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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설원기에 대한 글 요약
※ 아래글은 하정공파 광주종원에게 7월종보에 알린 글입니다.
※ 차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을 종중임원중 일부는 아는 이야기를 한다고 싫어하고 말 없는 대다수 종원은 이야기 해달라는데 다른사람에게 듣었던 말을 조금이라도 설명할 수 있게 짧게 요점만 말하라는데 그러면 전달할 부분을 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어렵습니다.
※ 지난해 어느분이 고려개국공신명단을 변조하였습니다
※ 금년에 차문관련해서 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매인/983박팽년상소문 해프닝(5월25일)부터 983대동운군옥 차원부설원기 해동잡록 그리고 왕수긍(6월16일)까지 11회 글을 중복된 부분 제외하고 요약해보니 채하님과 류병수님께서 여러번 말씀하신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광주종원의 요청으로 요약하였으나 원본글을 보시려면 첨부파일을 보십시오.
1. 들어가는 글
① 1997년 대전뿌리공원 차씨유래비와 2004년 5개국어로 만들어 배포한 연안차씨 갑신보에 문화류씨는 가짜성씨(假姓)이고 류차달(이하 선조존칭생략함)은 차무일 38세손 차달(성은 차씨 이름은 달, 시호는 문도공)이라 했으나 대전 뿌리공원에 "문화류씨는 가성이며 문화류씨 시조는 류효금이다"라는 문헌을 류문에서 조사해 보니 차문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차원부설원기" 책이 위서(창작한 글)로 판명되어 2007년 양문 합의하여 해어졌고 국립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전자판 “문화문화대백과사전”에서 “차원부”는 검색되지만 “차원부설원기”는 삭제해서 검색되지 않습니다.
② 1988년“전라문화논총(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의 박천식 교수 논문 중 “삼한공신일람표”를 조작해서 일부성씨에서 자기선조를 추가하여 2018년 SNS에 올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③ 2019년 1월 류차양문 원로들 서울 모임에서 뿌리공원 차씨유래비문에서 어떤내용을 써도 좋으나 “柳”글짜는 삭제하라는 문화류씨 요구에 차문 새집행부는“문화류씨와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자”라 했고 그 후 "차원부 설원기가 처음 발견된 것"처럼 보도하여 채하님과 류병수님이 11회 글을 발표했는데 100페이지가 넘어 요약합니다. 요약과정에서 내 주관적일 수 있으니 첨부파일 원본글을 보시기 바라며 류병수님글과 함께 중복된 부분은 줄여 소개합니다.
2. 류교수님 글(차문홈페이지에 대한 반박글임)
① 박팽년 상소문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보도에 반박하는 글
“박팽년 상소문” 뉴스가 30년전 1989년 7월 16일 MBC에서 보도한 내용인데 근자에 누군가에 의해 새로 발굴되었다고 뉴스 형태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요즘 이 뉴스 내용이 믿을 만한 듯이 퍼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필자가 검토한 결과 전혀 그렇지 않음이 판명되어 진실이 더 왜곡되기 전에 사실을 밝혀 공개하는 것이다.
② 보도 내용 : 단종복위 모의사건 발각 한 달 전인 1456년 음력 5월 17일에 쓰인 세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초본이다.
③ 뉴스에 나온 문건은 박팽년“상소문”이 아니라 가짜 박팽년이 지었다고 조작된 위서(僞書)“차원부설원기”이다.
차원부설원기는 왕과 왕의 권위를 가장하고 저자를 박팽년으로 조작한 위서(僞書)로 국가 공신 우대 정책을 이용해서 차원부를 내세운 것이며 임진왜란 직전에 200년전쯤 과거 고려말-조선초의 일이라며 조작해낸 문헌이다.
④ 차원부설원기에서는 기(記)는 1456년 5월 17일 박팽년이, 서(序)는 5월 21일 하위지가 썼다고 조작하는데 두 분이 며칠 후 6월 1일에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분들이기 차원부설원기를 썼을 수가 없고 썼다고 해도 세조에게 바칠 수 없는 것이다.
⑤ 경태 7(1456)년 5월 교지는 차원부설원기에‘시호를 내리는 것에 관한 의논’이 언급되어 있으나 시호를 내렸다거나 시호가 무엇인지 하는 내용들이 나오지 않고 일성록 1786년 9월 7일 1787년 2월 6일 1788년 4월 4일에 류급과 차세진 차석주가 정조 임금에게 차원부에게 증시를 요청하는 상언(上言)을 올리는데 정조는‘믿을 수 없다’고 하여 세 차례 모두 거절하고 있다.
당시 류씨도 차씨도 차원부에게 경태7년 시호가 내려진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⑥ 승정원일기 11월 20일(을사) 1804년 嘉慶(淸/仁宗) 9년 : 순조 4년.
이현묵이 이조의 말로 아뢰었다. “문절공 차원부의 증시에 대한 연시 행사를 12월 12일 전라도 순천 땅에서 거행할 것이라고 하여 감히 아룁니다.”승정원일기에 차원부의 연시 행사가 1804년 12월 12일에 행해질 예정임을 말하고 있다.
