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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계로 유라시아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데니스 사이노어의 글이다. "Inner Asia"란 개념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 "Inner Asia"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라시아 초원 및 그 주변부를 다 포함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노학자가 평생 연구를 되씹어 보며 후학들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어보자.
원문은 강연문인 만큼 비교적 쉽게 쓴 글이며(배경지식이 없으면 어려울 수도 있음) 참 아름답고 깔끔한데 번역하면서 다 뵈려났다. 역자의 공력이 모자라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기 까다로운 말(예를 들어 people, nomad, ethnic 등)도 있고 이중적인 의미의 말도 섞여 있어서 오역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그런대로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참고문헌은 다 뺐다.
뱀꼬리:
서방학계에서 중국사 또는/그리고 유라시아사의 통설은 "The Cambridge History of OO"의 제목으로 출판된다. 몽골시대 이전의 유목민족을 중심으로 한 고대 유라시아사에 대해 데니스 사이노어가 편집한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는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읽어볼만 하다 (상대적으로 동북아시아의 민족에 대한 지면이 다소 소홀한 것이 흠이다.)
서방학자가 쓴 중국 주변의 "유목민족"에 대해 근래에 나온 수작으로는 니콜라스 디코스모의 "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를 추천한다. 2005년에 우리나라에도 이재성에 의해 번역되어 "오랑캐의 탄생"이란 제목(왜 이런 재미없는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다)으로 황금가지에서 출판되었다 . 유라시아 초원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까지의 고고학적 성과가 두루 반영되어 있으며 중국과 북방민족(특히 흉노)와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 신선하다. 중국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반향이 있었다.
Acta Orientalia Academiae Scientiarum Hung. Volume 58 (1), 3–14 (2005)
중앙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역사
및 역사학에 대한 회고
(Reflections on the History and Histography
of the Nomad Empires of
데니스 사이노어
(Denis Sinor)
The first part of this essay deals with the difficulties created by the rarity of indigenous, written sources and the multiplicity of languages used in external sources. The ethnonyms and administrative terms these contain cannot be relied upon to determine the language spoken by a given people. Archaeological data are seldom convertible into historical terms. The second part examines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Key words: written sources, languages spoken, harmonising archaeology and history, pastoral nomadism, warfare, mig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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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사이노어, 인디아나대학교 중앙유라시아학과, 미국 인디아나주 블루밍턴 47405, 전자우편: sinord@indiana.edu
내가 이 짧은 발표에서 하려는 몇 마디는 이러하다. 먼저 이 지역에 관한 역사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다음으로 그 역사 자체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륙간 이동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중세 중앙유라시아 역사를 기술코자 하는 이들이 어김없이 먼저 맞부딪치는 어려움은 (유목민족이 직접 쓴) 고유 문헌자료가 지독히도 드물다는 점이다. 몽고 오르콘강에서 발견된 8세기 무렵 고대 투르크 명문과 13세기 전반부에 몽고어로 쓰여진 “원조비사” 사이의 4백 여 년이란 기간에 대한 고유 기초 문헌자료가 우리에겐 없다. 따라서 내륙아시아(Inner Asia)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외부인이 쓴 사료를 기초로 재구축해야 하는데, 이러한 사료는 대부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 게다가 역사가가 이 주요 자료를 완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세 언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 두드러진 본보기로서, 알란족(Alans)의 역사에 대한 주요 사료는 무려 15가지 언어로 산재해 있다!
20세기 후반부, 소장 사학자들이 지닌 공구-언어(tool-language)에 대한 유창한 독해 지식을 보면, 불어와 독일어에 대한 지식은 줄어들어 가고 현대 중국어와 일본어에 대한 지식은 폭넓게 늘어나고 있다. 전자의 경향은 응당 안타깝지만, 후자는 꼭 필요하며 반길만한 진전이다. 왜냐하면 중국인 또는 일본인 동학들의 작업에 의한 성과 없이는 연구할 수 없는 주제가 이제는 많기 때문이다. 내가 젋었을 적엔 이와 같지 아니했었다.
