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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71) : 다시 모이자
마태복음 18:15 - 20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은 청년 주일입니다. 어느 해보다 우리 청년 주일이 더욱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20대 30대 젊은 크리스찬들이 참으로 교회에 다니기 힘든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사실 과거에 젊은 크리스찬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굳이 관심을 안두어도 우리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았죠.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교회에 남아있는 청년들도 참으로 힘듭니다.
과거에는 청년들이 힘들다 라고 얘기하면 우리 어르신들이 기도 안해서 그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그렇게 얘기했지만, 요즘 청년들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청년 크리스천들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게 그들의 인생의 삶을 살아가고 신앙도 살아갑니다.
그들도 이제 교회에서 위로받고 싶고요 격려받고 싶습니다. 우리 청년들 보시면 괜찮아 힘내라 잘한다 이렇게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청년부 사역자 시절에 우리 청년부회장하고 제가 스스럼 없이 지냈습니다. 편하게 지냈더니 그 청년부 회장이 제가 살던 기숙사에 찾아오겠다고 하면서 로즈마리 묘종을 선물로 사왔습니다. 함께 밥도 먹고 학교도 좀 구경시켜주고 그 로즈마리를 저는 창문에 놓고 일주일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로즈마리가 시들어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청년 회장이 그때 너무 좋았다고 임원들을 다 데리고 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에 제가 한 주일 설교가 뭐였냐면 생명을 살리는 크리스찬이 되자 였습니다.
제가 생명을 살리는 크리스찬이 되자고 설교했는데 로즈마리를 다 죽여놨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날부터 물 주고 거름 주고 계속 안수기도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쪽인가 다시 살아나는데 다시 바로 서지 못하고 옆으로 이렇게 살아 가지고 옆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청년회장이 와 가지고 그걸 보더니 목사님 로즈마리가 죽었다 살았네요.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야 목사는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죽일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부활시킬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그 청년과 함께 같이 그 청년부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서 오늘 제가 사실은 첫째 주일 우리 4부 예배 때 설교하는데 청년 주일에 맞춰서 셋째 주에 제가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설교 끝나고 우리 청년부들에게 선물을 성도님들 대신해서 제가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좋은 선물을 줬으면 좋겠는데 저도 똑같이 로즈마리 묘종을 우리 청년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꼭 생명을 살리는 우리 젊은 크리스찬들이 되어 달라고 권면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 새벽 이슬같은 청년과 같은 신앙으로 한 주를 살아가서 늘 하나님 주신 삶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이렇게 인사나누길 원합니다.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크십니다.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하니까 크시네요.
예 청년의 마음으로 새벽이슬 같은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에 말씀 일흔한번째 '다시 모이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저희들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에는 전체 장 제목이 있는데 그 전체 장 제목은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 '천국은 누구에게 허락될 수 있는 가' 라는 장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지지난주 우리 어린이 주일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 가 천국에 큰 자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리고 지난 주 어버이주일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주께 대하듯 하는 자를 하나님은 천국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자 지극히 작은 자를 신앙으로 대하는 자들이 천국에 갈 수있는 선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무조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작은자를 잘 대한다고 해서 그런 조건으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든, 작은자를 하나님 대하듯 대하든, 그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죄인이지만 천국의 삶을 소망하며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지라도 지극히 작은자를 하나님 대하듯 대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공로와 수고로도 구원받는자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 모두는 죄인 임을 인정하고 죄인인 것에서 어떻게 천국을 허락받으며 천국의 큰 자가 될 수 있을가를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첫 번째는 구원의 문제는 교회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교회에 있다. 그것을 마음에 품을때 우리는 천국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죠.
죄의 문제든 구원의 문제든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의 삶에서 어떤 문제든 교회에서 해결 받아야 천국을 꿈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17절에 이렇게 증거합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5절에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관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이야기하죠.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5절의 증거는 어떤 죄의 문제든 구원의 문제든 그 문제가 발생했을때 첫번째 해결할 수 있는 거는 사람 대 사람, 인간의 관계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문제 하나님과의 일대일 문제 속에서 발생된 죄 문제를 제외하고 저와 여러분이 짓는 모든 죄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범하는 죄이지요. 범하는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주로 인간의 관계 안에서 범하는 죄의 문제는 먼저 성경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느냐? 네 죄로 인해서 상처받은 자 아픔이 있는 자 그것으로 고통을 겪고있는 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함으로써 탕감받고 구원의 길을 걸으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죄의 문제의 첫 번째 해결은 인간적인 인간의 관계적인 문제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첫 번째 죄와 구원의 문제 해결은 사람과 사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의 방법을 16절에서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율법을 통해서 해결하라.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게 하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두세 증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곧 두번째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또 우리 삶에 어떤 문제의 해결 방법은 법적으로 해결할 수있다는 것이죠. 성경적으로는 율법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라고 얘기합니다.
