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맞이에 이렇게 빌고 싶었다
정동식
상쾌한 새해 아침을 여는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음악이 울렸다.
23년 1월 1일 아침 07:00였다. 해맞이를 한다면서 07시에 일어나다니!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처남이 포항 창포사거리에 살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영일대 해수욕장
까지 불과 10여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만에 하나 스스로 깨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알람 설정을
해 놓았다. 해맞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축제이다.
올해는 많은 나라가 코로나 방역 규제를 해제하면서 지난 2년 동안 열리지 못했던 새해맞이 행사가 주요 도시에서 개최됐다고 한다. 특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지하철역과 전선의 참호 안에서도 시민들과 군인들이 새해를 축하했다고 하니 신년은 누구에게나 희망과 기대를 한 아름 선물하는 것 같다.
나는 적어도 2007년 전까지는 해맞이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일출을 보러 가는 건 한가한 사람이나 즐기는 여유나 낭만처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이 휴가를 가거나
쉬는 시간에 우리가 할 일은 더 많아 바쁘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휴가는 사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하루 전날부터 동해안으로 일출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찰나와 같은 환희를 음미하기 위해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비싼 숙박료를 지불하고, 여명이 밝아올 이른 새벽부터 추위를 참으며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그건 고생이라고 여겼다. 내가 등산의 묘미를 모르던 30대 초반에 설악산 비선대,
와선대를 노닐며 걷다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을 보면서 ‘왜, 저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지?’ 하며
의문을 품던 생각과 비슷했다.
하지만 해맞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떤 일을 계기로 달라졌다.
내가 처음으로 해맞이를 경험한 건 서울에서 Y 청장님이 대구치안의 수장으로 오신 뒤이다. 2번의 새해를 맞이
하며 갓바위 일출과 용지봉 일출을 함께 했다.
갓바위 일출은 꼭두새벽부터 차량이 많이 막혀 해뜨기 바로 직전에 부랴부랴 해맞이 명소 부근에 도착하여 사람들 틈새로 겨우 천신을 맞이했고, 용지봉 일출은 등산을 겸해서 대구시민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산신제도 같이
지낸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몸만 따라갔지만 산행과 일출행사를 준비한 주무계원들은 간단한 제수용 음식과 20여 명이 먹을 분량까지 지고 오느라 애를 많이 먹었지 싶다. 예전에 왕이 승하하면 백성들이 눈물 흘린 이유가 진짜 슬퍼서가 아니라 우리가 저 왕릉을 어떻게 만들꼬 고생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혀서 울었다고 한다.
큰 행사는 그냥 저절로 진행되지 않는다. 준비를 위해 많은 사람이 음지에서 고생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
했다. 청장님과 우리도 혹한의 날씨를 무릅쓰고 용지봉에 올랐다. 시민의 안녕을 지켜달라고 해님과 산신령님께
축문을 읽던 청장님 모습에서, 치안책임자의 진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Y 청장님과 두 번의 새해맞이 일출행사를 가진 이후에는 일부러 정월초하루에 일출을 보러 가지는 않았다.
간혹 시골에 장모님을 뵈러 갈 때면 처갓집에서 자고 해돋이를 보러 갔다. 아침이 되면 타지에서 열심히 달려온 자동차가 마을 앞길을 지날 즈음, 우리는 여유 있게 기상하여 주섬주섬 옷을 입고 7시쯤에 출발하면 충분했다.
차로 기껏 5분 정도면 해안에 도착이 가능할 정도로 접근성이 좋았다. 모포마을 일출은 가깝기도 하거니와 한적한 곳이라 추우면 차 안에서도 볼 수 있어 고생하지 않고 편히 해맞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바닷가로 나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백사장은 물론 해안도로 인도, 그리고 상가건물 앞까지 붐비고
있었다. 작년 영일대 해맞이 행사는 코로나 상황으로 전면 취소되었지만, 올해는 영일대 누각만 출입이 통제
되고 백사장과 다른 곳은 개방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은 독도인데 올해 일출
시간은 07시 26분이란다. 처남에 의하면 호미곶 일출은 07시 32분이니 이곳 일출은 3~4분 늦은 7시 35~36분
쯤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드디어 영일만 너머 어느 산의 공제선(스카이라인)을 경계로 여명이 밝아왔다. 어쩌면 이 순간이 일출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다. 해뜨기 전의 어둑한 새벽은 태양의 이웃을 4색으로 단장했다. 공제선 바로 위로는
주황빛, 그 위로 어두운 하늘빛, 공제선을 이고 있는 산들은 칠흑빛, 바다는 검푸른 빛이었다.. 영일대해수욕장
에서 바라본 여명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칠흑빛 산은 여명을 빛낼 조연을, 검푸른 바다와 밝은 듯 어두운
하늘은 감초역할을 했다. 소수 정예단원만 출연한 빛의 뮤지컬이었다. 해뜨기 바로 직전에는 사르르 은빛
모레를 굴리는 파랑의 연주가 시작되고, 주황빛 여명을 배경으로 갈매기가 무리 지어 상공을 날아올랐다.
새떼의 축하비행이 끝나자, 누군가 먼저 “뜬다~!”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심봤~다!”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해가 처음 뜰 때의 장면은 이집트 고대의 태양신 ‘라-하라크티(Ra-Harakhty)’가 까치발을 들고 태양 원반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운 듯 슬그머니 자태를 보여 준 해님은 이제 더 수줍어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위용을 드러내며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어느 정도 높게 오르니 출렁이는 바다를 미끄러지듯 윤슬이 건너왔다.
뽀르르 뽀르르 속삭이는 윤슬은 해님과 나를 탯줄처럼 이어 주어 포근함을 느꼈다.
뭇사람은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신비로운 기운을 받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해맞이는 왜 하는 걸까??
만일 그 목적이 한 해의 안녕과 소원을 비는 데 있다면, 이번 새해맞이는 잘한 일은 아니었다. 새해 소망을
제대로 빌지 못한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허투른 행동은 하지 않고 소원만 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만일 정성 들여 기도를 했다면 나는 이렇게 빌고 싶었다.
“저는 딸이 없고 아들만 둘입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셋째를 낳자고 가족회의를 한 적도 있는데 막내의 반대로
회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딸을 낳아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딸이 있으면 어떨까, 당신을 닮은 딸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딸과 같이 사는 새로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꿈을 꾸기도 합니다.
대사를 치르게 되면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끔찍이 아껴주리라 다짐하지만, 두 녀석이 장가를 안 가고
있으니 언감생심입니다. 더 늦지 않게 그들이 짝을 만나 혼인하면 손자를 보고 싶고, 손녀도 보고 싶습니다.
나이에 맞게 누려야 할 행복이 있는데, 아들 둘은 아직 결혼 생각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언젠가 주말연속극에 아파트 인센티브를 걸고 아들을 장가보내려는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요?
이 문제만큼은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식 인생을 존중하며, 지금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직 저의 마음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로 머물러 있습죠..
후덕하고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이는 어떻게 하면 나이에 비해 젊게 살 수 있는가, 와는 결이 다른 문제입니다.
남들이 누리는 소소한 행복을 저에게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라고.
오늘은 소한 하루 전날 밤, 귓가에 별바람이 스치운다.
내일은 무지갯빛 내 소망이 순풍을 타고, 어느 처자와 인연이 닿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 23.01.05)
첫댓글 새해 아드님과 아름답게 헤어질 소망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해맞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글을 좀 더 퇴고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