구전사료의 기록이 사멸된 탓으로 학자들은 굴곡되어있는 어원을 통한 족속비정이라는 마른 바위로부터 진실의 물보라를 일으키려고 눈물겹게 노력하곤 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자가 셀 수 없이 많은 글(나 자신도 어쩌면 이런 글에서 과실을 항변했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들 종족만의 말뿌리로써 말했던 언어나 칭호 혹은 단순히 떠도는 단어(말하자면 어떤 중국어, 그리스어, 이란어 등의 텍스트에 삽입된 단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했었다. 어떤 사람들이 쓰던 언어가 무엇인지 우리가 규정할 수 있도록 알려줄 만한 ‘떠도는 단어’조차도 우리는 때때로 갖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유연(柔然)의 경우가 그러하다. 학식이 높은 Peter Golden은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Turkic Peoples, 1992, pp. 76–79 에서 유연을 그가 몽고어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동호(東胡) 그룹에 한데 묶었다. 그러나 사실상 유연의 언어(고유명칭 자체 외의 언어)로 된 단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명칭 자체도 알려진 어떤 언어와도 들어 맞지 않는다. 그럼 생각해 볼 요점이 무엇이겠는가? 유연의 경우는 단지 그 시공간적인 위치만을 증거로 어족을 어떤 사람들에게 연결시킨 고전적인 사례다. 내 강연이 있고 난 후에 출판된 한 양질의 글에서, Alexander Vovin (2004)은 유연의 언어가 주변의 다른 어떠한 언어와도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는 일부 고대 튀르크(돌궐) 단어(주로 칭호)는 유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었을까? 단어를 유연으로부터 빌려오되 다른 언어로부터는 빌려오지 않았다는데, 왜 이렇게 “아주 큰” 특이성이 있는 걸까?
말뿌리 연구(ethnonym)를 그 자체의 틀 속에 그냥 내버려두면, 종족(ethnic)이나 언어의 귀속을 증명할 수 없거니와 반증도 할 수 없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세익스피어풍의 의문을 더욱 빈번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왜 그러한지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비잔틴 사료에는 훈족(Huns)은 9개, 헝가리인은 무려 19개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훈족(Huns)이란 이름은 대단히 많은 민족(people)에게 적용되었다. 아바르족(Avars)은 훈족(Huns)이라고 불렸고, 튀르크족(Türks = 돌궐)도 그러했으며, 헝가리족(Hungarians), 쿠만족(Cumans), 오노구르족(Onogurs, 이 이름은 ‘헝가리’란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심지어 셀주크(Seljuk)와 오토만(Ottomans)마저 그러했다. 킵착 투르크족(Kipchak Turks)은 러시아어로 뽀로브치(Polovtsi)였고, 라틴 사료에는 꾸마니(Cumani) 이며, 헝가리의 알란족(Alans)은 그들을 야쯔(Jász)라고 불렀다.
고전시대, 즉 이른바 스키토-사르마티안 시기의 민족(people)한테도 이와 똑 같은 상황이 있었다. 때문에 Schiltz (2002)는 말했다. “…우리의 연구에 있어 한가지 주요 문제는 명명된 이름이다. 텍스트에 나오는 초원지대의 민족 (이름들은)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으며, 경우를 막론하고 의심할 것 없이 전혀 (이름이) 종족(ethnic) 구성과 부합하지 않는다 […c’est bien là l’un des problèmes majeures de nos études, les noms dont sont baptisés, dans les textes, les peuples des steppes ne sont pas sémantiquements cohérents et ne correspondent en tout cas sans doute jamais à des ethnies constitués.]”.
지나치게 전적으로 어원연구에 의존하면 심지어 유럽의 역사마저 애매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독일인(German)이 가장 많이 쓰는 자칭은 도이치(Deutsch)다. 그러나 러시아인은 그들을 Nemets라 부르고, 프랑스인은 Allemands라고 부른다. 한편 프랑스인을 말하자면, 켈트족(Celtic people)이되 게르만계 이름을 가지며 로망어(Romance language)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헝가리인은 자신들을 마쟈르(Magyar)라고 부르며 투르크족(Turks)이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피노-우그릭(Finno-Ugric) 언어를 쓰며 실질적인 이들의 모든 행정 용어(administrative term)는 슬라브어(Slavic)다.
뒤집어 말해서, 행정 용어가 만일 이것을 쓰는 사람들의 언어로서 성립되었다면 그 행정 용어는 (종족이나 어족 비정의) 증거로서 신뢰성이 없다. 5세기 무렵, 내륙아시아인 유연의 지배자는 가한(可汗, k’o-han, 투르크-몽골어의 kaghan)이라는 칭호를 가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유연 사람들이 투르크어족 혹은 몽고어족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9세기, 아마도 슬라브족 바이킹이었을 루스(Rūs) 사람들의 지배자도 또한 카간(kaghan)이란 칭호를 따왔다. 헝가리인은 슬라브족은 아니지만 그 지배자는 슬라브어 칭호인 키랠리(király)를 가졌는데, 이 칭호의 (말뿌리는) 궁국적으로 샤률마뉴(Charlemagne)라는 개인 이름까지 거슬러 간다. 단지 독일(Germans)의 지배자가 지닌 카이저(Kaiser)라는 칭호가 카이사르(Caesar)까지 거슬러간다고 해서 그들은 라틴어로 말했다든지 아니면 게세르칸(Gesser khan)이 있었던 몽골과 연관이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않된다. 영국의 행정 용어는 거의 전적으로 프랑스어(treasurer, governor, councilor 따위)이고, 헝가리인의 행정용어는 거의 완전하게 슬라브어(király, nádor 따위)다. 미합중국의 모토(motto)가 “E pluribus unum (다양함 속의 하나)”라고 해서 그 땅의 공식언어가 라틴어라는 결론을 이끌게 하지 않는다.
