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국 여배우 스테파니 파커(Stephanie Parker) , 공터에서 목 매 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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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기 여배우 스테파니 파커(22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BBC 등 영국의 주요 외신들은 2009년 4월 19일 오전(현지시각) 여배우 스테파니 파커가 폰티브리드 인근의 한 공터에서 목을 매 숨져있었다고 전했다. 아직 정확한 자살 동기 등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 <빌롱잉>(BBC 웨일즈)의 시청자들을 비롯해 많은 영국 시민들이 충격에 휩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소속사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드라마를 제작하고 방송한 BBC 웨일즈 측의 고위 관계자는 "BBC 웨일즈의 모든 직원과 <빌롱잉> 관계자들은 스테파니의 사망 소식에 매우 슬퍼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 9만9622점 경복궁서 용산 박물관으로 이전 시작
포장 등 일련의 준비작업을 거쳐 지난해 4월 19일 소장품이 처음으로 새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이날 가장 먼저 경복궁 내 현재의 박물관 수장고를 떠난 석기ㆍ청동기시대 마제석검 등 석제품 2천여 점을 시작으로, 8개월 동안 소장 유물 9만9천622점의 이전 작업이 있었다.
운반에는 5t 무진동차량 500여 대가 동원됐고, 무장경찰이 운송차량 호송을 지원했다.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만 396점에 달하는 유물 이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정부가 지급한 손해보험 액수만 5억2천만원. 평가된 유물 전체의 금전적 가치는 7천억원에 달했다.
하루평균 50여 명이 투입된 10만여 점을 옮기는 작업은 2004년 12월 24일 청동종과 청동화로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Google
[2004년] 김정일 북한 위원장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4년 4월 19일 중국 베이징(北京)에 도착,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된 후인 200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으며, 2001년 1월 상하이를 거쳐서 베이징을 방문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3일간의 베이징 체류기간 동안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 중국 4세대 지도부와 상견례를 통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북핵문제와 경협 등 현안에 대한 양국 입장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서 후 주석은 중국의 경제개혁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북한이 대민관계를 개선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특히 체니 미국 부통령의 방중 결과를 북한측에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급작스럽고 비밀스런 이번 방문에서 북한이 얻은 성과라면 중국의 경제적 지원과 신의주 경제특구에 대한 협력 정도라고 보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3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4월 22일, 김 위원장이 돌아오던 길목이었던 신의주부근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해 김 위원장을 겨냥한 암살기도 여부가 의문시되기도 했다. /조선
[2000년]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 별세
← 한국 개신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
한국 개신교의 최고 원로인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가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15분 별세했다. 향년 98세였다. 한경직 목사는 1902년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나 정주 오산학교와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1926년 도미,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귀국한 한 목사는 이듬해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선 목회자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온 한 목사는 1945년 12월 월남민들과 함께 ‘베다니교회’를 설립, 한국 최대의 영락교회로 키워냈다. 6.25가 끝난 뒤에는 재건된 숭실대 학장, 선명회 이사장, 장로교 총회장 등을 역임하며 60-70년대의 비약적인 개신교 발전을 이끌었다.
1972년 영락교회에서 은퇴한 한 목사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현역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활발히 활동했으며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92년 `종교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2001년] 우주 왕복선 엔데버호 발사 (21일 국제우주정거장 도킹)
미국인 4명과 캐나다·이탈리아·러시아인 각 1명씩 모두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우주왕복선(space shuttle) 엔데버호(Endeavor)가 2001년 4월 19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21일 지구 상공 311km 궤도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했다.
11일간 우주 공간에 머무른 이들은 22일 길이 17.6m, 무게 1620㎏의 거대한 기중기 형태의 로봇팔을 ISS의 실험실 모듈에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업은 캐나다인 크리스 해드필드 대원과 미국인 스콧 파라진스키 대원이 해냈다. 캐나다측이 제작해 '캐나다암 2'라고 이름붙은 이 로봇팔은 제작비가 9억달러나 된다. 엔데버호에는 또 이탈리아가 만든 화물 운반기 ‘라파엘로 모듈’이 실려 있다. /조선
[1999년] ‘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 은퇴
북미아이스하키(NHL) 최고의 스타 '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Gretzky, Wayne, 1961.1.26~ )가 1999년 4월 19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피츠버그 펭귄스와의 최종전을 끝으로 은퇴했다.
1979년 데뷔한 그는 NHL 22년 동안 최다득점 외에 18차례 올스타에 선정됐고, 10번이나 득점랭킹 1위, 19시즌 동안 정규리그 MVP에 9차례 뽑히는 등 신화적인 기록들을 작성했다.
