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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 너머학교
2020.06.10.
1장 시대의 ‘우상’을 무너뜨린 선각자
*현대문명의 경고등, 『작은 것이 아름답다』
-두 세상 이야기
두바이 : 두바이가 속한 아랍에미리트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부자가 된 나라. 두바이는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초대형 건설과 개발 사업 계획을 내세워 외국의 뭉칫돈을 끌어들였다.
깜짝 변신을 ‘사막의 기적’이나 ‘꿈의 낙원’이라는 찬사가 2008년 금음위기가 온 세계를 덮쳤을 때 두바이에 투자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만큼 토대가 취약하고 건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화려하게 꾸며진 ‘멋진 신세계’가 알고 보니 한낱 ‘사막의 신기루’이자 껍데기만 그럴싸한 ‘모래성’일 뿐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두바이 전체 인구 중 외국인 비율이 무려 80퍼센트(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피눈물로 얼룩진 ‘노예 노동’이었다. 일사병사망자가 한 해 900명이 될 때도 있었다. 약자를 극도로 학대하고 착취하는 곳이 곧 두바이다.(p.15-16) ->경제성장, 개발, 물질의 풍요 등을 지상 목표로 삼아 거칠게 직진으로만 내달리는 지금의 주류 세상이 드리우는 어둡고도 불길한 ‘그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크고 높고 빠른 것에 대한 끝없는 욕망.19
가비오타스(남미 콜롬비아 적도 부근의 사막 같은 사바나 지역에 있는 공동체마을-200여명)
새로운 대안을 찾은 ‘희망의 땅’, 자연 속에서 평화롭고 소박하게 사는 것, 서구 모델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뿌리내리고자 하는 곳의 풍토에 맞게 나름의 독자적인 사회를 세우겠다는 꿈을 품음. 자기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막에 대해서도 쓸모없는 모래땅이 아니라 ‘다른 흙’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지역의 환경과 조건에 잘 어울리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갖가지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 냈다.
적도의 바람을 에너지로 바꿔 주는 풍차, 소형 수력발전기, 아이들의 시소를 용해 만든 효율 높은 펌프, 물속 세균을 자동으로 없애 주는 태양열주전자,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프레온 가스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태양열 냉장고, 태양열로 일처리를 하는 주방, 옥상 농장 등이 대표작이다. 화석연료인 석유 대신 태양 에너지를 사용. 메마른 풀로 뒤덮이고 더러운 물이 흐르던 황무지에 거대한 열대 숲도 일구어 오늘날 콜롬비아에서 가장 넓은 조림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로 울창해졌다.(p.17-18)
->흐름에 맞서 인간적인 연대와 협동, 지속 가능한 문명과 삶, 자연과의 조화 등을 핵심 원리로 삼는 새로운 대안 사회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건 작고 낮고 느린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19
그렇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어떠할까요?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과 적성, 그리고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일한다. 직업, 재산, 출신, 나이, 성별 등을 비롯해 어떤 구실로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일군 주역인 파올로 루가리 : “계속 꿈꾸어야 합니다. 만약 꿈을 꾸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잠들어 있는 겁니다.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입니다.”(p.18)
연대와 협동의 인간관계, 지속가능한 사회경제 시스템과 과학기술, 자연 파괴와 에너지 낭비를 일삼지 않는 생태적 생활방식 등이야말로 이 지구와 인류가 참된 평화와 안녕을 이룰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이 슈마허 주장의 고갱이다.(p.20)
이 책은 사람과 자연을 모두 위태로운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산업문명과 기술주의 사회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성찰한다. 아울러 ‘작은 것’과 인간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안 경제와 과학기술에 대한 구상을 제시한다.(p.21)
‘작은 것’의 큰 힘 “환경 문제는 환경 문제가 아니고 환경운동은 환경운동이 아니다.” 자연 보전 차원을 넘어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 지속 가능성 등과 같은 생태적 원리와 가치를 바탕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새롭게 재구성하자는 게 바로 생태주의다.
(p.22-23)
이 책이 나온 1973년을 전후한 때는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1962년에 나온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이 살충제 같은 화학물질이 일으키는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충격적으로 일깨웠다.