처음에 15절의 말씀대로 사람과 사람 사람 안에서 그것을 해결해 보는 것 곧 죄인은 자신으로 상처받은 이들 자신에게 고통받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내 죄를 탕감받을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게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법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그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을 만나서 15절의 말씀대로 일대일로 만나서 그 사람과 만나서 권고하고 권면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해서 해결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16절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문제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힘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그 사람들이 모든 걸 차지하는 세상이 되는 거죠.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법이요 오늘 성경에선 율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법의 취지는 힘없고 빽이 없는 사람들이 더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억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법을 만드는 것이지요.
법의 대원칙 중에 하나는 법에 있어서 억울한 사람은 없게 해야한다는 것이 법의 원칙 중에 하나입니다. 법은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법을 만든 것이 법의 정신이라고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처벌하고 죄인을 만들려고 법을 만든 게 아니고요 우리가 사회학적으로 법을 만든 이유는 죄인을 덜 만들기 하기 위해서 사회가 죄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그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더 범하게 하고 저와 여러분을 더 죄인으로 족쇄로 묶어놓으려고 율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죄를 덜 짓게 하기 위해서 죄인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본래 취지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율법이 있음에도 우리 안의 죄의 문제, 우리 인간의 삶 속에 어떤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소유하여 도리어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이 만들어내고 율법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던 바리새인들 율법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본래의 취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율법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때는 율법이 참으로 정교했고요 율법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구원받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즘 시대를 법치주의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정치인들 다른 중요한 사람들이 다 헌법 얘기합니다. 한법 1조에서는 헌법 몇 조에서는 어떻고, 법 법 법 얘기 많이 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행복합니까?
그렇게 법을 외치는데 아마도 동의하시는 분 많지 않으실 겁니다. 이땅에 훌륭한 법이 있는데 여전히 우리 세상은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율법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라는 것이 끝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죄의 문제와 우리의 삶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15절에서 사람 대 사람, 사람 안에서 우리 인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얘기하되,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16절에서 법의 문제로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17절에 그 다음에 방법이 있다 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사람 안에서 사람 대 사람이 해결하거나 또는 율법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 그런데 그렇게라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17절에서 무엇이라 얘기합니까? 교회에 말하라.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교회에 속해 있는 크리스찬들은 지금의 15, 16, 17 절을 점점점 점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죄의 문제 어떤 세상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적어도 우리 크리스찬들은 이 방법론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람 안에서 해결하자. 해결이 안 되면 법으로 율법을 해결하고 율법으로서도 법으로도 해결이 안되면 교회로 오라는 것이죠. 물론 교회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병이 나면,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면 경찰서에 가야되고요 법원에 가셔야지요.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교에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우습고 아이러니하고 헛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 라는 것이, 어떤 이들이 병을 고치러 병원에 갔는데 오히려 병이 더 도지거나 죽고 나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병이 고쳐져야 되는데, 병원에 가는데 그 병명을 모르는 것도 많지요.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법원에 가거나 법에 그 집행자에게 갔는데 오히려 그가 이야기한 법 때문에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도 너무나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배움을 얻으려고 학교에 갔더니 오히려 편견과 선입견을 얻어서 더 무지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병을 고치고 교회가 늘상 정의롭고 교회가 풍족한 지식을 가르치는 곳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증거되는 교회 모습은 병원에서 용한 의사에게 병을 고치지 못하는 이들이 마지막에는 교회에 오더라는 것이죠.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 교회 오면 다 고친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하시면 고치실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내가 마지막 병원에서 병을 고치지 못했다면 다른 병원 찾아보자 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돌아와서 교회와서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이죠.
그것이 교회가 그동안 역사 속에 서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새벽기도 때 직접 겪은 예화로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
부교역자 시절에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의사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부인 되신 권사님이 암이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들 유명한 의사이니 많은 의사들을 만나게 해서 병을 고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장로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모든 의사를 만났고 가장 좋다는 약으로 처방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제 마음에 위로는 안됩니다. 제 영혼에 평화는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대로 교회와서 기도해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평안을 얻게 되었고,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 말씀 속에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나가니 그 가운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의사 선생님이며 최고의 인맥을 가지신 분인데 그분이 마지막 때가 되니까 자신의 진짜 인맥은 교회에 있다 라고 얘기 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을 붙잡는 인맥 나를 위해 내 아내를 위해 기도해 줄 신앙의 동료들을 붙잡는 인맥은 교회에 있더라 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가 있으십니까? 교회에 말하십시오. 교회에 말하십시오.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과 새 생명을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세상 법정에서는 억울하고 속상한 판결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 전혀 죄가 없으신 이시지만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도 또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여 있는 이 교회가 정의롭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정의롭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교회가 비난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 몸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공의로우신 분 아니십니까? 세상 법에 억울함을 당했다면 교회에서 완전하신 주님 앞에 무릎꿇고 위로 받으시고 격려 받으십시오.
