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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81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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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95세 되신 전직 대통령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에 전 국민과 그리고 전 세계가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쾌유를 비는 모습에 정말이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병실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들고 릴레이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어린 감사의 편지가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해계신 여러 ‘전직 대통령’들과 너무 비교가 되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오랜 숙원이었던 흑백갈등을 해소한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세기 위대한 영혼으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의 숨결이 좀 더 지속되기를...
넬슨 만델라,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한 인간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는 리처드 스텐절이라는 한 기자의 증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타임지의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넬슨 만델라에 매료된 나머지 3년간 넬슨 만델라와 동고동락하면서 그의 자서전 집필에 참여합니다. 3년간의 기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만델라를 만나면서 제 자신이 좀 더 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를 떠나오자 제 삶에서 태양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정녕 태양 같은 존재, 큰 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남긴 어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사에 길이 남을 내용들이었습니다. 출옥 후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는 흑인들을 향해 던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되 잊지 말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첫 번째로 시도한 작업이 있습니다. 복수와 응징이 아니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진실을 고백하라. 그러면 용서하겠다.”
이것이 만델라가 풀어낸 ‘사랑과 정의의 방정식’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대사면을 선포한 것입니다. 유엔은 넬슨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만델라가 67년 동안 사회에 공헌한 점을 기려 국제사회가 이날 하루만큼은 67분 동안 개인 시간을 할애해 지역사회나 불우 이웃, 장애인을 돕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바다처럼 관대하고 산처럼 든든한 넬슨 만델라, 항상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은 만델라였지만 젊은 시절 그의 생애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백인 정부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젊은 만델라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를 일찌감치 투옥시킵니다. 그리고 28년 동안이나 가둬놓았습니다. 군대생활 2년, 혹은 3년 얼마나 길었습니까? 10년 징역 살고 밖으로 나오면 거의 폐인처럼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죄도 없이 똑똑한 인재라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투옥기간 동안 가족들도 모진 박해를 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식구들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그 역사적인 날, 1990년 2월 11일 넬슨 만델라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1962년 평화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수감되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오던 중 28년 만에 출옥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넬슨 만델라의 얼굴에 쏠렸습니다.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장장 28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으니 분노와 화로 암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폐인처럼 되지 않았을까? 휠체어나 구급차를 타고 출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모든 걱정들은 기우였습니다. 그는 아주 밝고 건강한 얼굴로 당당히 교도소 문을 걸어 나왔습니다.
취재기자들이 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만 수감생활해도 폐인이 되어서 나오는데 28년 동안이나 그 안에 사셨는데, 어찌 이렇게 건강하십니까?”
환한 머금은 넬슨 만델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 교도소는 저주의 장소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감사입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한명만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달려왔습니다.
우리 인간들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절박할 때는 한없이 졸라대지만 문제가 해소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은망덕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모습 앞에 많이 서글프고 쓸쓸하셨을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 존재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감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이요 먼지 같은 존재들이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셔서 이 땅위에 두 발로 서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지속적인 은총이 아니라면 단 한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 앞에 취해야 할 태도는 지속적인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 오랜 고통 속에서도 늘 감사꺼리를 찾았던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열심히 감사꺼리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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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이다>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느날 코리는 테살로니카전서 5,18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코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즈막하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믿어야 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작 선악과 몇 개 따먹은 것인데도 야단맞을까봐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나에게서 몸을 숨기는 사람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자비를 믿지 않으면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당신을 지옥처럼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를 계속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게 만든 대상은 바로 내 안의 ‘자아’입니다. 그것이 뱀으로 상징됩니다. 뱀은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는 결핍에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불만 때문에 자아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불만과는 반대로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10명이 주님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외국인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을 다 고쳐주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를 이미 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만 하면 됩니다. 감사가 곧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청하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청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입니다. 감사하면 이미 받았다고 믿는 것이기에 사실 하느님께서 청하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때 아버지께 이렇게 청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은 청할 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미 청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청한 것을 받으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청은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며 무언가 청한다면 “무자비한 분이시지만 내 청 좀 들어주세요. 만약 들어주시면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인정해줄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위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는 청원은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당황하며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엄마가 그런 거 받으면 주신 분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 어?”
