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찬미(讚美)
유수 설창환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 남녀의 정사’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기사 내용으로는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 경, 쓰시마 섬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를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였다.
이 기사는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양장을 한 여자는 당시 최고의 성악가 요 대중가수였고, 중년 신사는 천재 극작가요 유명 연극인이었기 때문이다. 승객 명부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은 윤수선(30세)과 김수산(30세)이었다.
윤심덕(1897~1926)은 당시 기록에는 “성량이 풍부하고 용모도 제대로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녀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대학에서 정식으로 성악을 공부한 음악가이자 연극배우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부모를 대신해서 그녀는 가족의 생계와 두 동생의 학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부모는 학구열이 높았으며, 여동생은 피아니스트, 남동생은 바리톤 성악가로 미국에 유학한 음악가이다.
당시에 윤심덕은 유명한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사사로운 행동이나 옷차림 하나까지도 기사화될 정도였다. 예술가들과 재벌들이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연애를 즐겼다. 음악가인 홍난파와도 가까웠으며, 여러 유명인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으로 사고가 매우 자유롭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이를 수용할 만한 사회 분위기가 아닌 탓에, 그녀는 많은 비난도 감수해야 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1926년에 그녀는 일본에서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취입했다. 피아노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맡았고, 총 26곡을 노래했다. 그중에서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가 되었다. ‘희망가’와 함께 각기 최초라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노래가 히트한 최초의 가요여서, 지금은 음악계에서도 최초의 가요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결국, 이 노래는 한국 가요사에 큰 그림자가 되어 가요의 역사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의 찬미’의 원작은 루마니아 작곡가인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다. 이 곡을 윤심덕이 편곡하고 직접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이 곡은 원래 왈츠풍의 경쾌한 곡이었으나 윤심덕이 템포를 매우 느리게 하고, 슬픈 가사를 붙여 비탄적인 곡이 되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사의 찬미 1절 가사)
김우진(1897~1926년)은 전라남도 장성의 대부호 가문 출신이다. 요즘 말로 재벌 2세다. 그는 집안에서 맺어준 여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명의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다. 그는 천재적인 극작가이자 연극 평론가이며,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의 엘리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경영하기를 원했고, 그는 작가와 연극을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와 심한 갈등에 처하게 된다. 윤심덕과는 일본 유학 중에 연극을 하면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은 모두 가정에서의 스트레스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적 갈등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불륜이라는 사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윤심덕이 1926년에 일본에서 ‘사의 찬미’ 녹음을 마친 후, 이들은 함께 부산행 배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쓰시마 부근에서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윤수선과 김수산 이라는 가명을 남긴 채, 짧은 30세의 일기로 영원한 바다 여행을 떠나 버렸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대서특필했고, 조선일보까지 연일 특집으로 연재하면서 그들의 죽음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최고의 가수와 천재 극작가의 동반 자살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사후에 더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음반도 재발매되어 10만 장 이상 팔렸다.
‘사의 찬미’는 당시에도 엄청난 파장과 인기를 끌었지만, 아직까지도 세상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이미자, 김정호 등을 비롯해서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불렀고,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드라마로도 재생산되고 있다. 1991년에는 김호성 감독에 장미희와 임성민 주연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2013년에는 네오 프로덕션에서 뮤지컬로 제작하였고, 2018년과 2021년에는 오페라로 작곡되어 대구국제오페라축제 때 공연되기도 했다. 같은 해에 SBS에서 신혜선과 이종석 주연의 3부작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짧은 드라마였지만, 큰 임팩트를 남겼다. 너무 짧아 아쉬웠다.
뛰어난 예술과 거침없는 사랑을 불태웠던 윤심덕은 한국의 카르멘이 되었고, 그녀의 파트너였던 김우진은 천재 극작가이자 자유연애의 첫 주자가 되었다. 물론 시대를 너무 앞서버린 탓에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실과 바늘처럼, 윤심덕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김우진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김우진에게도 윤심덕은 언제나 그림자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림자가 되어 슬프고도 못다 핀 꽃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현해탄 : 당시에 큐수 지방의 북서쪽 바다를 지칭했고 이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바다를 가르킨다.
첫댓글 다른 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
재무님 오랫 만에 놀러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자주 오세요.
재무님 무탈하지요 이방찾아오시는 길 잃어버린줄 알았어요 자주좀 들려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