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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1
이사야서 풀이 1 .信天함석헌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내가 공부를 못해가지고 와서 안됐습니다.
옛날 서울과 지방 사방에서 모여가지고 공부하던 무교회 때는 부족은 해도 그래도 제나름대로 뭘 공부해가지고 와서 하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하느라 그렇게 못해 미안한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는 제2이사야, 40장 이하를 읽어갈 겁니다.「이사야서」는 왜 골랐나? 금년에 우리 표어가 ‘평화’라고 그러잖았어요? 예수님을 평화의 인물이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구약에 있는 인물 중에서 예수님한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사람은 아마 이사야일 거예요. 그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신약 속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늘 「이사야서」를 많이 인용하셨고, 또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사야서」많이 인용하는 걸 보면 아실 겁니다. 선지자 중에 제일 놀라운 사람이라 하겠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사야가 주장하는 건 ‘평화’ 입니다. 금년에 평화라고 제목을 내걸었으니까 며칠 같이 지내는 동안에 이걸 읽어볼까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자꾸 읽으세요. 자꾸 읽어서 이사야가 내 것이 돼야 해요. 나도 그렇게는 못됐습니다. 그렇게는 못됐습니다마는 맛을 조금 들여 본거고, 그렇게 돼야겠다는 생각이 나니까 채 못된 것을 말씀드려서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는 믿는 바가 있어서 하는 겁니다. 다른 것 다 말고라도「이사야서」만은 내 것 되도록 하면, 그 다음의 것은 다 그 속에 있어요. 「예레미야」고「창세기」,「민수기」고 말할 것 없어요. 그리고 그건 문학이라 해도 아주 좋은 문학이에요, 우리 말 번역이 좀 잘못돼 그렇지. 나는 히브리 말 모르니까 모릅니다만, 그거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들의 말도 그렇고, 우리 글로 번역해 논 글만 봐도 좋아요. 나는 일제시대에,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그럴 때 일부러 펴놓고 읽었어요. 그러면 어느 때 읽어도 좋았어요. 죽었던 마음이 살아나 답답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그렇게 돼야 그담 성령의 감동이 올 수 있어요. 마음이 꾸벅꾸벅 졸고 축 늘어지고, 그런 마음에 영이 오겠어요? 하늘에서 물이 내려올 때 바가지를 바로 대야지 엎어 대고야 물 필 것을 바랄 수가 있겠어요?
우리의 몸은 몸으로서의 법칙도 있고 그러니까, 그거 무시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생명을 만들었지만 거저 만든 게 아니라 햇빛 하고 땅의 흙하고 물하고 바람하고, 이 네 가지 조건만은 어쩔 수 없었어요. 인간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해서 네 가지의 원소가 있어야 된다고 말해온 것은, 벌써 여러 천 년 전부터예요. 근래 학(學)이 발달되기 전에 그게 근본이 돼가지고 연구를 계속해나가니까 지금은 이제 100종이 넘는다고 하는 원소가 발견이 됐어요. 크게 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저 빛(불), 땅의 흙, 바람, 물, 곧 지수화풍 그 네 가지 요소가 없어서는 안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이 이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흙 속에 있고 바람 속에 있고 햇빛 속에 있고 물 속에 있는 명령에도 복종해야 됩니다. 물 안 마시면서 목을 축여줍소서, 그건 말이 안돼요. 목이 마르면 물 가져다 마셔야 해요. 목마른 생각이 나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마셔라!” 하신 거예요. 그것은 생명의 원리니까 그걸 따르는 게 마땅해요. 그건 여러분이 다 따를 거예요. 그래도 어떤 때에 가면 맑은 물이어야만 되는데 맑지 못한 물을 먹으면서 생명이 건 전하길 바라는데, 그건 잘못이에요.
지수화풍이라고 단순한 것 같지만, 옛날 사람의 생각인 것 같지만 인류가 쓰라린 경험을 하고 또 하고 어떻게 안 죽어볼려고, 모처럼 생명이 됐는데 생명이 스스로 살아야 된다고 한 명령은 하나님이 한 거예요,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내 속에는 생의 욕(欲)이라는 것이 있어요. 생의 애착이니 하는 건 본래 생 그 자체에서 살려고 하는 그 노력 때문에 나오는 거니까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왜 했는지 알 수 없어요. 그걸 다 안 것처럼 말할 수도 없고. 어떤 깊음 속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인지 알 수가 없어요. 어느 면으로 보면, 모순 같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그런 분이 마지막 순간에 왜 그런 소리 했을까? 동양사람이나 서양사람 생각에 죽을 때는 칼이 들어와도 까딱도 안하고 죽는 게 성자라고 그러는데,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던 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럴 수가 있나? 알 수가 없는 일이에요. 다른 이는 모르겠소마는 우치무라 선생 같은 이는 그렇게 해석했지요. 여러 번 하는 말입니다마는, 내 마음 속에 그것이 의문으로 있었으니까 그것은 쑥 깊이 들어왔어요. 왜 그랬냐 하면「시편」22편의 첫마딘데, 그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시편」의 시작은 그걸로 돼서 읽어 내려가노라면 그 고통을 다 감당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들어갑니다. 읽어보세요. 그래 그것을 외실려고 그랬다가 채 외시지 못하고 목숨이 끝나는 걸 거다, 좋은 해석이에요.
그런데 나로서는 거기다 하나 더 첨부하면 좋겠어요. 그럼 그건 왜 그랬겠나? 젊어서 그걸 많이 외셨을 것이에요. 젊어 많이 외셨기 때문에 이제 운명하는 시간이 오니까 자동적으로 그게 나왔을 거예요. 그러니 생의 깊은 속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이지요.
네가 스스로 얻도록 하라
곁길로 가서 안됐습니다. 40장에서 66장까지 읽어보노라면 그 아낙에서 대충, 합동번역에는 항목을 이렇게 달았어요. 그 항목이 꼭꼭 들어맞았는지 대조는 못했소마는 대체로 보기 쉽게 했는데, 어느 면으론 그거 없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항목을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그것만 보고 이건 이런 뜻이로군, 그렇게 돼서 그걸 읽지 않아요. 성경 보는 방법의 하나가 죽죽 보다가 여기서 어디까지가 말을 끊어야 좋고, 여기서부터는 연결이 어떻게 되고 그걸 내가 찾아내려고 해야 해석이 되지, 그저 남 해놓은 대로 여기 이렇군, 여기 이런 얘기로군 그렇게 하면 그건 안돼요. 어머님이 자식을 사랑해서 다 씹어서 먹여주면 애가 좋을 것 같지만 안돼요. 그러니까 선생이 자기 연구한 걸 친절하게 너무 풀어서 말해주면 안된단 말이에요. 그래 옛날 사람 그런 글 안 썼어요.