그러자 아이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귤을 아저씨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까주세요!”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달라고 하는 것이니 강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부분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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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다 같이 나병의 치유에 대한 기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주인공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치유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는 시리아인이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다.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생기가 넘치는 믿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의 치유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2열왕 5,1)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는데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고 몸이 깨끗이 나았다(14절). 이 기적은 요르단 강물이 특별히 치유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의 영역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과 신비를 드러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야훼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있다. 즉 자기 나라에 가서도 ‘성역’에서 야훼를 숭배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얼마쯤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선물도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표시일 뿐이다(15절). 그러나 예언자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믿음(신앙)을 통한 그분의 능력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또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제멋대로 다루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신앙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자신을 맡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지성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가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이러한 내용을 오늘의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이곳에서도 다른 아홉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한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신다. 그리고 이 기적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를 지나가실 때(11절) 일어난다. 이것은 이 기적이 예수께서 수난과 영광의 자리로 가시는 데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기적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몰이해를 예고해주는 구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병치유사화(루가 5,12-18)와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그들을 깨끗하게 고쳐주기 전에 ‘사제들에게 보여라’(14절)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보아(14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했다고 하는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처럼 ‘권리’만을 내세우려 하는 오늘의 이 시대가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행위’는 예의바르고 양식 있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 된 ‘믿음의 행위’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것이다.(15.18절)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절) 하신 것은 다른 아홉 사람이 당신을 통해 자비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유다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불충분하고 왜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분의 자비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특권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나병에서 ‘치유’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절) 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보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명칭 자체가 뜻하는 감사의 행위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최고도로 표현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감사의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실현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표현인 감사의 행위도 그분의 사랑의 무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계획을 넘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관습으로 율법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하늘나라와는 먼 것이다.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에 근거하고 있는 이러한 확고하고도 무상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디모 2,8.11.13) 우리의 믿음이 감사의 행위로 항상 표현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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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전에 나병은 하늘이 내린 징벌로 여겨졌고, 전염을 우려하여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소외와 고독,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징벌이라는 사회적·종교적 인식까지 더해서 나병 환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병이 그 자리에서 나았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치유해 주시려는 의도를 지닌 말씀이지만, 거기에는 나병 환자들의 믿음이 작용해야 하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 치유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은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열 사람이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치유는 아홉 명에게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에 머물고 말지만,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돌아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환자들과 비슷합니다. 행복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기에 행복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우리 생활을 감사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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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몸이 몹시 아플 때 안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또 어떤 큰 슬픔을 겪을 때 위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도,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그런 일을 계기로 종교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더 깊은 신앙 단계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멈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고, 실망해서 기도와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2-19)
예수님께서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을 찾으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감사드리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그 아홉 명이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서, 더 큰 은총을 구하지 않고 멈춘 것이 안타까워서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그 아홉 명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을까? 사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그들이 크게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직 병을 고치기 전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이 나으면 나에게로 다시 돌아와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홉 명은 사제에게 가서 병이 나았음을 확인 받은 뒤에 별 생각 없이 그냥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크게 기뻐하고 좋아했을 텐데, 아마도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것이고, 감사드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즉 기쁨에 취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변호해 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떻든 그들의 믿음은 ‘간절하게 청하기만 하는 믿음’이었고, 은혜를 받은 뒤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주 부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또는 영적인 기준으로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궁극적인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은 것은 신앙인으로서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에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하는 믿음’과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일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리는 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신앙생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든지 얻지 못했든지 간에 평소에 감사기도를 잘 바치는 사람이 있고, 청원기도는 잘 바치지만 감사기도는 바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하는 믿음’과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 하나의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서 청하기만 하는 것은 부족한 믿음이고, 그런 믿음은 아직 ‘기복신앙’ 단계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믿음입니다. 