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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1781년(정조 5)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五 / 跋 / 平城世稿跋
記曰。先祖有媺而不傳。不仁也。傳曰。遠者人之所易忘也而能追之。厚之道也。若平城金君克夫所爲世稿者。豈非有得於仁厚之道者與。平城之世。肇自勝國。科聲宦業。赫世蟬聯。至沙月公。以節齋懿親。不能翺翔淸顯。然嘗被己卯賢良薦。訥齋,四談諸公。世濟厥美。以垂裕後昆。世之譚文獻舊家者咸歸焉。克夫以先公之命。搜集逸稿。就徵士訥翁李公勘校爲二冊。續取近代遺文爲一冊。而以傍祖文字附焉。以成一家之書。天球弘璧。錯落卷中。學行節義文章。彪炳焜耀。相傳數百歲不絶。何其偉與。史稱東萊呂氏爲八代文獻。夫以中原之大。文物之盛。僅有此數。而今僻處左海。追古人於千載之上而與之幷。斯不亦難乎哉。抑未知呂家子孫能收集文字。世世無失。如今日否。其同不同。未可知也。克夫豈弟修謹。克世其家。而有子景霖字澤世。穎悟天出。如祥麟威鳳。人皆期以瑞世資。而不幸九歲而圽。所著詩文。盡隨入土中。只有若干篇。辭氣冲澹。意趣悠遠。不徒詞采之工神思之逸而已。是宜附之篇後。以壽其傳。未知克夫以爲然否。
대산집 제45권 / 발(跋) / 《평성세고》 발문〔平城世稿跋〕
옛글에 이르기를 “선조가 아름다운 덕이 있는데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한 것이다.”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죽은 지 오래된 이는 사람들이 잊기 쉬운 바이니, 잘 추모하는 것이 후한 도이다.” 하였다. 평성(平城) 김군 극부(金君克夫)가 세고(世稿)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 어찌 인후한 도리에 잘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성의 세계(世系)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대로 과거 급제자와 벼슬한 자가 혁혁하게 잇따라 나왔다. 사월공(沙月公)에 이르러 절재공(節齋公)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청현직에 나서지 못했지만 일찍이 기묘년(1519, 중종14)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고, 눌재공(訥齋公)과 사담공(四談公) 등이 대대로 그 아름다운 덕을 이루어서 후세에게 전하였으니, 세상에 문헌을 갖춘 오래된 가문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이 집안을 손꼽았다.
극부가 선공의 명으로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징사(徵士) 눌옹(訥翁) 이공(李公)에게 교감을 받아 2책으로 만들었는데, 이어서 근대에 유문을 취하여 1책을 만들고는 방조(傍祖)의 작품을 그에 부집(附集)하여 일가의 책을 이루었다. 귀중한 보옥이 책 안에 벌여 있어 학행과 절의, 문장이 표범 가죽처럼 찬란히 빛나 수백 년을 끊이지 않고 전해져 왔으니 어쩌면 그리도 위대한가? 사서(史書)에서는 동래 여씨(東萊呂氏) 집안을 팔대 문헌(八代文獻)이라고 칭하였으니 광대하고 문물이 성대한 중국에도 겨우 이 정도였을 뿐이다. 그런데 궁벽한 동해에서 천년 전의 고인을 뒤쫓아 그들과 나란히 하였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모르겠지만 여씨(呂氏) 집안의 자손들이 오늘날 김군의 집안처럼 선조의 글을 수집하여 대대로 잘 지켜 왔던가? 그 같은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극부는 성품이 화락하고 삼가 그 가문을 잘 이어 왔다. 또 자가 택세(澤世)인 아들 김경림(金景霖)은 기린과 봉황처럼 총명한 재주를 타고나서 사람들이 모두 성세(盛世)의 자질이라고 기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9세에 죽고 말았다. 그가 지었던 시문은 모두 광중(壙中)으로 따라 들어가고 약간 편만 남아 있는데 문장의 기운이 맑고 내용이 깊어서 한갓 문채가 솜씨 있고 생각이 뛰어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글도 마땅히 편말에 붙여서 오래 전해지도록 해야 할 터인데 극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주-D001] 선조가 …… 것이다 : 《한유전집(韓愈全集)》 권34 〈고 패주 사법참군 이군 묘지명(故貝州司法參軍李君墓誌銘)〉에, 이고(李翱)가 조상의 기록을 정리해 실록(實錄)을 만들며 “선조에게 미덕이 있는데 모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한 것이다.〔先祖有美而不知 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라고 하였다.[주-D002] 죽은 …… 도이다 : 《논어》 〈학이(學而)〉 신종추원장(愼終追遠章) 집주에 나온다.[주-D003] 김군 극부(金君克夫) : 김필형(金弼衡, 1725~1800)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극부, 호는 국창(菊牕)이다. 눌은 이광정(李光庭)의 문인이다.[주-D004] 평성의 세계(世系) : 평성 김씨(平城金氏)는 본래 순천 김씨(順天金氏)이다.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집안이었는데, 김종서가 정난(靖難)으로 숙청되어 그 일가와 자손들의 환로가 막히게 되자, 일부가 평성으로 고쳐서 과거에 응시하였다.