근래에 와서 책을 내면 돈이 생기기 때문에, 보기 좋은 책 써서 돈 버느라고 자주 이런 책이 나오니까 그렇지, 제자가 할 걸 미리 다 해놓으면 교육이 안돼요. 그러니까 웬만치 알아듣게 해주고 그 다음에는 “네가 해봐!” 그럭하고 중요한 건 남겨놓는 거, 제가 스스로 얻도록 하는 것이 좋은 현상이지. 학원에서는 시험준비 선생이 다 풀어주는데, 돈 떼먹기 위해서 그러지 사람 되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그렇게는 아예 하지 마세요. 그런 교육 받을려고 하지도 말고. 벌써 웬만한 사람이면 가만 둬두시오. 그러면 오히려 해달라는 말 하지 않아요! 우리 학교 다닐 때도 수학문제 풀라고 그러면 못생긴 것들은 와서 베껴가지고 갈라고 그러지만, 조금 뭐 있는 것들은 아니야 내가 풀 거야 그래요. 그러는 걸 그래도 옹근 낯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성경은 더한 거예요. 그러니 본래 성경은 장이 없어요. 장도 없고 절도 없는 것을 후에 이걸 보던 분들이 편하게 하느라고 했어. 지금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퍽 쉽긴 쉬워요. 하나 만일 그렇지 않고 이걸 그대로 둬뒀던들 공부는 어려웠겠지만 아는 사람은 철저히 알았을거에요. 이것이 어디서 어디까지냐? 쉼표도 종지부도 없대요. 도무지 본래 히브리 글자는 자음만이지 모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기역이 있으면 ‘가’하고 발음할 수도 있고 ‘기’하고 발음할 수도 있고 ‘고’하고 발음 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런 걸 이렇게 봐 이걸 뭐라고 보냐, 거기가 힘이 드는 데예요. 우리는 참 쉽게 됐어요. 쉽게 되기는 됐지만, 옛날 사람은 공부를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줄줄 읽어만 가려고 그러지 마시고, 줄줄 읽기도 해야지만, 이걸 또 힘을 들여서 내 힘으로 토막토막 끊어서 보시도록 해 보세요. 그러지 않고는 내게 힘이 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번뜻 생명으로 와요. “아 그렇지! 이런 말이지” 하실 줄 압니다마는, 혹시나 젊은 분들은 그런데 못 갔나, 그런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어려서 예닐곱 살 때부터 예수교 학교 다녔으나까 믿은 지 70년이 넘었다면 넘었지만 성경을 저렇게 보는 건가, 그걸 안 거는 스물다섯 나서 우치무라 선생 모임에 가서였어요. 그렇게 보는 줄 나는 몰랐어요. 그이는 성경을 보는 거를 ‘성경연구’라고 이름을 붙이고 했는데……성경을 대하는 것이 마치 육신을 위해 밥을 먹는 모양으로, 태도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해서가 아니라, 가만 말씀하신 걸 보면, 아하 성경은 이렇게 읽는 거로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목사님에게서도 그걸 배우질 못했는데, 그래 눈이 뜬 다음에 이것저것 봐서 다른 사람의 영향도 있지만, 지금도 못 잊는 것은 신앙이란 이런 거냐, 성경이란 이렇게 보는 것이냐, 그 생각이 들게 되면 정말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성경을 보고 거기에 대해 해설을 해준 것도 좋지만 성경 본문에 재미를 들여야 된다고 하는 것도 거기서 처음 얻어들은 말이고, 아닌게아니라 해설한 걸 보면 재미가 있어요. 재미있는데 성경 본문을 펴놓고 그걸 보면 어떻게 나는 힘이 안 났어요. 그러니까 보다가 그만두고 그만두고 하지만, 그래도 그걸 참고 내가 내 깐으로 봐서 내 마음대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를 한 절로 찍고, 여기서 여길 이렇게 하고 해서, 어떻게 연결이 되고 여기 말과 여기 말이 어 떻게 연결이 되고, 이런 걸 내 속에서 찾아내도록 해보세요.
본래 옛날의 동양 한문이라는 건 상형문자가 돼 놔서 산출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글을 많이 안 써요. 몇자 그저 써놓으면 벌써 우리 마음에 오는 말이 얼마든지 거기 있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글이 맛이 있는 거고 글의 의미가 강한 거고 그래요. 지금처럼 이렇게 풀어놓으면 해놓은 음식 같아서 보기는 쉬운데 힘이 안 생겨요. 그런데 정신에 관한 말일수록 그래요. 우리 영혼에 관한 말일수록 그렇지요.『노자』『장자』읽어보시오, 얼마나 힘이 드나.『논어』『맹자』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더 힘드는 건 그런 건데, 그건 한문이 원래 그렇고 또 그네들이 본래 그렇기 때문에, 팔아먹자는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의 얻은 것을 그 기쁨대로 그대로 그것을 표시 하느라고 그러는 거니까, 예술적인 그런 동기가 있기 때문에 그저 뜻만 통하지 않아요? 거기 어떤 진리에 대한 미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도 묘하게 표시하는 성자들의 말 보시오. 두 자 석 자 중 얼마나 놀라운 말들이 들어 있나? 본래 그런 건데, 히브리 글을 모르니까 모르지만, 옛날 원어를 본다면 그럴 거예요. 다 그럴 수야 있겠소마는 번역한 거라도 열심으로 보면 아마 그걸 대충은 알 겁니다.
일방적으로 하시는 평화의 선포
이걸 써놓긴 써놔도, 내가 하느라고 한 거지만, 여러분이 참고를 하라고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이걸 보고 이제 다 됐다. 그럼 그건 소용없어요. 40장에서 66장까지 나오는 걸 제목을 추려서 나눠본다면 뭐뭐 될까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 번 읽어보시면서 보면, 고칠 것도 있고 자기 경우에 따라서 새로 나는 것도 있고 그럴 거예요.