그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로 가려면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되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유대인들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 아홉 명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예수님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1) 이 말씀은 그의 병이 나았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대신해서 그의 치유를 확인해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2)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말씀이기도 한데, 그러면 “구원하였다.” 라는 말은 “구원이 시작되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한 뒤에 이루어집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이 신앙을 통해서 얻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평화,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 또는 어떤 현세적인 목표 달성 등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것을 원하는 일 자체는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지만, 그 단계에서 멈추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러면 신앙생활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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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시던 저희 아버지께서는 한국에 들어오시면 광화문이나 인사동에 가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작은 디카를 가지고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들을 이곳 저곳 찍으시면서 혼자 즐거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조카와 함께 광화문에 가셨던 저희 아버지께서 두루마리 하나를 사 들고 오셨습니다. 조카의 말로는, 자기가 길가에서 서예를 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자 아버지가 직접 문구를 골라 가져왔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왜 이런 쓸데없는 걸 사왔냐며 핀잔을 주셨습니다. 셈이 밝으신 저희 어머니에게는 그 작품이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다시 외국으로 나가셨고 갑작스런 뇌경색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버지가 가져오신 그 글귀 아래에서 슬피 우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선택하신 그 글귀는, “부르면 언제나 가슴 뛰는 당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을 때는 그 모습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뒤돌아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그 자취를 선명하게 느끼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소중한 시간을 함부로 흘려보냈음에 후회하며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 순간을, 나병 환자들이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라고 표현 합니다. 이 안에서, 그들의 절박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은 문둥병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 피부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불결하게 여겨졌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벌이라고 생각되었으므로 환자들은 사람들과 접촉 할 수 없었고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제들을 찾아가 병이 완전히 나았음을 검사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사제에게 보여주라고 명하시고,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몸이 깨끗해진 사람들은 더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서로 부둥켜 안고 울며 그동안의 설움을 털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과 원수처럼 지내던 사마리아인 뿐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아홉 명 역시, 병이 나은 순간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상태를 먼저 보이고 싶었을 것이고 잔치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은 잊혀져 갑니다. 보란 듯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신의 행복한 상황에 취해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를 들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실제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보다는 청원 기도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 또한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청원 기도는 감사 기도를 통해 완전히 종료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마리아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유일하게 사마리아인 만이 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바로 이 “구원”, 즉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하늘 나라에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청원이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매사에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자세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인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사랑이란 어디서나 존재하며 우리의 곁에 보란 듯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인지 안타까워하며 후회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이 현재의 우리의 시간을 돌아봅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치지 말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십시오.
물론 우리의 삶이 아주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소 불행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힘을 주는 무언가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모르고 지나치지만, 어디서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보란 듯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 하듯,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환호송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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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진구 야고보 신부님]
<“네 닭을 잊었느냐?”>
고해소에서 교우들을 기다리다가 읽은 책 속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섰는데, 우리의 수문장 베드로 사도가, “자네! 죄가 너무 커! 들어올 생각도 말게!” 하고는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죄인은 급히 한 손으로 그 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 사도에게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사도님! 그 새 이놈을 잊으셨습니까?” 눈을 돌려 그것을 본 베드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바로 “닭 한 마리”였던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웃기는 했지만 속은 편치 못했습니다. 사실 죄로 따지자면 저도 만만치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도 그 은총을 자주 잊고 사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떤 때는 제 알량한 지식의 틀 안에 주님을 가두기도 했으니,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대로 하여 나병을 고치고, 물보다 앞서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주님이심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하며, 그 땅의 흙을 통해서나마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을 경배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께서 사랑과 자비의 신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 다가오며 자비를 청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율법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따릅니다.
그 모두가 말씀대로 하여 병이 나았지만, 정작 그분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한 이는, 율법과 상관없는 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율법을 넘어서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믿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다윗의 후손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 것도, 구원은 옛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실하신 사랑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변함없음을 믿는다면, 우리도 자신의 “선하지 못한 온갖 틀”을 부술 수 있어야 합니다.