[주-D005] 사월공(沙月公) : 김상(金湘, 1484~1538)이다. 자는 장원(長源), 호는 사월이다. 김종서와 재종간이다.[주-D006] 절재공(節齋公) :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이다.[주-D007] 눌재공(訥齋公) : 김경언(金慶言, 1521~1557)이다. 자는 언희(彦喜), 호는 눌재이다. 1548년(명종3) 별시에 급제하고 풍기 군수(豐基郡守)를 역임하였다.[주-D008] 사담공(四談公) : 김호(金頀)이다.[주-D009] 눌옹(訥翁) 이공(李公) :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이현일(李玄逸), 권두경(權斗經)의 문인으로 김성탁(金聖鐸), 권구(權榘) 등과 교유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써 영남 문원을 일으키고 세교를 부흥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집으로 《눌은집(訥隱集)》이 전한다.[주-D010] 방조(傍祖) : 김필형의 방조인 장원공(壯元公) 김경운(金慶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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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경언(金慶言) 조선 명종(明宗) 때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김상(金湘)의 아들로, 1548년(명종 3)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냄
한국/조선전기 , 전라도/순천 , 인명/관인/문신
2 김상(金湘)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군수(郡守) 김경언(金慶言)의 아버지로, 1522년(중종 17)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냄.
한국/조선전기 , 경상도/함창 , 인명/관인/문신
1 김언희(金彦喜) 김경언(金慶言)으로, 언희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눌재(訥齋)이다. 김상(金湘)의 아들이며, 1543년(중종38)에 진사가 되고 1548년(명종3)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풍기 군수 등을 역임했다. 함창에서 예천 용문 하금곡리로 와서 살았다. 퇴계 이황이 1557년(명종12)에 풍기 군수 김경언에게 소수서원에 관한 일로 편지를 보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退溪集 卷12》 금계집(錦溪集)
1 김언희(金彦喜) 김경언(金慶言)으로, 언희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눌재(訥齋)이다. 김상(金湘)의 아들이며, 1543년(중종38)에 진사가 되고 1548년(명종3)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풍기 군수 등을 역임했다. 함창에서 예천 용문 하금곡리로 와서 살았다. 퇴계 이황이 1557년(명종12)에 풍기 군수 김경언에게 소수서원에 관한 일로 편지를 보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退溪集 卷12》 금계집(錦溪集)
2 사월공(沙月公) 김상(金湘, 1484~1538)이다. 자는 장원(長源), 호는 사월이다. 김종서와 재종간이다. 대산집(大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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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金湘)
[문과] 세조(世祖) 3년(1457) 정축(丁丑) 별시(別試) 정과(丁科) 5위(12/13)
자(字) 탁지(濯之)
본인본관 강릉(江陵)
거주지 미상(未詳)
[생원]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1[壯元]위(1/100)
조선왕조실록 전체 (15)
1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2월 10일(정유) 이승손ㆍ정척 등이 진사ㆍ생원 1백 명을 뽑아 계문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ㆍ참판(參判) 정척(鄭陟) 등이 진사(進士) 최한보(崔漢輔) 등 1백 명, 생원(生員) 김상(金湘) 등 1백 명을 뽑아 계문하였다. 【원전】 6 집 566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2 세조 14년 무자(1468, 성화) 4월 24일(계축) 행대를 보내 하도 수령을 규찰하게 하다. 그에 대한 사목