1972년 국제 연구단체인 로마클럽이 펴낸 환경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무분별한 산업화가 낳을 지구 자원의 고갈을 경고. ‘세계 환경의 날’ 선포(6월5일) :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에서 “환경 파괴가 더 심해진다면 인류의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한 것도 1972년이다. (p.24)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는 ‘인문적 지혜’가 듬뿍 담겨 있다. 현대 물질문명의 자기 파괴적인 성장과 기술 논리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참된 인간’과 그런 인간을 기르는 인문학에 있다는 슈마허의 굳은 신념이 돋보이게 함. 환경의 고전이자 경제 비평서, 문명과 인간에 관한 사유가 드넓게 펼쳐지는 문명 담론서이자 인문서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지적 여정이 알려 준 것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벌어지던 와중에 만난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사람이 만든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과 사상을 말함. 크게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정치경제학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려면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p.29-30)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면서 슈마허는, 경제란 그 자체로서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경제학 또한 보다 좋은 세상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더욱 가다듬었다.(p.30)
경제학과 생태주의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슈마허는 서서히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산업주의 체제 자체를 깊이 성찰하는 단계로 나가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상관없이 끝없는 경제 성장과 산업 발전을 추구하는 산업주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그 결과 자연은 물론 인간마저도 파괴할 수밖에 없다고 깨달았다.
산업사회에 대한 슈마허의 이런 통찰은 1954년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불교 국가인 버마(지금의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함. 가난하면서도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비결이 궁금했다.(p.31)
경제의 참된 목적은 물질의 풍요나 번영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안식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쳤다.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서구식 사회 진보와 현실 변혁을 추구했던 사람이 동양의 영적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서구식 경제개발과 산업화는 극소수 사람에게만 달콤한 열매를 안겨 줄 뿐 대다수 민중은 그에 따른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p.33)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하는 게 좋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곧 나쁜 일을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p.38)
슈마허 – 대안 경제학자, 녹색사상가, 철학자, 환경운동가. 이론가. 실천가. 서구식 산업사회에서 병들고 시들어 가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참된 행복을 누리며 잘살 수 있을지, 그리고 지속 가능하고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그것이다.(p.39)
2장 우리가 사는 세상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경제
한 명도 빠짐없이 회계학을 배우라고? 지금의 대학 교양 과목들은 필요 없다고 보고 우리 대학 애들 뽑아 놓으니 숫자는 좀 알더라는 평가 받는 게 목표다. 많은 대학이 기업의 돈벌이 논리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 그 바람에 대학이 갈수록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기업 ‘입맛’에 맞는 노동력을 길러 내는 취업 준비기관 비슷한 곳으로 바뀌어 가며, 회계학을 전교생의 교양 필수 과목으로 강요하는 대학이 생겨난 것 또한 이런 흐름의 결과다.(p.47)
자본주의 경제에서 숫자란 GNP(국민이 한 해 동안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를 모두 합한 금액)와GDP(국내 총생산, 국가 기준)는 생산 중심 개념. 전쟁이 터지면 무기를 엄청나게 많이 생산하고 사고판다. 환경오염으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면 더 많은 의사와 간호사, 병원 등이 필요해진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수리를 하거나 새 차를 사야 한다.
이 모든 경우가 돈이 오가고 돈이 필요하다. 집 뜰에서 키운 감자를 먹는 게 아니라 머나먼 나라에서 생산되어 먼 거리를 이동해 온 외국의 포테이토칩 과자를 사먹는 게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행위. 장지오노의 말,(프랑스 환경운동가, 나무를 심은 사람) 자동차 사고가 한 번 날 때마다 미국 경제가 성장한다고 비꼬기도 함.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산업에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의 뺨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고, 솜털이 돋아나도록 한다.”
