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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무성한 싱그러운 초여름이 오면 시골 신작로 주변과 산야에 만발하는 아카시아 꽃을 쉬이 만날 수 있다. 연두빛 잎사귀 꽃대 위에 하얀 이밥처럼 송알송알 탐스럽게 엉긴 꽃송이를 보노라면 유년시절의 향수를 한정없이 불러온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베이비붐 세대에게 그윽한 향수를 자아내는 과수원길의 정겨운 풍경이다. 시어에서 노스탤지어가 뚝뚝 떨어진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박화목 선생이 누이동생과 함께 외가 근처의 과수원길을 걷다가 서정적인 광경을 보고 쓴 시에다가 작곡가인 김공선 선생이 노랫가락을 입히며 삽시간에 한국 동요계를 평정한 "과수원길"의 상큼한 가사이다. 1972년 세상밖으로 데뷔해서 단숨에 국민 동요로 안착한 과수원길 노래는 온 산천에 널려 피던 아카시아 꽃을 우리들과 친숙한 동구밖길로 가져오는데 성공하며 국민들의 뇌리에 추억의 꽃으로 무난하게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분강촌 앞들로 나가는 동구밖 우릉골 할매네 길다란 과수원길 담장은 온통 아카시아 나무들로 빼곡했다. 초여름 꽃향내가 실바람을 타고 웅장한 새당나무의 풍성한 잎사귀를 뚫고 마을 삽지껄을 넘어올 때면 향긋한 꽃내음이 온 동네에 진동을 했다. 동구밖을 지나 앞들(전평)과 수루뫼(수림뫼樹林山: 나무가 우거진 산, "수림"이라는 지명에 "뫼"가 추가된 합성어) 아래와 청고개로 일을 나가는 마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는 꽃송이를 한 떨기씩 뜯어내어 입에 물곤 했다. 벌들과 새들도 날아와서 꿀을 따고 둥지를 틀며 초여름날의 푸르고 싱그러운 세상을 만끽했다. 동구와 뒷산에 천지 삐까리인 아카시아 꽃이 주는 풍성한 정취는 휘영청한 달빛이 가득한 초여름밤이면 한껏 목가적인 풍경을 빚어내어 동네가 마치 한 폭의 회백색 무대처럼 희멀겋게 빛났다. 재잘대는 구여울 소리와 분강에 투영된 황금빛 달그림자 그리고 하얀 휘장을 두른 듯한 동구밖길의 호젓한 전경은 분강촌이 강호가도의 요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분강촌이 영천이씨 세거지인 것이 다행이지 만약 심상한 이성촌(異姓村) 동네였다면 "한여름 밤의 꿈"이 무수히 탄생하는 로맨틱한 초여름날이 되었을 것이다.
여름날의 아카시아 꽃송이는 싱그럽기는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다. 파르스름하면서도 연두빛을 띤 푸른 꽃대의 잎사귀에서 돋아난 하얀 우유빛 꽃잎들이 조롱조롱 엮여서 마치 수줍은 새악시 마냥 아래로 고개를 떨구는 자태가 그저 이를 데 없이 수수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꽃말도 "순수"와 더불어 "숨은 사랑"을 담고 있다. 잎사구 대를 따라 한결같이 옆으로 나란히 한 조화로운 잎들은 흐트러짐이 없다. 몸태는 온통 가시로 무장을 한 채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서 생장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이파리와 꽃다발은 색상과 무늬가 조화롭고 탐스럽고 향기로워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초여름 꽃이 되었다.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참남배로 사이 신작로 양쪽 길가에는 유난히도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다. 둔덕 아래로는 낙동강 여울이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많은 은어떼처럼 반짝이며 흘러가고 강둑에는 방풍림처럼 길다랗게 숲을 이룬 아카시아 나무들이 가로수같이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4~5월 전교생이 낙동강 언덕길에 코스모스 모종을 구간별로 맡아서 모를 심듯이 심어나가는 울력이 끝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카시아 꽃들이 넓은 강변을 따라 하얀 수채화처럼 활짝 피어났다. 초여름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하뉘바람이 하얀 꽃잎들을 넓고 길다란 신작로 하늘 위에 눈송이처럼 가득히 날릴 때면 일대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초여름 뙤양볕이 기승을 부리는 하굣길에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신작로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로 첨벙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리고는 아카시아 숲속으로 담부떼처럼 몰려가서 찔레와 아카시아 꽃을 되는대로 마구 훑어 먹으며 부산을 떨었다. 