겉만 새롭고 속은 여전하다면, 주님 곁을 슬쩍 떠난 아홉 명의 나병환자나 “새벽 닭”을 잊은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잊지 말고, 꾸준함과 인내로 그 은총을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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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님]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발병한 나병으로 청춘의 모든 꿈을 접고 일생을 방랑하며 그 한을 시로 남기고 1975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는 이런 절절한 내용입니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 꽃과 나비가 /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이 시는 나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시인이 세상의 편견과 멸시를 받고 “나도 사람이올시다!”라고 목메인 절규를 한 시입니다.
문둥이, 나병, 한센병….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으로서 최소의 기본권조차 박탈당하는 병이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서 바로 이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은 분명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놀라운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만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듯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어쩌면 예수님의 물음은 우리 모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나병 환자처럼 더럽고 흉한 죄악으로 물든 우리의 영혼을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깨끗하게 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책임을 묻거나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무조건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례성사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을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 중의 하나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삶의 양식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온갖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이방인 나병 환자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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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강건 빈첸시오 신부님]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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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람>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곁에 있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멀찍이 설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멀찍이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눈 돌린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귀 막은 사람에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곁에 두지 않은 사람을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없어지길 바라던 사람을 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듣습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을 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듣고 품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기에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기에 살 맛 나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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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언젠가 사제들하고 등산을 하다가 급한 볼일 생겼습니다. 마침 제법 큰 바위가 있었고, 사람들이 없는 확인하고 그 바위 옆으로 돌아가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화장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수건으로 닦고, 그것을 덮었습니다. 일을 보고 가다가 되돌아 보니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돌들을 주어다가 그것을(똥) 덮으려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제가 일을 보았던 큰 바위 앞에서 모여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제가 일을 본 후에 저희 뒤를 따라왔던 사람이 돌로 놓은 그곳에 돌을 하나씩을 쌓아놓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법 큰 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큰 바위 밑에 제법 큰 돌탑이 있으니까, 자기들도 돌을 쌓고, 손을 비비면서 빌고 있었습니다. 저는 민망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해서 못 본 척하고 얼른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도를 하는데 “참 많은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 모르고 한 일이긴 하지만 똥에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기도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셨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외침 속에는,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은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10명의 나병 환자들을 낫게(치유)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침을 받은 10명의 환자 중에 이방인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돌아온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믿고 나아온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성물을 안겨 주셨습니다. 감사에 더 큰 감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의 육신뿐만 아니라, 너의 마음에 그동안에 있었던 미움과 원망은 사라지고 대신 평온한 마음을 주리라. 그리고 이제 네가 하는 모든 일마다 잘되게 해 주리라.”
참된 감사는 은총을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후부터는 그러면 어떡할 것입니까? 그 흉한 모습으로 어디 가서 살 것입니까? 병 고침을 받아도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들을 반겨 줄 것입니까? 그들이 갈 곳은 다시 자기 마을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말없이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더 큰 은총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홉 사람은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구원(영원한 생명)도 놓쳐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병 고침을 받아도 예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입니다. 이제 “오직 예수, 당신 이름만을 부르며….”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돌아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미 주신 것, 그리고 미리주신것을 기억하면서 그 은총을 깨닫는 것, 거기에서 감사가 출발합니다.
오늘 눈을 뜨고 살았구나! 먹고 싸고 자고 숨 쉬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니 용서받고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의 말씀 듣고, 영성체하는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즉, “원수는 물에 새겨 흘려보내서 잊어버리고, 은혜는 돌에 새겨 오랫동안 감사하며 기억하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도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까 1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감사하는 데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감사가 신앙이고 축복이고 은총의 출발점입니다.
고운님들 모두 감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어 만사형통하시고,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고운님들의 자녀가 간절히 원하는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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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83)
♧♧ 시편 55편 9절….