‘파괴적 생산’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이것이 더 많은 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돈이란 오로지 양적인 액수가 ‘숫자’로 환원되고 계산되고 표현되는 화폐 가치를 뜻한다.(p.50-51)
GNP나GDP에는 또 무엇이 빠질까? 돈으로 계산하거나 거래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혹은 이 세상이 유지되는 데 중요한 일들로는 뭐가 있을까? 요리, 청소, 빨래 등과 같은 가사 노동, 아이, 병자, 장애인, 노인 등을 돌보는 이른바 돌봄 노동,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과 같은 자급 노동, 물물교환과 상호부조, 봉사활동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것은 화폐거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이 떠받들고 있는 GNP나GDP니 경제성장이나 하는 것들의 민낯이다. 심하게 말하면, 삶과 세상의 참모습과는 동떨어진, 아니 도리어 그 참모습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숫자놀음’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GNP나GDP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무조건 좋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는 건 환상이자 착각이다.(p.51-52) 화폐 가치란 흔히 ‘가격’이라 부른다. 온갖 사물을 가격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일직선으로 줄 세워 시장에서 사고파는 똑같은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칼 폴라니는(경제사상가) 『거대한 전환』에서 이런 식의 시장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라 불렀다. 그 속에 들어가면 인간, 자연, 사회, 민주주의, 공공성, 생명 따위는 형체도 없이 몽땅 짓이겨져 똑같은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p.58-59)
시장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적 장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시장주의 경제학은 사회현상의 복잡성을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 역시도 매우 단편적으로만 파악하다고 비판하였다.(p.60)
메타 경제학이란 ‘경제학을 넘어서는 경제학’, ‘더 높은 차원의 경제학’을 가리키는 말로 슈마허는 “경제학의 한계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경제학”이라고 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자 ‘자연과 함께하는 경제학’인 셈이다. 이처럼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인간적. 생태적. 사회적 가치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게 메타 경제학의 입장이다.(p.61)
잔치는 끝났다 스스로를 죽이는 오류 근대인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운명을 타고난 ‘외부 세력’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근대인은 자연과 싸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결국에는 자기가 패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p.64)
지금 경제는 석유를 자본이 아니라 소득으로 취급한다. 곰곰이 따져 보면 인간이 만든 것보다 물, 공기, 땅 등과 같이 자연이 제공하는 자본이 훨씬 더 크다. 그런데 자연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문제는,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자연을 자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공짜로 주어진 것, 선물로 받은 것,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 정도로 취급한다. (p.67) 비극의 섬 사례))
남태평양의 인구 1만여 명의 작고 외딴 섬나라 나우루 3-4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축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로 전락.
인광석 : 수많은 철새의 배설물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땅에 스며들어 만들어진 것.(펠리칸). 비료를 만드는데 반드시 들어가야할 물질. 돈다발이 안겨 주는 달콤한 소비와 사치에 중독돼 흥청망청 편하게만 살던 부자들이 거지 신세가 됨.
눈앞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자연을 마구 탕진하면서 미래를 팔아넘긴 대가가 얼마나 가옥한지를 날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p.68-69)
석유문명을 넘어 나우루 경제가 현대 산업문명이라면? 그리고 인광석이 석유라면? 실제로도 아주 비슷하다. 인광석이 나우루를 먹여 살렸듯이 현대 산업문명을 먹여 살리는 주역이 석유다. 빠르게 바닥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이제 석유 생산의 꼭짓점은 지났다. 앞으로는 석유가 비싸고 귀한 자원이 될 것이다. 대량으로 값싼 석유가 공급된 결과로 가능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통렬하게 경고 했다. 값싸고 풍부한 석유가 남긴 유산 가운데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두가지다.
농업과 도시가 그것이다. 슈마허는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 없이는 아예 존립할 수조차 없는 산업화된 현대 농업의 본질을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전에 이미 명쾌하게 파헤쳤다.(p.70-71)
제 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욤 키프르전쟁)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진 전쟁. 이집트와 시리아가 과거 3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
‘석유의 무기화’는 국제사회에서 산유국 발언권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 때 석유값이 4배나 뛰면서 고유가 시대를 초래했다.(p.71) 현대식 농업 시스템은 석유에 너무나 크게 의존한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석유를 먹는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이것은 단기적인 시스템이지 항구적인 게 아니다. 석유만이 아니다. 이것은, 가령 모래처럼 어디에나 널린 자원을 빼면 재생 불가능한 자원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다. 이런 시스템은 지속될 수 없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당위의 문제다.(p.72)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에너지로 쓰는 새로운 운송수단과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식량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p.73)
현대 농업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은 기계화, 대규모화, 농약과 화학비료의 대량 사용, 농산물의 장거리 대량 운송 등에 힘입은 덕분이다. 결국 도시란, 슈마허가 맞춤하게 표현했듯이 “석유라는 에너지를 계속 넣어 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기계”인 셈이고, 석유 위에 세워진 현대 산업문명이 실은 얼마나 취약하고 지속 불가능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p.74)
세 명의 마법사가 심어 준 환상 슈마허 주장의 핵심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값싸고 풍부한 화석연료와 몇 가지 환상 탓에 생겨나고 뿌리내린 어떤 특이한 생활방식이 이제 끝나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환상이란 무엇일까?