오늘 우선 이렇게 해놓고 보면 처음에 분명 하나 나오는 것이 40장 1절의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라. 그것들에게 외쳐 고하라” 운운하는 것으로 그거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평화의 선포예요.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하나님하고 전쟁상태에 있었어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도 아니고 남과 북이 형제끼리 전쟁상태에 있지만 형제끼리 전쟁상태에 있다는 건 말을 바꿔하면 아버지에 대한 전쟁상태란 말 아니에요? 단군에 대해 싸우고 있다 그 말이고, 올라가면 하나님하고 싸우고 있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하고 싸우지 않는 형제끼리 싸움이 어디 있어요? 형제끼리 싸움하고 아버지와 싸움 안하는 재주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평화란 문제는 평상 하나님에게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게 이게 정말 제 1이사야도 그렇지만 제2이사야는 놀라운 문헌인데,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많이 읽으신 거예요. 틀림없이 많이 읽으신 거예요. 예수님보다 더 오래 전에, 여러분 아시지요, 1947년인가 사해문서가 쿰란에서 나왔어요. 나도 거기 갔댔어요. 거기 비 안 오는 곳이니까 아주 건조해서 바위라는 데가, 굳은 바위가 아니고 여기로 말하면 석벽 같아서 바위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파면 쉽게 팔 수 있는 그런 데예요. 그런 구멍을 뚫어서 한 데서 나왔다는 건데, 거기서 여러 가지 문헌이 나왔다고 그러지만 그중에 제일 귀한 게「이사야」사본입니다. 지금 현행 것과 거의 대동소이, 별로 틀린 것이 없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양피지에 쓴 건데, 다른 것도 조각조각 나온 것이 많이 있고 그렇지만, 특별히 그게 거의 전편이 나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고, 그래 그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럼 쿰란이라는 데서 그런 문서가 나왔다는 건 아주 중요한 거예요. 기독교는 어디서 나왔나? 예수 믿으니까 됐다 그러지만, 예수님 나시기 전 400년까지에 귀한 예언자의 역사가 끊어지고 그후 나지 않았어요. 계속해 계속해 나던 것이 그렇게 됐던 때,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고 났으니, 그거는 하나님이 내보냈다는 데는 다시 더 말이 없고 고마운 일이지요. 뭐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 그렇지만, 하늘이 있으면 이 땅의 면도 반드시 있어요. 그걸 반드시 찾아내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건데 이것이 어떻게 돼서 이 시대에 나오게 됐지? 하는 그 면을 꼭 반드시 알아내도록 하는 게 난 옳게 찾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게 뭔고 하니 쿰란에 있던 어느 종교, 뭣인지 예수님 나시기 전이니까 얼마 전인지 모르지만, 과히 그리 멀지 않은, 어떤 학자들의 말은 필시 세례 요한도 이 단체에서 일을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혹시 여기를 찾아오시지나 않았던가, 그럴 수가 있다, 그러리만큼 그건 물론 추측이지만, 그럴 만큼 거의 가까운, 그러니까 그 전에 예언자들이 내려오던 그 계열이 없어지고 툭 튀어나서 예수님의 신약이라는 게 나오는데, 이 두 중간에 뭣이 있겠는데 어떻게 됐지요? 빠진 고리란 말이에요. 사슬이 이렇게 달려가면 고리고리 달렸어야 하는데 몇 고리가 빠졌으니, 역사에 내려가는 데 제일 괴로운 건 그거예요. 이거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쿰란서 됐다는 거 아니에요? 야, 이렇게 됐구나!
왜 그러냐 하면「말라기」에 있었던 그 영향과 예수님과 너무 동떨어져요. 반드시 역사적으로 전개돼서 나왔겠는데 뭘로 됐겠나? 그랬는데 그걸 거의 짐작할 수 있다는 그게 근래 연구해서 얻은 에세네파라는 종교단이에요. 종교단체가 있어서 수양을 하고 있었던 것 같고, 그 자리는 지금도 가면 볼 수 있어요. 흙으로 이렇게 물을 저장을 하고 쓰던 데, 자던 방, 집회 하던 방, 무슨 목욕하던 방, 문은 없고 자리만 요렇게 남아 있어요. 신기한 거예요. 놀라운 거예요. 그랬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 그러면, 이건 추측이에요. 거기 종교단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무슨 전쟁이 났어요. 전쟁으로 인해 적군이 오면 어떡하지요? 물론 약탈당해갈 거니까 이 소중한 걸, 정신의 양식으로 읽곤 하던 이 소중한 걸 어떡하지요? 그래서 거길 파고 묻고 간 거겠지요. 다른 것도 더러 나온대요. 그랬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2천 년 동안 오다가 지금 와서, 벌써 수십 년 전입니다마는 발견이 돼가지고 사해본이라고 하는 게 났는데, 이사야가 난 것도 그렇지만 거기 종교단이 있어서 그랬다는 걸 보면, 그 종교단의 이름이 뭔지 규칙도 나와 있고, 자기네 두목이 되는 사람들의 이름도 있고 그래요.
그런 것이 구약 때와는 다르고 예수께는 안 왔지만 중간에 무슨 그런 것을 상상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학자들의 추측이 세례 요한이 들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전도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의 살림이 바로 그런 거예요. 아주 간소하게 엄격한 종교단체 생활을 하고 그러는 사람들인데, 여러분이 그런 데 흥미가 생기면 찾아보라고 내가 일부러 끄집어내서 하는 얘기입니다.
일대 비약의 예수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일본 말로는 연구해낸 것도 있고, 영어로는 물론 책이 많이 있고 한데, 요새는 세월이 지나가서 그렇지만 한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그랬지요. 하여간 에세네파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구약시대와도 다르고 기독교는 물론 아니고, 하지만 공통점이 많이 있어요. 그 안에 나오는 글에서 보면, 예수님이 신약 속에서 하시는 말과 비슷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또 다른 점도 있어요.
그중에 어느 퀘이커 사람이 중요하게 봤던 것만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같은 점이 많이 있는데, 더구나 산상수훈에 나오는 근사한 말이 거기 문헌에도 많이 있는데, 그 단체도 엄격한 종교단체는 종교단체인데 다른 것이 뭐냐 그러면, 예수님이 인솔해 다니던 제자들 단체는 개방적인 단체인데 즉 오픈(open)된 개방단체인데, 이건 아주 클로스(close), 폐쇄단체라 그겁니다. “우리는 특별히 뺀 사람이다”, 이건 시대가 달라지면 그들이 융성한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좀해서 막 사람을 넣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말 누가 한 걸 들었는데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림으로 이렇게 내려오면서도, 내림 없이 되는 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 뜻을 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 그때 보내신 거지만, 옛날 인간의 말로 하면 예언자의 그 정신이 내려와서 내려와서 이렇게 된 거, 하지만 고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대 비약(飛躍)이에요. 놀라운 겁니다. 전에 받은 것도 있지만 일대 놀라운 새로운 것을 받아가지고 새 시대의 종교로 나왔다, 그 새롭다는 게 뭐겠냐? 그런 점이 이제 성경을 고쳐 읽는 데서 많이 참고할 건데, 그렇다면 이사야가 거기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평상시에 예수님이 많이 보고해서, 여기 있는 말을 보면 사상적으로 맥락이 통해요.
