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 황선영
주연이 결혼식에 안 가겠다고 한다. 이번에 확실하냐고 물었다. 마음이 갈대인 엄마. 왔다, 갔다. 이럴까, 저럴까. 결정 장애라는 병이 있다던데 그건 것 같다. 생각은 혼자 조용히 하고 최종만 말해 주면 좋겠는데 마음이 바뀔 때마다 전화를 해대니 싫다. 도대체 몇 번 째인지 모르겠다. 결혼식 날짜가 나온 봄부터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 크게 아프지도 않고 사무가 바쁜 사람도 아니면서 큰이모가 조카 결혼식에 안 간다는 게 남들 보기 민망도 하지만 가지 못할 사연을 이해한다.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아는데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으며 축의금을 막내 이모 계좌로 보내라고 했다. 엄마 통장이 내게 있다. 일 보러 읍내까지 나가는 교통이 좋지 않고 은행을 핸드폰 안에 넣는다는 건 못 믿을 일이라 나를 은행창구 직원으로 삼았다. 이름 모를 이에게 계좌 이체를 하고 공과금이 잘 빠졌는지 확인한다. 가끔 홈쇼핑 물건을 주문해 주고. 예금 잔고를 생각하면 축의금이 좀 많다.
국화가 그랬다. 세상에 당연한 게 없다고,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고. 읽던 책이나 설교에서 또 강연 프로그램에서 듣기도 했는데 의미 없는 말이라 그냥 흘렸다. 딸을 잃을뻔한 고통이 있는 국화가 한 이야기라 더 와닿았을까? 모르겠다. 무슨 큰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잠깐 머리가 멍했고 뒤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다.'라는 문장은 뇌와 심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과 행동에 거름망이 되었다. 당연한 일이 무슨 이유로 당연한가?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 먹고 학교 가고 출근하고 모든 게 자동 재생되고 있을 때, 무심히 튼 텔레비전에서 누구는 교통사고로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일하다 죽었다는가 뉴스가 나왔다. 우리는 왜 아무 일 없이 여기에 있을까? 살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게 감격스러워 밥 먹으라고 식구들을 부르는데 목이 메었다. 방에서 나오는 남편 차림이 오늘따라 추레하다. 가을 잠바가 많이 낡은 탓으로. 둘째가 태어난 2009년 5월에 산 것이다. 봄에도 가을에도 입을 수 있게 무난한 베이지 색으로 골랐던 기억이 난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잠바 하나 사 입을 여유가 없는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우리는 왜 가난한가를 논하자면 이건 또 너무 나열할 게 많아 너무 구질구질하다. 이러나저러나 말로 다 못할 것들 뿐이구나.
무슨 게임을 하는지 양손을 써가며 핸드폰 삼매경 중인 남편을 불렀다. "자기야, 롯데슈퍼 같이 가요. 생수 사야 해서. 농협 쪽으로 가자." 대답이 없다. 귀가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 근 반백 년을 살았으니 어디 하나 나빠진 게 이상할 건 아니지. 이만큼 살았다고 모든 면에 어른은 아니다. 아직도 중학생과 같은 자세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트 좀 같이 가자고! 무거워서 혼자 못 들어!" 귀 가까이에서 크게 말했더니 들렸나 보다. 핸드폰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슬리퍼를 신고 중문을 지나 현관을 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에 와서야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다.
"어디 간다고?"
"농협이랑 마트요."
"농협은 왜 가?"
"엄마가 주연이 결혼식 못 간다고 축의금 막내 이모한테 보내래."
"아니 왜 조카 결혼을 안 가셔?"
"왜, 사정있으면 못 갈 수도 있지. 조카 결혼식 참석이 법이야?"
"당연하지. 집안에 이보다 큰일이 없잖아."
"당연? 지금 당연이라고 그랬어? 뭐가, 왜 당연한지 설명해 봐."
"그럼, 무슨 중한 일도 없으면서 조카 결혼식에 안 간다는 게 말이 돼?"
"자기가 뭘 안다고 단정해. 그리고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
"있지 왜 없어!"
"오호, 그래 알았어. 그럼 좀 나열해 볼까? 자기는 당연한 걸 못 하는 게 수십 가지도 넘거든!"