달짝지근한 맛에 향기로운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는 아카시아 꽃은 지난했던 그 시절에 시골 아이들의 무난한 군것질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강가는 키다리 아카시아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널따란 거렁지를 만들어 주어서 아늑한 쉼터가 되었다. 낙동강 위에는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그림처럼 걸려 있고 아래로는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며 너울대는 여울물이 흐르고 강변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신작로와 숲속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조그마한 요정들과 뒤섞여 노는 정겨운 광경들은 마치 동화나라의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혜옥이의 여윈 얼굴은 아카시아 꽃보다도 더욱 하얗고 곱단했다. 횡렬로 가지런히 나온 아카시아 이파리 줄기를 꺾어서 조그만 손에 건네주고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잎 한 잎 잎사귀를 떨궈가며 작은 이맛살에 꿀밤을 연거푸 선사할 때면 그만 뾰로통해지고 샐그러지는 모양새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오빠의 눈망울을 쳐다보던 그 작은 앙증맞은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두근거리는 가슴소리를 쉬이 숨겨주던 여울진 낙강 소리가 더없이 고마웠다.
추억은 언제나 상념을 부른다. 유년시절 어느 초여름날 울창한 아카시아 숲속에서 벌어졌던 쓸쓸한 정경들은 신산한 세상살이에 가슴을 적시는 정취로 깊게 남아 계절이 오고 갈 때면 애수가 되어 속절없이 눈물을 뿌린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1975년 이른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년의 집은 삼형제가 예안중학교와 도산국민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었다. 5학년인 소년에게 도시락통이 돌아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도시락통은 으레히 형들의 차지였으며 이따끔씩 소년이 도시락을 쌀 때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소년에게 오후 수업이 있던 그날 등굣길에도 의인 앞 낙동강 여울이 여전히 큰 울음소리를 내고 청소깝 외나무다리 위로는 언제나 처럼 의촌리 아이들이 줄을 지어 아장아장 강을 건너오고 뱅기장 옆 신작로 긴 강둑에는 도로를 덮을 만큼 활짝 핀 아카시아 꽃잎들이 강바람에 떨어져 이리저리 흩날리던 그런 날이었다.
형들에게 도시락통을 내준 소년을 달래기 위해
예수 할머니가 누런 놋그릇에 납작보리 밥을 가득히 담고 뚜껑을 덮은 후 찬과 함께 파란색 보자기에 싸서 소년에게 건내주었다.
소년은 그 도시락통을 학교에 가지고 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등굣길 궁리 끝에 의인 앞 뱅기장 맞은편 아카시아 군락들이 만발한 숲속으로 들어가서 도시락통을 꼭꼭 숨겨 놓고 학교로 갔다. 하굣길에 남몰래 혼자서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점심시간에 할 일이 없어서 학교 뒷동산에 있는 묘목장 옆 산등성이로 가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목실골에 있는 엄마를 생각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점심시간에 내살미 가는 길 초입에 있던 묘목장을 산책하시던 담임 선생님이 잠든 소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 왜 여기서 잠을 자니? "
" 점심은 먹었니? "
"..............."
선생님은 조용히 소년의 손을 잡으시더니 자전거 뒤에 태우고는 교문 밖으로 나갔다. 백운이발관 맞은편에 있는 선생님의 하숙방이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나가시더니 삼립단팥빵과 함께 앞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길러 온 찬물 한 대접을 내놓으셨다.
