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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6권 / 서(書) / 조 광주 철영 에게 보내다〔與趙光州 徹永〕
이번에 문공(文公 주희)의 《소학》을 본떠 《해동신편(海東新編)》을 편수코자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뜻이 매우 훌륭하더군요. 후학들이 이 책의 완성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저번에 너무 바쁘게 답장을 올리느라 문맥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 스스로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까마득히 모를 정도이니, 물어주신 훌륭한 생각을 크게 저버려 돌이켜보면 회한이 한량없습니다.
대개 그 규모와 범례의 대강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첫 편인 〈열녀전(烈女傳)〉 이하를 곧 다른 말로 대신 채우려 하십니까? 아니면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 세 편의 본문을 예전대로 놔두고 〈계고(稽古)〉 이하를 비로소 동국의 사적에서 수집하여 바꾸려 하십니까? 앞처럼 하거나 뒤처럼 하거나 간에 제 생각으로는 모두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데 오늘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입교〉와 〈계고〉 두 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장차 첫머리부터 바꾸어 채울 생각인 듯한데, 이와 같다면 더욱 완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말이 많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도리에 딱 맞는 말은 다른 유사한 말을 끌어다 붙일 수 없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이 말만 있을 뿐입니다. 〈입교(入敎)〉 한 편을 가지고 말하면 “앉을 때 가에 앉지 말고 설 때에 비스듬히 서지 말라.”는 말을 무슨 말로 바꿀 수 있으며, “남자는 빨리 대답하고 여자는 느리게 대답한다.”는 말을 무슨 말로 대신하겠습니까. 〈명륜〉과 〈경신〉은 단락마다 구어(句語)마다 모두 그러하니, 〈입교〉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계고〉 한 편과 같은 경우는 또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인극(人極)을 세워 인륜과 도리를 다하는 것은 성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오직 성인이라야 천형(踐形)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 사이에 몇 명 되지 않지만, 천하 후세는 마땅히 극진하게 실천한 분을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선생(朱先生 주희)이 편제(篇題) 속에서 특별히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라는 한마디 말을 인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철안(鐵案 확고한 단안)입니다.
〈계고편(稽古篇)〉에서 인증한 것이 모두 성인의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성인을 주체로 삼은 뒤에 도리가 바야흐로 원만해집니다. 이제 이것을 놔두고 따로 구하려 한다면 아무리 그 수집과 꾸밈에 진력한다고 해도 결국 주선생이 이른바 “제1등의 도리를 남에게 양보해 주고 제2등의 도리를 행하는 것”임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제 견해로는 《신편》을 편수하는 사람이 〈계고〉 이상에다 손을 대려고 한다면 결단코 완성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광입교(廣立敎)〉ㆍ〈광명륜(廣明倫)〉ㆍ〈광경신(廣敬身)〉과 같은 것은 곧 선현의 교훈에 대한 부연 설명이요, 성인을 희망한 실제 사적입니다. 만일 입언(立言)이 정밀하고 제행(制行)이 독실한 경우가 있다면, 편집을 많이 했다고 해서 꺼릴 것이 없고 수집을 널리 했다고 해서 꺼릴 것도 없으니, 참으로 문공(文公)이 편집한 정도로만 그쳐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보살펴 정치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 어진 선비가 배출되어 유학을 도왔으니, 그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수집하여 구편(舊編)과 함께 세상에 행한다면, 보고 느끼고 본받음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계고〉는 그 속에 있게 되니, 반드시 첫머리부터 바꿔 채운 뒤에 비로소 《동국소학(東國小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동국소학’ 넉 자는 끝내 제목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대개 《소학》과 《대학》의 도(道)는 천지를 세우고 백세를 기다릴 만하여 동해나 서해에 놓아두어도 표준이 되고 북해나 남해에 놓아두어도 표준이 되니, 동국에 어찌 다른 《소학》이 있겠습니까. 