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추씨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보감입니다. 오늘 우연히 이 카페에 들러 망추정 기문을 보았습니다. 하동 고전문중이 진사 추한진(秋翰鎭)님의 후손이시군요. 추한진께서는 1813년 계유생으로1846년(헌종12년)에 진사시험에 입격하셨습니다. 1848년의 아래 추씨 완(完文) 문중기록에도 이름이 있으며 조선말엽 각종 위선사업에 참여하신 기록들이 있습니다. 귀 문중에 정중한 경의를 표합니다!!!
1. 1846년 사마방목에서
崇禎紀元後四丙午式司馬榜目 憲宗12年(1846)
" 1846년(憲宗 12)의 生員·進士試 급제자의 명부다. 上同年 芸閣에서 간행했다는 刊記가있다. 試官에는 一所(禮曹)에 趙斗淳· 成遂默· 尹定鉉 등이고 二所(成均館)에 金東健· 金英淳· 趙徽林 등 이었다. 試題는 1所에 賦 <來讀晦菴新著書>, 詩<冬夜讀書題紅燭 悔從長夜飮>이었고, 2所에 賦<立義以爲土地>, 詩<朱干玉戚冕而舞大武>였는데 이외에 疑와 義의 2題가 있다. 生員試는 1등에 金益容·權基常·徐斗煥 등 5명이고, 2등에는 李維在· 金庭學· 權益和 등 25명, 3등에 宋一心· 林在華· 成載瑾 등 70명이다. 進士試 1등은 李鼎謀· 河達鏞· 韓益謙 등 5명이고, 2등은 趙秉學· 朴烱遠· 金在麟 등 25명, 3등은 趙容在· 徐榮宅· 秋翰鎭 등 70명이다. 卷頭에는 60년 전에 합격한<回榜>으로 龍驤衛 大護軍 鄭祖榮이 수록되었다. 성명 아래는 모두 일반적인 例의 기록이 있다.
2. 1866년 추씨입종문(立宗文)중에서
1866년 9월 20일 팔도의 추씨들이 화원 인흥서원에 모여 춘추(春秋)로 황단(皇壇)에 참반(參班)해야 하니 오직 인재를 종손으로 세워야 한다는 의론(議論)이 발의되어 경상도 충청도 평안도 유림과 전국 8도의 추씨 후손들이 모여 입종문을 작성하였다. 이에 1866년 병인년 9월 21일 대구부(大邱府)에 입종문을 작성하여 청원을 하였다. 이때 청원에 서명한 이로는 대구유학 추상우, 추학규, 추영규, 추용성, 추용직, 추용필, 추용위(대구 공산문중 주손), 추부령, 추곤구, 추호구, 추병수, 추병기(秋秉驥), 추병진, 청도의 추문규, 선산의 추천규, 김해의 추태구, 거제의 추려구, 경주의 추용조, 상주의 추묵준, 하동의 진사(進士) 추한진, 신령의 추호구, 진주의 추욱구, 밀양의 추철구, 추준구, 합천의 추병무, 추병만, 홍천의 추용도, 영월의 추실엽, 평산 추용칠, 추서구, 남원의 추만엽 등이다.
3. 1868년 추씨 천선록(闡先錄)에서
1800년대 중반 인흥서원을 중심으로 추씨 위선사업에 진력하셨던 분들의 기록입니다. 옛말에 공평한 의론이 천하에 있어 해가 하늘에 달려 있고, 물이 땅 속으로 다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잠깐 어두워졌다가도 크게 밝아질 때가 있고 오랫동안 정체되었다가도 반드시 소통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추문의 선대 어르신들의 좋은 덕행이 묻혀서 통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천도(天道)는 환원하기를 좋아하고 공의(公議)는 신속히 발양(發揚)되는 법이다. 우리 후손들이 바친 정성으로 큰일을 성취한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송(山訟)이다.
노당공의 무덤이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드러나자 투매(偸埋-몰래 묘를 씀)한 네 무덤이 차례로 드러나 발굴된 것이다. 이것은 선고(先考)께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를 쓰신 진심어린 정성이 연세가 더할수록 점점 독실하여 영문(永文)과 세문(世文) 등에게 직접 명하여 부지런히 일을 마치게 한 결과였다. 그 기송(起訟)은 옥과(玉果)에 사는 성옥(成玉)과 대구에 사는 득래(得來)가 앞장서서 시작하였고, 서울 사는 석필(晳弼)과 대구 사는 만구(晩九), 종진(鍾晉), 학준(學俊)이 여러 종인들과 함께 동참하였다.
