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8.
복주는 장사꾼
바리
능숙하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부드러운 남색 가을 정장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복주가 또각또각 걸어간다. 복주의 가슴팍에는 세월을 머금어 누르스름해진 흰색 명찰이 달려있다. 명찰에는 빨간 글씨로 ‘롯데마트’가 작게 적혀 있고, 그 아래 단단한 글씨체로 ‘이복주’가 적혀 있다. 한 아주머니께서 엘리베이터 앞의 등산 점퍼 할인 행사 매대에서 양손으로 분주히 옷을 정리하고 있다. 복주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반가운 목소리로 복주에게 옆에 있는 아가씨가 누구냐고 묻는다.
복주를 따라온 사람은 복주의 딸 유라다. 추석날 직원을 대신해서 유라가 복주에게 시급 만 원을 받고 기꺼이 엄마의 일을 돕는 딸의 포지션을 맡았다. 복주는 아주머니께 딸이 엄마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처럼 자랑을 한다. 복주의 장단에 맞춰 유라는 순진한 표정으로 복주의 옆을 따른다. 아주머니와의 간단한 대화 후에 복주가 남색 천으로 덮인 쥬얼리 매대와 매대 사이의 좁은 틈을 지나 네 개의 매대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유라도 좁은 공간을 간단히 둘러보며 복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짐 정리를 마친 복주는 멀뚱히 서 있는 유라에게 간단한 일을 지시한다. 유라는 복주의 지시에 따라 쥬얼리 매대 위의 남색 천을 걷어낸 후 귀걸이와 목걸이를 차곡차곡 채워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진열대를 매대 위에 정리한다. 그러다 유라가 뒤쪽에 있는 매대에 다가가 정리를 하려 하자 복주가 흠칫 놀라 유라를 부른다. 그러고는 네모난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시늉을 하며 이쪽은 우리 매장 ‘드림쥬얼리’이고 뒤쪽은 다른 매장인 ‘골드쥬얼리’라고 설명한다. 매대는 이어붙어져 있어서 다른 매장임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유라는 이 작은 네모 칸을 또 둘로 나눠 두 매장이 나누어 장사를 한다는 것에 놀란다. 마침 수수한 옷차림에 짧은 단발머리를 한 은희가 네모난 공간 안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건넨다. 복주와 은희는 방 한 칸 크기의 매장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오랜 세월 반지나 목걸이를 팔았다.
복주는 무엇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묻는 유라에게 답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양의 열쇠를 구별하여 재빠르게 진열장의 잠금을 푼다. 진열장의 불을 켜자 천에 덮여 있었던 온갖 보석들이 빛을 튕겨대며 시끄럽게 반짝거린다. 유라는 엄마인 복주를 사장님이라 부를지, 엄마라 부를지, 평소처럼 반말을 할지, 아니면 존댓말을 할지 고민이 된다. 유라가 이미 충분히 반짝이는 진열장 위를 팔을 훌럭훌럭 위아래로 휘저어대며 유리세정제로 닦는 시늉을 한다. 복주와 아는 사이인 아주머니들의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로 옆의 여성 속옷 매장의 아주머니가 슬쩍 복주 근처로 다가와 말을 붙인다. “딸이 참 착하네!” 곧 멀리서 또다른 아주머니가 다가와 복주 옆에 멋쩍게 서 있는 유라에게 “생글생글해서 좋다”라고 말을 건네고는 사라진다. 그러자 뒤쪽에 계신 ‘골드쥬얼리’ 아주머니가 등을 지고 있는 복주에게 넌지시 말한다. “우리 딸들은 도와달래도 절대 안오던데~”
유라는 꽉 끼는 가죽바지를 입은듯한 기분으로 모두에게 친절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순진하고 듬직한 딸답게 “하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오랜 세월 서로를 봐온 직원들이 모인 롯데마트 공동체는 서로에게 친절하지만 부담스러운 느낌이 든다. 유라는 순간 절벽 꼭대기에 오른 것처럼 머리가 지끈하다. 복주에게 해온 오백만 개의 거짓말과 크고 작은 배신과 미움의 순간들이 떠올라서다. 유라는 이 모든 진실 중에 털끝 하나라도 들키면 복주는 이 공동체에서 분명 순식간에 불쌍한 엄마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유라는 컨셉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치게 친절하게 웃어버려 다시는 그들에게 싸늘한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복주는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면서도 조금은 넉살스럽고 여유 있는 대답을 늘어놓는다. 그들을 대하는 복주의 말투는 지나치게 친절해서 로봇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복주는 가족을 대할 때와는 달리 밖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가식을 섞어 말하곤 한다. 그건 유라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봐왔던 복주의 모습이었다.
예전부터 복주는 그랬다. 복주는 자식의 담임선생님이든 자식의 친구들이든 먼 친척이든 누군가를 만나면 꼭 높은 톤의 목소리를 유지했다. 복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절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유라는 그런 복주가 오히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유라는 꾸밈없는 어른을 만날 때마다 복주 생각이 난다. 이를테면 지현이네 엄마가 유라의 밥숟갈 위에 열무김치를 손으로 덥썩 집어 올려주었을 때 시원한 쾌감을 느끼며 복주를 생각하는 것이다. 복주가 이렇게 쿨해졌으면 하고 바란 적도 많다. 하지만 복주는 유라의 친구들에게는 반드시 피자를 사줘야 하는 사람이었고 깨끗하지 않은 살림살이를 함부로 보여주는 것도 싫어했다. 언제나 유라에게 복주의 가식은 의문이었고 답답함이었다.