지금의 산업사회를 휘감고 있는 환상을 명료하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 번째, 모든 자연법칙을 깨고 유한한 환경에서도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줌. 두 번째,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단순하고 지겨운 일을 계속할 노동력이 무한히 공급될 것이라는 착각.(과거 노예제-주인보다 훨씬 자신이 더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됨) 세 번째,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냄)
“실패가 가장 위대한 성공으로 여겨지는”이 어처구니없는 산업사회 아래서 우리 인간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며 이런 현실을 넘어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도 탐구해야 하고, 슈마허가 깊이 고민한 ‘인간문제’의 초점도 이 두 가지에 맞추어져 있다.(p.76)
산업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망치는가
나쁜 노동, 좋은 노동
세계에서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과 이혼율,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 시간과 학습 시간,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정규직 비율과 사회적 불평등 정도가 대표적이다.
세계 11위권의 경제 대국, 1인당 국민소득도 2만 달러가 훌쩍 넘는데, 행복하지 않는 이유를 ‘풍요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소득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뒤로는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다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데도 왜 불행할까?
우리의 ‘삶과 일’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유는 우리가 ‘나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굿 워크』에서 슈마허는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필요하고 쓸모 있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
둘째, 자신의 재능을 잘 발휘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셋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서(p.79-80)
이 세 가지를 노동의 목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큰 욕구가 이것들과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란 뭘까?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가치에 관심을 갖는다. ....(중략) 이 세 가지 근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노동이다. ‘좋은 노동’이란 이런 노동의 목적과 인간의 욕구가 상호 작용하면서 삶을 살찌우고 고양시키는 선순환 관계를 이룰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진정한 일의 즐거움이 없으면 삶의 행복도 없다는 얘기다.(p.81)
삶의 존엄성과 품위를 망가뜨리는 사회 산업사회는
첫째, 지나치게 복잡하다.
둘째, 탐욕, 시기심, 이기주의 같은 좋지 않은 마음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이용하다.
셋째, 노동에서 품위와 만족을 없애 버린다.
넷째, 지나치게 큰 규모 탓에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이다.
산업사회는 왜 이런 본성을 지니게 됐을까? 슈마허의 주장은 단순명쾌하다. 물불 가리지 않는 경제성장이 바로 그 주범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뿐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저하고 의심하고 변덕을 부리고 그냥 여기저기 뛰어다닐 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와중에 노동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인격 또한 망가질 수밖에 없다.(p.82-83)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산업사회가 뿌리내리면서 노동은 삶과 분리되어 상품이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살아간다.
예)가비오타스 사람들 이들이 일하는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뜻과 이상을 이루고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그 결과 일이 기쁨이자 즐거움이 된다. 일이 자기 삶의 발전과 성숙을 이끌어 준다. 일과 삶이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 주며 하나로 통합된다.
이들의 일은 서로 돕고 어우러지는 과정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 모든 것이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산 노동’이란 이런 것이다. ‘죽은 노동’은 단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고 물질적 대가를 더 많이 받기만을 원할 뿐이다.
바로 자본주의 산업사회 아래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자본주의 산업사회 자체가 돈벌이와 이윤 극대화, 경쟁, 욕망 따위를 동력으로 하여 굴러가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아래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슈마허는 “도전할 가치도 없고, 자기완성을 위한 자극도 없으며, 발전 가능성이나 진선미(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의 요소도 찾을 수 없는 노동에 평생을 허비하도록 종신형 판을 받은 셈”이라고 했다.(p.85-86)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또는 ‘얼마나 누려야 만족할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야 충분할까? 우리는 얼마나 더 편리하고 안락해져야 만족할까? 멈추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자전거처럼 무작정 끝도 없이 앞으로 달려야 하는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산업문명이다.(p.87)
여기 ‘오래된 미래’를 보라 라다크는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외지고 황량한 곳이다. 특별한 자원도 없고 땅도 척박한 곳이다. 기후마저 혹독하다. 하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누려왔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라다크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했다. 서로 협동하며,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사는 이들의 생활에는 늘 여유와 활기가 넘쳤다. 서로 돕는 경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일구어 온 덕분이다. 삶의 뿌리는 깊고 튼실했으며 전체적인 관계의 사슬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한 부분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라다크에 1970년대 중반부터 변화의 바람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인도 정부가 이곳을 개발하고 외부에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그 뒤 모든 게 바뀌었다.
한적했던 산골에 포장도로가 뚫렸고, 서구식 공장과 학교, 병원, 은행, 발전소, 비행장 따위가 속속 들어섰다. 외부관광객이 끊임없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시골에 살던 사람은 화려해진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호텔, 식당, 술집 같은 먹고 마시고 노는 시설이 빠르게 늘어났다.