이 세상 말대로 하면, 나서 스스로 생긴 건 아니지만 말하자면 선생이 됐다, 공자님이 후대에 났지만 자기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주공을 사숙했다, 그러지 않아요. 그런 모양으로 예수님은 아예 어려서부터「이사야서」많이 읽었어요. 그러게 교회당에 처음 들어가서 내주는 게 그것도 이사야 두루마리가 돼서 펴서 읽었다는 걸 보면, 그것 다 우연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옛날 선지자가 말씀하던 것 오늘날 내가 받았다, 아주 놀라운 말씀인데, 가버나움 갔을 때 그랬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대체를 대강 듣고 보노라면 마음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래 하는 말 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몇 개로 해보면 처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평화를 아주 선포하는 건데, 지금 우리 역사에, 현대에 있는 것도 평화가 이렇게 되지 않고는 안될 게 아닌가 해요. 왜 그런고 하니, 미국더러 물어 보고 소련더러 물어보고 그래도, 저쪽에서 하면 우리도 하지요. 솔트(SOLT)라고 그래서 둘째번 솔트가 모이긴 했어도 신통하지 않지 않아요? 될수록이면 우리 서로 심한 무기경쟁 하지 말자, 경쟁을 하다가는 자기네도 못 견뎌나고 인류 전체가 망할 거니까. 그만한 인간적인 이성은 있으니까 서로 경쟁을 하긴 하면서도 그렇게 해요. 무기협정을 하고 그러긴 해도, 마음에 “그럼 우리 세계평화를 위하자, 우리 싸움 말자” 하고 그게 정말 진정이라면 “네가 쳐들어오더라도, 내가 우리나라를 다 내놀 지경이 되더라도 난 무기를 이젠 안 만들겠다”고, 한편에서 그러기 전엔 평화가 안 올 겁니다.
그러니 그 노릇을 누가 해요? 천하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평화주의라고 해도 그건 말하기 어려운 겁니다. 이치로 말한다면 그러기 전엔 안됩니다. 그러니까 간디가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개인의 경우라면 누구든지 옳은 일을 위해 내 몸을 희생한다면 덕으로 알 것이다, 민족도 마찬가지, 세계가 옳게 돼가자면 이상을 추구하다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보려는 그런 각오 없이는 안된다, 난 인도가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랬어요. 간디는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러면 잡아 죽이겠다고 할지 몰라요. 저런 반역자가 어디 있나, 민족 팔아먹는 놈이 어디 있나 그럴지 몰라요. 개인에게서 자기가 겸손하게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면 덕이라고 하는데, 왜 민족에서는 제 민족을 자꾸 자랑해야 그걸 덕이라고 합니까, 없는 것까지. 언제나 쌈해 졌다는 법은 없잖아요? 늘 들어오길 적국이 먼저 왔다고 그러고, 왔다가는 그놈들 패해갔다고 그러지 제가 졌다고 안 그래요. 진 경우에도 이기지 못했다 할지언정 졌다고는 안 하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길인 것처럼. 그런 민족주의를, 그런 애국심 을 가지고 여러분을 협박할 날이 올는지도 몰라요.
언제 한 번 강원도엘 갔더니 “선생님, 뭐 나라가 이런데 종교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요. 일언지하에 싹 잘라 말했어요. “종교가 위입니까? 나라가 위입니까? 난 국가 밑에 있는 종교 안 믿소!” 그렇다면 뭘 하러 믿어요. 나라 위에 종교 있지 나라 밑에 종교 있어요? 그 런 종교 믿어 뭘 해요? 정치세력 믿지 않고는 설 수 없는 종교는 믿어 뭘 해요? 종교는 우리 정신적 살림을 위해 있는 건데, 사람은 육체만이 아니에요. 국가 권력 밑에 있는 종교, 그건 안 믿어도 좋아요! 그런데 위험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니까 믿으려거던 각오 있어야 돼요.
나 일제시대 겪었던 말 할 거예요. 일제시대 때 뭔고 하니 신사참배하라고 그러잖아요. 우리 믿는 거를 압박을 하기 위해서. 내가 당한 걸 얘기하면 나 취조하던 형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경에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그랬나?” 날더러 물어요. 그러면 내가 벌써 형사의 말을 알아요.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간다, 저놈이 그럴 거다. 왠고 하니 기독교의 말로는 믿지 않으면 지옥 가니까.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이 어떻게 나올 거냐 하면 “그럼 천황폐하는 어떻게 되느냐?” 으례 그럴 거예요. 내 그걸 알아요. 그걸 알면서 거기 들어가 빠지고 싶지 않아요. 그거는 잘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어리석은 일인데, 그래서 내가 뭐라 했는고 하니 성경에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간다고 그랬다, 그렇지만 한 편 그것은 믿음에서 그렇고 한편에는 성경에 무슨 진리가 있는고 하니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다 건져서 천하 모든 인간을 건져준다고 하는 만민구원의 진리가 있다, 그랬어요. 걸리지 않으니까,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런 협잡종교가 어디 있냐?” 그래요.
예언자 정신이 부족한 나라
여러분, 국가하고 종교하고는 늘 그런 관계에 있으니, 언젠가는 그런 거 당할 생각을 해야 돼요.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다 그런데서 겪어왔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고로 이것이 역사에서 힘 있는 말로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수천 년 역사를 가졌지만 그 수천 년 났던 사람이 다 그런 게 아니라, 물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해서 나라 일 하기 위해 수고하고 그랬겠지만, 그래도 그중에 소수의 이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서 어떤 때는 죽으면서, 예레미야는 그러다가 그렇게 애국심이 있는 분이지만 자기 동족한테 죽지 않았어요? 그러고 박해를 그렇게 받으면서도 민족보다는 하나님이 위주, 하나님이 이거 내신 거지, 그 진리 무시하고는 나라가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아주 서슴없이 얘기를 한 거, 그 덕택에 망했다가도 살아나고 살아나고 그랬지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권력이면 다라고 거기 아첨을 하는 놈이 정말 나라를 마지막까지 붙들었느냐? 그건 안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런다고 그랬지만 그때의 이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빠졌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지친 상태에 빠진 다음이에요. 그거는 구약을 차례차례「열왕기 상」「열왕기 하」,「역대기 상」「역대기 하」를 여러분이 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바빌론이 한참 세력이 강해서 마지막에는 그러다 못해 포로로 잡아가지 않았어요? 중공도 커가지고 세계패권 싸움을 할는지 몰라요. 또 인도도 수억 되는 나라니까 좀더 있으면 그도 이제 행세를 하고 나설는지 몰라요. 그렇게 되면 세계가 이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직까지는 두진영이 싸우는 거니까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직접 간접 이편에 붙거나 저편에 붙거나, 미국의 권력권에 들든지 소련의 위성국가 노릇을 하든지 하고 있지요.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세력이라고 하는 게 이제 나오긴 나왔지만, 으레 나올 것이 나 왔지만, 그 제3세력이 정말 아주 중대하게 돼서 인류 해방까지 그렇게 나가겠나? 난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될지 말할 수가 없지만 지금 같아서는 크게 기대가 안돼요. 왜 그런고 하니 신앙적으로 반드시 철저한 것 같지 않아요.