"또 시작이네. 됐어 됐어."
남편은 나를 앞서 빠르게 앞으로 가 버렸다. 울면 지는 건데 다 하지 못한 말이 억울해서 그러나 구저분해서 늘어놓을 수 없는 말들이라 서럽다. '자기야, 세계 평화가 꿈인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세상 모든 집안이 자기네처럼 화목한 건 아니야.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고. 장례식장에서 땅 한 평 가지고 엄마랑 둘째 이모랑 피 튀기게 싸우는 거 봤지? 우린 그래. 아직 문제가 정리된 것도 아닌데 웃으면서 얼굴 보기가 쉽겠어. 괜한 노파심이지. 좋은 날 분위기 망칠까 걱정되나 봐. 둘째 이모는 당연히 올 거니까 엄마가 피해 주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이모들은 다 남편 옆에 세우고 있는데 아무리 나이 들었어도 과부인 신세가 좀 초라하지 않겠어. 엄마도 낼모레 70이야. 그 복잡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닐 생각하면 머리도 무겁지. 결혼식이 저녁 다 되어서라는데 그러면 하룻밤 어디서 자야잖아. 왔다 갔다 차비에, 옷 한벌 번듯한 게 없으니 사야 하고 장성한 조카들 결혼해서 조무래기들도 여럿인데 얼마라도 쥐어줘야 맘이 편할 테고. 축의금도 섭섭지 않게 하려면 도대체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 거야. 엄마 통장 좀 봐봐.'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하려면 이런 너저분한 사연을 늘어 놀을 수밖에 없겠어서 나는 입을 앙다물고 콧구멍을 벌렁이며 힘차게 걸었다.
첫댓글 그래요.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는 것도 많은데요.
엄마는 누구보다 당신 마음 잘 헤아리는 딸이 있어 좋으시겠네요.
우리 엄마가 선생님 댓글을 본다면 코웃음을 칠 텐데. 알지 못해 다행입니다.
봄부터 조카 결혼식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신 어머니의 심정 먹먹하네요.
어머니의 일상이 늘 평온하고 건강하기를 기대합니다.
아, 저는 선생님처럼 생각은 못했는데
그렇네요. 자꾸 전화와서 귀찮기만 했거든요.
당연한 게 아닌 게 많다는 걸 배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사한 게 넘치네요.
날마다 감사합시다!
엄마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도 이해는 해요. 전화를 받아 주기 힘들어서 그렇지. 하하.
집집마다 사는 이야기 비슷한가 봅니다. 어머니 가슴에 낙엽이 내리겠습니다. 그래도 황선생님 계셔서 많이 위안이 되시겠어요.
우리 엄마가 컴퓨터를 못 해서 참 다행입니다. 아무 위안도 되어 주지 못한답니다.
소재로만 이용해 먹는 것 같아
가책을 느낍니다. 하하하.
아무리 남편이라도 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한 일 중 하나가 친정 식구들의 안타까운 삶이더라고요. 자존심이 발동할 때, 코만 벌렁벌렁, 공감했어요.
어머나,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 문단 엄청나게 머리 썼거든요.
스스로 되게 흡족했는데
벌렁벌렁을 알아주시니 더 감격스럽습니다.
늘 듣던 '당연하지'가 선생님을 만나 철학의 반열에 올랐네요. 하하. 마음에 콕 박히는 글입니다.
와, 멋있는 댓글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아버지가 철학을 엄청 싫어하세요. 다 개똥같은 소리라고.
나 이러는 줄 알면 혼나겠네요. 크크크.
남들은 당연하게 생각해도 나에겐 그렇지 못한 일이 한, 두개 쯤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잘 챙기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친정 식구들이 모두 마음놓고 지내실 거예요.
한, 두개밖에 없으시다니.
역시.
맞아요. 사람 다 다르죠.
내 당연과 니 당연이 달라달라.
세상 일은 안 풀려도 엄마를 이렇게 깊이 이해해 주는 딸이 있으니 엄마는 행복할 겁니다.
부디 제발
그렇다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티키타카 하는 황선생님과 엄마, 선생님과
남편의 대화에서 당연한 우리의 일상을 봅니다. 다른 말로는 삶을 대하는 우리들의 찐 얼굴이랄까요?
매번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