"폭풍의 세찬 바람 피하여 은신처로 서둘러 가련마는..."
‘폭풍(히브리어. 르아흐 소아)...’은 문자적으로 ‘돌진하는 바람’이란 뜻이며, ‘세찬 바람(히브리어. 시아르)’는 ‘회오리바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이것은 매우 극심한 환난을 상징하는데 곧 압살롬의 반역이 매우 거세고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마치 비둘기가 폭풍과 세찬 바람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비바람을 피하듯, 예루살렘 궁전을 벗어나 피신하여 압살롬의 반역이 평정되기까지 요르단 강 동쪽 지역의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사무엘 하권 17장 27절. 참조)
♧♧ 시편 55편 10절….
"주님, 엉클어 버리소서. 그들의 말을 갈라 버리소서. 성안의 폭력과 분쟁을 제가 봅니다."
* 그들의 말을 갈라 버리소서...
다윗은 예루살렘 성안의 죄악상을 창세기 11장 바벨탑을 쌓은 노아의 후손들의 죄악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기 11장 4절).’고 하며 하느님께 도전했던 후손들이 하느님의 강한 섭리에 의해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듯이, 다윗은 하느님의 성읍에서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를 대적하는 무리들도 하느님의 강한 섭리로 인해 그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스스로 멸망하게 되기를 비유적인 표현을 써 간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간구는 훗날 압살롬의 참모 아히토펠의 계략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아히토펠이 압살롬과 결별한 탓에 반역의 무리들이 이내 다윗의 군대에 패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사무엘 하권 17장 1-14절. 참조)
* 성안의 폭력과 분쟁을 제가 봅니다...
이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를 들고자 사전에 치밀하게 음모를 꾸민 것과 마침내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을 가리킵니다.(사무엘 하권 15장 1-12절. 참조) 평소 하느님의 축복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처럼 폭력과 분쟁의 장소가 되어버렸으니 이는 과거에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채 온자 죄악과 방탕에 취하여 결국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한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하게 해줍니다.(창세기 19장. 참조)
♧♧ 시편 55편 11절….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성벽 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 안에 환난과 재앙이..."
*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성벽 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는 압살롬의 무리들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편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현재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악인들의 손 안에 넘어가 있음을 하느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 안에 환난과 재앙이...
압살롬과 아히토펠이 불의하게 권력을 탈취하고 자신들의 야심만을 채우려든 결과 예루살렘 성에는 선보다 ‘사악함’과 백성에 대한 ‘학대’만 있을 뿐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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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참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 어렸을 때 집의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상입니다. 어렸을 때 모 만화잡지에서 보았던 미래의 세계에 대한 예측들이 실제로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안전한 시대를 살면서 번영을 누립니다.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훨씬 더 높은 행복도를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큰 절망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유하고 안전한 곳에 살수록 자살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조건 속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희망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위해 통제력, 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통제력은 희망을 방해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희망을 향해 노력할 이유를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같은 행동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있을 때 희망을 더욱더 쉽게 찾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통제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같은 신앙으로 하나를 이루는 주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늘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분명히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통제력 없이 살 때 희망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에만 급급하다면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과연 희망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 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비를 청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지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받은 은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때만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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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날씨가 쌀쌀해져서 바지를 갈아입었습니다. 전에 입던 바지를 빨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지갑, 손수건, 안경 닦는 수건을 꺼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문득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생각났습니다. 노트북의 자료를 사무실 컴퓨터로 옮기면서 사용했던 메모리 카드입니다. 혹시 하고 빨래 바구니에 넣었던 바지를 살피니 거기에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묵주반지도 있었습니다.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세탁기에 넣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일 멀리 있는 아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제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성격이 깔끔하시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저의 입맛에 맞도록 세심하게 준비해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교우분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도와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30분만 걸어가면 아담한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거위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물고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보고, 담소를 나누는 노인도 봅니다.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유명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만을 기억하는 건 그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드렸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을 기억하는 건 치유된 10명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이 치유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영혼이 치유되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 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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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삶>
-믿음의 삶-
하느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참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은 어지러워도 하느님은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올해는 우리 요셉수도원에도 근래 보기 드문 풍작으로 배들이 크고 잘 생기고 색깔도 좋고 맛있고 수확량도 많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탓할 바 사람인 우리들이지 하느님은 전혀 탓할바 못됩니다. 참으로 우리를 감사, 감동, 감탄케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즘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을 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이 크고 깊은 사랑은 온통 아름다운 자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할 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어제 역시 참 아름다운 날, 산책중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오/사랑스러워라/아름다워라/황홀한 기쁨!
