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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
0. 위치 : 강원 속초시 강현면, 인제군 시화면, 고성군 토성면 0. 코스 : 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오세암-백담사-용대리 (하행)
새벽 3시 33분 미시령(767m)은 적막 속에 가랑비로 촉촉이 젖어들다가 등산객의 부산한 몸놀림에 부스스 눈을 뜬다. 고개 북쪽은 금강산 권역이고 남쪽은 설악산 권역으로 통한다. 왼쪽 시작지점에 키보다도 훨씬 높게 둘러쳐진 철조망을 잽싸게 통과해야 한다. 철조망 기둥을 꽉 잡고 아슬아슬 넘어야 한다. 옆은 보지 마라. 수십 길 낭떠러지 절개지로 현기증이라도 도질지 모른다. 당황하다가 옷이 찢기고 팔다리가 찢길지도 모른다. 산길은 잡풀로 우거져 어디가 길인지 헤집고 나아가야 한다. 처음 미시령에 섰을 대는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하였는데 비옷을 걸치고 숲속을 올라가려니 바람은 막히고 한증막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 30분쯤을 바삐 오르다가 비옷을 벗어버린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게 아니다. 이렇게 시원하고 가뿐할 줄이야. 다행히 내리던 비는 주춤거린다. 숲속을 벗어나나 싶더니 이제는 아예 돌너덜이다. 상상을 초월할 엄청난 돌무더기이다.
거대한 바위가 산자락을 온통 뒤덮고 있는데 두 발만으로는 도저히 걸어 지나갈 수가 없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때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두 팔까지 동원하여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때로는 몸의 중심을 잡고 어둠 속에서 건너뛰어야 한다. 어디가 길인지조차 막연한데 그 넓은 너덜지대에 밧줄을 늘이고 형광막대기를 일정 간격으로 세워놓아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마저 한순간에 잃고 헤매기도 한다. 희미한 새벽녘에 바위는 마치 눈이 내려 눈덩이나 어름덩이로 보인다. 황철북봉(1319봉)에 힘겹게 오른다. 새벽 5시가 넘고 온천지가 환하게 밝았을 시간인데도 짙은 안개로 아직껏 어둠침침하다. 쉴 틈도 없이 산행은 이어지고 좀은 완만한 숲속인가 싶더니 다시 너덜을 거쳐 황철봉(1381m)에 선다. 그러나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다만 <천연보호구역>이란 자그마한 석조기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큰 노여움이라도 산걸까. 바람은 어찌나 드세게 몰아치는지 몸뚱이가 휘청거린다. 이리 휘청 쏠리고 저리 휘청 쏠리다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아예 털썩 주저 않거나 바위를 끌어안기도 한다. 날이 좋으면 이 많은 바위들이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주위가 온통 누런빛을 발하면서 황철봉(黃鐵峰)이라 불리는 것은 아닌지 싶다. 그만큼 바위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게다. 때문인가 너덜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없다. 오르막이 있으니 내려가야 한다. 거대한 너덜지대로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다. 그러나 누천 년 오랜 세월 자연의 검증을 받았기에 어느 바위 하나 제 마음대로 덜컹거리거나 굴러 내리지 않는다. 서로 모서리를 맞물고 떠받치고 있기에 아주 견고해 보인다. 그것만이 저 혼자가 아닌 주변의 모두가 고스란히 제 형태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해안 방파제 삼발이 같은 크고 작은 틈새에 빠지거나 끼이지 않도록 잘 건너뛰어야 한다.
이처럼 삭은 이빨 건들거리듯 하지 않기에 그나마 안심하고 오르내린다. 그래도 빗물에 바위들은 이끼(바위옷)가 물기를 머금어 다소 미끄럽다. 하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이 있다. 저희끼리 서로 내통하고 좀은 어수룩한 한 녀석만 만만하게 보고 물 먹이는 것이다. 멍청하게 있다가 십중팔구는 그대로 당하게 마련이다. 너덜에 바람이 분다. 그도 태풍에 못지않은 강풍으로 몸이 밀려 기우뚱거리다 그대로 날려갈 것 같이 세차다. 계곡의 나무들은 서로 키 재기하듯 다투며 하늘을 떠받들기라도 하는 양 마음껏 몸매를 뽐내고 있는데 능선에 혹간 있는 나무는 아예 납작 엎드리듯이 하였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서둘지도 망설이지도 마라. 호랑이굴에 가서도 정신만은 똑바로 해야 한다. 설마하니 바위까지야 어쩌랴. 바위를 끌어안듯 낮추거나 잠시 바위가 되어라. 바람이 세다한들 바위까지야 감히 날려버릴까. 그나마 훤하게 밝아서 다행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발걸음도 가뿐가뿐하니 그저 좋기만 한데 나쁜 날은 모두가 귀찮은데다 예상 외로 아주 힘들게 한다. 그만큼 마음가짐에서 많은 변화를 불러온다. 오늘은 과히 컨디션이 좋지 않다. 서재에서 에어컨을 켜놓고 자다가 감기들은 데다 모임에서 과음하고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잠까지 설쳤기 때문일 것이다. 발걸음이 아주 무겁다. 그러나 산은 함께 할 뿐 어차피 내가 가야한다.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황철봉에서 내려서는 대간은 가파르고 험난한 너덜지대다. 더 높았을 봉우리가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닌지 더 높이 쌓으려고 준비하였던 바위무더기는 아니었는지 그 형성과정이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저 태고의 신비와 정적을 품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 아직도 못다 꾼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깨울 사람도 없지만 깨워도 선뜻 일어나지를 않을 게다. 너덜지대는 자칫 발자국의 흔적마저 놓치고 식별할 수 없어 헤매기 일쑤다.