이름을 《해동계고신편(海東稽古新編)》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그저 볼품없는 소견을 기술하였는데 이는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귀서원(詠歸書院)의 위차(位次)를 개정한 일은 접때에 광주(光州)의 사림(士林)을 통하여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 그 때 들은 바는 대개 “영사정(永思亭)을 북쪽 벽으로 옮겨 봉안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으나, 북쪽 벽에서 왼편에 봉안할지 오른편에 봉안할지를 아직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근자에 영귀서원의 옛날 위차도(位次圖)와 개정한 뒤의 위차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이 의례가 이미 거행되었고 영사정이 하서(河西)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세대의 순서로 자리의 차례를 정한 것이니 본래 원우(院宇)의 통례입니다. 다만 객위(客位)가 주향(主享)을 누르고 있으니 저도 이 점에 대해 끝내 의혹이 풀리지 않습니다. 가령 원우(院宇)는 공체(公體)이니 주객을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정과 여론으로 보면 끝내 그렇지 않습니다. 저번에 사림(士林)들을 접견했을 때 이미 사견으로 대략 말한 바 있으니, 이제 와서 이전의 말을 되풀이해본들 마려(磨驢)처럼 옛 자국만 밟는 격입니다. 더구나 이미 이루어진 의례를 어찌 감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심히 염려되는 것은 오늘날 혹시 조금이라도 잘 살피지 못했다가 나중에 지적을 받게 되면 현인을 공경하는 의례에 흠이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 춘향(春享)이 아직 멀었으니, 청컨대 마땅히 홀기 꽂고 큰 띠 두른 벼슬아치가 두 고을의 사림들을 지휘하여 이러한 전말(顚末)로 현관(賢關)과 국중의 예법을 아는 학자들에게 널리 상의하되, 그 처변(處變)하는 예절이 최선이 되도록 노력하여 다른 서원의 본보기가 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번거로움을 끼치니 매우 죄송합니다.
[주-D001] 조 광주(趙光州) : 조철영(趙徹永, 1777~1853)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여(敬汝), 호는 신전(莘田)이다. 조진명(趙鎭明)의 아들이다. 1801년(순조1) 생원시에 합격하고 1841년(헌종7)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했다.[주-D002] 오직 …… 있다 : 천형(踐形)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天性)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형색(形色)은 천성이니 오직 성인이라야 천형할 수 있다.” 하였다.[주-D003] 근심스러우면 …… 뿐이다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종신토록 근심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걱정은 없다. 종신토록 근심할 것은 있으니,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 임금은 천하에 법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향인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곧 근심스러운 것이다.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也. 乃若所憂則有之, 舜人也, 我亦人也,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 憂之如何? 如舜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주-D004] 영귀서원(詠歸書院) :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 있다. 1564년(명종19)에 전라도 옥과(玉果) 유림들이 옥과 현감을 지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서원이다. 1729년(영조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년(정조21)에 허계(許繼), 1846년(헌종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하였다. 1965년에는 위백규(魏伯珪)를 봉안하여, 6위를 모시게 되었다.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년(영조 3)~1798년(정조 22) 자화(子華) 계항(桂巷) 장흥(長興)
[주-D005] 영사정(永思亭) : 최형한(崔亨漢, ?~1504)의 호이다. 본관은 영암(靈巖), 자는 탁경(卓卿), 아버지는 영원(永源), 광주(光州) 출신이다. 1483년(성종1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89년(성종20)에 옥과 현감으로 부임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지었다. 1498년(연산군4)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고, 1503년(연산군9)에 영암 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갑자사화 때 궁궐 앞에서 대죄(待罪)하다가 굶어 죽었다.
