 없습니다.
유동훈: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 생각했으면 분명히 뭐라고 항의를 하고 했을텐데~
최원정: 그때(1950년)는 아무 소리도 안하더니 왜 갑자기 지금 이래, 우리가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근거네요.
다니엘: 전 개인적으로 오늘 많은 분들이 이 방송을 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유는 한국 사람들은 항상 당연히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많이들 주장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우리 땅이었으니까 왜 국제재판소로 가지 않는지는 다 이유가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공부하고 또 외국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야지 일본의 주장이 말이 안되는 주장이라고 이해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시원: 한번쯤은 정말 제대로 판결을 해보면 괜찮을 것 같거든요.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 않는 거죠?
정병준: 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기에 그렇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다고 하는 것은 분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고 하는 것은 일본의 오래된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은 북방 섬에 대한 영토 주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고 하는 것은 한국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박상영: 지금 어떻게 보면 최선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네요.
이시원: 일본은 지금 낚시질 하고 있네요.
장병준: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한국인들이 걸려 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시원: 저는 영화 곡성이 생각나요. 곡성, 미끼를 물어보는 것이오. 그렇게 뭔가 쳐놓고서 그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애요.
유동훈: 어떤 역사학자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남이 훔쳐간 거를 겨우 찾아와서 내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걸 다시 꺼내서 누구 건가 확인해 보자 라는 것과 같다는 거죠.
다니엘: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요. 국제사법재판소에 오래된 일본 판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정병준: 그런 얘기도 많이 하고 있고, 재판관들도 있고, 그러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한국이 당연히 이기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 국가주권 영토에 관한 문제를 제3자 한테 맡긴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시원: 마지막 소감이기도 하고 부탁의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독도 수호령, 정병준 교수님이라고 말을 했는데 아직 독도에 얼킨 문제들이 많잖아요. 오래 오래 사시면서 이걸 밝히셔서 수호신으로서 등극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최원정: 어려움 있으면 불러주세요. 우리가 어벤져스 처럼 가겠습니다.
박상영: 저 타자도 잘 치거든요.
정병준: 독도를 어떻게 한국이 지켰냐 하면 47년 이래 한국의 정부, 각 기관들, 언론, 학자, 국민들이 똘똘 뭉쳐서, 주체들이 주먹을 꼭 쥐고 사실은 대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반면에 일본에서는 일본 외무성이나 시네마현과 같은 작은 주체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이고요. 그래서 해방 이후에 독도 라는 것은 한국독립의 물리적인 상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해방 후 한국 현대사 속에서 독도가 우리 영토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우리가 BTS 와 봉준호 감독을 배출한 나라입니다. 정말 민관이 한 마음이 돼서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될 것 같애요.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왜 나만해~~ 하~하~ (일동) 독도는 우리땅~~~ 자, 독도는 우리 땅~~땅~~땅~~땅~~ 외치면서 오늘 역사저널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1 역사저널 그날 256회 2020.3.10.화. 한국영토 독도, 현대사발굴! 독도 1947에서 정리).
① 서론: 일본은 1904.2월에 러일전쟁을 유발, 1905년 전쟁 중에 조선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 외교권을 빼앗고, 동년 1.28에 조선의 독도를 강제로 일본에 편입시켰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한국이 해방되자 당연히 독도는 우리 땅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지금까지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가 역사적 국제적으로 한국 땅이라는 증거는 아래와 같이 많다.
② 본론(증거들):
첫번째, 세종실록지리지 권153(1454)-독도를 조선시대부터 인식, 세종실록에도 섬과 섬 사이가 가까워서 날씨가 좋으면 독도가 보인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게 1832년에 독일학자 율리우스 클라프로트가 제작한 독일지도에 분명 나타난다(다니엘 린데만). Carte des Trois Royaumes (1832), 조선반도와 울릉도와 독도는 같은 노란 색깔로, 일본과 오키섬, 쓰시마는 녹색으로 표시,
두번째, 대한제국칙령 제41호(1900.10.25)-울릉도를 울도군이라 하고 관할구역은 울릉도 죽도 석도로 한다. 石島가 뭐냐 돌섬, 석도=돌섬, 당시에 울릉도에는 의외로 전라도 어민들이 많았다. 전라도 방언을 보면 돌을 독으로 발음, 그래서 “돌섬-돌도(석도)-독도”가 한자로 石島가 된다. 일본이 영유권을 말하기 전에 1900년 칙령 41호로 우리가 먼저 독도를 관할했다.