세상의 수많은 철학자 교육자 자산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에 대학교수가 십만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진보 지식의 발전은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사람 됨에 대한 인성이 정말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는가는 저는 의심이 됩니다.
과거에 선생님이 부족하던 시절에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때는 한 학급이 60명에서 65번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깐, 권사님이 말도 마세요, 우리는 90 명까지 있었다고 하십니다.
저 콩나물 시루처럼 그렇게 있으셨는데, 정 안되니까 사과박스를 의자로 앉아서 공부했다는 분도 제가 들었습니다. 지금 선생님 많습니다. 하지만 참 선생이 없어요. 그때는 선생이 부족해도 참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학교가 하지 못하는 진짜 사람을 사랑하는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 학교가 하지 못하는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저희 때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회초리로 많이 때리셨습니다. 매를 많이 때리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학교에서 선생님들한테 매를 맞은 것이 정말 하나같이 다 억울했습니다. 내가 왜 맞아야 돼? 어떤 선생님은 시험지에서 틀린 숫자만큼 때렸습니다.
한 개 틀리면 한 대, 10개 틀리면 10 대를 때렸습니다. 여러분은 다 한 대도 안맞으신거 같은 표정이시지만, 저는 좀 많이 틀려서 많이 맞았습니다. 떠들었다고 단체 기합으로 다 매맞고 어떤 땐 선생님 감정대로 때립니다.
그 당시에 우리 그 차 번호가 위에 뭐 서울 뭐에 이렇게 21번 같은 표현 있었잖아요? 그날 뭐 차가 뛰어들었는데, 그 차가 서울 22번이었다고, 22번 일어나 해서는 22번을 그 번호라고 때리곤 했습니다.
저희 교장선생님의 성이 전 씨였는데, 막 화나서 전 씨 다 일어나 해서 전 씨 학생을 때리면 저희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장 선생님이 화가 났구나.
그런데 제가 그렇게 선생님께 매를 맞고 회초리를 맞아서 다 억울했지만, 딱 한 분에게 회초리를 맞은 것 사랑의 매는 여전히 제게는 기억이 되고 제 인생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아닙니다. 지금 뭐 교회학교 선생님이 애들 매를 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죠. 학교에서도 못때리게 하고 집에서도 안 때리는데 교회학교 선생님이 매를 든다고 여러분 그렇게 교회학교 선생님께 한번 부탁해 보십시오.
때리는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르칠 겁니다. 아무튼 저는 주일 학교 선생님이 때리신 매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 매로 제 신앙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매를 맞았던 이유는 거짓말해서 였습니다. 선생님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선생님 집에 놀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같이 놀다가 그냥 선생님 집에 막 처들어갔습니다.
함께 재밌게 놀다가 저녁이 되는데 한 학부형이 우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기 아이들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우리가 부모님께 얘기 안하고 온 것을 아시게 된 겁니다. 집에 보내기 전에 선생님이 굉장히 화를 내면서 훈육을 하셨습니다.
매질을 하시면서 그 선생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나는 일전 한푼 안받고 내 시간과 내 물질을 내는거다. 내놓으면서 주말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교사로서 너희를 가르치는데 대충 대충 가르쳐 주면 내가 왜 소명의 삶을 살겠냐?
회사에서도 부하 직원 한번 손찌검 안하고 군대에서도 얼차려 한번 준 적이 없지만, 너희 만큼은 혼을 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겠다. 그러시면서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날 맞은 매는 정말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가족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를 저희를 정말 자녀처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맞은 매는 부모님이 하나님이 우리를 훈육하시며 때리시는 매로 느껴졌습니다.
요즘 그런 선생님 있을까요? 유명한 인강 강사, 인터넷 강사 뭐 그 유명한 인터넷 강사가 그런 인성을 그런 신앙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자기 권리만 챙기는 선생님들 그럼 배움을 줄 수 있을까?