일성록의 기사는 차원부에게는 정조 이전에 증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언을 한 사람들도 조정의 해당 부서의 관원도 정조 임금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태 7년 1456년 5월에 내렸다고 교지는 100% 위조이다.
차원부가 조선 후기에 차석주 등의 노력으로 정몽주 같은 고려 절신에 조선 개국 공신으로 우상화되었다. 그 즈음에 기장 남의 무덤을 역시 차원부설원기에서 꾸며진 인물인 차건신의 무덤으로 둔갑시키는 일 등 대대적인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성록에 상소를 올릴 때 참여하였던 류급 등이 앞장서서 순천에 오천서원을 세우고 차원부를 제향한 것도 이때쯤이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때 차원부 관련 서원들이 세워졌으나 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차원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후손들이 차원부설원기와 차원부에 대해 더 확실하게 인정을 받으려고 무진 노력한 것이 교지 조작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조작인 증거를 제시하는 자가당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⑦ 류중교(1832~1893,고흥인)의“성재집”에서 경태 7년 교지는 위조라했다.
⑧ 류씨와 차씨가 동조동원(同祖同源)이라는 것은 가장 오래되어 원본이라는 차원부설원기 필사본에는 柳와 車가 함께 나올 때는 ‘柳車’로 나오는데 뒤의 車柳로 바뀌어 나온다.
⑨ 차원부가 살해되고 족보가 불살라졌다고 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이며 우리나라 최초 족보 문화류씨 영락보는 1423년에 완성되었고 왕자의난 20년후 영락보에 차원부가 만들었다는 족보가 불에 타서 없어진 중대한 사실이 영락보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신광사 족보가 없었다는 결론이다.
⑩ 차원부설원기 위작설을 제기한 사람은 남극관(1689~1714) 홍계희(1703~1771) 윤광소(1708~1786) 황윤석(1729~1791) 삼봉집의 편찬자(미상) 하진현(1776~1846) 윤광소(1708~1786) 등이며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서 남극관의“몽예집”을 보았고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이익이 차원부설원기에 거짓이 많다고 한 것을 알았다.
지금은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를 손끝에서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마도 옛날의 수십 명의 학자들보다 필자(류교수)가 사료에서 어떤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할 것이다.
⑪ 조선 초기 한미한 자기 조상을 여말 수절인사와 단종충신과 결부시켜 조상세계를 정리하는 데서 차씨에 의해 차원부설원기가 편찬되고 그 결과 18세기 이래 박씨는 박혁거세, 김씨는 알지와 수로왕, 리 최 손 정씨 등은 신라 6성에서, 조 강 홍 림 황 남 양 로씨 등은 중국 유명성씨를 연접시켰고 한씨와 기씨 선우씨는 마한 내지 기자 단군까지 계보화하여 조상세계가 날조와 함께 차원부설원기와 같은 위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1998년의 이수건 교수는 위작 증거로“차원부의 先代家系는 앞의 世系表와 같이 고려후기 200여년동안 고관과 명공거족 사위였다는 것을 위조하였다.
차원부설원기가 가장 먼저 언급된 문건은 능성구씨 구예(具藝)가 차송우의 장인이라 나오는데 차송우와 구예를 따져보면 구예의 장남 구영검은 차송우(? ~1268)보다 88년 후인 1356년에 사망하여 차송우는 자신이 죽은 후에 태어난 구예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차원부설원기에서 차효전은 류차달 아들로 기술하고 있는데 차식 신도비에서는 아버지 류차달은 없고 차효전이 있다.
차원부설원기에서 류차달 차효전 두 사람의 공훈으로 조작을 했으나 차식신도비에서는 차효전의 공훈으로 둔갑시켜 날조해 버렸다.
이것은 차운로가 차원부설원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남효원이 차원부설원기응제시를 썼다는 6월 2일(이때는 음력이지만)은 사육신 변고가 터진 날이고 남효원이 2살인데 시를 썼다는 것이다.
3. 류병수님의 사성강목 대한 글
차원부설원기는 문종이 승하하기전에 신원해 주라 했서 세조가 즉위한 뒤에 교지(1456년 5월,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가증 문하시중 행 고려 간의대부 차원부 증시 문절공)를 내려고 차원부설원기를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조 시호법에 의하면 차원부설원기에 문절(文節)은 시호법에 배우기를 부지련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염치를 좋아하고 스스로 극기하는 것을 절(節)아라하여 차원부 문절은 부적절하다.
대동운부군옥은 권문해(1534-1591)이 1589(선조22)년 20권 목판본을 발행 했고 1836(헌종2)년 권문해 7세손 권진락이 발행한 판각본(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에 문화류씨는 당초 필체와 다르게 덧칠하여 차원부설원기를 써 놓았고 연안차씨는 덧칠한 글씨로 차운혁 위에 차원부를 추가 했다.
4. 류교수님의 사성강목에 대한 글
① 사성강목의 차원부설원기
남평문씨 문극겸(1122~1189)의 사위 차거수(車擧首)의 후손으로서 차거수를 1세로 놓으면 차원부는 10세가 되고 차식신도비와 차원부설원기에“차송우가 1268년, 107세로 사망했으니 태어난 해는 1162년이 된다.