[주-D006] 객위(客位)가 …… 않습니다 : 객위는 최형한(崔亨漢)의 위패를 말하고 주향은 김인후(金麟厚)의 위패를 말한다. 영귀서원은 본래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주향이 되어야 합당한데, 최형한이 옥과 현감으로 있을 때 영귀정(詠歸亭)을 지었고 김인후보다 앞 선 시기의 인물이라 하여, 김인후의 위패보다 높은 오른쪽에 위치시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07] 마려(磨驢)처럼 …… 격입니다 : 마려는 빙글빙글 돌면서 맷돌을 끄는 나귀라는 뜻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답습만 하는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나의 생계가 졸렬하기 그지없어서, 맷돌 끄는 나귀처럼 돌기만 하는 것을 비웃겠지.[應笑謀生拙, 團團如磨驢.]”라고 하였고, 또 “돌고 도는 것이 맷돌 끄는 소와 같아서, 걸음걸음마다 묵은 자국만 밟노라.[團團如磨牛, 步步踏陳跡.]”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21 伯父送先人下第歸蜀詩云, 卷35 送芝上人游廬山》
[주-D008] 두 고을 : 광주(光州)와 옥과(玉果)를 말한다.
[주-D009] 현관(賢關) : 어진 선비를 기르는 기관으로, 성균관ㆍ한림원 등을 말한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안동교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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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7권 / 서(書) / 이우서에게 답하다〔答李羽瑞〕
급하게 한번 편지를 주고받은 뒤로 다시 소식이 아득해지니, 어찌 멈춘 구름을 바라보는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그대는 재주가 높고 나이가 젊어 적은 성취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필적을 대할 때부터 이미 그대의 품은 뜻을 알고 멀리서나마 위안이 되었으니, 어찌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 방금 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어버이 모시면서 글을 읽는 생활이 더욱 좋으심을 알게 되니 더욱 기뻤습니다. 정진(正鎭)은 귀먹고 눈 어둡기가 날로 심해지니 스스로 슬퍼하며 탄식할 뿐입니다.
〈태극도설(太極圖說)〉 논의에 대해서 다시 분석하여 요점을 보여 주시니 애써주신 뜻에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다만 노호(鷺湖 홍직필(洪直弼))의 설명 중에 ‘자정(自定)’ 두 글자는 깨닫기가 매우 어려우니, 오히려 그 위아래의 문맥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영귀서원(詠歸書院)에 대해 운운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어찌 다시 논의하는 것입니까. 다만 보내주신 편지에서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나이의 차례로 순서를 정한다.[世次爲序]”는 설을 인용하였으나, 이는 영귀서원의 본래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듯합니다. 대개 영사정(永思亭)의 나이가 많다 하여 동쪽 자리에 두었으나 애초에 나이로 순서를 정하지 않았고 도로 거두어들인 것도 이유가 있는데, 한 사람의 형편없는 소행 때문에 구설수가 전현(前賢)에게 미치게 되었으니, 이는 매우 미안스런 일입니다. 이것을 논의하여 설명하고자 한다면 마치 저들과 더불어 논변하는 것과 같으니, 물어주신 뜻은 감사하지만 가슴에 묻어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픈 말은 많지만 다 적지 못합니다. 조석으로 노력하여 평소에 품은 생각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D001] 멈춘 구름을 바라보는 : 원문의 ‘정운(停雲)’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말한 것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의 〈정운(停雲)〉에 “자욱한 구름 멈추어 있고, 때때로 부슬부슬 비가 내리네.[靄靄停雲, 濛濛時雨.]”라는 구절이 있는데, 스스로 그 서문에 “정운(停雲)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停雲, 思親友也.]”라고 하였다.