인명(personal name) 또한 믿지 못할 증거다. 우리는 이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명문, 즉 튀르크 비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내 말뜻은 이 제국의 지배층은 튀르크어로 말했지만 그들의 많은 지도층 인사가 非튀르크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Sinor 1985).
내륙아시아에 산재한 언어의 분열 탓으로 어떤 언어를 어떤 민족(people)에게 귀속시키는 노력은 신빙성이 낮고 위험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비록 현대에는 투르크어가 가장 폭넓게 쓰이고 있지만, 고전시대 혹은 심지어 중세시대 초기에도 그러했는지에 대한 징표는 없다. 우리는 몽골어 또는 퉁구스어가 어디서 사용되었는지 모르며, 이란어의 확산에 대한 것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이른바 고아시아어(Palaeoasiatic languages)의 존재에 항상 주목하고 있고 그 몇 가지는 아직도 쓰이고 있지만 이것들은 아마도 확인할 만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언어들의 작은 일부만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철저하게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대략 서기 1세기 무렵의 내륙아시아에 거주하는 민족에 대한 기술이 중국측 사료에 59개나 됨을 밝혔다. 59 중에 단지 18만이 그들 각각의 언어에 대한 어떤 정보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 중 단지 3개만이 식별이 가능했고 다른 3개에 대해서 우리는 유식한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또한 56민족은 이름도 알려져 있으되 그들의 언어가 어떠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제 언어학에서 고고학으로 옮겨 가보자. 중앙 유라시아 문명의 특수성 탓에 구대륙(Old World)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 비교하여 고고학적 발견은 양적으로 대단치 않다. 몇몇 도시만을 가진 채 세워진 문명의 자취는 소멸될 수 밖에 없다. 중앙 유라시아 전체의 고고학적 재료는 (양적으로) 예컨대 이탈리아만큼도 되지 않는다. 관련된 영역은 광대하되 인구는 극히 적었던 탓으로 지금까지도 고고학적 발견은 아주 드물다. 심지어 얼마 없는 무덤 유적지에서도 더욱 얼마 없는 구조물이 남아있고, 단지 드물게나마 얼린 상태로 아니면 아주 건조한 모래 같은 토양이 유기물, 옷, 심지어 인체 등을 보존시킨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분명히 고고학은 가장 중요한 발견을 기대하게 만든다. 지난 몇 년간의 정치적 변동에 따라 이 분야에 대한 국제 협력이 촉진되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안타깝게도, 고고학적 결과는 역사적 서술로 그다지 잘 전환되지 못한다. 내륙아시아에 있어서 문헌사료에 기초한 역사적 결론을 고고학에 의해 나온 것과 합치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외부 증거도 없는 채 한 무덤을 다른 민족을 제쳐두고 어떤 한 민족에게만 귀속시킬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어떤 무덤유적지를 투르크 혹은 몽골 민족에게 속한다고 판단했을 때, 우리는 그 그릇이나 활이 그것에 귀속됨이 확인될 수 있는지 혹은 출토한 인골이 투르크 혹은 몽골이라고 판명되는 근거는 있는지 부질없는 질문을 하기가 무척 껄끄럽지 않은가? 2차사료를 통해 누군가는 기원전 시기의 투르크족 혹은 몽골족에 대한 것을 보지만 전자는 서기 6세기에 출현했을 따름이며 후자는 9세기 전에는 출현하지도 않았다. 사실 13세기가 되기까지의 이들은 언급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어떤이는 때때로 유행하는 비판정신의 부족에 곤란에 처한다. 모처럼 우리는 헝가리에 와있으므로 헝가리를 예로 들어 고고학/인류학적 귀속작업이 직면하는 어려움을 보자. 서부 헝가리의 두난툴(Dunántúl)에는 연대상 10세기 무렵부터의 수 백 무덤유적지가 출토되었고 수많은 학자에 의해 1세기 넘게 연구되어왔다. 오늘날까지도 언어의 귀속을 제외한 매장된 사람들의 종족(ethnic)에 관한 의견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Mesterházy 2000). 그래도, 귀속에 근거가 있는 예를 든다면, 중국령 투르크스탄에서 출토한 유럽인종(Europoid) 인체는 (이로부터) 1천년 후에 이 지역에 출현했던 토카리아인(Tokharians)으로 흔히 귀속된다.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은 즉, 우리는 출토한 이 인체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근거로 이 사람들이 지닌 언어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인구의 언어는 영어다.