빈민가도 생기고 급기야는 깨끗하던 자연도 환경오염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들어온 돈이 라다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음식, 옷, 집을 비롯해 사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깥에서 들어온 상품에 의존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분열도 심각해지고, 긴밀하게 연결돼 있던 사람들이 노인과 젊은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불교를 믿는 사람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 남성과 여성, 전문가와 일반 사람, 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 등으로 갈라지고 말았다.(p.88-92)
경제성장이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과 더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모든 생명의 토대인 자연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반대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자본과 시장과 과학기술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다.
자연은 성장의 도구이자 자원 공급 창고로만 취급되고 있다. 그 속에서 경제성장은 오로지 ‘성장을 위한 성장’이라는 무한 팽창의 외길을 치닫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하인’이어야 할 돈이 ‘나쁜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슈마허가 말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관념들.
1.모든 사물은 화폐라는 획일적 단위로 측정하고 계산하고 표현할 수 있다.
2.끝없는 성장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며, 경제성장과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3.자연은 경제성장과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무한정으로 착취하고 개발하고 이용해도 된다.
4.인간은 경제 성장을 위해 쓰여야 할 ‘노동력’에 지나지 않는다.
5.행복과 삶의 질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는 물질의 소유와 소비다.(p.93-94)
3장 새로운 미래의 꿈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경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마태복음 20장 포도밭주인과 일꾼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품삯이야기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다른 이름이다, 마지막 남은 일자리라도 붙잡으려고 해 질 녘까지 인력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 냉혹한 경쟁에서 밀려나 고통과 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 곧 불안하고 힘든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이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부가 아니라 더 소박한 즐거움이고, 더 큰 행운이 아니라 더 깊은 행복이다. 노동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다”라고 주장했다.(p.101)
정작 시에라리온 국민은 자기 나라의 다이아몬드 탓에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당하는데 반해 이 기업은 그 덕분에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다이아몬드가 ‘피로 얼룩진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까닭이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일종의 폭력 행위다.” 불교 경제학은 재생 불가능한 재화는 오로지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0)
자동차와 소는 어떻게 다른가 자동차는 그냥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소는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체다. 이런 존재를 단순히 인간 중심의 효용이라는 잣대로만 취급해도 될까? 그냥 쓰다가 버려도 될까? 슈마허는 이런 질문에 대해 과학적 해답을 찾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높은 존재다. 그러므로 도물에 대해 최대한의 동정심을 느낄 수 있고 또 느껴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동물에게 착하고 어진 일을 베풀 수 있고 또 베풀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환경윤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생태학자 알도 레오폴드가 1949년에 펴낸 대표작 『모래 군(郡)의 열두 달』에서 자연을 인간도 함께 속하는 ‘생명 공동체’로 보는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그는, 인간한테만 적용했던 윤리를 동식물은 물론 대지에까지 넓혀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p.111-113)
자연은 생산을 위한 ‘원료 제공자’ 일 뿐이며, 사람은 노동력을 대 주는 ‘생산의 도구’일 뿐이다. 슈마허는 이런 산업형 농업을 넘어 토지 관리와 농업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의 세 가지가 그 핵심이다.(p.115)
*농업의 새로운 세 가지 과제
첫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것
둘째, 인간의 서식지를 고귀하게 만들 것 셋째, 적당한 생활에 필요한 식량과 기타 원료를 생산할 것(p.116)
‘작은 것’은 왜 아름다울까 산업사회와 현대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거대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대다수 사람이 거대주의에 대한 우상숭배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사회와 현대 문명은 ‘거대한 것’을 추구한다. 산업사회가 대형화와 기계화를 추구하는 까닭이다.(p.117)
인간적 소통이 가능한 적당한 크기, 안성맞춤의 크기가 중요하다. 클수록 좋은 건 결코 아니다. 거대주의 중독에서 벗어나 훨씬 더 작은 단위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힘은 작은 규모에서 발휘될 수 있다. 슈마허『내가 믿는 세상』(p.119)
오늘날 과학기술은 ‘거대과학’또는 ‘거대기술’로 불린다, 국가의 권력 논리나 기업의 이윤 논리에 휘둘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큰 것’을 숭배하는 우리 시대의 이런 거대주의에 맞서 슈마허는 ‘작은 것’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효율적이다. 뿐만 아니라 편하고 즐겁고 지속적이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일찍이 “만약 당신이 우주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라.”고 말했다. 우주는 무한히 크다. 마을은 아주 작다. 진정으로 큰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큰 것은 작은 것을 주춧돌과 기둥으로 삼아야만 제대로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 (p.123)
옛날 전통사회의 뒤떨어진 기술보다는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현대 산업사회의 거대하고 복잡한 기술보다는 훨씬 값싸고 단순하고 대중적인 기술이 중간기술입니다. 양쪽의 장점은 취하되 단점은 버림으로써 말 그대로 둘 사이의 ‘중도’를 지혜롭게 찾자는 뜻이지요.(p.125)
겸손과 지혜의 과학기술을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방법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의 물이 고이는 조하드(옛날에 빗물을 모아 땅속에 스며들게 하려고 초승달 모양으로 진흙 제방을 쌓아만듬-일종의 소규모 저수지)를 위생에 좋지 않다며 대부분 메워버림.