" 자~ 먹거라. 앞 집 점방에서 사왔단다 "
선생님은 우체국에 다녀오신다며 자리를 피해주셨다. 눈물 젖은 빵이 소년의 입으로 들어갔다.
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선생님이 물으셨다.
"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
" 달리기 선수나 배구 선수요! 아니~ 선생님이 될라 카니더~ 도산서원 금송이한테 이미 약속을 했니더~ ”
" 노래를 불러 보거라~ "
" 애국가를 불러도 되니껴? "
소년은 신이 나서 애국가를 2절까지 크게 불렀다. 애국가를 다 들으신 선생님은
" 다른 노래가 있으면 더 하거라~ "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하굣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들뜬 기분으로 토계 번화가를 한 걸음에 빠져나왔다. 콩닥거리는 바쁜 마음에 교문을 뛰어나와서 돌아가는 토계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개천을 냅다 가로질러 둑방을 넘어 포도밭두렁을 금새 지나 짜장면집 골목 사이로 마구 내달렸다. 지름길로 단숨에 도산지서 앞까지 달려온 것이다. 집으로 올 때면 늘 신비롭게 다가오던 계남고택도 오늘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성기 형님이 일을 하고 있는 술도가를 급히 지나서 의인 앤떼이를 뛰어 돌아 뱅기장 맞은편 강변에 울창하게 줄지어 서 있는 하얀 아카시아 숲속으로 정신없이 들어갔다. 강바람에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아카시아 꽃잎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의 작은 머리 속에는 온통 도시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시락통은 뒤죽박죽이 된 채 돌멩이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 놈의 들쥐들이 도시락통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예수 할머니가 머리에 쓰고 다니시던 아끼던 보자기 마저 갈기갈기 찢어 놓아 버렸다.
그 날 저녁에 소년은 예수 할머니한테 혼이 났다.
"아까운 보자기는 왜 찢어왔느냐!"고...
하지만 소년은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해 늦겨울 어느 공일날 토계 예배당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천사의 노래소리가 분강촌에서 희미하게 멎어질 무렵, 예수 할머니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동네 사람들이 송티재에 있는 곳집에 가서 상여틀을 가지고 왔다. 토계 예배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수 꽃봉오리를 만들어 상여에 걸쳤다. 영결식에 꽃상여가 놓여졌다. 우리집 삽지껄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 멍석을 여러 개 펴고 꽃상여를 올려 놓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를 때는 소년도 따라 부르며 울었다. 곡을 하며 흐느끼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소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꽃상여는 집을 떠나갔고 예수 할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먼 옛날 어느 초여름날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무성하던 숲속에서 조그만 초록색 요정들과 소년만이 간직했던 도시락에 깃든 슬픈 이야기도 이제는 흘러간 세월 따라 저기 파란 하늘나라에서 예수 할머니와 함께 별이 되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거저 아스라이 흘러갔다. 그리고 지친 넋은 옛 기억을 붙잡고 상념의 종을 울리고 있다. 흩날리는 초여름의 아카시아 꽃잎 속으로 옛사람들이 보이고 나의 청춘이 보이고 지나간 도산골의 흔적들이 풍경화처럼 걸려 있다.
해마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초여름이 오면 분강촌 동구밖길과 의인 뱅기장 강변길과 예수 할머니와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의인 여울 위로 하얗게 떨어지던 분분한 낙화 속에 파란 보자기에 질끈 동여 싼 투박한 누런 놋그릇 도시락통이 떠오르고 떨어지는 꽃잎 아래 저만치 서서 배시시 웃고 있는 작은 가인의 얼굴이 보이고 그리고 5월의 풀잎마냥 싱그러운 선생님과 해맑은 소년이 자전거를 함께 타고 노래를 부르며 평화로이 토계천 다리를 건너 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분강촌 산야가 수몰되지 않았다면 우람한 구당나무가 앞들을 품고 있는 동구밖 과수원길에도 지금쯤 아카시아 꽃잎들이 하얗게 흩날리고 있을게다♧.