특히 1999년 3월 30일 프로통산(WHA·월드하키연맹 포함) 1072번째 득점을 올려 그의 어릴적 우상인 고디 하우(71)의 '불멸의 기록'(1071점)을 깨는 신기록을 이룩했다. 통산 최다득점(894골)과 최다어시스트(1962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레츠키는 1998년 '하키뉴스지'에 NHL 역대 최고선수로 선정됐었다. 또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에서는 숫자 99를 말해야 할 때 그의 이름(99는 그의 배번)이 언급될 정도로 그레츠키는 추앙받는 존재였다. /조선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한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4.21~ ) 영국 여왕과 부군 에든버러 공이 3박4일 일정으로 1999년 4월 19일 방한했다. 영국 왕의 방한은 1883년 한-영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래 116년간의 양국관계 사상 처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내외는 이날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한 직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데 이어 청와대를 방문, 공식 환영행사를 갖고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정상환담을 갖고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방안과 문화 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여왕 내외는 또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방문, 태권도 시범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방한 3일째인 2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둘러보고 안동 청과시장, 봉정사 등을 방문했다.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 한옥의 전통적인 건축미가 잘 보존된 풍산 류씨 문중의 충효당(보물 414호)을 방문해 집을 둘러 보고, 서애 류성룡의 후손 탤런트 류시원의 본가인 담연재에서 하회별신 굿탈놀이 아홉마당을 관람하며,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조옥화씨(78)가 여왕의 73회 생일을 위해 마련한 생일상을 받았다. /조선
[1994년] 황영조 미국 보스턴국제마라톤대회서 4위 - 2시간 8분 7초 한국신
4번째 풀코스 도전인 92바르셀로나 올림픽서 우승(2시간13분23초)을 이뤄 온 국민을 감동시켰던 황영조(黃永祚, 1970~ )는 이후 돌발적인 은퇴선언과 거듭된 방황으로 눈총을 샀지만 94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9초(4위)의 한국신기록을 수립, 당당히 재기합니다. 이 레이스는 마지막 4Km 구간을 남기고 선두그룹이 15초대의 놀라운 스퍼트로 경쟁을 펼친 막판 스퍼트로 잊지못할 명승부로 꼽힙니다.
상승세를 탄 황영조는 일본에서 열린 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다시 한 번 국민을 열광시켰고, 95춘천국제마라톤서는 2시간11분32초로 2위, 여전히 세계적인 마라토너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96동아마라톤서 불의의 다리부상으로 29위(2시간25분45초)로 밀려나면서 대표선발에서 탈락, 짧은 마라톤 인생을 정리하게 됩니다. /Google
[1991년] 고르바초프 방한으로 제주정상회담 개최
1991년 오늘,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우리 나라 제주도를 방문했다.
그는 1박 2일 동안 제주에 머무르면서 노태우 대통령과 3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한국의 UN가입 지지와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위한 공동 노력, 경제협력 확대를 합의했다. /YTN
[1960년] 4.19혁명 발발
←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정권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에서 행진하고 있다.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자유당 정권의 오랜 독재 정치와 부정 부패로 국민의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데다가 1960년 3월 15일의 부정 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일어난 혁명이다.
1952년 7월 4일 집권욕에 사로잡힌 자유당 정권은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에서도 관권을 동원하여 승리를 거두고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날 4·19 혁명으로 폭발한 것이다.
4·19 혁명은 정권을 빼앗거나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오직 독재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청년 학생들의 불타는 정의감에서 일어난 집단 행동이었다. 4·19 혁명은 학생이 주동이 되었고, 그 배경에는 온 국민의 호응이 있었다. 그러한 뜻에서 4·19 혁명은 민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근대적인 시민 투쟁으로서 우리 민족의 민주적 역량을 보여 준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조선
[1948년] 김구-김규식,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참석차 방북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金九 1876∼1949) 선생과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북행을 감행했다.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연석회의에 이어 27일부터는 '남북요인 15인회담'과 '4김 회담' 등이 계속됐다. 이같은 일련의 회담을 통해 남북지도자들은 외국군대 즉각철수, 全조선정치회의 소집,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의 4개항을 결의했다.