->공무원이 오랜시간 30여년 동안 조하드를 만들어 물길과 저수지를 갖춘 1만 개의 탄탄한 수로망을 갖추게 됨.->1000여 개 마을에 사는 70여만 명의 주민에게 물을 대 줌.-> 물이 살아나면서 자연과 경제가 함께 살아났고, 이곳 주민들의 생활 또한 크게 달라짐.
‘조하드’와 ‘와카워터’에 담긴 뜻-> 대형 댐이 아니어도 충분 핵심열쇠는 민주적이고 공동체적인 물의 관리(마을 회의가 한달에 한번씩 모든 결정은 합의에 따라 투명하게 이루어짐) 공동체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물의 집단적 관리. 주민들이 삶의 존엄성과 자부심, 용기를 되찾은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다.(p.128-131)
->가난 때문에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며 자연이 되살아나면서 마을 공동체가 복원되었다. 마을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 ‘복덩이’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며 지역경제와 사람들 생활도 훨씬 풍요로워졌다.
‘와카워터’(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북동부 고원지대 마을의 식수탑) : 이슬이나 공기 중에 밴 습기를 모아 먹는 물을 만드는 게 이 탑이 하는 일. 물방울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역할)(p.132-133)
슈마허가 고민했던 문제들. 대형 댐, 조하드, 와카워터 드은 모두 물 공급 같은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그런데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엇갈린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과학기술은 뭘까?
국가와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의 첨단 거대주의과학기술은 인류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낡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조하드나 와카워터 같은 것에 쓰인 기술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참된 삶의 지혜나 지식은 과학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맺어야 할까?
이해의 과학, 조작의 과학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슈마허의 전체 이론이나 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과학기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학기술 사회라 불린다. 현대 문명을 과학기술 문명이라 일컫기도 한다. (p.134-135)
과학기술은 인간의 산물이지만 자연은 늘 언제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알고 있다. 자연의 성장도 신비롭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성장을 멈추는 자연의 신비로움이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에는 규모, 속도, 힘에 한계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자기 균형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조절하고 정화할줄 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규모, 속도, 힘에서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자기 균형, 자기 조절, 자기 정화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 않다.
->“과학이란 적정한 한계를 유지할 때는 유익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사악할뿐만 아니라 파괴적으로 바뀌게 된다.” 자본주의 산물인 현대 과학기술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고, 전문적이고, 폭력적이고, 막대한 돈의 힘으로 굴러간다. 그래서 결국은 소수를 위한 기술, 착취를 위한 기술, 민주주의와 인간과 자연을 망가뜨리는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는게 슈마허의 견해다. 과학은 ‘이해’를 위한 것과 ‘조작’을 위한 것으로 나뉜다. 이해->인간의 사고 능력을 키워서 자유와 삶의 성숙에 이바지하는 ‘지혜로서의 앎’이다.
조작->더 많은 지식을 쌓아 자기 마음대로 외부 환경을 조작하려는 ‘권력과 힘으로서의 앎’이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고,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연의 소유자이자 지배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조작을 위한 과학은 갈수록 복잡하고 거대하게 발전하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자연 조작에서 인간 조작으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유전자 조작을 넘어 인간 복제로까지 치닫고 있는 생명공학이 이를 상징한다.
*과학을 보는 관점. 한쪽 과학은 자연을 신의 작품이자 ‘인간의 어머니’로 다른 쪽 과학은 장연을 정복 대상이나 이용해야 할 자원(p.135-137)
*인간을 보는 관점도 결정적인 차이를 보임
한쪽->인간을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고귀한 ‘예술품’으로
다른 한 쪽->인간이란 그저 하나의 고등동물로서 진화의 우연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둘 사이의 차이는 ‘유기체적 세계관’과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유기체란 각 부분과 전체가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되고 얽혀 있는 조직체. 기계론적 세계관 : 자동차나 시계를 떠올리면 된다. 슈마허는, 서구 문명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혜와 이해의 과학’이 아닌 ‘조작과 권력의 과학’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탓이라고 진단한다.
