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까지 오랜 고난
성경 말씀: 출애굽기 34:1-9; 골로새서 3:12-17
요약
고난과 오랜 고난은 성경에서 구별됩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불구하고 그들이 뜻하는 것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오랜 고난으로 이루어집니다. 고난은 사람들이 타락된 세상에서 조건적으로 직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백성이 세상의 타락된 삶으로부터 구별된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함께로 타락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타락된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인내가 아닌 고난
성령님의 열매로 오랜 고난은 오랜 참음과 같이 인내로 여겨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랜 고난은 성경에서 언약의 삶을 다루는 특별한 말입니다. 언약의 삶은 인내하는 삶이 아닌 오랜 고난의 삶입니다. 이 다름은 먼저 의식되어야 합니다.
인내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점에서 인내는 목표가 아닌 수단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인내합니다. 성공을 위한 수련 과정은 인내로 보입니다. 그들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인내합니다. 이 점에서 인내는 보통 삶에 수반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열매로 오랜 고난은 목표를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은 오랜 고난으로 펼쳐갑니다. 언약은 세상에서 구별되기 때문에, 언약의 삶 자체는 이루어지고 펼쳐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언약의 삶은 세상 삶 가운데 오랜 고난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오랜 고난의 시각에서 서사됩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보이신 표적 때문에 예수님에게 모이지만,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다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섞이게 되지 않는 다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표로 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군중에 섞이지 않으셔서 예수님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은 고독한 삶이 아닌 오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에 근거된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세상에 성취나 누림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느냐 아니냐로 부터 떠나,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겪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 삶을 사는 고난을 겪지만, 예수님은 세상 삶으로부터 구별된 삶의 오랜 고난을 겪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상에 오심은 기본적으로 고난입니다.
고난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음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음이 고난입니다. 따라서 오랜 고난은 세상에서 말해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말해집니다.
그러므로 오랜 고난은 세상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아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특성’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오랜 고난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오랜 고난으로 펼쳐갑니다. 예수님의 세상에 오림이 오랜 고난임으로, 고난 받는 예수님을 따름 또한 오랜 고난입니다.
세상에 고난은 조건적입니다. 나쁜 조건에 있는 누구나 고난을 겪습니다. 건강, 경제, 혹은 사회 신분의 문제는 조건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나은 조건을 위해 참고, 견디고, 또 인내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삶은 조건적으로 영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오랜 고난은 조건적으로 오지 않고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수반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름은 오랜 고난의 열매 맺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오랜 고난의 열매 맺음으로 펼쳐집니다.
성령님의 열매로 오랜 고난은 육체적 고통의 측면으로 생각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조건적 고난은 육체적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진다고 말해질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아져야 합니다. 세상의 조건과 관계되지 않는 고난입니다.
함께의 고난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유혹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으셨기에, 그들 또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사는 한,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으로 유혹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적 삶으로 혹은 영예로운 삶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 사람들의 뜻을 추구하는 삶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적용될 수 없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오랜 고난의 삶으로 불러집니다.
여기서 오랜 고난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피하려는 조건적 어려움이 아닙니다. 세상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없는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세상의 고난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랜 고난”이라는 용어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편 145:8)”라는 구절에 “노하기를 더디 함”이라는 관용구로부터 유래합니다. 여기서 “노하기를 더디 함”이라는 관용구는 대상을 향한 표현의 상호 작용의 양식이 아닌 그분 백성을 향한 그분의 함께의 양식입니다.
구약에 주님의 진노의 폭발에 대한 언급이 여기저기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분 진로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폭발하십니다. 이 배경에서 그분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으로 찬양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에게 참지 않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보시는 것이 그분에게 보이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세상 삶이 좋으면, 고난의 삶이 아닌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삶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고난의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오랜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이 펼쳐지는 양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만 고난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세상 현실에서 죽음에 직면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유래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길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로 가길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분명히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순응하는 데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에게도 고난이지만, 겟세마네 기도의 고난은 보통 사람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고난의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으로 서사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십자가는 단지 세상의 고난을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왔습니다. 그들의 고난은 세상의 고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에 맺어지지 않습니다. 즉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된 고난
성령님의 열매로 오랜 고난은,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생각되면, 분명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진행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타락된 세상은 말해질 필요 없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에, 타락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운행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을 따른 삶은 고난 받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영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영은 고난으로 인도를 따라 열매 맺습니다.
오랜 고난의 의식은 하나님의 뜻에 수반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고난의 의미 없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행복과 평행될 수 없습니다. 여기 구약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누리는 축복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보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없이 말해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고난 가운데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오랜 고난은 의도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개인이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참고 인내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을 위해 맺어지는 오랜 고난은 다릅니다. 개인은 그의 고난이 일시적이라고 전제합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오랜 고난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고난을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고난은 오랜 고난입니다.
세상의 행복이나 나음을 향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한, 지혜를 추구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은 세상의 행복이나 나음이 된다고 말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행복이나 나아짐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은 세상의 행복이나 나음이 아니기 때문에, 오랜 고난으로 불러집니다. 세상을 살면서 바라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오랜 고난을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영성을 떠나 말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오랜 고난을 바라지 않지만, 그것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이 점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출현에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열매로 세상에 맺어집니다. 그리스도인교 삶은 개인들의 노력의 결실이 아니지만,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그 열매는 오랜 고난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의 복음이 영적으로 서사되는 것은 이 점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서사될 수 없습니다. 개인은 십자가를 향해 의도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으로 서사됩니다.
성령님은 개인이 가길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지는 오랜 고난의 길입니다. 그 고난의 길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고난으로 맺어지는 열매는 세상에 평가되게 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하는 결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으로부터 야기되는 고난이 아닌
아버지의 영의 열매로 맺어지는 고난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고난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고난으로 극복하게 하옵소서.
고난의 삶이 기쁨으로 맺어지고,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파급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고난이 종말까지 맺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