어쨌거나 두 세력이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건데 그 싸우는 중에 우리나라가 큰 길거리에 있어요. 우리나라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일본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가는 큰 길거리에 앉았기 때문에, 큰 길거리에 세계의 공로(公路)에 앉은 다음에는 팔자가 평안할 수가 없어요. 오는 놈 짓밟고 가는 놈 짓밟고, 그래 내가 우리나라 역사를 부끄러운 일이지만 ‘큰 길거리에 앉은 늙은 갈보’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고, 혹은 ‘쓰레기통’ 이라고 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려움은 어디서 나왔나 하면, 세계의 통로에, 큰길에 앉았기 때문에 그게 원인이에요. 우리 잘못도 있지만, 잘못이 생긴 것도 성격의 결함이 있는 것도 그런 점으로 인해 생긴 것이 많이 있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 그런 말 했는데, 우리도 그런 점을 알아야 돼요.
그래 여러 가지 점에서 유대 나라와 비교되는 것이 많은데 어떤 면에서 우리가 못한 점이 많이 있어요. 그 못한 점 많은 것 중에 제일 두드러진 것은 예언자 정신이 아주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유대 사람들은 샤일록으로 대표되는 아주 나쁜 면이 있지 않아요? 유대 민족도 결점이 있어요. 없지 않아요. 그렇지만 민족은 망했으면서도, 나라는 망했으면서도 천년이 넘도록까지 세계에서 유대인의 세력이란 상당한 거예요. 누구도 무시를 못하는데 그런 게 어디서 나오느냐 그러면, 아무래도 옛날로부터 하나님을 믿던 그 신앙 때문이라고 그래야만 맞을 거예요.
그런데 깨닫는 것을 깊이 하기 위해 말을 좀 뒤집어서 합시다. 내가 일부러 하나님의 뺀 백성(選民)이라 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뺐다는 게 너만 특별히 곱고 너는 밉고 그러겠어요? 안 그래요. 하나님의 뺀 백성이라는 거는 하나님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내 민족의 일을 생각하고 일하는 가운데 그 참된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온 빛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특별히 뺐지 그런 것을 이 백성한테 가르쳐줘야 해요. 그것을 자기 사명으로 아는 데서 이 사관이 성립됐지요. 예언자도 없는데 하늘에서 “네 백성은 뺀 백성이다” 그런 말 내려왔겠어요? 그런 일 없어요.
지치고 지친 백성
하늘에서 아무리 그런 말이 내려오려고 해도 이 세상에서 그걸 받아서 외칠 나팔이 있어야지. 예언자는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의 나팔인데, 예언자는 쇠로 만든 나팔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나팔이니까 자기가 자기를 상당히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그 말 전혀 모르지요. 그러게 그저 성경에서 그랬다고 그래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걸로 하면 정성은 있는 것 같은데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믿기도 해야 하지만 이해가 있어야 해요. 우리 이성으로 “아, 그렇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인간이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라야 깊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의지가 움직이고 실행에까지 힘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치 모르고 그저 믿으라니까 믿는 거 좋지 않아요. 그러는 건 결국 이럭하는 것이 좋다니까, 내게 이롭다니까 그러는 거지 도덕적으로 수긍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인 다음에는 그 점을 인간의 일로 따져야 해요. 벌써 여러 번 하는 말입니다만, 반드시 그건 설명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에서는 내버리시고 야곱은 빼셨다” 그러지만 에서에게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요. 없는 거 아니에요. 야곱이 앙큼한 어머니와 짜고 나이 많은 아버지를 속이는데, 그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곱이 뽑힌 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결코 인간 이성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그 말이에요. 인간 이성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주 이치에 맞지 않고 되는 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게 여기 이것도 하나님이 너는 처음부터 뺐다, 그러면 무조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선조 내림내림으로 신앙을 받아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네 민족을 보고 생각하기를, 다른 민족을 봐도 우리 같은 이런 종교를 가진 민족은 없다고 했겠지요. 왜 그런지 그거는 몰랐을 거예요. 소 만들어놓고 제사하는 놈이 있지 않나, 독수리 만들어 놓고 제사하는 놈이 있지 않나, 별별 게 다 있어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점치는 놈 있지, 굿하는 놈 있지, 유치한 종교라는 게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아브라함으로 시작을 했다는 종교가 어떻게 그리 도덕적이냐? 어떻게 그리 정신적이냐? 그러지만 희미하게나마 선조 이래 누구에게서부터인지, 아브라함도 그전에 받은 데가 있겠지 없겠어요. 하여간 그게 오는 동안에 이 사람들 “아, 그렇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특별히 이 면에서 쓰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로구나” 하는 데서 뺀 백성이라는 그런 확신이 났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견뎌왔을 것이에요. 하지만 뺀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어 이것을 특권으로 알게 됐어요. 뺀 백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네게는 이런 일이 제일 적당한 일이다, 그래 시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뽑아 쓰는데 그림 재주가 있는 놈한테는, “저기 담벼락에 도표를 그려야겠는데 그거는 네가 그려라” 그러는 거고, 수학에 재주가 있는 놈 있으면 수 학 풀 때 이건 네가 해라 그러고, 그런 걸 봐서 하지 않아요. 하나님도 그러시지 각각에게 맞지 않는 걸 정할 리 없지요. 그러니까 민족의 특징을 봐서 예언자가 깨달을 때는 그런 건데, 후대에 그것을 전해 받은 놈은 “이것은 자랑스러운 우리 특권이다” 그걸 자랑거리로 알고 특권으로 알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을 하려고 한다든지, 남한테 뽐내려 한다든지, 이런 데로 나간 것이 이 민족이 잘못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가 이방종교가 들어와서 나은 것 같으니까 그걸 하고, 이래 가지고는 잘못 돼서 마지막에 다는 아니지만 거의 중요한 사람을 뽑아다가 포로로 가져가지 않았어요. 우리 민족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좀 있어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하는 거. 이 민족은 아주 대규모로 잡혀갔으니 어쨌겠어요. 그러니 그전에 하나님의 맨 백성이라고 해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끌어내왔던 그런 백성들, 다윗이 났고 솔로몬이 났고 했던 그런 것이 다 무너져버리고 그리고 이제 남의 나라를, 거리가 상당히 멀어요. 거리가 얼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팔레스타인에서부터 끌어서 중요한 사람들을 데려갔으니까 본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형편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게 되지 않았겠어요. 그 남은 사람들마저도 지치고 지쳐 한없이 약해졌는데, 여기 이사야가 예언하는 것은, 그 포로에서부터 이제 놓여 나오게 된다 그런 거예요. 이사야는 그런 거 느낀 거예요.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했다는 게 그거 아니에요? 제2이사야에 서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위로하고 위로하라!