과외 선생님 학원 선생님이 지식 만을 가르쳐 주지 정말 인간의 성품 사람 됨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모든 이권 모든 보상 모든 대가없이 순수한 지혜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분은 저는 교회 안에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학교의 선생님들 주일학교의 선생님들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듯 교회가 진정한 지식과 지혜 사람됨을 가르칠 수 있는 곳입니다. 제가 스승의 날이라 교회주일학교 선생님께 오랜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승님, 스승의 은혜 감사합니다. 뭐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같이 늙어 가는데 무슨 스승이야? 교회 학교 선생님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야 이제는 네가 목사고 나는 여전히 집사야. 스승이란 표현 쓰지마. 같이 스승되고 같이 늙어가고 같이 신앙의 동료되자. 이건 교회에서만 있는 겁니다. 그 분은 그렇게 얘기하시지만 저는 평생 그분을 저희 영적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구원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 이제 교회 안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모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코로나가 끝나면 교회가 다 흩어지고 교회가 다 개별적인 모임을 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죠. 사람과 사람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법적으로 풀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에게 갈급한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스승이 아닙니다. 법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흥미로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영적으로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곳은 교회 뿐이라고, 주님이 임재하신 이 성전 뿐이라고 믿습니다.
보십시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에 다시 사람들이 모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모여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의 영성을 찾아야 하고 새롭게 신앙과 교제의 삶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그 교회를 생각하면서 지금의 코로나를 신앙과 믿음으로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두 사람이 모여야 한다. 두세 사람이 모여야 한다. 이것을 품고 살아갈 때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 19절과 20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성취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주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다 약속해 주고 두 사람 아니 그 이상이 모인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제하고 만나고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모이는 곳 함께 하는 곳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이 코로나가 끝나면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리고 온라인 처치 사이버 공간에 만들어진 교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죠. 많은 그런 교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반대의 교회 모습이 포스트 코로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모이는 교회 다시 함께하는 교회 다시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하고 모이는 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참된 교회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비대면 온라인 시대를 준비하고 개별화된 공간, 개별화된 시간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이야기 할지 모릅니다.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죠. 교회도 똑같이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쫓아가야지요.
말씀 속에서 교회 본래의 모습을 뭐라고 이야기하는지요? 교회가 막 생겼을 때 성령이 오순절날 강림 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제 우리가 이곳에 천국에 모형을 만들자 했을 때 처음 교회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의 말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첫 번째가 뭡니까?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줘야 한다고 얘기하지요.
이것을 나눠주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기를 힘쓰며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라고 증거합니다.
2000년 전에 인터넷에 없던 사이버 공간이라고 sns 가 없었던 때에 교회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교회는 지금 과학이 발전한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가 지켜야 할 계획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잘 들으면 세상이 칭송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 너 예배 잘 드린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구원받는 자가 늘어날까요? 아니요.
내 시간, 내 물질, 내 것은 하나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예배를 잘 드리고 생활을 잘하겠다는 것은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어린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그들을 온라인 사이버 바리새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가 어쩔 수 없이 저희들이 이렇게 온라인으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지만 이 시대가 끝나면 저희는 다시 모여야 합니다.
코로나로 무너진 예배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시 성전에 모이는 것 그리고 내 시간, 내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시간과 물질을 마음과 뜻을 다 함께 나눌 우리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모습이 있는 것 그것이 예배의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 19 절과 20 절을 다시 보십시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약속해주고 계시지요. 어떤 어려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지라도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 문제 해결되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이 우리와 동행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우린 다시 모여야 합니다.
제가 청년 때 어떤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랑 같이 조금 힘든 일인데 그 일을 하게 됐는데 제 친구가 통 연락도 안되고 안옵니다. 그래서 혼자 교회 마당에서 혼자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신 장로님 한 분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가시면서 제 모습을 보더니 저한테 오셔서 야, 도와줄게 하면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제가 장로님은 아니에요 저 혼자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도 장로님이 같이 하자고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줄게. 그 모습을 2층에 있는 부목사님이 보신 겁니다. 부목사님이 부리나게 달려와서, 아 장로님 하지 마세요. 제가 이제 도와줄테니까 장로님들 가셔도 됩니다.
장로님이 아니야, 내가 같이 도와줄게. 그러면서 그 장로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하나 보다 둘이 낫고 둘보다 셋이 낫지. 이게 교회 아닙니까? 이게 예배지요. 한 명 있는 것보다 두 분이 같이 예배 드리는 거.
두 명 보다 세 명이 같이 예배 드리는 것이 더 기쁨이 함께 영광이 되는 그것이 선교 그것이 전도가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삶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모이십시다. 모여야 힘이 되고 모여야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이 성전에 가득찬 성도님들이 뜨겁게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그때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신앙과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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