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張旭鎭)
“I'm Simple”
장욱진님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죠.
그 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그린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나, 나무나 사람을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표현하기 때문이죠.
마치 불교의 선사상이 담긴 듯한 그림...
가로수 / 1978
30.0 X 40.0cm
쉬운듯 보여도, 막상 그리려면 대단한 공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그림의 여러 형태를 답습해 온 몸으로 체득된 상태가 아니면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
I'm Simple!
장욱진님의 그림입니다.
님의 그림은 고기먹은 후에 입속에 기름기가 가득할 때,
김치를 먹고 입안이 개운해지는 그런 느낌이죠.
예술이건 사람이건 어떤 경지- 높은 경지에 올라가면
행동이 단순해지고 심플해집니다.
마치 어린이가 된듯한 느낌을 전해주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의 이기가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단순한 생활, 단순한 예술행위가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Simple, 단순한 삶'하니까, 한국 조계종 선맥을 있는 대선사 경허스님이 생각납니다.
말년에 존경받는 삶과 풍족한 삶을 떨치고(버리고) 심플한 삶을 살러
척박한 개마고원 삼수- 갑산으로 들어가 어린이를 가르치는 산골마을 훈장이 되고
이름도 없이 열반에 드는데, 나중에 유골이라도 수습하러 물어 물어 찾아간 제자 만공선사가
수풀이 무성한 산소를 보며 목놓아 흐느끼는(통곡) 장면이 제 머리에 크로즈업 되네요. ^_^
어찌 살아야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삶을 만들 수 있을까요?
생활의 단순화, 삶의 심플화!
'심플한 삶이란 결국 욕심이 없는 삶'이겠죠?
오늘 12월 27일은 장욱진님 돌아가신 날이라, 그림 몇장 올려 봅니다. -文貞善-
★ 장욱진(張旭鎭, 1917~1990.12.27) 사망
1990 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12.27] 사망.
1917년 충남 연기(燕岐)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2고보, 양정고보를 거쳐 도쿄[東京]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945~1947년 국립박물관 학예관, 1954~1960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60년에 사직한 이후로 작품활동에만 몰두하였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8년 분청사기에 그림을 그린 도화전을 열었고, 1983년 판화집을 냈다.
동화·전설·이웃 등 친근한 소재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성으로 그려내었으며,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었다.
주요작품으로 《까치》(1958), 《두 아이》(1973), 《집》(1978), 《가로수》(1978) 등이 있으며,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1976)가 있다.
★ 미니멀리즘과 삶의 단순함, I'm Simple 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_^
*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소한도의, 최소의, 극미의’라는 minimal에 'ism'을 덧붙인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두가족 / 1976 캔버스에 유화
24.0 X 33.0cm
세사람 / 1973 캔버스에 유화
37.5 X 45.0cm
부엌 / 1973 캔버스에 유화
22.0X 27.0cm
해돋이 / 1987 / 캔버스에 유화
44.5 X 27.0cm
가족 / 1975 / 캔버스에 유화
19.3 X 22.7cm
집과 아이 / 1959 / 캔버스에 유화
45.5 X 27.0cm
새와 아이 / 1973 / 캔버스에 유화
27.9 X 22.0cm
기원 / 1990 / 캔버스에유화
41.0x32.0cm
두 여인 / 1956 / 캔버스에 유화
23.0 X 33.0cm
세한도 / 1987
23.1 X 45.7cm
하얀집 / 1969
31.0 X 43.0cm
마당 / 1985
34.0 X 25.0cm
해돋이 / 1987
27.0 X 44.5cm
오후 / 1985 / 캔버스에유화
42.0x32.0cm
도인 / 1988
41.0 X 32.0
가로수 / 1986
35.0 X 35.0cm
까치와 아이 / 1987
41.0 X 32.0cm
기원 / 1984
35.2 X 27.4cm
호작도 / 1984
27.5 X 22.0cm
십장생 / 1984
30.0 X 30.0cm
길 / 1983
27.9 X 22.0cm
달맞이 / 1981
29.5 X 29.5cm
가로수 / 1978
30.0 X 40.0cm
새 / 1983
29.7 X 29.7cm
여인상 / 1984 / 캔버스에유화
42.0x32.0cm
연보
1918 양력 1918년 1월 8일(음력 1917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에서 아버지 장기용(張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926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3학년 때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전일본 소학생미전」에서 일등상을 받다.
1930 서울에 있는 경성 제 2 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32 부정하다 싶은 일에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삼학년 때 드디어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 끝에 퇴학당했다.
1933 성홍열을 앓고 이 후유증을 다스리기 위해 만공선사가 계신
충남 예산의 수덕사 에 가서 6개월 동안 정양하다.
1936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다
1938 조선일보 주최의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등을 출품해서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받다.
1939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23회),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다.
1941 4월12일,이병도박사의 맏딸 이순경(李舜卿,1920년 9월3일생)과 결혼하다.
1942 장남 정순(正淳) 태어나다.
1943 9월,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다
1945 국립중앙박물관에 취직하다.
장녀 경수(暻洙)태어나다.
1947 국립중앙박물관을 사직하다.
차녀 희순(喜淳)태어나다.
1948 12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1947년에 결성한 신사실파 제1회 동인전에 참가하다.
1949 11월,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유화 13점을 출품하다.
1951 초가을에 고향에서 자화상인<보리밭>을 포함, 40여 점을 그리다.
3녀 혜수(惠洙)태어나다.
1953 5월말 부산에서 열린 제3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유화 5점을 출품하다.
195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하다.
4녀 윤미(允美)태어나다.
1955 11월,백우회전에 <수하(樹下)>를 출품,독지가의 이름을 딴 ‘이범래씨상’
을 받다.
