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À la Sorbonne il y a plein de gentillesse,
Mais, il n’y a pas de pardon.“
“소르본 대학에는 충만한 친절함이 있지만,
그러나 용서란 없다!”
내가 파리1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등록하고
처음 만났던 한 벗에게서 들은 충고였다.
‘친절함이 충만하다’는 말은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용서가 없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두렵게 하였다.
하지만 점점 더 이 말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은 한 참 후에서였다.
파리에 대한 첫 인상은
어디를 가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작은 소르본 광장에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의복이며, 말이며 모든 것이 컬러풀하였다.
‘다양성 속의 통일, 무질서 속의 질서’가 소르본의 첫 인상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의 교수나 학생들 그리고 직원들은 매우 인내심이 깊고
배려심도 깊고 참 친절하였다.
친절하다는 것은 다만 말을 부드럽게 하거나 웃음을 보여주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친절하다는 것은 상대방이 법이나 질서를 잘 이해하도록 그리고 납득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을 납득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또박 또박 설명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사정을 잘 들어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외국인들이 많은 학교여서 특히 문화나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토록 아주 신경을 쓰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가끔 어떤 외국인 학생들은, 특히 아랍인들과 동양인들은 이러한 친절을 악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에게 관대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거짓으로 사연을 만들고 자기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과장하면서 자주 상식과 관습을 벗어나는 일들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러한 일들이 습관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학교는 그야말로 무질서와 혼란이 남무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르본 대학에서는 상식을 무시하고 법이나 관습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용서’ 즉 ‘봐주기’라는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법과 관습 그리고 상식적인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지만, 그러나 법과 상식을 무시할 때 용서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친절’은 외국인들이 법과 관습 그리고 상식적인 일들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잘못이나 오류를 적당히 봐준다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가끔 이들의 이 같은 행위를 잘못 이해한 외국인 학생들은 ‘소르본 사람들은 겉으로는 친절한 척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아주 비정하고 인정사정이 없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아마도 오늘 날의 한국사회는 ‘친절함은 아주 드물게 보이고, 용서는 도처에서 보인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일상에서 그리고 메스컴에서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을, 심지어 범법적이고 불법적인 일들을 거의 매일 접하게 되지만, 심각한 문제들도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리고, 엄격해야 할 법적 도덕적 잣대는 너무 쉽게 무시되고 잊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분야에서 작은 일에도 철저하게 엄격하게 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친절함을 느낄 수가 있는 사회적 풍토 속에 살 수 있을 것이다. 물이 가득한 저수지의 보에 난 작은 구멍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 그 보는 무너질 수밖에 없듯이, 작은 것이라 하나씩 무시하다 보면 결국 사회전체가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불친절함으로 가득 차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