①차거수→②차약춘(동생차약송)→③차덕위→④차척→⑤차수하→⑥차송우→⑦차득규→⑧차포온→⑨차종로→⑩차원부가 차식신도비와 차천로 “오산집”에 계보가 나오는데 차거수 장인 문극겸부터 차송우까지는 6세대가 40년 간격이 있고 신도비에서 차송우가 최의(崔竩)를 제거한 것이 현종 때라고 나오지만 “고려사”에 고종 45년(1258년)으로 나온다. 현종 재위기간은 1009~1031년이고 고종재위기간은 1213~1259년이다.
차원부설원기에 차거수가 문극겸의 사위로 나오는 거짓이며 문극겸 행적과 가문의 권위를 차씨 가문 배경으로 끌어오기 위한 차원부설원기 조작이다.
차원부는 가문 네 명의 얼자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의 이름을 그대로 족보에 기록하여 이들 4명이 차씨 70여 명을 송원과 마원의 골짜기에서 추살하여 태종이 원통하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차원부에게 서로에서 치제하였고 문하시중을 증직하였으며 문절 시호를 내려주었고 그 아들 차안경에게 장의(莊毅)의 시호를 내려 주었다고 차원부설원기에 나온다.
차안경에게 장의 시호를 내렸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고려통일대전”에 연안차씨 인물이 10명이 있는데 절반 이상이 차원부설원기에서 행적이 꾸며진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 차안경은 “고려통일대전지(誌)”에 시호가‘송절(松節)’이라고만 나오고 차원부는 세종 때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② 대동운부군옥, 차원부설원기, 해동잡록, 그리고 왕수긍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서 2017년에 작성한 이방간(회안대군, 호 망우당)의 행장 관련 연구인“망우당행장 국역 연구용역사업 최종 결과물”에 한만유(1746~1812)가 지은“회안대군공 신도비 기(記)”가 소개되어 있는 글 안에 차원부설원기에서 조작된 이방간의 일화가 수용되어 있었다. 차원부의 행적과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임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한지 무려 20여년이 흐르고 있는 이 시점에 이방간에 대한 연구라면 고려말과 조선초의 상황과 더불어 왕자의 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일 터인데 그대로 검토하고 판단해 봐도 알 수 있는 그 황당한 날조를 어찌 간파하지도 못하고 다른 연구도 참조하지 않았는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③ 대동운부군옥과 신편대동운옥
대동운부군옥에는 차원부설원기가 포함되어 있으나 필사본에는 차원부설원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문화류씨’항목 여백에 추가로 종이를 덧대어 車原頫 雪冤記 車松祐 써 놓았다.
“서경잡록”은 왕수긍과 정지상의 “보음록”에서는‘고려 태조 왕건은 왕수긍의 13대손인 왕몽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다.’라는 것은 지나(支那)의 왕씨가 우리나라로 와서 차씨가 되었다는 계보를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정약용도 왕수긍은 “위서(僞書)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왕씨와 차씨와 류씨 등을 같은 계통으로 꾸며내는 이야기로 왕몽이 기원전 210년에‘一土草家者王’(一土草家가 왕이 됨)이라는 동요가 있었다는 것인데 삼국시대에 극소수만 알고 있는 한자를 아이들이 한자 파자로 노래를 불렀다니 심각한 시대착오이다. 여기에 차씨가 고려 이전에는 역사에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작이다.
왕몽(차무일)은 기원전 210년에 일곱째 아들과 도망했고 기원전 57년에 '신라 태조'에 의해 좌상이 되었고 200년을 살았다는 것인데 신라는‘좌상’이란 직책이 없다.
군옥의 차원부설원기에 황제→신갑→왕조명(단군때치민장)→왕수긍→왕몽(차무일)→차제능→류효전(차효전)→차원부로 이어지는 것은 모두 적절한 이름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만들었으나 현재 차원부설원기에는 왕수긍이 나오지 않는다.
5. 결론 겸 註釋
※류재균주1 : 박팽년은 체포되어 1456년 6월 7일 옥사합니다. 6월 8일 단종 복위 주동자들이 모두 능지처참되었는데 5월 17일 차원부설원기를 썼다는데 죽기 21일전에 세조명으로 차원부설원기를 쓸 수 없고 후손들이 없어 내 아버지가 안쓴 글이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용한 것입니다.
※주2 : 이성계가 차원부를 3번 찾아 간 것은
① 배극렴에게 이성계가 3번 찾아갔고 교지를 내린 이야기이며 이성계가 방석이를 태자로 삼으려 하자
② 조준이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된 것을 차원부가 건의한 것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주3 “연안차씨 최초족보 무자보(1708년 숙종34) 서문을 류상운선조가 썼다고하며 기축보(1769년 영조45) 서문을 황경원(대제학공조판서)가 썼다는데 차문 누군가 쓰고 약재류상운과 황경원이 썼다고 하는 것은 차원부설원기를 차천로(1556-1615첨정)가 짓고 박팽년이 썼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이글이 차문관련하여 요약되었기에 참고하시라고 여기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