둘째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다.
팔도의 유론(儒論)으로 인하여 인흥리에 사당을 영입(營立)한 것이다. 응령(應齡), 학구(鶴九), 부령(富齡) 같은 이와 석원(碩遠), 은영(誾永), 한기(漢驥)가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이에 합천에 사는 이복(仁復), 천욱(天郁), 재팔(在八), 거창에 사는 두전(斗田), 정우(正祐)가 앞장 서고, 대구 사는 학로(學魯), 창원 사는 학경(學慶), 신령 사는 만수(晩壽), 하동 사는 진사 한진(翰鎭)이 모두 뒤따라 의로운 정신으로 사재를 출연하였다. 김해 사는 병관(秉觀)은 현로(賢勞)를 꺼리지 않았다.
마침내 신도비를 현풍 땅에서 새기고, 대구 각북에서 재목감을 벌목하여 일꾼을 사서 운반을 하였는데 그 비용이 매우 컸다. 경영에 착수하는 길은 그 기지(基地)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구에 사는 연실(蓮實)이 밭을 사서 헌납하였고, 대구 사는 성윤(聖允), 시윤(時允)이 미력하나마 서원의 동재(東齋)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대구 사는 상우(尙佑)가 권하지 않았는데도 맨 먼저 사당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대구 사는 성운(成雲), 중억(仲億) 이 그 동당(同堂)들과 함께 세 개의 문을 만들었다. 신령 사는 경찬(慶瓚), 경로(慶魯), 보구(葆求), 형구(瀠求)가 소문을 듣고 와서 신문(神門)과 서재(西齋)를 만드는 일을 분담하였다. 대구 사는 치붕(致鵬)이 신도비를 주간하여 돌을 다듬고 글씨를 새겨 세웠는데, 그의 숙부 홍직(弘直)이 그 일파를 감독하여 함께 하였다. 대구 사는 홍필(弘弼)이 강당을 담당하였는데, 그 종숙 용구(容九)가 자기 당내의 일가들을 이끌고 와서 도왔다. 묘정비(廟庭碑)가 없을 수 없다기에, 대구 사는 연석(演錫)에게 제반 수응(酬應)하는 절차를 위임하였고, 대구 사는 석구(錫九), 일태(日泰)가 이를 관할하였다.
역량에 따라 일을 분배한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구 사는 유실(有實), 치선(致璇), 백천(百千), 기풍(基豊), 철득(哲得), 울산 사는 덕홍(德弘), 선산 사는 응수(應秀), 경주 사는 치덕(致德), 치현(致賢), 동래 사는 일관(日寬), 장옥(長玉), 충주 사는 계원(桂元)이 일파들과 상의하여 각각 일면씩 담당하였다. 의흥사는 춘세(春世), 밀양 사는 흥칠(興七), 영천 사는 춘복(春福), 통영 사는 선규(善奎), 양산 사는 광우(光禹)가 능력에 따라 정성을 보내왔다.
대구 사는 만후(晩垕), 칠곡 사는 득종(得宗)이 성심으로 물자를 공급하였는데 불행히 단명하고 말았다. 대구사는 부령(富齡), 병수(秉收), 성규(聖奎), 학구(學求), 재풍(載豊), 택풍(宅豊), 성칠(成七), 치원(致遠), 성우(聖佑), 두찬(斗贊), 홍식(弘植), 광령(光齡), 곤구(崑求), 경석(慶錫), 계순(繼淳), 계조(繼祚), 선산 사는 영조(永祚), 창원 사는 성룡(性龍), 성화(性華), 서원(現 청주)사는 성임(成稔)이 기회가 닿는 대로 간고(幹蠱-幹父之蠱의 준말로 아들이 부친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하였다. 네 선생을 봉안하는 자리에서 의리상 부조(不祧)하자는 여론으로 인해 대구 사는 홍부(弘富)가 별묘(別廟)에 쓸 재목감을 보내왔다.
셋째는 황단(皇壇)에 참반(參班) 한 것이다.