[주-D002] 영귀서원(詠歸書院)에 …… 것 : 영귀서원은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 있는데, 1564년(명종19)에 전라도 옥과(玉果) 유림들이 옥과 현감을 지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서원이다. 1729년(영조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년(정조21)에 허계(許繼), 1846년(헌종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런데 1841년 경에 최형한(崔亨漢, ?~1504)의 위패를 이 서원에 봉안하면서 위차(位次) 문제가 발생하였다. 영귀서원은 본래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주향이 되어야 합당한데, 최형한이 옥과 현감으로 있을 때 영귀정(詠歸亭)을 지었고 김인후보다 앞 선 시기의 인물이라 하여, 김인후의 위패보다 높은 오른쪽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기정진의 답변은 《노사집》 권6, 〈조 광주 철영에게 보내다[與趙光州徹永]〉라는 편지 속에 들어 있다.[주-D003] 영사정(永思亭) : 최형한(崔亨漢, ?~1504)의 호이다. 본관은 영암(靈巖), 자는 탁경(卓卿), 아버지는 영원(永源), 광주(光州) 출신이다. 1483년(성종1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89년(성종20)에 옥과 현감으로 부임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지었다. 1498년(연산군4)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고, 1503년(연산군9)에 영암 군수로 나갔으나 다음 해 갑자사화 때 궁궐 앞에서 대죄(待罪)하다가 굶어 죽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안동교 김석태 (공역) | 2018
答李羽瑞
草草一往復。遂復漠然。奚禁停雲之悵。但念左右以高材富齡。不得少而爲足。自對墨蹟。已知雅意之所存。遙望相慰。豈必減朝暮遇耶。卽又惠存。憑審侍讀增茂。尤庸欣倒。正鎭聵眊日甚。秖自悼歎。圖說議論。再荷以梗槩剖示。深感勤意。但鷺湖說中自定二字。頗難契悟。猶恨其不見上下語脈之全也。詠院云云。已屬過境。今何用更入言議耶。但盛喩中引尤翁世次爲序之說。似未悉詠院本事。蓋永思以高年在東位。則初未嘗以年爲次。其還收則亦有說。以一身無似之致。而脣舌惹及於前賢。則此未安之大者故耳。欲議說之。則似乎與彼辨。雖感俯問之意。卷而懷之。其或可乎。多少莫旣。惟朝夕自勉旃。無負素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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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전라도(全羅道) 1813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辛二剛 1601 1661 寧越 柔叔 靑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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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遜齋集)》 박광일(朴光一, 1655~1723) 자 사원(士元), 호 손재(遜齋), 본관 순천(順天)
손재집 제8권 / 행장(行狀) / 청단사에 청파 신공을 봉안하는 제문〔靑丹祠靑坡辛公奉安祭文〕 누락되어 제문 순서에 넣지 못하고, 여기에 옮겨 간행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영월의 대성이로다 / 寧越大姓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품으로 / 生有異品
활달하고 영특하였네 / 開爽聦穎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으니 / 事親以孝
천성에서 나온 것이로다 / 出於天性
병자호란으로 / 爰自丙丁
하늘과 땅 뒤집힌 뒤로 / 天地飜覆
벼슬길에 뜻을 끊고 / 絶意名途
문 닫고 학문에 힘썼도다 / 杜門力學
《주역》에 침잠하니 / 沈潛大易
주공(周公)의 마음과 공자의 생각이고 / 周情孔思
선천과 후천에 대해 / 先天後天
은미한 뜻을 밝혔도다 / 發其微義
