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초부터 봇물처럼 터진 우리 부부의 스리랑카 향수병은 좀처럼 식지를 않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심지어는 식사 방식이나 식기조차도 스리랑카 스타일로 대변혁을 시작했고, 생각이나 행동은 물론 지인들과의 대화조차도 스리랑카 이야기를 빼면 안 되는 것처럼 변해 갔으며 머리와 마음속까지도 거의 스리랑카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2012년 2월인 퇴직까지도 약 8 년이라는 시간이 내게 주워졌기에 우선은 현지어를 구사할 수 있게 신할라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늘리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 분(A***)이 보내준 신할라어 교본과 인터넷을 통하여 나의 스리랑카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늘리는데 대부분의 여유 시간을 할애했고 철두철미하게 이에 매달렸다. 곧 환갑이 될 나이에 뒤늦은 어학공부는 힘이 들고 좀처럼 진전이 안 되고 있음을 실감하면서도 이런 어려움 끝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내 꿈(Dream)이 있다는 희망이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부부는 조선일보 前 기자인 불자부부에게 지난 정월의 스리랑카 여행 이야기와 8 년 후에 스리랑카에 정착할 계획에 대해 밝혔더니 몹시도 부러워하며 당장이라도 우리 부부와 여행을 함께 하고 싶다하기에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함께 하자고 언약을 한 것이 나의 두 번째 스리랑카 여행이 되었다.
2004년 8월 초 여름휴가 기간이 되자 우리 부부는 전 조선일보 기자 불자부부(이하 기자부부)와 약속했던 4박 5일의 미얀마(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와 11박 13일의 스리랑카(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여행을 함께 하였다.
2004년 8월 2일 아침, 국외여행의 부푼 꿈에 한껏 젖은 기자부부와 우리 부부는 제주공항을 출발하여 서울, 인천공항을 거쳐 태국 방콕(Bankok)공항에서 (A)와 합류 하기 위해서 잠시 내렸다. 장시간 항공기 탑승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 두 가족은 기진맥진한 몸으로 환승 절차를 마치고 환승장으로 나오니 우리 두 가족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A)는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콜롬보 대법원 판사인 (C)를 소개함으로써 세 가족 여섯이서 천불천탑 불교나라 미얀마 여행을 함께 하였다
(A)는 콜롬보 대법원 현직 판사인 (C)가 불자이면서도 비리를 저지른 스리랑카 승려에게 준엄한 법의 심판을 내릴 정도로 강직한 판사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분이라고 소개한다. 특히 조선일보 前 기자 부인은 판사 각하라고까지 존칭을 하였고, 콜롬보 대법원 판사로서의 흐트러짐이 없는 (C)의 언행은 여행 내내 변함이 없었다.
만약 스리랑카 승려인 (A)가 율법을 어기는 처신과 외국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망각하여 배신으로 되갚으며, 외국 불자부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후의를 거짓으로 일관함으로써 결국 불자부부의 노년의 마지막 꿈(Dream)까지도 접어야 하는 좌절감과 금전적인 손해까지 입혔음을 대법원 판사인 (C)가 인지한다면 어떤 판단이나 판결을 내릴지가 매우 궁금해진다. 결코 모르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다.
미얀마 양곤(Yangon)공항은 공항이라기보다도 20세기 우리나라 버스터미널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고 허름하나, 5 일 동안 우리를 안내해 줄 미얀마 전통복장의 가이드(Mr. 킨)는 아담한 작은 체구이지만 우리들을 영어로 능숙하게 안내하며 인텔리 수준의 호감을 갖게 하는 인물이었다.
양곤 시내로 향하는 작고 낡은 중고버스는 아예 에어컨조차 없고 의자는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더 이상 작동이 되질 않으니, 하루 종일 항공기 탑승에 시달렸고 열대 폭염에 익숙하지 않음이라 숙소(Sumit Parkview Hotel)에 여장을 풀고서야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미얀마 이틀째(2004.08.03.) 여행 첫 날 밤을 보내고 새벽녘 미얀마 사람들이 바삐 살아가는 온갖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어제의 피로는 깨끗하게 사라졌고 정신도 맑아진 것이 아마도 어젯밤 단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일정은 양곤과 만달레이(Mandalay) 관광이 예정이라 미얀마의 상징으로 세계 3대 사원 중 하나로서 연간 1,500만 명 이상이 찾는다는 미얀마 최대 사원인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를 찾았다. 맨발로 입장을 하고서 7톤의 황금칠을 100m 높이와 둘레 426m의 황금불탑 기단을 둘러싸는 불탑과 작은 건물에 모셔진 불상을 찾는 수많은 불자들은 스리랑카 어느 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처럼 불심이 깊음을 알게 했다.
이어서 프로펠라 항공기로 양곤공항에서 만달레이공항으로 이동한 우리 일행은 쉴 새 없이 Snake Pagoda와 Mahamuni Pagoda를 찾으니 지는 해에 쫓겨 나머지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숙소(Mandray View Inn) 잡으니 미얀마 여행 2/5가 지나간다.
미얀마 사흘째(2004,08.04.), 먼저 만달레이 시내 청동불상 제작 공장을 잠시 들리고는 Swan U Poan Shin Pagoda, Golden Palace Monastery, Atu Ma Shi Monastery, Shwe Kyi Myin Pagoda, Ein Daw Pagoda를 쉼 없이 찾다보니 어느 덧 미얀마의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게 되니 어젯밤 묵었던 그 호텔방에서 연속 지내면서 미얀마 여행 3/5의 즐거운 밤을 보낸다.
미얀마 나흘째(2004,08,05.), 쉼이 없는 여정의 시작은 먼저 Mandalay Hill에 있는 Sutungpyai Pagoda, Kuthodaw Pagoda를 찾는다. 되돌아오는 길에 큰물에 집이 잠겨 호수가 된 길가 원두막에서 황소 두 마리를 이웃으로 삼고 물이 빠져 옛집으로 되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빈자의 모습과 사원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구하던 동자승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히고 속이 아려온다. 마지막으로 Mandalay Royal Palace에서 찬란했던 옛 버마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양곤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만달레이공항에서 프로펠라 항공기에 몸을 실으니 어느덧 저녁이고 첫날 그 숙소(Sumit Parkview Hotel)에서 미얀마 여행 마지막 밤을 맞는다. 밤이 꽤나 지난 시각에야 식당을 찾아 저녁식사 도중에 들은 젊디젊은 여가수의 영화 사랑과 평화의 주제곡(OST) Unchained Melody의 열창은 지금도 귀에 선하다.
미얀마 마지막 날(2004.08.06.), 가이드(Mr. 킨)는 양곤의 흰코끼리동물원(White Elephant Zoo)을 마지막으로 안내하고는 우리 일행을 양곤공항으로 안내한다. 누구에게나 헤어짐은 섭섭함인지, 닷새 동안의 인연을 끈을 놓지 못함인지 다시 미얀마를 찾을 때는 반드시 불러달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첫날의 내 느낌처럼 순수하고 배려심이 많았었다고 기억되며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잊지 않음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반드시 만난다는 인연의 끈이 언젠가는 다시 이어지기를 고대해본다.
양곤공항에서 항공기로 태국 방콕공항으로 이동한 세 가족 우리 일행은 스리랑카행 항공기로 환승하고 콜롬보공항에 도착하여 콜롬보 시내에 숙소(Galadari Hotel)를 정하니 나는 두 번째이고 내 아내는 세 번째 스리랑카 방문 첫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