몇십 년을 장사하며 살아온 복주는 사람이 돈으로 보이는 지경이다. 복주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한 말은 고객의 마음을 흔드는 장사 기술이다. 옆 매장에서 속옷을 몇 벌 사주거나 멀리 악세서리 매장에 들러 필요도 없는 팔천 원짜리 머리끈을 사고 말을 붙이는 것은 인적 네트워크와 잠재 고객을 늘리는 일이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는 길을 궁리하던 젊은 시절의 복주는 자신을 갈아가며 고객의 마음에 드는 화법을 익혔다.
복주가 유라에게 세척하는 법, 결제하는 법, 판매 후 장부를 작성하고 전산에 올리는 법 등을 가르친다. 이제 둘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 뿐이다. 유라와 복주는 매대 앞에 섰다. 복주는 익숙한 듯 가만히 말없이 제자리에 서서 매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객들의 기색을 살핀다. 복주는 무방비 상태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드림쥬얼리’와 ‘골드쥬얼리’ 사이에 조용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이들은 두세 시간에 한 명의 손님이 방문하더라도 매분 매초 사람들에게 눈을 뗄 수 없다. 한 명의 고객에 따라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밍숭맹숭한 유라의 눈빛과 달리 베테랑 복주의 눈빛은 초원과 풀숲 전체를 조망하며 먹잇감을 둘러보는 위엄있는 사자의 눈빛과 닮아있다.
복주는 딱 보면 안다. 살 사람과 안 살 사람은 멀리서 걸어오는 눈빛, 걸음걸이만 봐도 구별할 수가 있다. 쥬얼리는 값이 비싸니 오는 손님도 한정적이다. 아무에게나 인사를 하려고 드는 유라에게 복주는 그렇게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고 충고한다. 인사를 한다고 해서 사려는 생각도 없었던 사람들이 덜컥 큰 돈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무기한의 시간이 복주에게는 30년 동안 단련해온 익숙한 기다림이다.
추석을 맞아 엄마의 선물을 사주러 나온 모녀가 성큼성큼 ‘드림쥬얼리’로 걸어온다. 맞은편의 신발 광고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유라의 정신이 번쩍 든다. 복주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튼다. 복주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문장에는 막힘이 없다. 마치 방금까지도 여러 손님을 응대했던 사람같다. 긴장한 유라는 허둥지둥 손님의 귀걸이를 건네받아 세척기에 넣는다.
복주는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처럼 악착같이 장사에 몰입하여 달려든다. 하지만 그 과정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눈치와 요령으로 가득하다. 손님이 붉은색 귀걸이를 귀에 대보자 복주는 어울리는 붉은 목걸이를 슬쩍 추천한다. 손님이 녹색 귀걸이를 들고 붉은색 귀걸이와 비교하니 복주는 처음부터 들고서 손에서 놓지 않던 붉은색을 망설임없이 적극 추천한다. 손님이 반지에 눈을 두자 “반지까지 하면 할인은 더 크게 해드릴게요”라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쥬얼리 세트에서 반지를 꺼내 부드럽게 검지손가락에 끼워드린다. “운명처럼 딱 맞네요” 손님의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자마자 복주는 말한다. “반지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귀걸이랑 목걸이만 해도 충분하죠.” 이 말을 들은 손님은 반지에 아쉬움이 남는다. 반지를 빼지 않고 만지작거리며 딸을 바라보자 딸은 난감한 듯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사줄게”라고 말한다. 그렇게 복주는 귀걸이를 사러 온 손님에게 목걸이와 반지까지 팔아버린다. 모든 것이 15분 안에 일어난 일이다. 복주가 결제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주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많이 살 생각이 아니었는데 홀랑 넘어가버렸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 광경을 가만히 옆에서 바라본 유라는 복주의 노련함에 감탄한다. 복주는 장사라는 분야에서 누구보다 실력있는 베테랑이다.
한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두 명의 손님이 등장한다. 둘은 뒤쪽 은희의 매장인 ‘골드쥬얼리’로 향한다. 유라는 한참을 기다린 탓에 안달이 나서 둘에게 슬쩍 인사한다. 둘은 ‘골드쥬얼리’를 둘러보다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한 명은 뒤쪽 매장을, 나머지 한 명의 일행은 복주의 매장을 둘러보는 상황이 벌어진다. 어떻게든 손님을 붙잡으려고 말을 붙이려는 유라를 복주가 말린다. 복주는 손님에게 가벼운 인사만 건네고 만다. 그것이 이곳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복주가 유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참 많았다고, 그래서 저쪽과 싸우기도 참 많이 싸운다고. 슬쩍 고개를 돌려 서로가 장사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싸우는 지경까지 간 적도 있다. 이 작은 칸을 대각선으로 나눠 같은 물건을 팔면서도 곤란해지지 않으려면 유연하게 선을 지켜야 한다고 복주는 말한다.
시끄러운 롯데마트 cm송이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흘러나와 귀를 때린다. 복주는 몇천 번을 들었을 이 노래를 고단한 눈빛으로 작게 흥얼거린다. 유라의 머리는 왕왕 울리는 것처럼 어지럽다. 복주는 손님을 놓칠세라 하루종일 의자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앉아 있거나 자리를 비운 단 몇 초 사이 돈이 옆 가게로 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복주는 유라가 하루종일 복주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해서인지 힘이 나는 것도 같다. 어쩐지 오늘 유라를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라는 복주가 돈과 고객만을 생각하며 보낸 시간을 가늠하다 아득해진다. 복주에게 일터는 조용한 전쟁터다. 몇십 년 동안의 끝없는 긴장 상태는 복주를 망가뜨리기도 했을 것이고 지금의 완벽한 장사 실력을 만들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자그마한 네모 한 칸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한 복주의 세월이 물밀 듯이 복주에서 유라에게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