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
나의 왼쪽이 허 모간호사, 두번째가 나, 김 모 수간호사, 옆의 둘은 이름이 기억 안나고, 마지막이 내 후배. 왼쪽의 지붕이 병실, 오른 쪽은 물론 신축병원, 다 짓는데 약 10년 이상이 걸렸지요. 때는 간호사들이 짧은 소매를 입은 걸 보니 6월, 시는 점심 식사후.
며칠 전 우리병원 신경외과에 있는 나의 대학후배가 나에게 무얼 물어보러 내 연구실에 들렀다. 그러면서 들고 온 사진 한 장을 내민다. 가만히 보니까 35년 전, 그러니까 75년 내가 내과 전공의 3년차 특실 주치의로, 후배가 나 밑에 인턴으로 있었을 때 점심식사후 쉬는 시간에 잠시 특실병동 옥상에서 찍은 것. 물론 지금은 철거 된 건물이고 일종의 별관으로 3층이었다. 사진에는 나와 후배, 그리고 4명의 간호사가 찍혀있는데 그 후 미국으로 간 김모 수간호사, 허모 간호사, 다른 두 간호사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본다. 그 때 나의 꿈이 무엇이었을까?
사진을 보니까 지금도 그 시절 환자들이 생각난다. 나는 특실을 인턴으로, 또 3년 후에는 내과 전공의로 근무를 하였으니까 기억하는 환자들의 연대는 다를 수 있다. 특 301호실에는 김 대중 전 대통령이 일종의 연금생활 중이었으나 병실에 한 번도 들어갈 일도, 들어가지도, 들어 갈 수도 없었다. 울산출신의 정보부의 감찰실장이던 명석한 두뇌의 이 모검사도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와의 권력 암투로 병보석 중이었고, 밤마다 홀로 병동 옥상에서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 모친을 몇 년이 지나 우연히 길에서 만나 아들의 안부를 물었더니 미국 뉴욕에서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 철강회사의 대표 신 모씨는 미화 20여 만불을 신문로 자택의 벽에 숨겨 놓았다가 압수수색에 걸려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들어 왔다. 그는 나에게 강철의 처리과정에서 냉간압과 열간압의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고,
자기 회사의 우수성을 몰라주는 정부당국자를 성토하였다.
또 부정에 연루된 기업인 승 모씨는 평소에는 기사를 보내어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의 식사를 주문해 먹다가도 재판 전날부터 금식한다. 다음날 수염도 안 깎은 얼굴에 정맥주사를 달고 휠체어를 타고 불쌍한 모습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것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동생이 한국 트럭터미널의 사장을 하였었는데. 히로뽕 제조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던 윤 모씨는 신체유치감정명령으로 3주간 나와 있다가 재수감 하루 전인가 이틀 전인가 감시하는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을 가버렸지. 병록지를 검토해보니까 탈출 전 저녁을 잘 먹지 않았고 맥박이 100회 이상으로 적혀 있었다. 그 후에도 신문에 안난걸 보면 어디에 있을까? 이쯤 되면 특실 병동인가, 서울 구치소의 특별 병동인가 모를 정도이다.
장기를 잘 두는 이 모 중앙정보부장의 동생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우리 인턴선생과 대국도 즐겨하였다. 안타까운 환자는 미국 MIT에서 초빙하여 온 KAIST의 세라믹 전공의 김 모실장, 부인도 같은 연구직이었는데, 그 때 선물로 받은 근사한 넥타이는 아직도 집에 걸려 있으나 내가 특실을 떠나고 난 후 만성 간염이 진행하여 결국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프로 레슬러 장 영철의 주치의로 괌에서 온 인품 좋았던 한의사, 당시 보안사령부사령관의 나이 어린 아들은 근황을 신문에 본 적이 있었다. 장안을 휘어잡던 인천 올림포스호텔의 나의 종씨 유 모씨는 나중 재산도 없이 불쌍하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폐암 수술을 간신히 받았던 김 모씨는 당연히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십여년이 지나 신문에서 이름을 보고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특실 인턴때 기억나는 환자 중에는 마치 장관처럼 행세하던 이 모 차관부인,
박 모 유정회 국회의원의 딸은 뇌암으로 입원을 수차례 되풀이하다가 죽었고,
그 모친은 딸에 대한 그리움을 병상일지를 출간하였는데 내 주위의 분들이 실명으로 기술되었다.
진통제로 조절이 안 되는 심한 복통으로 입원하여 3일 만에 회충이 위사진에서 증명된 나의 친구 부친,
나의 고등학교 은사 부인은 위암 절제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셨다가 그냥 Open & Close로 끝이나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나는 이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대부분 기억한다.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 무엇이 좋은지 웃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