♤사진 설명(caption)
사진1은 도산국민학교 등하굣길 왕복 이십 리 신작로 주변 풍광이다. 지금 보아도 강변길을 따라 길게 펼쳐진 만만찮은 등하굣길이었다. 도산국민학교는 의열단 단원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이 1회로 졸업한 유서 깊은 학교이다. 분강촌(그림 왼쪽 상단)에서 도산서원(그림 속 정자가 있는 곳)까지는 소나무가 가로수였다면 도산서원에서부터 의인 앤떼이(사진1의 강변길 끝 지점)까지는 아카시아 나무가 가로수였다. 초여름날 시원한 강바람에 아카시아 이파리와 꽃잎들이 하늘거리며 내뿜는 향긋한 꽃향기는 싱그럽고도 청초했다.
사진1의 낙동강 중앙 여울진 지대에 돌무더기가 듬성듬성 쌓여 있는 곳이 아래 사진3과4에 보이는 청소갑 외나무다리가 걸쳐져 있던 장소였다. 사진1에는 비가 많이 와서 다리가 파손되어 사라진 모습이고 사진3과4는 다리가 성한 때의 모습이다. 섬마(섬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갑 외나무다리를 수시로 놓았지만 장마기에 비가 많이 오면 소나무 가지 위에 흙으로 덮어 놓은 매가리 없는 다리가 부서지기 일쑤였다. 물론 다리 바로 윗 지대에 도산서원 앞과 강 건너 시사단을 오가는 나룻배가 수시로 다녔지만 스스로 건널 수 있는 다리보다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전설의 청소갑 외나무다리... 말그대로 시대상을 보여주는 추억의 다리였다.
사진1은 도산서원 별유사로 있는 이동채 선배님(54회)이 보내 주셨고 그림은 1746년 겸재 정선 선생이 도산서원의 주변 풍광을 그린 "계상정거도(현재 일천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그림 왼편 중앙에 소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 후대들이 청소갑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조선시대 때 도산서원 앞 강가 나룻터에서 시사단(1792)이 있는 섬마로 건너가는 이동 수단인 나룻배가 그려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진2는 1960년대 촬영한 작가 미상의 작품이고 사진3은 이서락 선생이 1974년 촬영한 전경이며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사진이다. 사진2와 3은 등굣길 중간 지점(1970년대 초반 도산서원 바로 아래 여울 지역)에 있는 섬마(섬마을)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전경이다. 사진 촬영을 한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장소이다.
♤사진 설명(caption)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낙강에 떨어져 흘러간 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은 꿈속에서 조차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의실 창문 밖으로 휘영청한 여름달에 비친 아카시아 꽃잎들이 마치 온 산천에 흰 소금을 뿌려 놓은 듯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적요한 달빛 속에 낙동강과 신작로 그리고 청소깝 외나무다리와 찔레꽃, 혜옥이와 만발한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뒤엉켜 무수한 추억을 부른다(사진1은 2022년 SNS 서포터즈 배현숙 선생이 칠곡군 지천면 낙산리의 아카시아 꽃길을 촬영한 작품이다. 사진2~3은 경희대 경영대학원 고양캠퍼스에서 필자가 촬영했다).
♤사진 설명(caption)
오른편 둘째줄 모자를 쓴 아기의 바로 왼편에 계신 분이 필자의 할머니(조모님 함자는 이기수)이다. 택호는 구레실댁이다. 1950년대 말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토계 예배당이 아니고 경산에 있는 반야월교회이다. 할머니는 평생 동안 교회에 다니셨다. 우리 집안에서는 할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예수 할머니라고 불렀다. 유년시절 할아버지를 따라서 반야월에 있는 고모님댁에 가면 주일날 고모님 가족과 함께 반야월교회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 기억에도 반야월교회의 건물이 엄청 크고 마당도 넓었다. 50여 년 전인데도 그곳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기도를 올리던 모습이 선연하다.