監察) 김상(金湘)을 전라도(全羅道)에, 정인형(鄭仁炯)을 경상도(慶尙道)에 보내었다. 【원전】 8 집 18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행대(行臺) 수령(守令)의 치적(治績)과 근만(勤慢), 향리(鄕吏
3 예종 1년 기축(1469, 성화) 3월 16일(경자) 홍주의 안철손의 공사에 관련된 자들을 추국케 하고 서울로 잡아 들이다
처음에 감찰(監察) 김상(金湘)이 홍주(洪州)에 가서 안철손(安哲孫)의 공사에 관련된 사람을 추국(推鞫)하니, 대답하는 바가 자못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서울로 나치(拿致)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4 성종 즉위년 기축(1469, 성화) 12월 3일(임자) 사헌부 장령 박숭질이 대행왕의 병을 밖에 알리지 않은 김상진과 권찬을 논핵하다
하였다. 박숭질(朴崇質)이 또 아뢰기를, “지금 북경(北京) 가는 행차에 당상관(堂上官)인 황중(黃中)과 장유성(張有誠)으로 통사(通事)를 삼았는데, 옛날에는 이런 예(例)가 없었습니다. 또 김상(金湘)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았는데... ..., 서장관은 으레 감찰(監察)로써 이를 임명했으므로 김상(金湘)은 감찰이 아니니 모두 고쳐 임명하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정승(政丞)이 북경(北京)에 간다면 비록 감찰(監察)이 아니더라도 또한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했었다
5 성종 즉위년 기축(1469, 성화) 12월 4일(계축) 대사헌 이극돈 등이 권찬과 김상진 등의 죄를 논하고, 서장관 김상의 개차를 청하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극돈(李克墩) 등이 권찬(權攅)과 김상진(金尙珍) 등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고, 또 김상(金湘)의 서장관(書狀官)을 고치기를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극돈 등이 또 아뢰기를, “장유성(張有誠)과 황
6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3월 27일(병오) 권감ㆍ송문림ㆍ김상ㆍ황중에게 전지와 노비를 주다
권감(權瑊)에게 전지 30결(結), 노비(奴婢) 4구(口)를, 송문림(宋文琳)에게 전지 20결 노비 2구를, 서장관(書狀官) 김상(金湘)ㆍ통사(通事) 황중(黃中)에게 전지 10결을, 장자효(張自孝)에게 전지 8결을 내려 주었다. 【
7 성종 3년 임진(1472, 성화) 11월 17일(기유) 서장관 김상과 통사 황중ㆍ장자효에게 각각 전지 10결씩을 주다
청승습사(請承襲使)의 서장관(書狀官) 김상(金湘)과 통사(通事) 황중(黃中)ㆍ장자효(張自孝)에게 각각 전지(田地) 10결(結)씩을 주었다. 【원전】 8 집 695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8 성종 6년 을미(1475, 성화) 8월 22일(무술) 전교서 교리 김상 등 4인이 윤대하다
전교서 교리(典校署校理) 김상(金湘) 등 4인이 윤대(輪對)하였다. 【원전】 9 집 254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9 성종 7년 병신(1476, 성화) 6월 12일(계미) 문서를 위조한 전교서 교리 김상을 《대전》에 의거하여 영구히 서용하지 않기로 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전교서 교리(典校署校理) 김상(金湘)이 노비(奴婢) 얻기를 꾀하여, 처부(妻父) 홍영덕(洪永德)이 허락한 내용적으로 버린 아내인 홍숙례(洪淑禮)의 아명(兒名) 각수(覺守)에 대한 〈문서상으로〉 시행하
10 성종 10년 기해(1479, 성화) 7월 12일(병인) 영구 서용을 금하는 명단에서 김상을 빼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김상(金湘)은 영구히 서용하지 않는 데에서 제외하라.” 하였다. 【원전】 10 집 3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11 성종 10년 기해(1479, 성화) 7월 14일(무진) 성현 등이 김화ㆍ송심ㆍ김상ㆍ유양춘 등의 영구 서용 제외를 풀지 말기를 청하다