이제 이 강연의 두 번째 파트, 즉 역사학적으로 보는 중앙아시아의 특징으로 넘어가자.
중앙유라시아 연구는 그 특이성에 의해 어려움이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는 강력히 통합할 만한 공용어 또는 심지어 강력하게 한데 묶을 만한 공용 문자마저 결여 되어있고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시대의 거주민들은 거의가 문맹이다. 소위 투르크 룬 문자의 씀씀이는 고대 투르크에 한정되어있고, 한편 소그드 문자는 그 변형이 오늘날까지 몽골 문자에 남아있지만 그 씀씀이는 언제나 아주 한계가 있다. 중국 혹은 데바나가리형(Devanagari-type) 문자는 폭넓게 수용된 적이 전혀 없었으며, 아랍 문자는 이슬람 문명을 일으키고 분열되어 있던 중요 내륙아시아 사람들을 이슬람 세계로 통합하였다.
중앙 유라시아사의 특징의 주요 공통분모이며 가장 전형적인 것은 그 주된 경제 구조가 유목생활(pastoral nomadism)을 기반으로 한 점이다.
먼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 강연의 제목에서 쓰고 있는 “유목제국(Nomad Empires)”이란 용어는 엄밀히 말해서 잘못 명명된 것이다. “제국(Empires)”은 “유목(nomadise)”하지 않으며, 단지 그 국민이 그럴 따름이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말해야 한다면 “유목민의 제국(Empires of nomadic peoples)”이어야 할 것이다. 명심해야할 것은 “유목민(nomads)”이 다 가축치기(pastoralists)는 아니며(수렵-채집민 또는 심지어 수렵민[예컨데 타이가 지대의 사람들]도 유목민[nomads]이다.), 모든 가축치기가 다 유목(nomadic)하지는 않는다. 광대한 미국 초원의 소치기(cattle-raisers)는 아주 잘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역사적 맥락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활짝 열린 중앙유라시아 초원에 힘의 근원(power-base)을 둔 이른바 기마 유목민(horse-riding nomads)이다.
유목생활(pastoral nomadism)은 효율적인 경작이 적합하지 않은 땅을 개척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이다. 초기 철기시대(B.C. 1000 초),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소, 양, 염소, 낙타 그리고 말을 갖춘 유목이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운송수단인 안장이 장착된 말의 대규모 사용은 사람들간의 접촉을 촉진했으며 또한 내가 뒤에서 말할 새로운 군사기술의 개발도 이끌어 내었다. 원시 농업 그리고/혹은 수렵 경제로부터 유목으로의 전이는 결과적으로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을 멀리 도약(quantum-leap)하게 만들었으며, 초원을 경계로 하고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초원지대에 있어서, 말에 대한 내부적인 수요는 제한된 탄력만이 있었고 지역시장(home market)은 쉽게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남아도는 말은 군사적 목적 혹은 중앙유라시아 유목경제체제 안에서 생산할 수 없는 물품에 대한 지불수단 외에 말떼의 무한한 증가를 통한 직접적인 이득은 없었다. 따라서 말 교역의 가치는 매우 컸는데 왜냐하면 구매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주요 피땀의 하나인 전쟁에 있어 말과 바꿀만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크게 통합된 집단을 유능한 이가 이끌면서 정복활동을 목적으로 할 때, 기마유목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군사력은 화약무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같은수의 정착인구의 군대보다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이 시기, 집단사냥을 통해 끊임없는 훈련을 거친 우월한 기동력의 군대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들의 적을 상대로 교묘한 작전수행을 펼쳤다. 앞쪽으로 활 쏘기는 물론이거니와 안장에 앉은 채 뒤돌아 추적자를 활 쏘는 기술의 습득은 적의 진영을 흐트러지게 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화약무기에 의해 제공된 우월한 군사력의 이점을 살려 힘을 팽창했듯이 기마유목민은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점잔은 삶을 끄집어 내기 보다는 더욱 정복활동을 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로즈 머피(Rhoads Murphey, 1961)의 말에 따르면 “초원과 파종지(sown) 사이, 유목민과 정착 농경민 사이의 대항(rivalry)은 [문명의] 가장 오랜 분쟁 중 한가지일 것이다.” 아시아 대륙 내륙 중심부의 일반적인 자연-지리적 조건은 정착 문명 창조의 방해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비특권층 사람들의 거주지역이었고 가진자와 없는자 사이의 긴장이 늘 조성되었는데, 후자는 따뜻한 화로(hearth)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소문난 고깃국(flesh-pot)에 다가가려고 시도하였다. 