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주제를 담은 2000년대 이후 일본 영화는 주로 환경 파괴로 인한 극한 재난 상황을 표현하거나, 인간이 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힘과 위로를 받는 치유를 표현해 왔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후쿠시마 50'(2020)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후자로는 한국에서 2018년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리틀 포레스트'(2015) 등이 있습니다.
영화 '아사코'(2019)는 주인공이 운명적인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거나, 삼각 로맨스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멜로 장르의 특징도 지녔지만, 개인적인 로맨스가 재난 이후 공동체에 닥친 믿음의 문제로 확장되거나 생태적 주제에 대한 은유로 의미가 확장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아사코'는 동일본 대지진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환경 파괴와 재난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를 주는 대신, 개인의 사랑과 믿음이 흔들리고 깨지는 은유 속에서 공동체적인 메시지를 줍니다. 전 지구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시스템이 중단된 지금, 환경 재난을 관계적 은유로 풀어내는 이 영화는 곱씹어 볼 만합니다.
영화 '아사코'(2019) 포스터.
'아사코'는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배경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땅이 흔들리거나 건물이 붕괴되는 등 지진의 직접적인 이미지는 간소화하고, 지진의 흔들리는 이미지를 관계의 이미지로 확장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바쿠와 료헤이는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외모가 닮았지만 성격은 다릅니다. 바쿠가 '자연'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료헤이는 '문명'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바쿠는 아사코를 두고 빵이나 신발을 사러 나갔다가 돌연 사라져 돌아오지 않거나, 오로라를 보고 싶다고 떠나거나, 바다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차를 멈춰 세웁니다. 처음 아사코에게 다가갈 때도 이름을 묻고는 대뜸 키스를 합니다. 자연적 성질에 충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말끔하고 성실한 도쿄의 회사원인 료헤이는 아사코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도 정중한 노력을 다합니다. 바쿠처럼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사코를 편안하게 해 주며 아사코에게 최선을 다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사코가 바쿠를 만난 장소와 대비되는 도쿄 도심의 공간적 특징, 바쿠의 이름 뜻은 '보리'인데 료헤이가 '맥주'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둘의 대비는 흥미롭습니다.
영화 속에서 지진은 료헤이가 아사코와 사랑을 시작하도록 해 주지만, 둘의 불안한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불안함은 바쿠가 가진 자연의 성질이면서 동시에 바쿠를 사랑했던 아사코가 갖게 되는 성질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바쿠가 아사코에게 다가가 키스할 때, 바쿠의 걸음을 비췄던 트래킹 쇼트는, 지진으로 일어난 인파 속에서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다가가 안길 때 아사코의 걸음을 비추는 쇼트에서 그대로 사용됩니다. 바쿠가 아사코에게 불안한 사랑을 뜻하는 지진과 같았다면,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불안한 사랑을 뜻하는 지진과 같습니다. 아사코가 료헤이와 사랑하면서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바쿠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것처럼, 료헤이는 바쿠가 찾아와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아사코에 대한 불안을 안게 됩니다.
지진은 문명을 흔들고 위협합니다. 영화는 땅이 갈라지는 지진의 자연 사건적 이미지는 간소화해 보여 주지만, 지진으로 교통수단이 마비돼 밤새 걷는 인파와 같은 사회 사건적 이미지를 상세히 보여 줍니다. 비인간 행위자인 지진은 인간을 흩어지게도 하고 모이게도 하며, 비인간 자연 사회에서 문명사회 속으로 침투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자연 사물의 행위성을 인간 세계 바깥이 아닌 문명 속 이미지로 그려 낸다는 점에서 자연 사물의 능동성을 능숙하게 번역해 냅니다.
지진은 재난 상황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의 정동을 남깁니다. 바쿠가 마침내 아사코를 다시 찾아와 료헤이를 떠나게 되는 사건은, 료헤이가 가슴 깊이 걱정해 왔던, 한번 일어나게 된다면 다시는 잊고 살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트라우마적 경험으로서 지진이 가진 정동을 표현합니다.
지진의 트라우마적 정동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능숙한 번역에 의해, 한 사람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 더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로맨스적 상처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로맨스의 경험에서 나아가, 국가적 혹은 지구적 재난 상황 이후 현실에서 더는 이전 시스템을 믿을 수 없게 됐다는 공동체적 믿음의 문제로 전면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오지만, 료헤이는 이미 아사코를 한 번 잃었고, 자신과 닮은 바쿠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돌아온 아사코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불안함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 불안함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국가적 재난 트라우마 속에서 일본 시민들이 느끼는 현재 시스템에 대한 불안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코로나19와 같은 현재의 전 지구적 재난 상황과도 공명합니다. 기존 시스템이 중단돼 더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언제 덮쳐 올지 모르는 불안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 영화가 마지막에 제시하는 이미지는 의미심장합니다. 폭우로 인해 범람하는 아마노강물을 바라보는 아사코와 료헤이. 료헤이는 강물이 더럽다고 말합니다. 바쿠가 나타나기 전 오사카에 함께 살 집을 구하는 씬에서 두 사람이 처음 아마노강을 볼 때는 영화의 시점이 쇼트/역쇼트로 표현되고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눕니다. 하지만 마지막 씬에서 두 사람은 역쇼트로 서로를 마주보는 대신, 서로의 옆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영화는 로맨스적 상황으로 은유하던 생태 문제를 로맨스적 해결로 끝맺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잡은 쇼트는 관객에게 마치 자연의 한 풍광처럼 보이며 영화가 끝납니다.
아사코는 범람하는 강물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상충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아사코의 시각은, 상실 이후 도전받는 믿음에 대한 생태적 대답을 뜻합니다. 문명적 시각으로 지탱되던 공동체는 자연의 언어를 번역해야 하는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아사코'는 영화가 가진 생태적 이미지들을 통해, 문명이 자연을 다스리고 극복하기보다 자연과 문명이 상호 침투하는 언어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아마노강을 바라보는 아사코와 료헤이. '아사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