그림이 있고 설명이 있으니 / 有圖有䟽
〈천인일리서〉로다 / 天人一理
성명의 은미함까지 / 性命之微
강구하지 않음이 없었나니 / 靡不講究
후대에게 남긴 덕은 / 垂裕後昆
효성과 우애를 우선하였네 / 先以孝友
깨끗한 초가집에 / 茅堂蕭灑
풍월이라 편액 걸었고 / 扁以風月
맑게 개어 끝이 없으니 / 淸霽無邊
흉금이 활짝 열렸도다 / 胷襟開豁
위아래로 고요한 곳에 / 俯仰靜裏
솔개 날고 물고기 뛰니 / 鳶飛魚躍
빛과 광채 감추고 / 含光晦彩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즐겼노라 / 反身自樂
집안은 화목하고 / 閨門怡愉
고을 사람들과 화락하며 / 鄕黨和悅
지초 혜초 서로 향기 내니 / 芝蕙交薰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일세 / 一代勝流
뒤에 태어난 젊은 사람들 / 後生小子
얼마나 많이 어울렸던가 / 幾多從遊
향선생 돌아가면 / 鄕先生沒
사당에 제사드릴 만하다 했으니 / 可祭於社
이제 희생과 술을 올리는 것을 / 薦以牲齊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는가 / 誰云不可
지금까지 적막한 것은 / 迄今寥寥
후학들의 책임이네 / 責在後學
청단의 언덕은 / 靑丹之阿
공이 노닐던 곳이니 / 杖屨攸及
사우를 창건하여 / 刱建祠宇
신위를 봉안하고 / 於焉妥神
이에 중정일을 맞아 / 玆値中丁
정성스러운 제사를 올립니다 / 式陳明禋
춘추제향 축문
효성과 우애의 행실이고 / 孝友之行
하늘과 사람의 학문이라 / 天人之學
초가집 한 채에 / 一堂茅屋
맑은 바람 시원하도다 / 淸風灑落
[주-D001] 청단사에 …… 제문 : 청파는 신이강(辛二剛, 1601~1661)의 호이며,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유숙(柔叔)이다. 학문과 덕행으로 옥과현(玉果縣) 선비들이 옥과의 상청단리(上靑丹里)에 사당을 세웠다. 1729년(영조5) 가을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영귀서원(詠歸書院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 배향되었다. 《西歸遺藁 卷7 辛公二剛墓誌銘, 韓國文集叢刊 b29輯》[주-D002] 후대에게 남긴 덕 : 후손에게 넉넉한 덕을 남겨 주었다는 말이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하였다.[주-D003] 솔개 …… 뛰니 : 자연의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다. 《중용장구》 12장에서 《시경》을 인용하여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라고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주-D004] 향선생 …… 했으니 :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권19 〈양소윤을 보내는 글[送楊少尹序)〉에 나온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오항녕 유영봉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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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遜齋集)》 박광일(朴光一, 1655~1723) 자 사원(士元), 호 손재(遜齋), 본관 순천(順天)
靑丹祠靑坡辛公奉安祭文 落漏不入於祭文次第移刊于此
恭惟先生。寧越大姓。生有異品。開爽聦穎。事親以孝。出於天性。爰自丙丁。天地飜覆。絶意名途。杜門力學。沉潛大易。周情孔思。先天後天。發其微義。有圖有䟽。天人一理。性命之微。靡不講究。垂裕後昆。先以孝友。茅堂蕭洒。扁以風月。淸霽無邊。胷襟開豁。俯仰靜裏。鳶飛魚躍。含光晦彩。反身自樂。閨門怡愉。鄕黨和悅。芝蕙交薰。一代勝流。後生小子。幾多從遊。鄕先生沒。可祭於社。薦以牲齊。誰云不可。迄今寥寥。責在後學。靑丹之阿。杖屨攸及。刱建祠宇。於焉妥神。玆値中丁。式陳明禋。
春秋祭享祝文
孝友之行。天人之學。一堂茅屋。淸風洒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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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존재집 제21권 / 기(記) / 영귀사우 옥과 중수기〔詠歸祠宇 玉果 重修記〕
