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정전(宣政殿) 동궐도(東闕圖)의 일부 - 지정번호 : 보물 제814호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便殿)으로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던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러나 1471년(성종 2년)에는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1553년(명종 8년)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하는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461년(세조 7년)에 조계청(朝啓廳)으로 불리우던 것을 선정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시에는 다른 전각들과 같이 소실되었으나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건하였으나 인조반정 시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1647년(인조 25년)에 중건하였다. 당시 중건공사에는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헐어 사용하였다. 이후 1674년(현종 15년)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현종이 동년 8월에 병으로 승하하여 그 시행여부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은 인조 때 중건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정전은 일제강점기에 변모되어 최근까지 원형을 잃어버린 상태로 존속해 왔다. 동궐도를 살펴보면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복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선정문 전면에도 다시 행각이 설치되고 조정문(造政門)이 있었다. 최근 정비공사를 통하여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복도는 복원되었으나 선정문 전면의 행각과 문은 복원되지 못하였다. 남행각과 서행각은 정비공사를 통하여 연결되었으며 북행각의 동측끝은 2칸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동행각은 희정당이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어 공간적 여유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담장으로 대신하였다.
기단은 장대석을 1단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 규모로 선정전을 축조하였다. 기단 상부는 박석으로 마감하였던 것을 최근 정비공사 시 방전(方塼)으로 교체하였다. 기단 전면에는 월대(月臺)를 구성하였는데 최근 정비공사 직전까지 바닥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장대석 3단 위에 장대석 갑석을 한단 얹은 원래의 모습을 되살렸다. 월대 상부는 다른 궁궐과 같이 박석으로 마감하고 청동제 드므를 2개소 설치하였는데 이는 화마를 막기 위한 벽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한 3개소의 계단을 두고 측면에는 각각 1개소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좌우측면의 돌계단에는 전면과 달리 둥근 형태의 소맷돌을 놓아 장식하였다.
내부 바닥은 귀틀과 마루짢는 방식이 변형되어 있던 것을 바로잡아 최근에 전통 우물마루로 다시 깔았다. 초석은 둥근 원형의 주좌가 있는 것으로 단면상 타원형으로 위가 약간 줄어 드는 형태이다. 이런 초석은 경희궁 홍화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둥은 12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2개의 고주(高柱)를 사용하였다. 고주는 후면쪽은 생략하는 감주법(減柱法)을 사용하고 전면쪽으로만 설치하였다. 후면에는 측면 평주열에서 뒤로 물러나 작은 직경의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의지하여 후벽(後壁)을 만들었다. 이러한 평면 형식은 편전 용도로 사용하는 경복궁 사정전과 유사하다. 다만 사정전의 경우는 후벽을 이루는 기둥이 측면 평주열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며 기둥 직경이 전면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의 것을 다포계의 법식에 따라 배열하였다. 살미외단은 2앙서, 3제공은 수서이며 4제공은 운공으로 처리하였다. 앙서의 형태는 원호를 그리면서 올라가는 모습으로 후기의 것과는 양식적 차이가 있다. 앙서의 형태는 비슷한 시기의 건물인 창경궁 명정전, 홍화문과 문묘 대성전 등과 유사하다. 주상포에서는 4제공이 날카로운 삼분두를 유지하고 있어 이 역시 후기와는 다른 중기적 특성을 보여 준다. 주간포의 살미내단은 교두형으로 마감하고 3출목에서 나온 초각이 천장을 받는 형식으로 마감하였다. 반면에 주상포 살미내단은 2제공부터 일체화하여 초각으로 처리하여 보아지 형태로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한편 귀공포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제공, 첨차, 귀한대가 교차하는 곳을 앙서, 수서 등으로 빈틈없이 장식하는 수법과 달리 일부를 생략하는 간화수법(簡化手法)을 관찰할 수 있어 중기적인 수법을 발견할 수 있다. 선정전 공포는 부재를 비교적 날렵한 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전체입면에서 공포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외목도리를 제외한 도리는 모두 7개를 사용하였으며 보는 대들보와 종보 등 2개를 사용하여 가구를 결구하였다. 대들보는 후면 평주 공포 위에서 고주 몸체에 끼우는 방식으로 결구하고 전면 평주와는 툇보를 이용하여 연결하였다. 고주는 종보 하단까지 연장되고 반대편에서는 대들보상에 동자주를 세우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다. 종보와 종도리는 역시 동자주를 세워 결구하는 간략한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측면 평주와 대들보는 충량으로 결구하여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을 받치고 있으며 외기도리를 짜아 측면서까래를 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창호는 사면 모두 세살분합창호이다. 천장은 작은 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어칸에는 쌍봉문(雙鳳紋)을, 나머지에는 육엽연화문(六葉蓮花紋) 5개를 그려 장식하고 있다. 외부 단청은 최근 공사 시 새로이 개채한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모루단청이나 도리 뺄목이나 추녀에는 원래의 흔적을 찾아 금문(錦紋)을 베푼 금단청을 시공하였다.
내부 어칸에는 어좌(御座)가 배설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이 둘러져 있다. 상부 천장에는 1단을 함입시켜 보개(寶蓋)를 만들어 장엄하고 있다. 보개는 장방형 평면의 4모서리를 모접기하고 다포계의 공포로 장식하였다. 보개의 천판(天板)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구름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정전인 인정전 어좌 상부도 역시 사정전과 같이 봉황으로 장식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와는 드물게 청기와를 사용하여 마감하여 궁궐 내에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청기와는 경복궁 발굴 시에도 발견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선정전이 유일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취두와 용두로 장식하였으나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생략하였다. 한편 마루에는 양성을 생략하였는데 이는 최고급의 재료인 청기와를 사용한 집에 굳이 양성으로 마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글, 도면 : 문화재청) 정면도 평면도 횡단면도 종단면도 동측면도
왼쪽의 청기와 건물이 선정전, 우측의 양성된 지붕의 건물이 희정당. 선정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측 팔작집으로 청기와를 올리고 남쪽의 선정문까지 복도로 이었다. 동측면. 추녀마루에 잡상을 생략했다. 창호는 사면 모두 세살분합창호이다.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한 3개소의 계단을 두었다. 측면에는 각각 1개소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좌우측면의 돌계단에는 전면과 달리 둥근 형태의 소맷돌을 놓아 장식하였다. 초석. 편액. 선정전 내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어 문무관리들이 옥좌 앞에 두 줄로 앉아서 정사를 논의 했다. 어좌(御座)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이 둘러져 있다.(이미지 : 문화재청) 상부 천장에는 1단을 함입시켜 보개(寶蓋)를 만들어 장엄하고 있다. 보개는 장방형 평면의 4모서리를 모접기하고 다포계의 공포로 장식하였다. 보개의 천판(天板)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구름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이미지 : 문화재청)
천장은 작은 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어칸에는 쌍봉문(雙鳳紋)을, 나머지에는 육엽연화문(六葉蓮花紋) 5개를 그려 장식하고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의 것을 다포계의 법식에 따라 배열하였다. 살미외단은 2앙서, 3제공은 수서이며 4제공은 운공으로 처리하였다.
귀공포. 추녀. 사래에 토수가 끼워져 있다. 선정전에서 바라본 복도. 선정문 밖의 마당이 보인다. |
출처: 나무과자 원문보기 글쓴이: 순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