하느님 손수 만드신/살아 있는 그림 성경책/자연!
행복하여라/자연 감상鑑賞시간/자연 관상觀想 시간!
하느님을 뵙는 시간/주님과 함께 걷는/산보散步 시간!”-
반면 일간신문 1면 기사가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어둡고 우울한 기사였습니다. 일반인 43.5%가 만성적 울분을 경험하고 있다 합니다.
-‘조국 대전’에 참여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가 수십 수백만이고, 직장에서 쫓겨나 분노한 노동자, 손님한테 갑질을 당하고도 울음을 삼켜야 하는 콜센터 직원, 학력과 계급의 대물림에 좌절하는 특성화고 학생들 사방에서 들려 오는 울분의 목소리입니다.
울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울분이 사회의 부당함이나 불공정함을 경험하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때문에 울분에는 분노와 억울함, 실망감과 복수심, 무기력감, 슬픔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울분, 이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 자연을 떠나 자초한 불행도 큽니다. 하느님에게서, 자연에게서 멀어질수록 인간성도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믿음, 궁극의 희망, 궁극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 버립니다. 하느님과의 연대가 우선입니다. 불신, 절망, 미움이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환경 탓만 하면 역시 답이 없습니다. 우선 믿는 나부터 내적혁명의 자세로 살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참 나를 회복하여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신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 아름다운 삶-믿음의 삶-’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겸손하십시오.
겸손한 삶이 아름답습니다. 참 믿음은 겸손함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워 질수록 겸손이요 멀어질수록 교만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주인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겸손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느님은 인종, 국적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분이시고 회개한 자, 겸손한 자,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 겸손해진 나아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그대로 믿음의 겸손, 믿음의 순종입니다. 그러자 나병환자 나아만은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피부와 더불어 마음도 치유되어 깨끗해 졌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요르단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일상의 모두입니다. 그러니 그 멀리 요르단강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마음으로 살 때 심신의 치유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성지순례 안해도 됩니다. 세상 그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이니 오늘 지금 여기 거룩한 일상의 강물에 심신을 담글 때 심신의 치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 미사 은총의 강물에 심신을 담금으로 치유, 구원받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깨끗한 속살은 바로 몸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마음도 깨끗해 졌음을 상징합니다. 교만했던 마음도 순종의 겸손으로 깨끗해 졌으니 심신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이어지는 나아만과 엘리사가 주고 받는 대화도 참 아름답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둘 다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종으로 고백하는, 흙처럼 겸손히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나아만, 참 순수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시리아 사람 장군 나아만이 아니라 이런 순수한 인간 나아만입니다.
일체의 선물을 거부한 대신 참 좋은 선물, 흙을 나아만에게 선물한 셈이니 참 멋진 예언자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겸손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겸손할 때 몸의 치유와 더불어 마음도 치유되어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둘째, 기억하십시오.