1956 제5회 국전 심사위원 이후 두 차례(제8회(1959) 제18회(1969)국전심사위원으로 위촉되다.
1957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동양미술전에 출품하다.
1958 뉴욕의 월드하우스 갤러리가 주최한 한국현대회화전에<나무와 새>(1957)
등 유화 2점을 출품하다.
1960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직하다.
명륜동 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명륜동 2가 22번지)으로 개비하다.
1963 경기도 남양주시의 작은 마을인 덕소 한강가에 화실을 짓고 혼자 생활하기 시작하다.
1964 11월 2일-8일, 반도화랑에서 유화20점을 가지고 제1회 개인전을 열다.
차남 홍순(洪淳)태어나다.
1970 정월, 불경을 공부하던 부인의 모습을 담은<진진묘>를 제작하다.
1973 선(禪)불교를 현창하는 목판화용 밑그림 50여점을 그리다.
목판화는 1995년에 제작된다.
1974 4월12-18일, 공간화랑에 32점의 유화를 걸고 제2회 개인전을 열다.
1975 덕소생활을 청산하고, 명륜동 양옥 뒤의 한옥을 사서 화실을 꾸미다.
1976 자주 사찰을 찾고, 부처 일대기인<팔상도>(1976)를 그리다.
잡지, 신문에 적었던 글을 모아 수상집 『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출간하다.
1977 여름에 양산 통도사의 경봉(鏡峰)스님이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내리다.
˚ 현대화랑에서 비공개 도화전을 열다.
1978 2월23일-28일, 현대화랑에서 윤광조의 분청사기에 그림을 그린
도화전을 열다.
1979 차남을 잃다.
10월11일-17일, 화집 발간 기념 전시회를 현대화랑에서 열다. 유화25점, 판화13점, 먹그림 18점을 전시하다.
1980 봄부터 충북 수안보 상모면 온천리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쓰기 시작하다.
1981 10월11일-17일, 공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전시회에는 유화 20여 점과
먹그림을 에칭판화로 옮긴 그림 5점을 전시하다.
1983 10월22일-29일, 연(淵)화랑에서 판화집 출판기념 판화전을 열다.
1985 여름에 수안보의 화실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하다.
1986 6월12일-19일, 유화8점과 먹그림을 모아 국제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봄에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낡은 한옥을 사서 보수하다.
가을에는 중앙일보가 제정한 예술대상의 수상자로 지명되다.
1987 2월에 대만과 태국을 여행하다.
˚ 5월 28일-6월6일, 두손화랑에서 화집을 내고 개인전을 열다.
1988 1월에 인도로 여행, 인도의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다.
12월에 발리섬으로 여행하다.
1989 7월, 마북리의 한옥 옆에 양옥을 완성하고 입주하다.
가을, 미국 뉴저지주의 ‘버겐 예술 과학박물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화전에
유화 8점을 출품하다.
1990 12월 27일,점심을 든 뒤 갑자기 발병, 오후4시에 한국병원에서 선종하다.
12월 29일 오후1시, 수원 시립 장제장에서 제자 및 미술계 인사들이 모여 영결식을 가지다.
1991 3월 말, 탑비(塔碑)를 고향인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에 세우다.
12월, 후학들이 모여 그의 일주기 추모전시회를 국제화랑에서 개최하고,
추모문집 『장욱진 이야기』(김영사)도 내다.
1992 11월, 미국 뉴욕의 ‘한정판 출판사’가
화문집 ‘Golden Ark: Paintings and Thoughts of Ucchin Chang (황금방주: 장욱진의 그림과 사상)을 발간하다.
1993 4월 김형국이 지은 작가론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이 출간되다.
1995 4월4일-5월14일, 호암 미술관에서 ‘장욱진전(展)’을 개최하다.
4월12일-22일, 가나 공방이 제작한 선(*)시리즈 목판화 25점이 신세계 가나화랑 에서 전시되다.
6월 17일,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생가 앞에서‘1995년 미술의 해’를 기념하여
연기군청이 건립한 생가비가 제막되다.
12월3일, 마북리 한옥 앞에 문화체육부와 ‘95미술의 해 조직위원회’는
말년에 작품 활동을 했던 곳임을 기리는 표석(標石)을 세우다.
1997 3월, 문고판 화집『장욱진-모더니스트民畵匠』(김형국 지음, 열화당,189쪽)이
출간되다.
3월 26일-4월5일,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장욱진版畵展’이 개최되다
1998 8월,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발족되다.
9월1일-20일, 가나아트센터(평창동)개관과 화집『장욱진 먹그림』(김형국ㆍ강운구 엮음,열화당)
출간 기념으로 ‘장욱진 먹그림전’을 개최하다
1999 7월15일-8월5일, 갤러리 현대에서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전’ 개최와 함께
아내의 회고를 곁들인 화집『장욱진의 색깔 있는 종이그림』(김형국 엮음,열화당)을 출간하다.
10월에 경기도 남양주시가 옛 덕소 화실 일대에 ‘장욱진기념 남양주 시립미술관 건립을 제의해 오다.
2000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될 10주기 회고전의 준비로 유화 전작도록(정영목 글)을 발간하다.
2001 1월5일-2월15일, 갤러리 현대에서「10주기 기념 회고전 해와달 ㆍ나무와 장욱진 전 」을 개최하다.
2003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하는 2004년 이달의 문화인물(11월)로 선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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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개인적으로 장욱진님의 작품을 무척 좋아합니다카페에서 다시 감상 할수 있게 되어 반갑습니다문정선님께서 작품 올리신다고 일일이 스켄 받으시고 글도 손수 작성 하신것 같은데 그 정성에 부산사생회를 위한 마음이 보입니다탱큐 베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