♤노래 설명(caption)
그 해 늦겨울 어느 공일날 토계 예배당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천사의 노래소리가 분강촌에서 희미하게 멎어질 무렵, 예수 할머니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토계 예배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수 꽃봉오리를 만들어 상여에 걸쳤다. 영결식에 꽃상여가 놓여졌다. 우리집 삽지껄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 멍석을 여러 개 펴고 꽃상여를 올려 놓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를 때는 소년도 따라 부르며 울었다.
먼 옛날 할머니를 떠나보낼 때 불렀던 그 노래를 아내 앤의 연주에 맞춰 다시 불러 보았다. 할머니를 그리워 하며~
"햇빛보다 더 밝은 그곳 그곳에는 어둠도 없어라. 우리 그곳에서 함께 기뻐하며 만날 때 이별의 눈물도 없어라~~~"
♤그림 및 사진 종합 설명(caption)
해마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초여름이 오면 예수 할머니와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분분한 낙화 속에 파란 보자기에 질끈 동여 싼 투박한 누런 놋그릇 도시락통이 떠오르고 선생님과 작은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평화로이 토계천 다리를 건너 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그림 출처: 네이버블로그 <펌> 나에게 넌 너에게 난 - 자전거 타는 풍경ㆍ2005]
사진1의 개울 위에 50여 년 전 소년과 선생님이 자전거를 함께 타고 애국가와 어린시절을 부르며 건넜던 토계(하계) 다리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하계마을이 수몰되어 모든 것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견고했던 시멘트 다리는 용하게도 살아남아서 옛날의 전설을 후대들에게 애잔하게 전하고 있다. 강물이 빠진 뒤 촬영한 황폐한 하계마을의 모습이다(사진출처: 58회 이동운 2024년 드론 촬영).
사진3은 그리운 은사님의 먼 옛날 모습이다. 도산국민학교 5학년 때 강위기 선생님은 담임을 맡으셨다. 선생님의 그때 연세는 젊디젊은 25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젊으셨던 나이에 그런 인후한 사랑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은사님의 인자하신 마음씀씀이가 소년으로 하여금 선생님에 대한 꿈을 더욱 깊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도산골이 수몰되면서 결국에는 도산국민학교(1918.3.3~1993.3.1)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사진2는 수몰로 사라진 도산국민학교 토계 구교정 본관 건물). 고향이 수몰된 후 잇따라 학교도 폐교가 되면서 선생님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그런데 최근 갖은 수소문 끝에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50여 년 만에 상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올해로 76세가 되셨다.
전화로 옛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선생님은 감격해 하셨고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선생님은 통화 중에 "니가 종구 맞니? 그때 그 종구가 참말로 맞나?" 하고 연신 물으셨다. 연구실에서 두 시간을 꼬박 통화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신이 나서 애국가를 2절까지 부르고 이용복 선생의 "어린시절"도 그때처럼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차 안에 걸어 놓은 작은 곰 인형과 마구 수다를 떨었다. 사진2는 필자가 유년시절 선생님과 함께 했던 도산골 산간벽촌에 있었던 도산국민학교 전경이다. 지금은 폐교되었다. 도산국민학교는 의열단 단원인 독립운동가이자 "청포도" 시인인 이육사 선생이 1회(15세)로 졸업한 도산골의 청징한 얼과 문화가 깊게 배어 있는 유서 깊은 공립 학당이었다.
첫댓글 학교 운동장 왼편(토계번화가 반대쪽)으로 나가서 내살미쪽 강가로 가는길에 이동후선생님댁의 과수원이 자리잡고 있었고 봄에 하얀꽃으로 온밭을 다덮은 과수원옆을 쭉 따라 다니던 정겨윘던 그길이 생각나네~
늘 고향 추억의 섬세하고도 구수한 좋은글 잘보고 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