초원 사람들과 이웃한 정착민 간의 상호작용은 전자의 탐욕이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현대의 전차부대의 활동범위는 연료의 양에 의존하듯이 유목민의 기병은 여러 말을 각각 모든 병사에게 배급할 수 있도록 하는 풍부한 목초지의 이용과 접근 용이성에 의존하며 이는 그들의 군사전술의 관건이 된다. 바다 없이 해군력이 유지될 수 없듯이, 어떠한 유목민의 파워도 풍족한 목초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카자노브(Khazanov’, 1984)는 “유목생활(pastoral nomadism)의 생태학적 토대는 이것이 복잡한 경제 개발을 위한 유효 범위를 적게 남긴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제 오로지 무기만을 생산할 수 있는 경제를 상상해 보자(너무 지나친 상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그 국경 밖의 경제에 의해 제공되는 이득과 물품을 얻을 수 있는 독점적인 자산이다. 정복활동에 이용되지 않는 한, “유목은 스태그네이션(stagnation)에 빠질 운명인데 왜냐하면 그 경제는 비대하되 비대한 생산을 소비해 균형을 맞춰 줄 수 있는 영구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Khazanov 1984)” 오랜 세월에 걸쳐 초원이 지닌 수용능력(capacity)은 일정했고, 거의 오늘날 몽골리아의 영토에 가까운 면적에 있어서 면적 당 가축의 수는 큰 변화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 몽골리아의 인구증가는 사실상 도시의 경우에 한한다. 또한, 적어도 여기서 고려하는 시대의 경우, 유목사회 안에서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괄목할 만한 기술 혁신은 없었다.
유목인이 자급자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산상태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만일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에서, 예컨대 자체생산이 불가능한 물품을 얻기 위한 욕망이나 지도자의 정치적 야망에 의해, 가축치기(pastoralist)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state)의 창설을 펼쳤다면, 그 목초지는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가축떼의 밀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새로운 초원국가(steppe-state)는 가축떼의 수를 점유한 목초지에 알맞은 적당량으로 줄이기 위해서 잉여의 동물을 수출하던지 아니면 잉여의 말로 인해 생긴 잠재적인 전쟁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대규모 군사행동에 필요할 만큼의 말의 고농도 집중은 평화상태에서는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무역 가능성에 제한이 있거나 지도자가 군사활동상의 성공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면, 초원국가는 각자의 확실한 생존을 위해 해체하던지 아니면 비효율적인 정부를 전복시켜 새로운 통치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우수꽝스럽지만 현대적인 용어를 빌려 썼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종족(ethnic)이나 언어의 배경이 서로 동일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족(tribe)의 통치체제 아래 한 새로운 국가가 창설되어 대체되었다는 말이다.
본질적으로, 무장분쟁의 패턴은 시대가 지나도 그 어떤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한가지 특성은 침입자에 의한 “외부인(outsiders)”의 공격인데(예컨대 말을 타고 오거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온다), 이들은 이들이 공격했던 땅에 영구적인 정치체(polity)를 수립할 수 없다. 이른바 “테로리스트”라는 여러 정착국가에 대한 현대의 적은 교묘하고 잽싸며 매우 위협적이지만 이들의 공격이 일어난 나라를 정복(점거를 제외하고)하지는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테로리스트의 경우처럼 유목민족(nomads)은 상당한 비중으로 성가시지만 그들 자신의 정치체의 특성을 바꾸지 않는 한 그들은 그들이 움켜쥔 정착인구를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환경의 제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유목민(pastoral nomads)은 땅을 정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유 정체성(identities)을 내주지 않는 한 그 땅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다. 쉴츠(Schiltz, 2002)의 적절한 말을 빌리면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돌아다니는) 유목국가(nomad state)란 개념 자체가 모순된 말(oxymoron)이다[On ne le répétera jamais assez. La notion d’État nomade est en soi un oxymoron.]”라고 말했다.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에는 지정학적 표기의 형상을 도와주고 법적으로 국가를 정의한 웨스트팔리아 강화조약(Treaty of Westphalia)과 같은 것 따위는 없다.