김구의 평양방문은 남북분단을 막아보자는 절실한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한 결과 만을 낳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소련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고 유엔 소총회가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결의하자 자칫하면 남북이 분단될 것을 우려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했었다. /조선
[1948년] 장개석,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선출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1934년 일종의 정신부흥운동인 신생활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때 장(蔣)·공(孔)·송(宋)·진(陳)의 <사대가족(四大家族)>을 중심으로 한 저장재벌[浙江財閥(절강재벌)]을 육성하여 자신의 재정적 기반으로 삼았다. 1936년 시안사건[西安事件(서안사건)]으로 구금당하여 할 수 없이 항일민족통일전선 형성에 동의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정부를 충칭[重慶(중경)]으로 옮긴 뒤, 항일전쟁 중에도 종종 반공정책을 단행했다.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충칭에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국공화평회담(國共和平會談)을 열었으나, 1946년 미국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국공내전이 일어났으며, 1948년 새로운 헌법으로 초대 총통(總統)에 취임했다. 1949년 그가 이끄는 국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미국의 강력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대패, 그 해 대륙을 잃고 타이완[臺灣(대만)]으로 쫓겨갔다. /yahoo
[1947년] 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제패
←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선수의 모습.
1947년 4월 19일 오전 11시,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한 8개국 156명의 선수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선에는 가슴에 ‘KOREA’와 태극기를 단 서윤복(徐潤福)과 남승룡(南昇龍)의 모습이 보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경기 시작 전 출전을 포기한 손기정 감독이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무국적 선수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의 프로펠러 군용기를 얻어타고 서울을 출발, 괌·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일주일이나 걸려 도착한 탓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165cm·55kg의 왜소한 체격, 그러나 스물 네 살의 서윤복은 뛰다가 쓰러질지언정 기권하지는 않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중간지점부터 선두를 달리던 서윤복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30km지점. 연도의 한 관중이 서윤복을 격려하려고 박수를 친다는 것이 그만 끌고나온 개의 끈을 놓친 것이다. 도로 안으로 뛰어든 개 때문에 서윤복이 넘어진 사이 7∼8명의 선수들이 서윤복 곁을 스쳐 지나갔다. 벌떡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운동화가 말썽이었다. 끈이 풀린 것이다. 서윤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처 달렸다. 선두 탈환. 멀리 결승점 보스턴시 청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2시간25분39초,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광복 후 처음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국제 마라톤대회, 더구나 우승까지 일궈냈으니 손기정도 서윤복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서윤복의 장거에 감격한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를 휘호로 써주었고, 이승만 박사는 울면서 축하해줬다. 다시 3년 뒤 함기용·송길윤·최윤칠 세 선수가 보스턴마라톤에서 각각 1·2·3위를 차지, ‘코리아’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 나치스에 봉기
유태인들이 학살 수용소로 가기 전 임시로 거주했던 바르샤바(Warzawa)의 게토(Ghetto)에서 1943년 4월 19일 나치스에 대항하는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다. 유태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1940년 11월 설치된 바르샤바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유태인 40여만 명이 좁고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 곳에는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1942년 7월 이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은 모두 동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해 여름에만 3만명의 유태인이 이곳을 떠나 트레블린카 학살수용소로 수송되었다. 대이동은 계속되었고 봉기 전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유태인 수는 고작 7만명 뿐이었다. 이들에게도 고통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남아있는 그들 대부분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나치스 SS대 전국 지도자인 히믈러(Himmler, Heinrich, 1900~1945)는 "바르샤바의 게토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1943년 오늘 SS대원 58명과 장교 16명이 전차와 장갑차로 게토에 침입했다. 유태인들은 격렬히 저항하며 그들에게 유탄과 화염병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기도 보급도 없는 주민들은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주민들의 방어기지인 지하실을 파괴했고, 화염 방사기로 집들을 불태웠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인 슈트로프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바르샤바에는 이제 유태인 거주 지역은 한 군데도 없다. 저녁 8시 15분에 모두 종료됐다.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태인 총수는 5만 6천 65명이다." /조선
[1934년] 최초의 과학의 날인 "과학데이" 행사 개최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4월 19일로,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여기던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죽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제1회 ‘과학데이’로 삼아 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 행사의 지도자인 김용관(金容瓘)이 투옥됨으로써 더 이상 행사를 계속하지 못하다가, 과학기술처 발족일인 1967년 4월 21일을 기념해 1968년 ‘과학의 날’로 정한 뒤, 1973년 3월 30일 제정·공포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확정되었다. /naver
[1906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Curie, Pierre) 사망
퀴리 [Curie, Pierre, 1859.5.15~1906.4.19]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가 1906년 4월 19일 마차에 치어 47세로 사망했다. 아내인 마리 퀴리(Curie, Marie, 1867~1934)가 워낙 유명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공동연구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퀴리는 노벨상 수상 후 소르본대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상온에서 1400 ℃ 정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磁化)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했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895년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Marja Skłodowska, 마리 퀴리)와 결혼한 후,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받아 방사능 연구에 몰두했다.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 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을 탐구하던 중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03년 아내와 H.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조선
[1882년]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Darwin, Charles) 사망
다윈 [Darwin, Charles, 1809.2.12~1882.4.19]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이 1882년 4월 19일 사망했다. 에든버러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어려서부터 품어왔던 동식물분야였다. 22세때 해군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남미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제도)들 그리고 호주 등지를 두루 항해하며 탐사한 경험은 훗날 그가 진화론을 기초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사상의 심증을 굳히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839년에는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해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59년 출간된 ‘종의 기원’은 그가 이제껏 연구해 온 진화론의 집대성이었다.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정식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 책에서 자연선택설을 요인론으로 설명했다. 즉 자연선택설은 생물의 어떤 종의 개체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에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해 버린다는 견해이다.