기원전 6세기에 키루스라는 사람이 자기네 옆에 있던 메디아를 정복해서 페르시아는 대제국이 됐어요. 엘람 이후에 늘 이집트와 싸우고 팔레스타인을 거쳐 마침내 이집트까지 여러 번 쳐들어간 강한 나라였어요. 그 다음은 앗시리아, 그 역시 강한 나라인데, 그런 것 다 무너져버리고 바빌론도 망하고 난 다음 앗시리아가 한동안 세력을 쥐었지요. 앗시리아 때는 굉장했습니다. 앗시리아는 특별히 전쟁 잘하는 국민인데 아주 군국주의 나라예요. 그래서 대적할 민족이 없는 그런 나라인데 이제 그 앗시리아까지 쳐없애고 이제 정말 키루스가 싹 쓰는 거예요. 이집트까지 권력 밑에 넣어가지고 두 진영이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세력 다툼을 하던 거기가 거의 종지부 찍히고 새 시대가 나오게 돼요.
이게 제2이사야가 일어서서 큰 말을 하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백성을 위로하라고 그래라, 저 높은 데 올라가서 전파하라고 그래라 그럽니다. 본문을 보면 알아요. 고레스라고 있는데 그를 들어서 쓸 것을, 예언자라고 하는 이는 앞의 역사를 대개 짐작하니까 민족에게 이렇게 해라 하는 메시지를 주는 게 그게 예언자의 책임이에요. 다른 나라에도 그 비슷한 게 있지만 그거는 직업적으로 임금 밑에서 벼슬 하면서 한다든지 그런 거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자기가 돈을 모으기 위해 한다든지 그런 게 아니고, 무슨 세력을 가지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종교적인 믿음의 동기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받아서 그 민족에게 메시지를 주는 겁니다. 그것은 물론 순수도가 꼭 같지는 않겠지요. 더 훌륭한 사람과 못한 사람 있겠지만 다른 나라 것과 비교할 때는 거기 특색이 있어요.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유대 나라와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우리나라가 동쪽에도 바다고 서쪽에도 바다고 반도로 돼서 어디 갈 데 없지 않아요. 유대 나라는 동쪽이 지중해고 서쪽으로 나오면 사막이 돼서 거기도 갈 데가 없어요. 우리가 반도인 대신에 거기는 반도는 아니지만 역시 좁다란 나라에 있고 대륙에서 이리로 올라오면 반드시 거길 거쳐 오고, 바다에서 대륙으로 들어갈려고 해도 거칠 데인 모양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를 갈려 해도 반드시 팔레스타인을 거쳐야 되고, 또 이집트에서 이쪽으로 올려고 해도 반드시 팔레스타인을 거쳐 오게 됐지요. 그러니 이 나라의 영향도 받고 저 나라의 영향도 받고. 우리나라도 고래로 중국에 큰 나라가 설 때마다 영향을 많이 입지 않았어요? 동쪽에 일본 있고 태평양으로 서양문명이 들어올 때, 그것이 통과 해 들어올 때 그 영향도 또 받았어요. 큰길가에 앉았다는 게 그것인데, 그렇게 문화가 전달돼서 좋은 점도 있어요. 중국에 있던 문화가 일본으로 전달된 거라든지, 서양서 오는 문화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다든지, 좋은 점도 있긴 있지만 또 입장아 아주 나쁜 점도 있어요. 큰 길가에 있으면서 제 성격을 그대로 가지는 사람 쉽지 않은 거요. 독립성을 유지하기 아주 어려운 그것이 우리의 어려운 점인데, 그런 비슷한 점이 유대에도 있지요.
그러기를 여러 백 년을 내려오다가 이사야가 이렇게 나와서, 기원전 6세기 혹은 7세기 키루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일어나가지고 온통 그때 세계를 다 정복을 하고 그전과는 판도가 달라지는, 세력 균형이 달라지는 새로운 역사를 펴게 돼요. 그후 페르시아가 잠깐 있다 망하고 이제 그리스가 나오고 로마가 나오고 그러게 됩니다. 그러니까 역사 연구하는 사람은 으례 다 아는데, 그렇게 되는 때 나서, 그 앞에 오는 역사의 그걸 느껴가지고 제 민족의 갈 길을 가리켜주는 거, 한마디로 말하면 메시지인데, 첫번에 하는 말이 “위로하고 위로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이 “동방에서 오는” 혹은, “북방에서 오는” 그러기도 했어요. 그를 들어 새 세계가 전개될 건데 그걸 알아차리라 하는 게 이사야가 말하는 요점입니다. 그러면서 시대가 변해지니까 이제는 전쟁 없다, 이때껏 시끄러운 그 전쟁 때문에 이러던 것이 끝나고 평화가 올 거라고 그때 그렇게 봤어요. 그게 물론 최종의, 이 우주에서 마지막 평화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때 보기에는 그렇게 본거니까 그걸 선포한 거예요.
민주주의가 잘 안되는 근본원인
그런데 아까 말씀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이러해서 그런다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거,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한다는 건 늘 상대적이기 때문에 미국하고 소련하고 맞닥뜨리면 미국이 순수한 평화주의 아니에요. 소련도 평화주의 아니에요. 두 놈이 만나면 자기는 언제든지 자기의 이(利)를 지키려고 하면서 하니까 늘 이중으로 해요. 무기축소도 해야겠지만 저놈들의 최강무기가 뭔지 알고 우리가 불시에 습격을 당하는 때 망하지 않도록 해야지 해요. 그러면 미국도 그런 예산을 하고 소련도 그걸 하니까 만나서 이렇게 서로 웃고 또 마지막에 헤어질 때 키스까지 하고 헤어지잖아요? 하지만 그게 가짜 키스라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평화가 오겠어요? 역사 있은 이래 오늘날까지 그거 반복이 되는 건데 하나님이 여기서 보여주는 건 뭔고 하니 그런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무조건 이런다, 그건 왜 그러냐 하는 거예요.
이때까지 한 말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지치고 지쳤어요. 지친 사람에게는 이제 어떡하면 살아나나 그거예요. 사람은 아무래도 속에 하나님의 씨를 품었지만 육(肉)속에 있으니 한계가 있지요. 한계가 있으니까 끝없이 견디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걸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키시기 위해 그런다, 그 사상이 확실히 있잖아요. 그건「이사야」아니고도 물론 있어요. 그런 것이「이사야」에 오면 특별해서 53장 읽어 내려가는 중에, 아주 중요한 장인데, 53장에 가서 예수님의 생애를 미리 본 것 같은 그런 게 나오쟎아요. 그전 사람은 아무리 깊게 봐도 그만큼 깊게 보질 못했어요.
사람이니까 여러 번 이렇게 지쳐가면, 보통으로 말하면 이런 어려움이 있으니까 차제에 일어나서 나라를 지킵시다, 이런 생각으로 권면할 거에요. 하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어요. 한도가 지나면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옳은 책망이다, 이렇게 생각돼도 지친 사람은 할 엄두를 내지 못해요. 하면 할수록 죽어 들어가요. 이스라엘도 그때 말하자면 그런 상태에 빠졌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은 책망 가지고는 안돼요.