큰 산은 반드시 매듭이 있다. 고개(재. 령. 치)가 있어 안부를 만들며 다음 산(봉)을 준비한다. 하나의 봉우리를 고개에서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고 올라가며 정상에서는 고개를 내리깔고 내려다보며 내려간다. 그렇게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 것이 산행으로 저항령(1100m)에 내려선다. 왼쪽은 신흥사와 설악동의 저항령계곡 이고 오른쪽은 백담사 길이다. 다시 오름길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너덜지대가 나온다. 그러나 바위들이 다소 작아졌다.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본다. 안개구름이 걷히고 황철봉의 절벽 일부가 나타나며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 오른쪽 너머로 속초 시내가 보이며 시계가 밝아진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1250봉에 오르니 바람은 여전하다. 아마 황철남봉 쯤이 아닐까 가늠해 본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물어도 모른다고 할 터이니 이런 때 안내판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바위야 너는 알겠지?
단지 거대한 바위덩어리들만이 온갖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더위를 식히며 즐기고 있는 듯싶다. 너머 길목에 큰 고사목 한 그루가 건드렁 거린다. 우지직 넘어지는 것은 아닌지 지레 겁이 난다. 살점은 깎이고 골조만 남은 능선을 왼쪽에 끼고 우회하며 오르내린다. 울산바위가 위용을 자랑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중 하나가 될 뻔했던 바위였는데 그만 발걸음이 너무 늦어 외설악 중턱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너덜지대 직전에 울산바위삼거리가 있는데 안개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 이곳에서 겨우 본다. 기슭에 전망 좋은 자리이지 싶으나 바람모지로 오랜 세월 서있던 소나무가 죽고 끝내는 가죽마저 벗겨졌다. 아직도 죽음을 거부하며 쟁쟁한 양 싶은데 온 몸뚱이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마치 힘줄이라도 솟구치듯 툭툭 불거져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내공을 키워갔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던 삶이었지 싶다.
다시 한 번 너덜지대를 오르면서 1327m봉을 거쳐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마등령 정상이다. 공룡능선 구간과 겹쳤으니 대간길은 완성된 셈이다. 거리에 비해 너덜지대가 많다 보니 5시간 30분이나 지났다. 다시 가랑비가 내리며 시계는 불량하다. 그래도 볼 만큼은 봤으니 아쉬움일랑 툭툭 털어버리자. 왼쪽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비선대 길이다. 조금 더 내려가서 마등령이다. 지난날 그녀석인가 토종다람쥐가 그냥 반갑기만 하다. 오른쪽 오세암 1.3km로 영시암을 거쳐서 백담사(7.8km)로 하산한다. 가파른 돌계단으로 감촉이 좋을 리 없다. 고아가 된 어린 조카와 승려 삼촌 간에 애환이 서려있는 오세암에서 물 한 구기 마시고 능선에 올라서니 왼쪽으로 내설악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만경대다. 영시암으로 가는 길은 능선의 바위군과는 달리 서너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그를 추종하는 듯 큰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며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영시암을 지나 백담사로 가는 길은 왼쪽 수렴동계곡을 따라간다. 봉정암을 찾는 불자들이 가랑비 속에도 우의를 걸치고 줄을 잇는다. 언제 그곳까지 가려나 싶지만 종교적 의지가 있지 않는가 싶다. 문득 하나의 나무가 되고 한줄기 물이 되고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구름이요 한 줌 바람이었다가 때로는 가랑비에 목을 축이고 살랑살랑 나부끼며 오가는 이를 묵묵히 바라보는 한 송이 산구절초로 호젓하게 미소를 머금고 싶어진다. 백담사에는 구석구석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숨결이 남아있다. 내주는 가을의 문턱인 입추이고 칠석이다. 또한 삼복의 끝자락인 말복이다. 이제 더위도 한 고비 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가을로 이어져 결실의 준비로 초목들은 더 치열하게 몸부림을 칠 것이다. 오늘 산행은 태풍에 버금갈 바람과 숱한 너덜과 안개와 구름에 간간이 가랑비와 함께 했다. 덕분에 무더위를 날려버리는 피서산행이 되었고 용대리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 2008년 08월 01일~02일 무박 8시간 30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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