현대 과학기술의 핵심 특성인 조작과 권력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 지혜의 탐구, 종교적 영성, 생명의 신비와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장점 : 수많은 혜택과 이득을 안겨 줌
단점 : 엄청난 규모와 힘으로 새로운 위험과 위기, 혼란을 낳고 있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며, 한순간에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고 ‘죽음과 공포의 독극물’인 방사능물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원자력 발전 기술, 유전자조작과 생명 복제도 서슴지 않는 생명공학 따위가 대표적이다. ‘빛’보다는 ‘그늘’을 더욱 짙게 드리우게 된 이유와 배경은 뭘까?(p.138-139)
돈과 권력의 ‘시녀’가 되나? 오늘날 과학기술에 ‘권력과 자본의 시녀’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달린데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 사적인 소유물일 뿐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을 손아귀에 쥔 기업은 그것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데 몰두한다. 특허제도는 기업들이 개발한 특정 기술에 대해 특허를 낸 뒤 막대한 이익을 챙길 때가 많다. 이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돈을 긁어모으는 구실을 함.
사례)글리벡-혈액에 생기는 암의 일종인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의 생명연장. 노바티스(스위스 거대 제약기업) 약값을 감당 안되게 비싼 값으로 엄청난 돈을 손쉽게 벌어들임. 지구온난화 문제도 이들 뒤에 석유기업이나 석탄 기업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화석연료기업은 지구 온난화를 부정해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기업이 국가 정책마저 쥐락펴락한다는 점이다.(p.141-142)
‘위험 사회’와 전문가주의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따라 ‘위험’도 덩달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원자력발전이다. 방사능이라는 물질은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죽음과 파괴로 몰아넣은 무시무시한 물질이다. 예) 체르노빌 참사와 후쿠시마 참사(p.143-145)
1970년대 당시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때였다. 석유를 대체할 값싸고 안정적인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여겨져 절대다수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슈마허는 어두운 실체를 거침없이 폭로.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원전 반대 운동에 나섰다.
시대를 앞지르는 그의 선구적인 혜안과 진실을 향한 용기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인류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불확실성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발전이 인류 역사에서 최고 꼭짓점에 다다른 지금, 정작 수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것은 인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p.147)
전문가주의도 문제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 정책 결정 과정 등은 소수의 과학기술 전문가와 관료 엘리트가 거의 독점하고 있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기득권 집단을 이룬다.
전문가란 대개 특정 분야의 지식을 풍부하게 갖추고 많은 경험 등을 바탕으로 가장 훌륭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요즘은 자기 전공 분야를 깊이 알긴 하지만 그 폭은 좁다. 그래서 ‘전체 틀’과 ‘큰 흐름’을 읽어 낼 줄 아는 안목이나 식견은 모자랄 때가 많다.
“전문가란 점점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느라 결국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이다.”(p.148-149)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중간기술 대량 생산에 쓰이는 기술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자연을 파괴하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낭비하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망친다. 이에 반해 대중에 의한 생산에 쓰이는 기술은 현대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면서도 중앙으로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다. 또한 자연 생태계의 법칙과 공존할 수 있고, 희소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결국은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삶과 지혜를 살찌워 준다. 이런 기술을 ‘중간기술’이라 부른다. 중도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중간기술이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간단하며, 자본이 적게 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안된 기술을 말한다.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을 기술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 기술이 사용되는 곳의 구체적인 환경과 조건에 잘 들어맞다. 뿐만 아니라 중간기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실제로 도움을 줌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 중앙 집중적이고 관료주의적이지 않은 작은 단위의 기술이기도 하다.
특히 슈마허는 가난한 나라들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 나라들에 걸맞는 기술과 도구를 제공해야 그 나라들이 자립과 안정을 이루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가난한 나라는 경제 규모도 작고 생산량도 적고 돈도 많지 않기 때문에 시장이 작다. 작은 시장에는 소규모 생산시설이 어울린다. 이런 시설은 소규모 기술을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곳에다 대규모의 첨단 대량 생산방식에 적합한 기술을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
슈마허의 중간기술이 민중의 기술, 민주적인 기술, 자립과 자조의 기술, 작은 기술, 평화의 기술, 요컨대 진정한 ‘인간의 기술’로 일컬어지는 까닭이다.(p.150-153)
중간기술은 작은 기술, 소규모 기술이다. 작은 것 속에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오늘날 원자력 발전의 핵에너지 기술, 산업형 농업의 새로운 농화학 기술 등을 비롯한 수많은 기술이 적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커다란 위험은 언제나 부분적인 지식을 대규모로 무자비하게 이용하는 데서 나온다.