사실은 구약의 하나님을 한마디로 표시하면 뭐겠어요? 여러분 알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제든지 말씀할 때는 ‘의로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한 때가 있습니다마는, 이 성경의 하나님은 동양의 의(義) 그런 의가 아니에요. 지독히 무서운 하나님, 의롭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요. 그것이 구약의 특색이에요. 내가 여담을 하나 할랍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잘 안되는 근본 원인이 뭐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요. 본래 민주주의가 서양에서 먼저 발달하게 됐어요. 그건 왜 그렇게 됐는고 하니 서양 사람들은 천 년이 넘도록 기독교 교육 밑에서 살아왔어요. 그것은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에 사람들이 반드시 진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이제 일찍이 예수님 돌아가신 이후 로마로 해서 천년 이상을 이렇게 내려오는 동안에 사회가 터가 잡히기를 이 기독교적인 도덕 속에서, 그 믿음 속에서 터가 잡힌 겁니다. 그러니까 정의의 관념이 우리보다 서양 사람이 훨씬 강합니다.
우리 공자, 맹자님의 도덕도, 높은 도덕이죠. 그건 기독교 도덕에 못지않게, 보통 말로 하면 높은 도덕입니다. 손색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 다른 점이 있다 그런다면 동양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해서 의를 강조하긴 합니다마는 동양의 의라는 것은 여기 하나님의 의와 같이 그렇게 강하지 못해요. 벌써부터 강조해왔던 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이다.” “불쌍한 것을 너희가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 “너희가 잘못된 거는 그 때문에 그랬느니라” 하는 말씀들이에요. 참 공정한 정의의 하나님인데,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그래서 유교 도덕 밑에 불교 신앙 밑에 살아왔지만, 사회정의감이 그렇게 강하지 못해요. 그런 것에 이 서양적인, 기독교적인 문명을 통해온 민주주의를 잘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석해요. 좋은 줄 알면서도 그러는 건 본래부터 정의감이 부족한 데서 그러는 거 아닌가 해요.
그전에도 언제 내가 말할 때 들으신 분은 아실 겁니다마는 동북아시아 평화문제를 위한 세미나를 일본에서 했는데 누가 말하기를, 남북한도 이제 갈라져 있는 건 안됐으니까, 동독· 서독 모양으로 서로 어느 정도 공존해가면서 교통할 수 있게 그럭하면 어떠냐? 그런 말을 하니까 독일서 왔다는 대표가 하는 말이 “그건 안됩니다.” 왜 안되는고 하니 독일에서 그런 것이 성립이 된 것은 독일 사람들은 동독 사람이나 서독 사람이나 간에, 그건 동독·서독만이 아니라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마는, 어쨌거나 유럽 사람은 독일 사람이라 하는 그 마음보다 유럽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강하다, 그러니까 성립이 됐다, 그런데 남북한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으로서의 그런 의식이 있는가 하면 그건 없다, 그러니 그건 안된다, 그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걸 듣고 과연 그럴 거다, 나는 거기 동감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요.
인류는 아마 자멸할는지도 몰라
요새『조선일보』인가『중앙일보』인가에「유럽합중국」이라고 글내는 걸 보지 않았어요? 그런 거 보면 나는 직접은 관계 안되지만 유럽이 하나가 되길 제발 바라는 사람 중 하나에요. 왠고 하니 세계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되면 일이 좀 빠를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어렵군요. 우리가 밖에서 본다면 유럽이 여러 민족이라고 그러지만 말이요, 유럽을 통째로 들어서 중국대륙 속에 요렇게 갖다 넣을 수 있어요. 중국에 유럽을 반짝 들어다 놓으면 그 속에 들어갈 건데 그 안에 나라가 몇이 있나 보시오. 그러고 이날까지 싸우고 그러는 거예요. 민족적인 전통 때문에, 더구나 프랑스가 잘 안 응하대요.
지금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돼가잖아요, 공동시장이라고. 그래도 금년에 의회를 뽑자, 그래서 의회가 성립됐어요. 한데 아직은 실력이 없다고 그럽디다만 차차 되겠는지 모르지요. 되면 좋을 겁니다만. 유럽 사람은 그래도 그런 의논이 나올 만해요. 한데 동양에서 그거 나오겠어요?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내 생각은 그랬어요. 일본이 대동아전쟁 때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대동아공영권(大同亞公營園)이라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이제 다시 한번 해보면 어떠냐 내가 그랬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일본은 그때 제국주의적인 그런 생각에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걸 조직할려고 그랬지만, 이제 봐! 중국이 깨기 시작하면, 10억이라는 국민이 민족주의로 나간다면 다들 결딴나요. 우리는, 뭐 우리나 일본은 바위 밑에 있는 계란이라고 내가 그랬어요. 곤륜산에서 굴러오는 돌이 그냥 깔고 넘어갔지 어디 가만 두겠어요. 그럼 아시아에 있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나라대로 갈라면 연방조직이나 해서 중국 민족이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세계가 옳게 되지, 그러지 않고는 안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정시대와는 다른 생각에 ‘대동아공영’이 이제 한번 됐으면…… 꿈같은 소리입니다마는. 내가 정치를 모르니까 그런 생각 하는지 몰라요. 그렇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있어요.
유럽은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이 있으니까 출발을 하지 않았어요? 아직 시원치 않지만 그렇다 그 말이에요. 유럽 사람에게 안된 점도 많긴 하지만, 인도주의가 발달한 것이 어디고 또 어디서 난 거냐 그러면 아리안족으로서의 특색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그건 기독교 교육 속에서 나왔어요. 기독교 교육을 참 잘 받았다고 그럴 순 없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천년이 넘도록 기독교 교육 속에서 자랐으니까 인도주의가 그만큼 발달됐고, 지금 이러니저러니 공산이요 자본이요 하지만, 세계가 이만큼 이라도 되는 것은 그 인도주의적인 정신이 조금 반짝하고 있으니까 이렇지요. 이제 조금 있으면, 이대로 가다가는 없어질 겁니다.