그럭저럭 생산성이 있는 풀밭-구역은 1달에 동물 한 마리 당 대략 10 에이커 만큼의 방목 용량을 가지고, 또한 바꿔 말하면, 말 한 마리를 1년 동안 먹여 살리려면 120 에이커 만큼의 구역이 필요하다. 유라시아 대초원지대의 가장 서부에 있는 목초지인 헝가리평원이 있는 곳이며, 지금 우리가 참석한 학회가 열리고 있는 이곳 올푈드(Alföld)는 250만 여 가축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몽골리아의 목초지에 비해 기껏해야 20만 가축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한 사람이 말 3마리만을 키운다고 치면, 이 헝가리의 구역은 다른 가축은 전혀 키울 수 없다는 조건에서 기껏해야 7만의 병사를 말에 태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흉노, 튀르크(突厥), 위구르 등등의 제국이 몽골리아 목초지에서 모을 수 있는 기마인력의 10퍼센트 미만이다. 이것이 왜 중앙유라시아의 서쪽 경계에 있던 훈족, 아바르족, 헝가리족 그리고 몽골족의 유목전사가 지금 우리가 학회를 열고 있는 이곳 세게드(Szeged) 지역으로부터 더 이상 서쪽으로 이동하지 못한 이유다.
풀과 물은 유목민족이 군사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요조건이다. 풀과 물이 있고 없음은 군대의 크기는 물론 이들의 작전수행이 가능한 범위를 결정한다. 1242년 3월에 몽골이 달아나는 벨라(Béla) 4세를 뒤쫓아 달마티아(Dalmatia)의 도시인 스플릿(Split)에 도달했을 때 몽골의 장수 콰이단(Qaidan)은 그 군대의 일부만을 데리고 왔었는데, 왜냐하면 Thomas of Spalato의 표현에 따르면 “그곳에는 그의 모든 기병(horsemen)을 위한 풀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Sinor 1972).
카르파티아 분지(Carpathian basin)에서 목초지의 풀-용량으로는 장기적으로 몽골 군대를 지탱할 수 없었고, 이러한 기초적 사실에 대한 인식은 바투(Batu)를 (목초지의 용량이) 적어도 5배나 되는 카르파티아의 동쪽 지역까지 물러나게 했다.
이제 내 생각의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가는데, 바로 중앙유라시아에서 일어났다는 거의 대륙을 횡단하는 장거리 이주 문제인데 내가 볼 때 그 성질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이 중앙유라시아사의 일반적인 개념을 왜곡하는 흔한 오류는 이 지역의 인구집단은 거의 끊임없이 이주하는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서방 사학자는 예컨대 몽골족이나 훈족 또는 헝가리족 같이 달리기가 빠른 기마유목민이 중국으로부터의 기마전사가 유럽으로의 이주를 재촉했다는 개념을 낳는데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으로부터 내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의 광대한 이주라는 그릇된 개념은 놀랍게도 학식 높은 디기네스(Deguignes)의 역작인 Histoire générale des Huns, des Turcs, des Mogols et des autres Tartares occidentaux…avant et depuis Jésus Christ jusqu’à présent (1756–1758) 까지 거슬러가는데, 여기서 그는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지식 세계가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전형적인 구문을 인용해 보자. 유라시아 유목민에 대한 뛰어난 사학자 베르나드스키(Vernadsky, 1950)는 “걸핏하면 그러한 일부 부족들은 팽창을 꾀했을 것이며 그 이웃을 공격했다. 그 결과는 일종의 연쇄반응(chain reaction)일 것인데 각각의 부족은 이웃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움직이게 했다. 이것은 수 백년 아니 수 천년 동안 초원지대에 나타난 정치변동의 본질이다” 라고 했다. 끌라우드 깡(Claude Cahen, 1948)은 초원에서의 “민족(peoples)의 광대한 이동”은 아나톨리아(Anatolia)의 투르크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는데, 이 뚜렷하게 그릇된 견해를 브리오니스(Vryonis, 1971)가 바로잡으며 “아나톨리아에 대한 터어키식 정복은 점진적인 성질에 더욱 가깝고 … 몇 백년에 걸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스인으로부터 투르크 세계로의 자리바뀜은 유목 부족민의 군사적 성공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리스인들은 아무도 지중해 속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인구구성(population)의 소멸, 즉 흡수하느냐 흡수되는냐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알기론 라슬로 바이다(László Vajda)만이 1974년에 독일어로 발표한 글에서 장거리에 걸친 빠른 이주에 연계된 지지할 수 없는 가설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했었다. 그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훈족, 고트족, 반달족, 아바르족, 헝가리족, 투르크족 등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보다 포괄적이고 수많은 민족의 이주를 인정치 않고서는 어떤 모양새로도 할 수 없다. (Vajda 1974). [Allem Anschein nach, ist die Forschung nicht imstande, etwa die Geschichte der Hunnen, Goten, Vandalen, Avaren, Ungarn, Türken etc. ohne die Annahme großräumiger und grosse Massen erfassender Völkerwanderungen zu behandeln]”