을 때에 자목(字牧)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고 형벌을 씀이 적중하지 아니하여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 위엄을 방자하게 하고 법을 소홀하게 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상(金湘)은 도둑질하여 처부(妻父)의 문기(文
12 성종 10년 기해(1479, 성화) 7월 15일(기사) 유양춘 등의 서용 문제와 무례한 대마 도주에 대한 대응책을 의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어제는 김화(金澕)ㆍ김상(金湘)ㆍ유양춘(柳陽春) 등을 서용(敍用)함이 마땅하지 못하다는 일을 가지고 천청(天聽)을 우러러 번독(煩瀆)하였으나,
13 성종 14년 계묘(1483, 성화) 8월 15일(을해) 승문원에서 성절사 한찬의 직함을 들어 가선 대부로 할 것을 건의하니 들어주다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김상(金湘)이 제조(提調)가 의논한 것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이제 성절사(聖節使) 한찬(韓儹)이 수동지(守同知)로서 직함(職銜)을 띠고 가는데, 신 등이 이미 의논해서 정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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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金湘)
[문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27/33)
자(字) 장원(長源)
본인본관 순천(順天)(주2)
거주지 함창(咸昌)【補】(주1)
[진사] 중종(中宗) 5년(151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8위(6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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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종 24년 기축(1529, 가정) 3월 28일(계해) 간원에서 백지 계본을 올린 호군 조침과 담당 승지의 추고를 청하다
겸춘추(兼春秋)는 중요한 직임인데, 근래 전조(銓曹)가 전혀 가려서 차출하지 않으니, 매우 마땅하지 않습니다.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 김상(金湘)과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인명(金麟明)은 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니, 모두 체직시키소
15 중종 31년 병신(1536, 가정) 8월 8일(신묘) 사헌부가 사간원이 추고 중인 자들의 서용을 반대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부사 조현범(趙賢範)과 김책(金策), 전 군수 유문함(柳文瑊)ㆍ김상(金湘)ㆍ김윤종(金胤宗)은 모두 어사에게 적발되어 지금 추고 중에 있는데, 공죄(公罪)인지 사죄인지 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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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 출신으로
*이하 본문에서 본관이라 한 것은 출신으로 바꿔야 함. 본관이 아니고 거주지를 기록한 것임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盧友明 1471 1523 豐川 君亮 信古堂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徐敬德 1489 1546 南陽 可久 花潭, 復齋 文康
당성(唐城)서경덕(徐敬德)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1 2월 17일, 松京 禾井里에서 태어나다.
생원 상진(尙震)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尙震 1493 1564 木川 起夫 泛虛亭, 松峴, 嚮日堂 成安
성종 24 1493 계축 弘治 6 1 6월 5일, 扶餘郡 場巖面 閤谷里에서 태어나다.
