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최대화/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황유원 시인
- 1982년 울산 출생
- 서강대 철학과 졸업
-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 수료
-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 심사 경위 》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734명이 4535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세 분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맡아주었는데 올해는 네 분이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셨다. 응모작을 4등분해서 김혜순, 남진우, 신형철, 이문재가 개별적으로 예심을 진행했고 각자 3~5명 정도의 응모자를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들의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 삼아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무라기엔 늦은」외 네 편을 투고한 김진규씨, 「사진」외 다섯 편을 투고한 박혜민씨, 「샤브샤브」외 네 편을 투고한 장형순씨,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투고한 황유원씨, 「속눈썹 나무 숲에 대한 진술서」외 네 편을 투고한 김은정씨, 「오브제」외 다섯 편을 투고한 임정민씨, 「원만이 아저씨」외 네 편을 투고한 이동호씨, 「인력의 이유」외 여섯 편을 투고한 박민규씨, 「임계」외 네 편을 투고한 김정희씨, 「점원들의 점심시간」외 네 편을 투고한 최몽휘씨, 「코시체」외 여덟 편을 투고한 용윤선씨, 「타인을 읽다」외 네 편을 투고한 한연희씨, 「최초로 레몬을 먹어본 개가 레몬에게 갖는 두려움」외 네 편을 투고한 백록담씨, 「하얀 숲」외 네 편을 투고한 오솔뫼씨.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며칠간 숙독하고 본심회의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본심은 불과 십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네 분의 심사위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당선자로 염두에 둔 응모자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응모한 황유원씨였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황유원씨의 작품이 어째서 우수한가에 대해 잠깐 동안 의견을 교환하고 그를 당선자로 최종 확정했다. 마라톤이 되기 일쑤인 심사회의를 백 미터 달리기로 만들어준 황유원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함께 달려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심사평 》
* 김혜순 시인
응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감각의 낯선 부분을 두드리는, 그런 드문 기쁨을 주는 시들을 만나기를 바랐다. 무릇 새로운 시인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다면 서툴지만 깊거나, 낯설지만 다층적이거나, 어눌하지만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시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엔 이제까지의 한국시에서 익숙했던 이미지도 들어 있고, 낯선 이미지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시편들로 시인이 어떻게 이미지를 구축하는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시가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 구축의 묘미라고나 할까. 형식이 내용을 구축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시 다섯 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미지들이 시 텍스트의 표면을 부풀리면서 상승하고, 하강하면서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는 모습이 유쾌하고도 풍자적이다. 능숙하게, 세련되게 나선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를 타는 재미도 남다르다. 그렇지만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리듬의 구사, 너무 능숙한 이미지 운용은 오히려 시인 스스로 경계해야 할 덕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신인을 탄생시키는 데에 최단 시간에 합의했다.
* 남진우 시인
너무 싱거운 심사였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당선작으로 밀고 싶은 응모자가 동일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런저런 심사에 참여해봤으나 이런 전광석화 같은 결정은 처음이었다.
그만큼「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의 작품을 투고한 황유원씨의 시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상당한 것이었다. 이 응모자는 언어를 다루고 시적 얼개를 짜고 상상력을 진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으며 작품 간의 수준의 편차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 기차와 기타를 넘나들며 화자가 펼치는 분방한 진술은 음악으로 표상되는 예술적 도취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 그것의 좌절을 힘있게 전달하고 있다. 또다른 작품 「레코드 속 밀림」이나 「풍차의 육체미」에서 도 긴 호흡의 시적 질주로 우리 시단에 새로운 장거리 주자가 탄생했음을 예고하고 있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지만 재치 있고 세련된 문장을 쓰는 일 정도라면 자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응모자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번듯하게 시의 꼴을 갖춘 작품들에서 그런 내심이 감지될 때면 답답함이 커진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문장을 써놓고 그 문장이 자신이 투여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맥락도 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주어와 술어를 어색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근화나 신해욱의 좋은 시와 비슷하게 보일 거라 믿는 것일까. 소설에 비해 시가 독자를 속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행성 글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와중에 다른 심사위원이 본심에 올린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올해는 이 사람이 당선자가 되거나 아니면 당선자가 없겠구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당선자를 뽑지 말자고 주장하는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이런 도입부는 분석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의미와 리듬이 서로 뒤엉켜 달려나갈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이문재 시인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 연까지 따라 읽을 수 있는 응모작이 많지 않았다. 낯설었다. 근래에 없던 일이다. 당선작은 순식간에, 그것도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지만, 내게 할당된 응모작의 전반적 수준은 예년에 견주어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양이와 개가 곳곳에서 출현하고 각주(脚註)가 수시로 달렸다. 다양한 서체(書體)를 동원했고, 그럴수록 문장이 길어졌다. 부모나 가족이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대화체였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분량이 길었고, 길어진 만큼 산만했다. 시를 수렴, 확장시키는 중심이 없었다. 무엇을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했다. 쓰기 자체에 대한 열정만 대단해 보였다.
‘사람에 관한 시’는 만만치 않다. 습작기의 시는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물에서 시작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낯익은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그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다. (대상)관찰, (의미)발견, (문장)표현이 시쓰기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저 세 단계(원칙)를 벗어나는 시쓰기는 없다.
황유원씨의 당선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활달한 상상력이었다. 활달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시적 대상이나 시 속의 상황, 또는 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가 알겠냐마는" "말하자면" "상관은 없겠지만"과 같은 표현은 거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쉽게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렉기타, 알약, 포도주를 가득 싣고 가는 기차—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시는 제법 강한 흡인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시쓰기에 대한, 아니 삶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폐적 독백을 뛰어넘는 개방적 대화의 문체에 신뢰가 갔다. 근래에 만나기 힘들었던 구심력-방사선적 상상력이었다.
- 《문학동네》 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