사람들(people)은 떠돌아 다니지만 민족(peoples)은 거의 그러지 않으며, 더군다나 언제나 눌러 남아있는 낙오자마저 있다. 내가 어디선가 발표했듯이, 키탄(契丹) 민족일부가 중국으로부터 이주해서 연이어 카라키타이(西遼)를 건국했어도 연쇄 반응은 유발되지 않았으며, 만일 어떤 키탄의 갈래 집단들이 북쪽으로 오브강(Ob)을 향했거나 서쪽으로 다뉴브강(Danube)을 향했다고 치더라도 이런 자리바꿈은 아무런 역사적 반향을 이끌지 못했다. 문헌에 잘 나타난 이주는 월지(月氏)에 의한 것인데, 이들은 기원전 2세기에 감숙(甘肅)으로부터 박트리아(Bactria)로 갔고 이 과정 중에 이들의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은 동에서 서로 이주한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이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중앙유라시아를 가로질렀다는 가상의 이동들을 수많은 2차 문헌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들 저작물은 그 이동 방향은 동에서 서라고 써놓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이는 왜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몽골리아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문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정중히 묻겠는데,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은 처음엔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했을까?
나는 중앙아시아에서 역사상 이주가 일어났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초원지대 전역을 가로지르는 연쇄반응적 이주가 일어났다고 반자동적으로 가정하는 점이다. 훈족과 흉노를 증거로 들면서 종종 반복되는 고전적인 사례를 보기로 하자. 유럽의 몽골로이드 훈족은 응당 그런 체질인류학적 자취가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는 먼 동쪽으로부터 유럽에 왔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사료에는 훈족과 연결시킬 수 있는 민족(people)을 확정할 만한 유효한 언급은 없고, 디기네스(Deguignes)가 훈족과 흉노라는 두 이름의 소리값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이후, 종종 흉노는 훈족에 연결되곤 했다. 사실, 우리는 흉노의 신체적 모습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관습적으로 노인-울라(Noin-ula) 고고학적 유적지의 거주민에게 흉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지만 여기서는 백인(Caucasian)의 인물화(portrait)만이 발견되었다. 또한 몽골로이드 두골이 있었으며 “머리카락의 질감” 또한 몽골로이드였다. 그런데, 서기 350년, 후조(後趙, 319–352)의 마지막 지배자는 그의 흉노 복속민을 불신하여 그들 2만 여 명을 몰살하라고 명을 내렸고, “이들 흉노는 … 중국옷을 입고 중국어를 말했으므로 비몽골로이드적 신체특징인 매부리코와 덥수룩한 구레나릇이 있는 이를 골라내어 죽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유럽에 “황인종” 훈족이 출현하기 불과 20년전에 일어났는데 중국에서는 “백인종” 흉노가 출현했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민족은 흔히 서로에게 비정되곤 한다. 아울러 서기311무렵의 고대 소그드 문서에 나타난 훈[xwn]이란 이름은 분명히 흉노를 지칭하는 말이고, 이 이름은 또한 인더스강 상류지대에서 발견된 늦어도 5 혹은 6세기 무렵의 여러 Thor-Shatial 소그드문자 비문에도 발견된다(Humbach 1985). 어찌되던 간에, 내가 이 강연의 앞부분에서 말했듯이, 전적으로 어원을 이용한 어떠한 (종족)비정은 그 불안정성 탓에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 공중누각과 같은 채 보증할 수도 없는 (종족)비정은 아마도 가장 큰 위험일 것이다. 역사학적으로 훈족을 흉노로 비정하는 것은 그러한 성급함의 사례이며 근절할 수 없는 결론인 듯 한다.
내가 볼 때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비정은 유연-아바르 동족론인데, 뒷받침할 만한 단편적인 증거도 없는 채 논문에서 논문으로 책에서 책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만일 정정당당히 이주에 대해 빛을 비추어본다면, 유물(artifact)로부터 아무것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먼저 그것들은 “메이드 인 oo”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로 그것들은 스스로 무역을 통해 또는 떠돌이 장인에 의한 기술 이전을 통해 움직인다. (블루밍턴의) 우리집 부엌에는 양질의 “메이드 인 차이나” 찻잔과 부서진 “메이드 인 독일” 커피잔이 있다. 그럼 나는 일찍이 있던 독일인의 정착지를 파괴한 중국인 정복자 물결이 있었던 이곳 블루밍턴으로의 외래 이주에 대한 연대를 확립하는 연구를 해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무역(장거리 무역)은 가장 오래된 인류활동에 속한다. 할슈타트(Hallstatt)와 신강(新疆)에서 발견된 직물(거의 동시대의 선사시대 일반적인 물품)은 서로 놀랄 만큼 닮아있는데, 비록 아직 설명은 불충분하지만 장인 기술(artisanal techniques) 이주의 놀랄만한 사례다 (Barber 1998).