이제신(李濟臣) 1536년(중종 31)~1583년(선조 16)
淸江先生集卷之四 / 行狀 /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尙公行狀。
尙震 1493 1564 木川 起夫 泛虛亭, 松峴, 嚮日堂 成安
公諱震。字起夫。木川人。其先本縣吏。高麗太祖統合三韓。木州人以百濟遺民。屢有警擾。賜姓畜獸以辱之。公之先。得象爲姓。後改以尙焉。有諱國珍。生諱得儒。以崔文憲沖待聘齋生。始免鄕役。生諱愿。給事中。給事生諱元諝。通禮門奉禮郞。歷數四代。有諱天錫。監門衛大護軍。寔公高祖。曾祖諱英孚。累贈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孝忠。忠淸道水軍虞候。累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考諱甫。安奇道察訪。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推恩。以公貴也。
判書公鄕居林川。貲甚殷富。貸與貧民。隨年豐歉。與民收散。晩年。悉取券投火曰。吾其庶有後乎。議政公席先業。居鄕殆六十歲。足絶官庭。未嘗非義作事。鄕人莫不飫德。蓋其種之者久也。議政公聘博士金徽之女。累贈貞敬夫人。乃延安望閥。前朝恭愍。親書八字以賜。提學金濤之後。本朝刑曹判書文靖公自知之曾孫。議政年衰無嗣。躬禱於聖住山。越明年公生。弘治六年癸丑六月五日也。
생원 변벽(卞碧)은 본관이 거창(居昌)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구산 선생 변공 묘갈명 병서 〔贈通訓大夫司憲府持平龜山先生卞公墓碣銘 並敍〕
구산(龜山) 선생 변공(卞公)의 휘는 벽(璧)이며 자는 헌지(獻之)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 호장(戶長)을 지냈던 휘 정실(廷實)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4대 뒤에 생원인 휘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으로 옮겼기에 마침내
밀양을 본관으로 하였으니, 이는 대개 중산(中山)의 정씨(程氏)와 연(燕)의 소씨(卲氏)가 하남(河南)을 본관으로 하였던 예와 같다. 조선조에 벼슬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며 호가 춘당(春堂)인 휘 중량(仲良)은 호가 춘정(春亭)이며 시호가 문숙(文肅)인 그의 동생 휘 계량(季良)과 함께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에게 사사하여 일세에 중망을 받았으며 나란히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니, 이분들이 공의 5대 조부이다. 고조부의 휘는 길상(吉祥)으로 풍주(豐州) 지사를 지냈으며, 증조부는 휘가 을명(乙明)으로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효생(孝生)이며, 아버지는 휘가 신보(申甫)로 충순위(忠順衛)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사종(嗣宗)의 따님이다.
공을 성화(成化) 계묘년(1483, 성종14)에
합천(陜川) 돈평리(遯坪里) 집에서 낳았다. 겨우 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친정에 데리고 가서 길렀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본관이 거창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형사보(邢士保)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중우(仲愚)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출신지는 거창(居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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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전부 출신으로 바꾸어야 함
귀납법적으로 일일이 고증해야 하지만 고증한 것만 바꾸는 게 아니라 작문구조적 법칙상 본관이라 한것은 거주지 출신을 나타낸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일괄, 출신으로 바꾸어야 함.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 출신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참봉 유맹달(柳孟達)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임천류씨는 없음. 봉화금씨 같이 다른 본관이 있는 경우도 여기선 본관이 아니라 거주지 출신임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유학 박계효(朴繼孝)는 본관이 삼가(三嘉)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생원 송석현(宋錫賢)은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생원 임말손(林末孫)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생원 변벽(卞璧)은 거창(居昌) 출신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거창 출신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본관이 거창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개성(開城) 출신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유학 윤환(尹瓛)은 본관이 여주(驪州)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정소(鄭韶)는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유학 이윤문(李允文)은 본관이 충주(忠州)다.
유학 김증(金增)은 본관이 청주(淸州)다.
생원 상진(尙震)은 임천(林川) 출신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본관이 보령(保寧)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생원 김숭종(金嵩宗)은 본관이 음성(陰城)이다.
진사 이난손(李蘭孫)은 본관이 온양(溫陽)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해(李蟹)는 본관이 나주(羅州)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생원 박이홍(朴以洪)은 본관이 창평(昌平)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생원 장응두(張應斗)는 본관이 장수(長水)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유학 어득한(魚得漢)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학식이 있었다.
진사 김응청(金應淸)은 본관이 영덕(盈德)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생원 김세보(金世寶)는 본관이 청도(淸道)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진사 김상(金湘)은 본관이 문경(聞慶)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본관이 영천(榮川)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정(李涏)은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생원 박덕손(朴德孫)은 본관이 함안(咸安)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본관이 봉화(奉化)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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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