기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억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늘 잊지 말아야 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성생활에 망각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보고 기억하라 눈에 보이는 온갖 성물들이요 잊지 말고 늘 기억하라 있는 전례입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매일 미사와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고백의 기도는 필수입니다. 고백과 기억은 함께 갑니다. 우리가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그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절대 고백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필요하다 느낄 때마다 하시기 바랍니다. 고백따라 가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초창기 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우리 역시 바쳐도 좋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기억할수록 우리도 언제나 성실하신 예수님을 닮아 성실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셋째, 감사하십시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에 저절로 감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감사요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원망이요 불평불만입니다. 감사 또한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감사할 때 기적입니다. 천형이라 칭하는 나병도 감사할 때 치유되어 천복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천형같은 질병도 천복으로 변합니다. 우선 나병환자 열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주님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비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치 복음의 나병환자처럼 자비송의 청원기도로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 영적 나병과도 같은 탐욕과 교만도 치유받으리라 믿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말씀에 치유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복귀한 나병 환자들입니다.
물론 주님의 일방적인 치유의 기적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의 은총과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만나 일어난 치유의 기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안타까운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치유 받은 열명 나병 환자중 감사와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던 사람은 단 하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바로 이런 자세로 미사를 드릴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되는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입니다. 제1독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겸손한 믿음의 본보기였듯이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하는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둘 다 이방인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열중 한 사람만이 감사와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왔으니 1/10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는 지요. 제가 볼 때 아홉은 반쪽짜리 육신의 치유일 뿐이고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라 생각됩니다. 감사와 찬양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온전한 전인적 영육의 치유입니다. 이런 기쁨이 진정 우리의 힘이 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사마리아 인에 대한 전인적 영육의 치유의 구원선언처럼 들립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에 믿음으로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의 믿음있어 영육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상경의 여정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이자 초월적 거점인 하느님의 자리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인류의 영적 중심지임을 상징합니다.
사람 눈에 유다인과 이방인들인 시리아인, 사마리아인의 구별이지 하느님 눈엔, 예수님 눈엔, 예루살렘에서 보면 모두가 한 인류 가족에 속한 누구나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종파에 관계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겸손과 감사의 믿음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이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로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겸손과 기억, 감사와 찬양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참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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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교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간은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은 인류역사 안에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려준 벌이라고 일컬어진 질병이었습니다. 한국의 한하운(韓何雲) 시인(詩人)의 시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는 1920년에 태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나서 남긴 시(詩)가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천형,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말하는 그 병의 비극성(悲劇性)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셨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만 생각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寓話)들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풂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알아듣고,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갓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스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失意)에 차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운 일들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보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우고 계획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은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바삐 가야 하였습니다. 각자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나병이라는 불행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안에는 초기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던 신앙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에게 와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疎外)시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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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던 예수님 앞에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마주오며 소리 높여 간청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라는 젊은 예언자가 자신들과 같은 나병은 물론 갖가지 질병을 치유해준다는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만이 자기들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나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은 현대의학에서는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모두가 무지했던 시대에는 마치 천형처럼 여겨졌지요. 환자들은 육신의 고통보다 하느님께 벌 받은 자라는 낙인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로 더 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마주친 장소가 사마리아도 아니고 갈릴래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이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기 전의 한 지점이라는 장소적 배경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어떤 마을 공동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슬픈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치라서 그렇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전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모두가 피하던 그에게손을 내밀어 직접 대시며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는데(루카 5,13 참조) 오늘은 직접 치유하는 절차를 생략하시고 사제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 상태가 호전되면 사제에게 보여 치유를 확인받는 율법 규정(레위 14,2-3)을 준수하라고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 마음에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번져 치유를 결심하신 것이니, 그 치유가 일어난다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환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사제에게로 발길을 돌립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마르 11,24)는 가르침이 그들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어느새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믿고 가는 동안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 놀랍고 은혜로운 체험은 환자 무리를 두 방향으로 가릅니다. 아마도 아홉 명은 서둘러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가족이 있는 마을로 바삐 뛰어갔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들에게는 온전해진 육신으로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과 소속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무엇보다 컸던 게지요.
"한 사람은 ...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되돌아 옵니다. 제도적 확인과 소속의 회복보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자동반사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유다인 입장에서 부정하다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누구보다도 철저히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시고 있는 셈이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열 명의 환자들 모두 말씀에 순종하여 육신의 질병을 치유받았습니다. 그 중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명은 그에 더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감사는 육신의 치유를 완성하고 확증하는 마침표인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여는 문입니다.
