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면 성
-임 종 호-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의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킬 박사는 덕망과 학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극진하게 주위 사람들을 돌보아 줌으로써 추앙을 받는다. 반면에 하이드는 밤만 되면 나타나 갖가지 끔찍한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인으로서 대낮엔 선량의 표상(表象) 같은 ‘지킬 박사’ 행세를 하다가 한밤엔 악의 화신(化身) 같은 ‘하이드’로 변신한다는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 이는 곧 인간의 내면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고 있다.
비단 이 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선량한 사람인양 보이기 위하여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위장한다.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철학자 니체는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다. 가령, 병문안을 하는 사람 중에는 환자의 무력함을 보고 은연중 우월감을 느끼며 즐기는 심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병문안이라는 자체는 아픈 사람을 위로하여 용기를 북돋우어 줌으로써 빨리 낫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에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앓는 환자의 무력함을 보고 안도와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보상 심리가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다. 어느 여자 동창회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유명 인사 축에 들어 있는 한 여자 동창 남편이 별안간 쓰려져서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한다. 동창 회원들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병문안을 갔다. 절망감에 빠진 친구를 향해 일제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하늘도 무심하지”하면서 진지하게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친구의 불행 앞에서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지 않았고, 내심으로는 돌아오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고한다. 보상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그럴수도 있을까?
실제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잘못 되면, “그 사람 참 안 됐네! 그런 사람은 잘 되었어야 했는데..”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화제거리로 삼아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얘기한다. “이보게나, 아무개가 망했다면서. 아! 세상도 무심하구먼” 이렇게 자못 아쉬워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내세우는 감정 속에는 상반된 심사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감정이라는 재료가 위선이라는 색깔로 호도 되고 있을 뿐이다.
불구경도 마찬가지다. 불이 훨훨 타오르면, “빨리 꺼야 할 텐데, 도대체 소방관은 뭣들하고 있는거야”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시늉을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속에는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구경하며, 오히려 통쾌감을 느끼는 묘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남의 불행을 즐기면서도 행복을 기원하는양 말하는 속보이는 위선~ 바로 이런 위선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각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솝우화에 의하면 위선자를 깨우쳐 주기 위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양을 잡아먹기 위하여 양떼의 근처에 숨어서 양치기가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도저히 기회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눈앞에 양의 가죽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옳지 잘 됐구나 하면서, 교묘히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양떼 속으로 섞여서 양우리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양고기를 실컷 먹을 마음으로 밤새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마침 그날 밤 양치기한테 손님이 찾아와 양고기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양가죽을 쓴 이리가 손님 접대용으로 잡혀 죽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착한 양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죽고 마는 이리의 신세가 바로 위선자의 신세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소외감을 메꾸기 위하여 불구경하는 군중 속에 휩쓸리거나, 병문안을 통하여 자신을 위안 받으려고 하는 심리 속에는, 위선으로 각색된 시기심과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경쟁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성취되지 않을 때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시기심이다. 이 시기심이 한번 발동하면 어느 누구라도 망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자가 열등감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상대가 망하는 길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남에게 충고를 잘 하며 설교조의 얘기를 곧잘 늘어놓는 사람을 보게 된다. 설교는 남을 일깨워 주는 일로서 그 자체로는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남을 교훈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두 얼굴을 가진 자이거나 구두선(口頭禪)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 탈레스는 그의 제자로부터, ‘선생님,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그럴듯한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곧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쉽고도 괜찮아 보이는 일은 구두선이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것은 바로, 아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이다.’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다투어 말하는 자는 많고, 몸소 실천하는 자는 적었던 것 같다.
이조 시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사대부 부인들이 오랑캐를 피하여 한강을 건너면서, “만약에 오랑캐에게 붙들리면 난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하거나 물에 빠져 죽을거야.” 하면서 정절을 자랑이나 하듯 강조하는 부인이 있었는가하면, ‘그거야 그때 가봐야 알지’ 하면서 자기 일에 열중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여인들이 오랑캐에게 붙들렸을 때 오랑캐의 첩이 된 것은, 혀를 깨물고 죽겠다던 여인이었고, 두고 봐야 안다는 여인은 자결로서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세운다는 것은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고,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 허점을 호도(糊塗)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천에 옮기지 못할 열 마디 구두선 보다 한 가지 만이라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진실되고 사랑스런 마음씨를 지니고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외모에 그렇게 투영될 것이고, 반면에 진실을 떠나 살면 얼굴 모양은 또 그렇게 일그러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안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얼굴 근육은 내면 심층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해서, 그에 상응한 흔적을 기어이 얼굴에 새겨 놓고야 마는 것같다.
따라서 진실과 사랑으로 가득 찬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에 도달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구김살 없이 활짝 웃는 얼굴만큼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겠는가. 진솔함과 다사로운 미소야말로 인간이 연출해 낼 수 있는 최선의 화장술이 아닐까?
첫댓글 권사님이 결론 부분을 올려 놓으셨는데
전문을 다시 올렸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공들여 썼던 글이라서...
감사합니다
블로그로 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