‘종의 기원’은 초판 1,250부가 발매 당일에 매진될 정도로 큰 반응을 일으켜 6판까지 출판됐다. 1871년 발표한 저작물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은 ‘종의 기원’에서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그의 태도를 분명히 한 저술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리학에서 뉴턴역학과 더불어 사상의 혁신을 가져와 그후의 자연관-세계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1872년] 독일 태생 미국의 사회사업학교 창설자, 여성운동가 잘로몬(Salomon, Alice) 출생
잘로몬 [Salomon, Alice, 1872.4.19~1948.8.30]
국제적으로 유명한 여성운동가이기도 하다. 베를린대학교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1906)를 받은 여성 중 한 사람으로, 박사학위 논문에서 동일 노동 분야의 남녀 임금차를 다루었다. 사회사업가를 위해 그녀가 개설한 정규훈련과정은 1899년 독일 최초의 사회사업학교로 발전했으며, 1932년 잘로몬으로 개칭되었다. 그녀는 1928년까지 이 학교의 교장을 지내는 한편 독일사회사업학교연합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04년 국제여성회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1920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공중보건 분야에서 활동을 계속했고 1932년 베를린대학교에서 명예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7년 나치 독일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사회사업행정에 관해 강연했다
[1824년]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 George Gordon) 사망
바이런 [Byron, George Gordon, 1788.1.22~1824.4.19]
"칼을 사용하면 칼집이 헤어지고 영혼이 괴로우면 가슴이 헌다.
심장도 숨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에도 휴식이 있어야 한다."
- 바이런의 시 <이젠 더 이상 헤매지 말자>에서
영국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 런던 출생. J.W. 괴테로부터 <금세기 최대의 천재>라고 찬사를 받은 그의 시의 영향은 전유럽에 미쳤다. 근위대위인 방탕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서 거만하고 변덕스러운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애정 밑에서 자랐다. 오른쪽 다리의 장애 때문에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10세 때 큰삼촌에게서 작위를 이어받아, 제6대 바이런남작으로서 노팅엄주 뉴스테드의 저택으로 옮겼다. 하로학교에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진학하였고 1807년 소설집 《나태한 나날》을 발표하였는데, 《에든버러 평론》지(誌)의 냉혹한 비평에 대응하여 풍자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1809)》로 반격하였다. 졸업 후, 세습귀족으로서 상원에 의석을 차지하였다. 1809~1811년에, 친구와 함께 리스본·세비야·몰타·알바니아·아테네 등 지중해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남유럽의 자유롭고 밝은 경치에 격렬한 창작의욕을 느껴 귀국한 후 즉시 여행에서 취재한 장편담시(長篇譚詩)인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1812, 제1·2편)》을 썼다. 이국취향이 넘치는 이 시집은 나오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어서 <아침에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라고 스스로 일기에 쓸 정도였다. 이어서 《사종도(邪宗徒, 1813)》 《아비도스의 신부(新婦, 1813)》 《해적(1814)》 《라라(1814)》 《코린트의 포위(1816)》 등의 담시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근친상간 등의 반도덕적인 주제는 캐롤라인 램과 이복누이 오거스터와의 추문, 또는 A. 밀뱅크와의 결혼, 그리고 이혼이라는 여러 가지 사생활의 악평과 함께 세간의 지탄도 엄격하여, 1816년 영국을 떠났다. 제네바로 가 시인 P.B. 셸리 부부와 교분을 맺었다. 그리고 셸리의 의매(義妹) 클레어 클레어몬트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후 베네치아·로마·피사 등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하였다. 이 사이에 귀치올리백작부인 테레사와 정을 맺으면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1816, 제3·4편)》을 비롯하여, 근대적 자아의 고뇌를 묘사한 《맨프레드(1817)》 《베포(1818)》 《마제프(1819)》 《마리노 팔리에로(1821)》 《사사르다나팔루스(1821)》 《케인(1821)》 《하늘과 땅(1823)》, 미완성의 작품 《불구의 변용(變容, 1824)》 등 시극을 정력적으로 발표한 외에, 미완성의 장시 《돈 주안(1819~24)》을 계속 썼다. 1822년에는 영국에서 온 친구 L. 헌트를 도와 《더 리버럴》지를 발간하였다. 이미 그는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당의 반오스트리아·반교황운동에 관여한 관계로 관헌의 감시하에 있었으나, 1823년 7월 그리스로 건너가 터키의 압제에 항거하는 그리스독립군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4월 19일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하였다. /yahoo