유목민의 이주에 대한 고정관념적 밑그림을 낳는데 기여했을 또 다른 요인은 앞서 언급했던 이들 군대의 빠른 이동력이다. 그러나 이주란 것은 이웃한 영역에 대한 재빠른 기습이 아니다. 그들은 천천히 행진했을 것인데, 아마도 두 발로, 그리고 낙타 혹은 소가 끄는 성가신 수레에 여성과 어린이를 태우고 나아갔을 것이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민족의 이동은 서로를 향해 부딪치는 당구공이 아니며 몇 십 년 전에 미국의 외교정책 입안자가 제출했던 틀린 이론인 이른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이 적용될 수도 없다. 카르파티아 분지로 훈족, 아바르족, 헝가리족, 쿠만족(Cumans)이 차례차례 밀어 닥쳤지만 그들 아무도 연쇄반응을 촉발시키지 않았다. 서고트족(Visigoths) 혹은 적어도 이들 대부분이 훈족의 공격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로마 제국 사람들을 대서양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롬바르드족(Lombards)은 4세기에 그들의 남쪽을 향해 이주를 시작했는데 그들의 이름을 딴 지역인 롬바르디(Lombardy)에 이르기까지 2백년이나 걸렸다. 보다 최근에 케네스 웨(Kenneth J. Hsü, 1998)는 피정복민의 엑소더스(exodos)를 야기시키지 않았던 침입의 일부 설득력있는 예를 열거했다. 정복자에 의해 지배층은 바뀌지만 인구구성(population)은 온존했다. 그는 또한 훈족의 서쪽 행진이 게르만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을 주로 야기시켰다는 역사학적 보편적인 설이 속빈 강정임을 보였다.
나는 카마강(Kama)으로부터 황하까지, 지중해로부터 타림분지(Tarim basin)까지 존재하는 투르크족이 다 8세기 몽골리아에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e)의 어떤 역할을 한 튀르크족(Türks)의 후손이라고 믿기는 어려움을 발견했다. 투르크족의 확산 과정은 응당 아주 길고 긴 과정이고,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할 수도 없다.
중앙유라시아의 역사학은 책에서 책으로, 논문에서 논문으로 되풀이되는 지나친 편견, 지지할 수 없는 낭설, 별 근거없는 가정을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다. 그러나 낙관적인 문안으로 결론을 내려보기로 하겠다. 나에겐 우리의 연구를 위한 새 시대를 알리는 희망적인 신호가 보인다. 첫 번째로 나는 새로 얻은 고고학적 자리에 대한 접근의 용이함을 말하는데, 중앙유라시아로 직접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며 그 현지 학자와의 보다 낳은 협력도 가능해졌다. 두 번째로 나는 눈부신 중국학(Sinology)의 발전에 따른 이득을 더 이상 어떻게 강조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이제까지 중국사료라는 거대한 보물창고로부터 단지 아주 자그마한 쪼가리만 연구에 이용되었을 뿐인데도 지난 20년 혹은 30년 동안 발표된 그 연구성과조차 우리가 발표하고자 하는 서부유라시아 역사에 표준으로 삼을 만하다. 나는 우리의 이 학회를 너무나 잘 대표해준 젊은 세대의 학자들이 더 낳은 조건에서 연구할 수 있길 바라며, 아울러 내 세대(나 또한 이들의 마지막 생존자 중 하나다)가 도달한 것 보다 많은 성과를 내놓았으면 한다.
첫댓글 유목지금까지 역사는 유목민을 포악하고 예와 품격이 떨어지는 존재라고 써있지요. 기록이란 역사를 쓰는 나라들에 의해서 기록이 없는 유목민들은 항상 위처럼 기록에 남지요.
감사합니다. 아이디 님. 지금 외국에 계시나요. 한국에 계시면 한번 연락해 주십시오. 좋은 곳에서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아이고 말씀만으로도 배부릅니다. 웬만하면 내년엔 한국에 돌아갈까합니다.
그런데 저런 역사관련 논문들을 인터넷에선 구해볼 수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