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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불’(不得不)
고린도전서 9:16-23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주일예배에 나오는 일이 망설여지지는 않았는가? 전염병이 약간 둔화되었고, 그 위협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다고 하나 늘 주의할 일이다. 손씻기가 감염예방에 최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염병의 악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당장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휴원을 하고, 학교마다 개학을 늦춘다고 한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으니 동네상권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쉽게 막을 수가 없다. 혐오와 배제는 전염병보다 더 큰 위협이 되었다.
나도 내일 로마 방문을 예정했다가 부득불 취소하였다. 이탈리아는 중국과 거리가 먼 곳인데도 난리라고 한다. 홍기석 목사님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달하였다.
“우리 가족이 지나가면, 스키포!(더러운 새끼들) 욕을 노골적으로 하기도 해. 동양인들은 수업에 못 들어오게도 하고, 빨리 지나가야 할 텐데...”
그는 이렇게 단정하였다. 이탈리아는 바이러스 자체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이 나라 사람들이 겁이 많아 그렇다는 것이다.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다. 평소에 문제없이 지내다가도 사회가 불안해지면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화풀이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그네는 늘 고달프다.
로마연합교회 홍기석 목사님 댁 큰 아들 한울이가 5살 때 일이다. 처음 이탈리아로 이사 가서 유치원에 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어린 아이지만 낯선 환경이 두려웠던 것이다. 며칠 간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버티다가 결국 끌려갔다고 한다. 다녀와서는 문을 닫아걸고 엉엉 울었다. 밥도 안 먹고, 밤 늦게까지 버티던 아이가 한 밤중에 제 방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더란다. 그것이 애국가였다. 어린 아이도 제 나라가 평안한가 보다.
그는 ‘부득불’ 27년째 동안 로마에 남았다. 그도 사람이 그리워 나를 불렀고, 나도 로마연합교회에 위로 차 간다고 약속하였었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부득불’(不得不)이란 한자어를 사용하였다. 요즘 한글전용과 영어남용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자 사용은 낯설다. 부득불은 ‘할 수 없이’란 뜻이다.
어느 분이 자기 손자 자랑을 하였다. 우리 손자가 한자 공부를 하는데 제법 많이 안다고 하였다. 만화로 공부하는 학습용 그림책 덕분이란다. 한번은 손자를 보러 그 집에 갔는데, 아이가 현관에서 자신을 보더니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늙을 노(老)’왔어.”
부득불(不得不)이란 한자는 이젠 한자라는 생각도 없이 쓴다. 부득이한 경우를 가리킨다. 살다보면 부득불 해야 할 일이 있다. 어쩔 수 없을 경우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경우 정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많은 위협을 받았다. 당시 권력자에게 억압을 받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당하였다. 왜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부득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였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우가 그랬다. 그도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활동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예레미야가 잠잠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는 마음에 하나님이 외치시는 ‘나팔 소리와 비상경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찌 외치는 일을 주저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 사명에 대해 이렇게 하소연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바울도 자신의 사명에 대해 솔직히 말하기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부득불 할 일”(16)이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라고 실토한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바울은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자가 된 사람이 아니다. 대단히 극적인 경험을 통해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바뀐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였다.
장차 상을 받거나, 대가를 얻거나, 권리를 행사하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다. 바울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이 된 사람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되었다(19).
사도 바울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포기’라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18).
바울은 강요가 아니라, 상급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비천하심과 그 희생에 동참한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울이 강조한 자유함의 의미이다.
2)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다. 본문은 바울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유익을 주기 위하여, 그가 어떻게 자유를 포기했는지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바울은 그 기준을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맞추고 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20)인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같이 행하였다.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21)인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방인들과 같이 행하였다.
바울은 “약한 자들”(22)을 얻기 위해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바울의 포기는 줏대 없이 적응하고, 타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이 그 자리에 내려간 것이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22) 그 사람들의 입장에 서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의 원리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빌립보서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담겨있는데 이를 ‘케노시스’(비움)라고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여기에서 자기 비움, 내려놓음, 자기 포기와 같은 사명의 원리가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복음의 전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는 두려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요, 그 사랑의 원리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위대한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 동포인 유대인을 사랑하였다. 그들에게 박해를 받아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양하지 않았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율법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일부 허용한다. 율법의 조항 때문에 갈등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고, 작은 차이 때문에 더 큰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인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특별한 사명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바울은 “약한 자들”을 위해 특별히 배려한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2).
그 약함은 세상의 약자들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고전 1:28)셨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무런 댓가를 지불할 수 없는 “약한 자들”의 편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부득불, 부득불, 부득불’ 행한 일이었다. 바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작은 타협을 통해 더 큰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였다. 자기 포기를 통해 더 많은 복음을 나누기를 원하였다. 스스로 종이 됨으로써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였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선택하시고, 그를 위해 낮아 지셨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에게 값없이 주신 복음 때문에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보수와 상급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신이 받을 상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스스로 자신의 결단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참 자유인이 되도록 하였다.
한스 쿠르파는 이런 말을 했다. “자유란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 다시 말하면 바울의 자유는 모든 것을 다 버릴지라도 예수를 선택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대로 따랐던 진정한 제자였다. 약자에게 한 없이 약하고, 강한 자들에게 더 없이 강하셨던 예수님의 원칙이 바울에게서 드러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그런 원칙은 잘 지키지 못한다.
온유하고 겸손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참고 인내하는 일이 어렵다. 작은 것조차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내 뜻대로 산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뜻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부득불 원리’ 때문에 가능하였다. ‘부득불’은 억지로 해야 할 때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위미한다. 끌려가듯 억지로 하는 일을 자기주도적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다.
과연 나는 부득불 하는 것은 있는가? 돌아보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가장 낮은 내 죄인의 자리에 찾아 오셔서, 지극한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평안의 복음을 전해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우리를 축복의 통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탁하셨다.
과연 후회 없는 삶은 무엇일까? 언제까지 나 중심으로만 살 것인가? 예수를 위해 계단 한 칸만 더 내려와도 좋을 일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내 욕망의 짐을 조금 가볍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더러 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지내라고 하신다. 부득불 감당해야 할 일에 기꺼이 나서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 잡으셔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첫댓글 부득불, 한단계 아래로 욕망의 짐을 가볍게, 사랑할수 있는 자유를 회복하라는 내안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포기'라는 용기있는 결단!!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