영귀사우는 김 문정공(金文正公)을 주향(主享)하고, 운암(雲巖)ㆍ월파(月波)ㆍ청파(靑坡) 세 선생을 배향하니 다른 제사를 모시는 사우(祠宇)들과 견줄 바가 아니다. 지금은 문정공이 문묘에 배향되어 이전에 비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명칭은 비록 사우지만 받들고 모시는 의식과 절차는 사액서원과 다름없으니, 높고 화려한 사당과 정돈되어 있는 강당, 문과 담장, 부엌이 다른 곳에 비해 남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우를 지은 지 오래되어 마룻대와 들보는 낡고 기울었으며, 기와와 서까래는 썩어 물이 샌다. 나머지 병우(丙宇)도 모두 그런 형편이므로 뜻밖의 근심거리가 생길까 걱정되는데도 사우의 물력이 부족하여 공사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집강(執綱)이라는 자들은 모두 죽루(竹樓)가 썩는 상황을 걱정하지 않고, 향촌의 유생들과 하릴없는 임원들은 한갓 전당(錢塘)의 탄식을 절실하게 늘어놓으면서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어찌해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정사년(1797, 정조21) 2월에 읍내 수재인 정필수(鄭必秀)ㆍ김득해(金得海)ㆍ이영백(李英白)ㆍ김성대(金成大) 등은 향교를 중수하는 큰 공사가 막 끝난 것을 보고는 서로 상의하기를 “이 사우는 바로 우리 본읍에 계셨던 선생(先生 전임 수령)들을 모신 사우이다. 하서와 운암 두 분이 끼친 교화 및 월파와 청파 두 분의 모범이 지금까지도 남아서 골짜기나 강촌에 사는 백성마저 아직까지 그분들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다. 이분들이 당(堂)에 계신 듯 항상 사모함이 어찌 그저 익주(益州)의 화상(畫像)뿐이겠는가. 만약 우리 사또 때에 예전 모습대로 손질해 고치지 않는다면, 유림의 계획은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빚는 꼴에 빠지고 말 것이니, 읍내 사람들이 추모함에 후회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들이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편안하고 즐겁게 태평성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네 분의 공적 때문이다. 우리들이 서로 물력을 모아 황하에 물 한 방울 보태고 태산에 흙먼지 하나 더하는 것처럼 한다면, 전대 현인들의 덕을 숭상하는 유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태평 시대에 인재를 배양하는 교화에 부끄러움이 없을 터이니 어찌 각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각각 약간의 돈을 내어 중수하는 일을 도왔다. 공사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나무를 깎고 흙을 발라 준공하였다.
중정(中丁) 하루 전날 위패를 다시 봉안하였는데, 경건한 수많은 선비들과 크고 아름다운 사당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바라보며 한목소리로 찬탄하기를 “고을의 큰일을 이루는 데에는 정해진 운수가 있구나.”라고 하였다. 나 또한 사우가 완성된 일을 기뻐하면서, 네 명의 집강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이 아끼는 재화를 들여서 옛날에는 미처 여력이 닿지 않았던 공사를 새롭게 하였으니, 큰 공을 세운 이에게는 반드시 보답해야 할 것이다. 저 네 명의 수재는 마땅히 발탁해 하재(下齋)에 두어 거룩한 제사를 맡게 하고 특별히 삭망일(朔望日)의 강첨(講簽)을 면제해 주며, 자식과 손자들 또한 호역(戶役) 부담을 면제해 준다면 그들의 공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라고 하니, 모두가 “예, 예.”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저간의 사정을 기록하여 이것을 편액에 걸어 훗날의 군자에게 알리고 뒤를 잇는 자들로 하여금 이 모습을 없애지 않고 오래 보존할 계책을 영구히 이어 가도록 한다.