상서공(명나라 호부상서 운심재 추유 선조)이 위유(慰諭)한 유적과 무강공(완산부원군 세심당 추수경 장군)이 우리나라를 구원해 준 공훈으로 필로(蹕路-임금이 거둥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어가가 지나가던 길)에서 호소하여 은혜를 입은 것이다. 갑자년(1864년)에 세문(世文)과 대구 사는 석원(碩遠), 상주 사는 한규(漢奎)가 서울로 와서 격쟁(擊錚-원통한 일이 있는 백성이 임금에게 하소연하려 할 때 쇠를 임금이 거쳐하는 편전의 앞문인 差備門 밖에서 치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을 말한다)하며 호소하자, 사안이 춘조에 내려졌으며, 이어서 또 명공거경(名公巨卿-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판서라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들에게서 신도비문(神道碑文)과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받았다.
서울 사는 선달 경한(景漢), 대구 사는 은영(誾永)이 모두 와서 모여 여관 밥을 먹으며 지냈는데, 오래 지나자 자용(資用)이 바닥 나 버렸다. 평산 사는 응렬(應烈)이 서흥(황해도 서흥) 사는 게운(啓運)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곧 자기 종제(從弟) 응순(應淳)과 차자(次子) 홍래(鴻徠)를 보내와 참여하여 일을 함께 하도록 하고 재물도 갖추어 보내니, 물자가 넘쳐나 계속 쓰게 되었다. 양덕(평안도 양덕) 사는 홍주(鴻疇), 신계(신계-황해도 신계)사는 홍남(鴻南)이 뒤이어 와서 수고하였고, 서흥 사는 응칠(應七), 곡산(谷山-황해도 곡산)사는 원풍(元豊), 영득(永得), 철원 사는 홍진(弘進), 이천 사는 종려(宗麗), 원주 사는 효철(孝哲), 익조(益祚), 횡성 사는 석부(錫富), 학문(學文), 홍천 사는 경수(敬守), 양양 사는 병협(秉協), 봉순(鳳淳)이 각각 분수껏 사재를 출연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밀양 사는 홍국(鴻國), 영월 사는 성실(成實)이 함흥(咸興) 연화도(蓮花島)에 가서 적부라공(籍符羅公)의 능에 성묘하였다. 대구 사는 은영(誾永), 진주 사는 계우(啓宇), 청도 사는 한기(漢驥), 창원사는 성룡(性龍)이 나주(羅州) 시랑동(侍郞洞)의 사인공(舍人公- 돈암공 추노선조)을 성묘하였다.
넷째는 수보(修譜)를 한 것이다.
팔도의 추씨 성을 추계로 관향을 통일한 것이다. 대구 사는 응령(應齡), 석원(碩遠)이 처음부터 끝가지 정성을 다 쏟아 참의(參議) 조획(措劃)하였다. 기사년(1869년) 중춘(仲春)에 함께 신령 땅에 가서 이미 연전에 각파의 계단(系單-세계와 단자)을 거둬 모은 것을 지금 비로소 편차(編次)하였다. 가승(家乘) 3권, 명심보감(明心寶鑑) 1권, 천선제명록(闡先題名錄) 1권, 황단참반기(皇壇參班記) 1권도 아울러 판각하였다. 대구 사는 은영, 청도 사는 한기, 서원 사는 성임(成稔), 창원 사는 성룡(性龍), 성화(性華)가 모두 교정을 맡고 유적을 모으고 파계(派系)를 전등(傳謄)하였는데 남김없이 아주 상세하였다.
청도 사는 학구(鶴九), 경산 사는 치민(致敏), 신령 사는 경찬(慶璨), 경로(慶魯), 보구(葆求), 형구(瀠求), 김해 사는 재근(在根), 예천 사는 광운(光雲), 의흥 사는 성대(成大), 순천 사는 태규(泰圭), 원주 사는 용유(鏞有), 선산 사는 영조(永祚), 대구 사는 순갑(淳甲), 여주 사는 계명(桂明) 등 여러 사람이 각파의 명전(名錢-명하전-족보대금)과 인역(印役)을 감독하고 도와 줄 사람을 모았는데, 서흥 사는 응칠은 늙은 나이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고 맨 먼저 멀리서 와 주었고, 신계 사는 홍남(鴻南)이 아주 조심스럽게 뒤이어 왔다.
4. 1848년 완문에서
사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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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감님,,,글 감사드립니다,,,추씨문중의 발전과 건승을 기원드립니다,,,허허허 ^^
보감님의하동고전추씨종친회카페가입을환영합니다.망추정.기문을알기쉽게글을올려주셔서감사드림니다.하동고전추씨종친회카페지기추병선[27세손연세]입니다.앞으로도 우리카페에도움될만한기록이있으면.글을올려주시기를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