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빙행(鑿氷行) : 얼음 캐는 노래
季冬江漢氷始壯 千人萬人出江上 丁丁斧斤亂相斲 隱隱下侵馮夷國
계동강한빙시장 천인만인출강상 정정부근난상착 은은하침풍이국
동지섣달 한강이 처음 꽁꽁 얼어붙자
천 사람 만 사람이 강 위로 나와서는
쩡쩡 도끼 휘두르며 얼음을 깎아내니
은은한 그 소리가 용궁까지 울리누나.
斲出層氷似雪山 積陰凜凜逼人寒 朝朝背負入凌陰 夜夜椎鑿集江心
착출층빙사설산 적음늠늠핍인한 조조배부입능음 야야추착집강심
깎아낸 층층 얼음 흡사 설산 같아
쌓인 음기 싸늘히 뼛속까지 스며드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에 저장하고
밤마다 망치 끌을 들고 강에 모이누나
晝短夜長夜未休 勞歌相應在中洲 短衣至骭足無屝 江上嚴風欲墮指
주단야장야미휴 노가상응재중주 단의지한족무비 강상엄풍욕타지
낮은 짧고 밤은 긴데 밤새 쉬지 않고
강 위에서 노동요를 서로 주고받네
정강이 가린 짧은 홑옷에 짚신도 없어
강가 모진 바람에 손가락 떨어지려네
高堂六月盛炎蒸 美人素手傳淸氷 鸞刀擊碎四座徧 空裏白日流素霰
고당륙월성염증 미인소수전청빙 난도격쇄사좌편 공리백일류소산
유월이라 푹푹 찌는 여름 고당 위에는
미인이 고운 손으로 맑은 얼음 전해주니
난도로 내리쳐서 온 자리에 나눠주면
허공 밝은 태양 아래 하얀 눈발 흩날린다
滿堂歡樂不知暑 誰言鑿氷此勞苦 君不見道傍暍死民 多是江中鑿氷人
만당환낙불지서 수언착빙차노고 군불견도방갈사민 다시강중착빙인
당에 가득 즐기는 사람은 무더위를 모르거니
얼음 깨는 수고로움을 그 누가 말해주랴
그댄 못 보았나 길가에서 더위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대부분 강 위에서 얼음 캐던 사람이라네.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농암집(農巖集)』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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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만 해도 겨울이면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이를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차츰 제빙 기술과 냉동고가 보급되면서
이러한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였다가 사용한 것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던 듯하다.
고려 시대에는 부귀한 사람들이 개인 창고를 지어 얼음을 저장하였다.
고려 고종(高宗) 때 권신(權臣)인 최이(崔怡)가
사사로이 백성을 동원하여 개인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하였는데,
여기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이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나온다.
한겨울에 얼음을 캐어 운반하는 일은 매우 고되고 인력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시대에는 개인이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보관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신에
국가가 얼음을 캐어 저장 관리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동호대교 부근인 두모포(豆毛浦)에
동빙고(東氷庫) 1동(棟)을 설치하여 왕실 제수용(祭需用) 얼음을 공급하였고,
용산(龍山) 둔지산(屯知山) 기슭에 서빙고(西氷庫) 8동을 설치하여
궁중 주방용(廚房用) 얼음을 공급하였는데, 서빙고 얼음의 일부는 신하들에게
반사(頒賜)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저장했던 얼음의 수량은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 시대 궁중의 예식(禮式)과 정무(政務)를 기록한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동빙고에 1만여 정(丁), 서빙고에 13만여 정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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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한강이 어는 풍경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조선 시대에도 해마다 한강이 얼었던 것은 아니어서 한강에서 얼음을 캘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정조(正祖) 2년(1778)에는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아
도성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에서 얼음을 운반해 와야 했다.
당시에 정조는 얼음을 캐고 운반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운반하는 과정 중에 백성들이 당할 고충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궁중 주방에 공급하는 얼음의 수량을 줄이는 한편,
이 일 때문에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엄한 하교(下敎)를 내렸다.
이 시에는 조선 시대 얼음을 캐던 백성들의 고충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양극화된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중국의 옛 철인(哲人) 맹자(孟子)는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인정(仁政)을 역설하였는데,
그 요체는 바로 ‘지도자가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것[與民同樂]’이었다.
백성들이 잘살아야 나라가 안정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루어야 이를 바탕으로 천자(天子)가 될 수 있으며,
지도자가 여민동락하지 못하면 민심이 이반되어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농암은 이 시를 통해 백성들의 고난을 묘사하고 여
민동락하지 못하는 세태를 비판함으로써 국가의 존망을 염려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