[1775년] 미국 독립전쟁 발발
영국이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압박을 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1775년 4월 19일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미국에 대해 세금을 혹독하게 부과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를 가했다. 1764년에는 'Sugar Act'라는 법을 제정하여 설탕을 수입할 때 관세를 부과했고, 1765년 '둔영법' 제정, 'Stamp Act제정' 등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영국의 통치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은 직접세에 대한 항세 운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직접세가 간접세로 전환되었으나 이 또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1773년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재정 지원을 목적으로 관세없이 식민지에서 차를 팔 수 있게 하는 'Tea Act'를 제정했는데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제1차 대륙회의와 제2차 대륙회의가 개최됐다.
1775년 5월에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독립군 사령관이 됐다. Bunker Hill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독립군은 식민지의 반란을 선언하며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식민지 군대가 불리하였으나 1777년 10월 17일 뉴욕의 북부인 Saratoga에서 식민지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되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1781년 버지니아의 York Town에서도 대승하게 됐다. 이후 1783년 파리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미시시피강 동쪽의 13개주는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미국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선언하게 됐다.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독립국가로 태어날 수 있었다. 미국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와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조선
그밖에
2009년 현대, 기아차 10종 4만 8천636대 리콜
2004년 자민련 김종필 총재 정계 은퇴 선언, ‘3金시대’ 종말
2004년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 짐 칸달루포 심장마비사
2003년 프랑스, 이슬람여성에게 신분증 사진 촬영 시 스카프 착용 금지 선언
2003년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 선생 118년 만에 명예졸업장 수여식 거행
2000년 필리핀항공 소속 보잉 737-200기 사말섬 추락. 131명 사망
1999년 서울시지하철공사 전면 파업에 돌입
1999년 독일의 도이체 텔레콤과 이탈리아의 텔레콤 이탈리아, 합병에 합의. 세계최대 통신사 탄생
1998년 이봉주, 제18회 로테르담 마라톤대회서 2시간7분44초로 한국신기록 수립
1997년 규제개혁추진회의 발족
1996년 모스크바에서 핵안전 정상회담 개막
1996년 북한 경비정 2척 서해 한계선 침범
1995년 오클라호마시, 극우파에 의한 폭탄테러
1995년 4.19묘역 국립묘지로 격상
1993년 전경련 고문 이원순옹 타계
1993년 무장 탈영병 서울도심서 총격난동
1993년 미국 사교집단 ‘다윗파’ 집단자살
1992년 제1회 세계체조개인선수권대회서 유옥렬 우승
1986년 프로야구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첫 맞대결
1984년 동남여객선 페리호 조난
1983년 대도 조세형 탈주 후 5일 만에 검거
1983년 문공부, 공산권의 순수 음악 음반 수입 허용
1980년 베트남 억류 세 외교관 5년 만에 귀국 발표
1974년 파키스탄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1958-1969) 아유브 칸 사망
1972년 대한항공(KAL) 태평양 횡단 첫 취항
1971년 미(美) 살인범 맨슨 재판, 사형 선고
1967년 수원에 경기도청사 본관 준공
1967년 서독 초대총리(1949-1963) 콘라드 아데나워 사망
1964년 라오스 우익 쿠데타, 1일 만에 실패
1955년 피분 태국수상 내한
1952년 동양통신 창간
1941년 프랑스, 국제연맹 탈퇴
1938년 독립운동가 우강 양기탁 사망
1935년 소설가 성해 이익상 사망
1925년 한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송욱 출생
1914년 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 사망
1912년 미국의 핵화학자 시보그 출생 -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 분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03년 소련 키시네프에서 유태인 120명 학살
1897년 제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1895년 을미개혁 단행
1895년 역모 죄인의 姓을 없애는 법례 폐지
1883년 브라질 대통령(1930-45, 1951-54) 바르가스 츨생
1481년 성종 12년 동국여지승람 완성
1390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