세번째, 1951년 영국정부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직전에 작성한 공식지도에 패전국 일본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선으로 명확하게 표시하였다. The Territory under Japanese Sovereignty as defined in Art. I of Peace Treaty. 평화협정에 규정되는 일본의 영토. 동해 한 가운데 독도와 오키섬 사이에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정확하게 나타내었다. 영국 정부는 이 지도를 미국에 보내 일본의 영토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도가 일본 영토영역에서 배제되고 한국령으로 표시된 지도다. 영국정부가 제작한 문서를 일본학자가 봤다(정병준 교수). 보고 각주에다 이렇게 썼다. 문서는 영국문서 보관소에서 확인했고, 지도는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확인했다. 그렇지만 지도는 소개하지 않았다. 왜,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네번째,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회의 때 독도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고 한국 지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일본은 완전 거짓말을 했다. 왜곡되고 거짓된 정보가 일본 외무성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거쳐서 미국무부, 호주 정부, 영국 정부 이런 외국 정부 손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이게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미국무부의 지리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현재 일본은 이런 자료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나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만들었지만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시기 일본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섬은 울릉도 & 독도였다. 일본령이 명백한 섬에, 예를들어 쓰시마, 오키 이런 섬은 일본섬 목록엔 없고, 분쟁이 있거나 논쟁이 있어서 일본령으로 인정받고 싶은 섬의 목록에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시켰다. 정말 경악했다,
다섯번째, 일본정부는 독도와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도해면허를 발행해주었다. 渡海免許는 일본 어민이 외국에서 항해할 때 발부받는 조업허가서. 1900년초 일본은 독도를 해외로 인식했다. 2020 도쿄올림픽 공식홈페이지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여섯번째, 前近代 일본 자료에 독도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자료는 없다. 다 울릉도와 독도다. 1904년 러일전쟁전 일본이 노렸던 건 사실 울릉도인데 울릉도는 너무 명확하게 조선(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독도만 떼어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고, 그걸 사실 국제법적으로 공인을 받기 위해서 1905년 2월 25일 내각 관보에 게재 하고, 러일전쟁 중에 편입시킨 사실을 지방신문에 공고했다. 그리고 1년 지나 1906년 2월 24일 시네마현 관리들이 울릉도를 방문, 울릉도 군수 심흥택에게 다케시마는 우리 거예요 라고 해서 경악하게 했다. 울릉도 군수가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1906년이면 1905년에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이미 강탈했고, 조선에다 통감부를 두었다. 조선이 일본지배를 받는 보호통치 하에 있었다.
일곱번째,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 제일 높은 지위는 주일미정치고문, 그 자리에, 윌리엄 시볼드가 있었다. 이 사람이 미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리앙코르 럭(Liancourt Rocks)에 대해서 재고가 필요하다(1949.11.14). 왜 재고가 필요하냐면 그 이전에 미국무부가 만든 대일평화조약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볼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된 것이고 타당성이 있다. 기상 관측기지나 레이더를 설치 할 수 있어 안보에 유리하다. 사실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7년부터 49년 까지는 독도(리앙코르 럭)가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윌리엄 시볼드가 개입하고 난 다음에 일본령으로 표시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바뀌게 되면서 최종 조약문에서는 독도가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시볼드의 부인이 일본 여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모다 다케소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의 글에, “나는 주일 정치 고문이었던 윌리엄 시볼드의 사무실을 늦은 밤 비밀리에 수없이 방문해 여러 차례 보고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자료가 충분히 전달돼 당연히 미국측이 참고했을 것이다.” 라고 회고 했다(1984년).
여덜번째, 1945.8.15.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광복하면서 당연히 독도가 우리 땅이 됐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샌프란시스코 회의(1951.9)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회의였다. 조약 2조에 보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청원권을 포기한다. 거기에 독도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홉번째, 1948년 6월 8일, 독도에 의문의 폭격사건이 발생한다. 스무대의 B-29 폭격기는 독도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 14명이 숨졌고 어선 10여척이 포탄에 맞아 침몰했다 (동아일보 1948.6.14),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실제로는 사상자가 백여명 이상으로 추산(한국외대 독도연구회 1995)하고 있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맥아더 사령부에 항의했고, 독도가 폭격연습장으로 사용된 것을 몰랐고 2주전에 우리에게 통보도 없었다. 주한미군사가 사건조사를 했고, 관련된 비행사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피해를 입은 한국 어민들에게는 910만원 정도를 요청을 했는데 실제로 630만원 정도 배상받았다고 한다. 배후에 일본이 있었지만 모든 사과와 책임, 배상은 미군이 했다. 충분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군은 우리 정부에 대해서 사과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당연히 독도 폭격훈련도 중지되었다.
열번째, 독도폭격사건이 있게 되자 모든 신문들이 독도가 어떤 곳인지 왜 중요한지 기사를 쓰게 되었다. 전국민적으로 독도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었다. 희생이 헛되지않게 독도는 우리가 지켜야 된다는 전국민적인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1948년에 제헌헌법을 만들 때도 사실은 독도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외적의 침략이나 침범이 있을 경우에 독도수호의 의지가 담겼다. 60년에 독도 폭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일본신문에는 보도돼지 않았다. 일본은 어떠한 관심이나 이의제기나 항의를 한 적도 없다.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 생각했으면 분명히 뭐라고 항의를 했어야했다, 그때는 아무 소리도 안하더니 최근에 갑자기 지금 우리의 독도 방문이나 군사훈련에 우리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열한번째,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전략상 독도를 탐냈고 러일 중에 통감부 통치하에 독도를 일본에 강제편입한 행위는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처럼 세계 인류 양심상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
③ 결론: 해방 후 한국 사람들은 항상 독도가 당연히 한국땅이라고 많이들 주장하고 있는데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하면 못한다. 그런 부분을 우리가 공부하고 또 외국 사람들한테 일본의 주장은 말이 안되는 주장이라고 많이 알려야 한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다고 하는 것은 분쟁을 인정하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고 하는 것은 일본의 오래된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은 북방 섬에 대한 영토 주권에 대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즉,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고 하는 것은 한국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글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④ 일본은 독도에 대나무가 풍부해서 다케시마(竹島)로 부른다고 하는데 실제로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다. 대나무가 아예 없다. 일본정부는 거짓말을 그만하고 시네마현과 아베는 정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