제1독서 대목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나병 치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언자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와 손을 얹는 직접적 치료 행위 대신,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런 무성의해 보이는 대우가 못마땅했지만 부하들의 권유로 이에 따르지요. 그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실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말씀은 듣는 이의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엘리사가 직접적인 치료 행위를 했다면 이방인 입장에서 엘리사의 능력으로 치유되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엘리사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선으로 자기 역할을 한정했기에 이처럼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집니다.
제2독서에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티모 2,10).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롭고 한계를 모르며 경계를 넘나듭니다. 말씀은 사람이 처한 마치 천형과도 같은 어떤 극한의 상황도, 비참한 처지도, 막막한 현실도 녹여내고 건너가게 하는 힘입니다. 단,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2티모 2,13).
그분의 성실함!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이유입니다. 그분은 당신 입에서 나간 말씀, 아니 그 말씀이 미처 소리를 입기 전에 품은 마음의 연민과 결심까지도 끝까지 성실히 완성하시는 분이시지요.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그러니 그런 주님의 성실함을 믿음으로써 치유를 얻고, 감사로써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얼마간 어느 정도 치유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족 같지만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지요(요한 4,9 참조).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유다인, 사마리아인, 또 다른 이방인 할 것 없이 한 무리를 이루어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공동체에서 저마다 소외되고 밀려난 이들이 사마리아 고을도 갈릴래아 고을도 아닌 그 "사이"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지내며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누가 진짜 "병든 이"일까 하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차별과 분열, 무시와 소외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이들이 "병든 이"일지, 아니면 병들고 허물어진 육신을 끌어안고 서로 기대고 보듬으며 함께 살 길을 찾는 이들일지... 오늘은 예수님께 다가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얼굴이 새롭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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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의 영성의샘물
<일요일은 다른 날과 구별하라>
일요일에도 온갖 모임과 계획으로 분주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일요일의 의미를 망가뜨린다.
일요일은 우리가 다른 날과 구별해서 외부와의 과제와 기대감을 차단한 날인데도 말이다. 모든 시간이 비슷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요일이 일상이 되면 일상도 역시 무의미해져 버린다.
일요일을 통해 한 주일의 흐름을 깰 수 있듯, 일 년은 축제(구원의 예배, 미사)를 통해서 깨어진다.
축제를 통해 사람들은 잊힌 나날을 되새기고 그 옛날 신성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중에서
♣ 주일은 하느님의 날, 즉 주님의 날이고 복을 주시는 날이며 거룩히 보내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날에 하는 사회의 모임이나 활동을 주일날에도 한다면 주님의 날을 내 날로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일상의 삶을 살고 일요일에 공동체가 모여 미사(예배)를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온전히 일주일의 삶이 완성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주일의 신성한 시간의 축제를 통해서 일상의 삶이 거룩해집니다.
구원의 축제인 주일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시간의 주인이신 영원한 분의 영원한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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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사랑받는 이유>
"열 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늘 있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물이 끊기면, 전기가 없으면
그때 비로소 마음에 자극이 되는
인간의 버릇없음을 예수님께서 한대 치십니다.
필요할 때는 살살거리고 얻고나면
언제그랬냐는듯 고얀 심보를 질책하십니다.
작은 것에도 깊이 감사하는 사람,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이는 사람,
그의 겸손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무뎌지는 마음 체크하세요
성당 처음 나온 사람이
예기치 않게 복 받습니다
예수님한테 사랑받고 싶으면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사랑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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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이 시월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집니다.
하느님께
돌아갈
우리 모두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자체가
자비이십니다.
자비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끝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치유는
모든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자비를 올바로
체험한 이는
자연스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깨어나는
삶으로 이끕니다.
영광의 삶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이렇듯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 돌아가
영광을 드리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감사와 찬미
기쁨과 영광이
중심이 되는 은총과
자비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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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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