“복잡한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삼류 기술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원리로 제대로 된 것을 만드는 데는 천재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간기술이 중시하는 ‘인간적 규모’는 단순히 크기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작은 것’은 일의 성격 자체를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과 창조성과 행복감을 불어넣어 준다. 진정한 인간임을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중간기술이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 되는 까닭이다.(p.154-157)
슈마허가 창안한 중간기술은 그 뒤로도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현장적용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은 ‘적정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질이 나쁜 물이라도 바로 필터로 정화해 마실 수 있도록 한 ‘라이프스트로’(생명의 빨대), 전기 없이도 낮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항아리 냉장고.’ 지하수를 손쉽게 끌어 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동식 물 공급 펌프 ‘슈퍼 머니메이커 펌프’, 여성이나 아이들이 보다 많은 양의 물을 편리하게 실어 나를 수 있게 만든 굴리는 물통 ‘큐드럼’등이 중간기술의 대표적인 보기다. 조하드나 와카워터도 가비오타스 공동체에서 만든 여러 시설과 물건도 모두 이런 기술이 적용된 사례다.
중간기술 또는 적정기술이 최근 들어 더욱 큰 관심과 주목을 모으는 것은 지금 인류가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이 이 기술과 맞물려 있어서다.(p.157)
좋은 기술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오늘날 정치의 핵심은 경제이며, 경제의 핵심은 기술이다. 나는 기술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방향은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다시 짜는 것이다. 이는 기술을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작은 존재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거대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 파괴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는 대신에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방향을 전환하려면 무엇보다도 상상력에 힘입어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해야 한다.(p.161)
4장 ‘마음의 집’을 손질하자
‘좋은 노동’과 ‘좋은 삶’의 관계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자신의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 가난한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부인을 왜 불쌍하게 여겼을까요?
힐러리를 비롯한 현대 산업사회의 대다수 여성에게 ‘좋은 삶’이란 뭘까? 아마도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상품을 맘껏 소비하는 생활 쪽에 가깝겠다.
슈마허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깊이 인식했고, 인간이 지닌 그 위대함과 숭고함이 사람마다 온전히 되살아나 환하게 빛나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p.167-168)
헬조선?
‘좋은 노동’을 일깨우는 교육
*우리가 노동을 하는 목적
1.필요하고 쓸모 있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가기 위해서다. 2.자기의 재능을 잘 발휘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다.
3.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서다.
노동의 목적과 욕구를 충족(인간의 가치, 사회적존재로서 다른 생명체 관심, 자기 자신 계발, 재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켜 주는 게 ‘좋은 노동’이다.
곧, 인간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함으로써 자기 삶을 아름답고 격조 높은 하나의 예술품으로 완성해 가는 게 좋은 노동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흙과 더불어 일하는 육체노동 같은 것을 보면 모든 생명은 근원적으로 신비롭고,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으며,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슈마허는 ‘좋은 노동’을 하면 이런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슈마허는 평생 흙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시골 농부가 첨단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보다 세상 이치를 더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에게 노동과 지혜와 ‘좋은 삶’은 이처럼 하나로 연결된다.(p.173)
슈마허는 교육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삶을 고귀한 예술품으로 가꾸어 나가는 데서 참된 지혜를 구하는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가 생각한 교육의 본질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한 관념, 곧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관념에 따라 결정된다.(p.175)
인간은 위대하다 참된 지혜와 ‘마음의 집’ 슈마허는, 지혜에 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지혜는 오직 자신의 내부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탐욕과 이기심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찾아오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 곧 ‘평정’상태가 지혜의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변화가 일어나야할 곳은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자기 마음의 집을 손질하자.”(p.180-181)
슈마허가 간 길, 우리가 갈 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이 삶과 세상을 바꾸는 힘과 지혜가 깃드는 곳이 우리 삶의 ‘중심’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아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 ‘중심’이란 바로 이런 ‘뿌리 깊은 나무’나 ‘샘이 깊은 물’과 같은 것이다. 내 삶을 이끌어 갈 ‘등불’을 찾아내고 그 등불이 인도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걸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기르는 것. ‘마음의 집’을 손질하는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