[주-D001] 김 문정공(金文正公) : 김인후(金麟厚, 1510~1560)로,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이다. 시호는 문정이다.[주-D002] 운암(雲巖) : 이흥발(李興浡, 1600~1673)의 호이다. 자는 유연(悠然)이다.[주-D003] 월파(月波) : 유팽로(柳彭老, ?~1592)의 호이다. 자는 형숙(亨叔)ㆍ군수(君壽)이다.[주-D004] 청파(靑坡) : 신이강(辛二剛, 1601~?)의 호이다. 자는 유숙(柔叔)이다.[주-D005] 전당(錢塘)의 탄식 : 전당은 절강(浙江)의 하류를 말한다. 조수가 밤낮으로 두 번씩 드는데, 사람들은 그 파도가 하늘에 치솟고 굉음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탄식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그저 탄식만 하며 어찌해 보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를 말한다.[주-D006] 이분들이 …… 사모함 : 원문 ‘갱장(羹墻)’은 사람을 우러러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지극히 사모한 나머지, 자리에 앉으면 담벼락에 요 임금의 모습이 나타나는 듯하고, 밥을 먹으면 국그릇 속에 요 임금의 모습이 비치는 듯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주-D007] 익주(益州)의 화상(畫像) : 추모한다는 말이다. 장방평(張方平)은 위태로운 때에 인종(仁宗)의 명을 받들고 익주로 갔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1년쯤 지난 뒤에 익주의 백성들은 장방평의 치적에 감사하기 위해 특별히 그의 화상을 정중사(淨衆寺)에 세워 존경하고 추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張益州畫像記》[주-D008] 밀가루도 …… 꼴 : 원문 ‘무면지불탁(無麵之不托)’은 아무것도 없이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晦庵集 卷26 上宰相書》[주-D009] 중정(中丁) : 음력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로, 대개 이날을 가리어 제사 지낸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년(영조 3)~1798년(정조 22) 자화(子華) 계항(桂巷) 장흥(長興)
정조 20 1796 병진 嘉慶 1 70 1월, 상의 명으로 문집을 올려 보내다. ○ 선공감 부봉사에 제수되다. ○ 3월, 上京해 숙배하고 〈萬言封事〉를 올리다. ○ 玉果 縣監이 되다.
순조 6 1806 병인 嘉慶 11 - 4월, 竹川祠字에 追配되다.
記는 玉果 縣監 재임 시 지은 〈玉果鍊武廳重建記〉, 〈詠歸祠宇重修記〉, 〈烈女金氏旌門記〉 등과 長興의 竹川祠宇, 淵谷書院에 대한 重修記가 실려 있다.
詠歸祠宇 玉果 重修記
詠歸祠宇。主享金文正公。配以雲巖,月波,靑坡三先生。非與他享祠宇比也。今文正公陞腏聖廡。此前尤重。名雖祠宇。尊奉之節。與賜額無異。廟宇之崇麗。講堂門墻齋庖之整飾。宜視他有異。而經始歲久。棟樑老欹。瓦桷朽漏。其餘丙宇皆然。恐有意外之患。而院力凋殘。無以興役。爲其執綱者。皆不懼竹樓之朽。鄕儒閒員。徒切錢塘之歎。耐至歲月。勢將莫可奈何。丁巳仲春。邑之凡秀鄭必秀,金得海,李英白,金成大等。目見校宮重修大役纔畢。相與謀曰此祠便是本邑之先生祠也。河西雲巖二公之遺化。月波靑坡二公之模範。至今猶在。峽氓江村。尙有絃誦之聲。其爲在堂之羹墻。奚啻爲益州之畫像而已也。若不及我侯之時。仍舊修葺。儒林之計。沒奈於無麵之不托。邑民追慕。悔將何及。吾輩之絲身糓腹。煕煕爲聖代之農氓。皆是四先生之效也。吾輩相與出力。爲涓爲埃於河岱。則不負前贒尙德之風。無愧昭代作人之化。盍各勉之。遂各出略干錢。以助其役。興工纔一旬。㓸墁竣工。中丁前一日。還安位板。章甫濟濟。廟宇輪奐。萬目聳瞻。同聲贊曰。邑之大事。有數存焉。余亦喜其有成。招謂四執綱曰。捐人所愛惜之財。新古所未遑之役。有大功者。必有明報。彼四秀宜擢之爲下齋。俾觀俎豆之耿光。特免朔望之講簽。俾其子若孫。亦免編戶之賤疤。則其在報功之道。似爲無愧。僉曰唯唯。遂記其事。揭之板。告之後來君子。使續起者無廢厥觀。永百年之計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