그거는 다른 문제와 관계되니까 이 다음에 언제 기회 있는 대로 말씀합시다. 그렇긴 하지만 인류의 살림이 대규모 기업을 해가지고,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을 가지고 살려낼 수 있느냐? 이것을 그만두지 않는 한은 전쟁은 기어이 아무 때 가서라도 나고야 말고, 전쟁이 난다면 인류는 아마 자멸하고 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아주 큽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래도 명맥을 유지해서, 당장은 망하지 않는 정도로, 유엔이라고 해가지고 요렇게 뭘 좀 해가는 것은 그 기독교를, 완전한 기독교 신앙은 안 받았어도 그 밑천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라난 그게 생명이 돼서 아직 그 빛이 남아 있는 때문이에요. 나는 공정하게 모르겠소만 토인비더러 물어본다면 어떻겠는지. 토인비 이후에는 문명 비평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젊어서, 그걸 이상이라고 해야 할는지, 한번 공부를 해가지고 문명비평을 해봤으면 했어요.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취미진진한 건 그거예요. 할 수가 없어서 하다가 모자라 그만둔 사람입니다마는……,그게 다른 게 아니고 여기 성경에 있던 걸로 하면 예언자 정신인데, 나는 어느 나라에 속해 있기는 있지만 내 나라라는 그런 생각에서가 아니라 세계를 걱정하는 의미에서 한번 이 문명을 바로 보고 비판을 못해보나? 그럭하는 것이 우리의 앞에 빛을 비쳐주는 일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성경을 보는 동안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왔는지 모르죠. 그래 오늘까지도 그걸 잊지 못하고 가끔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이런 데서 크게 달라지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키루스가 일어나, 두 세력이 다투던 데가 싹 한판도 안에 들어가니까 그때 이사야가 보기에도 하여간 크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우리가 지금 보면 그건 좀 지나쳤다, 그런 점도 있어요. 하지만 키루스 그를 어쩌면 유대 민족이 늘 기대해오던 메시야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리만큼 기대를 걸고, 이제 그 키루스를 하나님이 일으키셨다, 그래요. 그러고 그게 올 것을 어느 정도 미리 봤는지 성경 안에서만 말고 밖의 역사와 대조를 해가지고 해야 할 건데, 나는 그 전문연구는 못했으니까 모릅니다마는, 하여간 제2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은 키루스가 올 것을 예감을 하는데 이걸로 이제 달라지지요.
달라지는 건 뭔고 하니,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우리 민족이 이제 다 돌아온다. 놀라운 생각이에요. 다 돌아올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 새로운 것을 느꼈어요. 그런 눈으로 민족을 바라보니까, 이 민족을 어떡하지? 이 민족이 이날까지 모세 이래 책망만 먹어왔어요. “이 자식들아, 이 자식들아!”
무조건 위로하라
시간 많이 지났으니 이젠 그만두겠습니다만 제1이사야 보시오. 얼마나 하면 “소도 제 구유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을 아는데 이 자식들은 도무지 제 애비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어요. 제가 길러낸 이놈들이 모른다, 그리고 이 ‘망할 민족’이라 그러고, ‘죄악의 자식’이라 그러고 얼마나 지독히 욕을 해요. 그건 이사야한테서만 듣는 게 아니고 역대로 계속 들어왔어요. 그건 왠고 하니 특별한 사명을 저한테 맡기려고 하는 데 듣지 않아요. 또 선조인 아브라함과 약속을 했는데 내가 차마 그걸 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깐 지독한 정의의 하나님이 예언자의 마음속에 감동을 해서 책망하고 그래요. 그런 것이 견디기도 어렵지만은 자랑이람 자랑인데, 그걸 받아보다 이젠 지쳤단 말입니다. 바빌론도 강하지, 앗시리아는 무서운 나라지, 이집트도 그렇지 그걸 견뎌낼려고 하니 어디 그게 돼요? 그러니까 견디고 견디고 하다가 이방 종교를 믿기도 해요. 그 종교란 좋구나 좋구나 하는 종교예요. 하나님의 종교란 아주 높은 영적 종교니까 아주 엄혹한 하나님이지요. 하지만 이방종교라는 건 생성 발전하는, 생물이 나고 죽고 하는 대지를 좋다 좋다 그래요. 봄철에 제사, 여름에 제사, 가을에 제사, 좋다 좋다 하고, 어느 때 가다가는 모든 도덕률을 일시 정지시켜놓고 그저 마음껏 뛰놀고 그러기 좋아하는 그런 종교인데, 이스라엘 종교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종교예요. 그러니까 어느 편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 하나님 너무 엄하게 해서, 무서워서…….
그때 그랬던 생각을 해야 예수님이 나셔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걱정 마라 그랬던 의미를 알 수가 있어요. 그 배경을 두고 생각하면 또 젊은 시대에 그 정의의 채찍 밑에서 자라난 게 있으니까 복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안될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가 예수 전에 있어서 아마 비교적 제일 예수에게 가깝게 하나님의 그런 것을 미리 체험한 사람이 아닌가, 예수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그래 그런 게 아닌가 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하시는 평화를 얘기하고는 첫째 말씀이 “위로하라”고 그랬어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사람이란 책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연약한데다가 하자고 하는 마음은 있지만 이 지체(肢體)가 감당을 못하니까 책망을 했다가도 어떤 때는 무조건 또 아버지가 누그러져서 “야, 이 자식아, 왜 그러냐” 그러고 나오게 될 때에 도리어 회개가 있게 되지, 아버지가 지나치기 나무라면 오히려 반항만 나와 안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리든지. 신문에도 더러 그런 일 보지 않아요. 동양에는 옛날부터 그런 일 많이 있었어요.
이런 때는 잘못이 있는 걸 이치로 추궁하면 할수록 저의 마음이 점점 죽어 들어가요. 그럴 줄을 알기 때문에 덮어놓고 “야, 이 자식아, 다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옛날같이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렇게 도리어 아버지 편에서 위로하고 사면하는 걸 무조건 선포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야 은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봐서 아는데 여러분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나는 비교적 온순한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싸움 안하는 애라고 그러는 이름이 있었어요. 성격이 못나 쌈할 줄 모르는 애예요. 그런데 또 공부도 한다면 좀 했지 뭐 놀기를 좋아하든지 그러진 않았어요. 어려서 아마 몇 살 땐지 몰라도 시험을 치게 됐는데 내일 가서 시험치는데 밤에 그 준비가 안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12시가 지나도록 앉아 했는지 그걸 자꾸 따로 외는데, 아버지가 보시기에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본래 애들에게 자상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고, 아버지 성격도 그렇고 나도 그래서 집안 애들 잘못 길렀습니다만, 애들하고 놀 줄을 몰라요. 아버지가 그리 엄격한 건 아니지만 평상시에 말이 없는 분이니까 내가 어렵게만 대하는데, 그날 저녁에 왜 그런지 오시더니 “얘, 자라. 그만했으면 됐어. 이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저절로 돼. 그러니 걱정 말고 자라.” 그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별일 없이 학교 시험을 치렀던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 어릴 때 생각인데 잊혀 지지가 않아요.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고마운 생각이 들었길래 그랬겠지요. 만일 그전이라도 “이 자식아, 그걸 모른단 말이냐” 하고 회초리로 갈겼다면 아주 낙심하고 말았을지 몰라요. 유대 민족의 처지가 그때 말하자면 그렇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 정의기 때문에 그때 이럭저럭했지만, 자꾸자꾸 이럭하는데, 그 옆에 사나운 이웃이 또 있지. 그런 속에서 지치고 지치고 그래 왔는데, 이제 또 그 이상으로 그런다 그러면, 이 속에 있던 하나님의 씨가 아주 없어져 버릴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사야가 그런 걸 느껴서 “야, 그저 무조건 위로해라” 그럭하고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다고 그래라”고 했을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