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한지, 그 천년의 비밀을 뜨는 사람
무형문화재 다시 보기(6) - 문경 한지장 김삼식씨를 만나다 ①
곽교신(iiidaum) 기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인쇄물
1966년 10월,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에서 작은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 폭 8cm 길이 620cm의 긴 종이를 말은 것으로 한지에 목판으로 찍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었다. 이 다라니경은 현존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습기 찬 석탑에서 1200년을 지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종이 질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다.
서양문명의 자존심인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찍은 '42행 성서'는 부식으로 전시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고려의 종이에 찍은 '직지'는 지금도 책장을 넘길 수 있으며, 신라의 다라니경은 아직도 전시가 가능한 상태이다. 쿠텐베르크 성서는 약 550세, 직지는 628세, 다라니경의 나이는 최소 1200세이다.
천년을 사는 한지의 신비로운 비밀의 열쇠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한지를 '창호지' 정도로 가벼이 불러도 좋은가.
▲ 한지제조 공정 중 절정의 기술을 요하는 물질하기. 이 순간 장인의 감각은 1g 단위의 차이까지 팔 동작에서 느낀다고 한다. 정밀한 무게 감각은 균일한 종이 두께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아름다운 '창작 한지'
먹고 살아야 종이도 뜬다. 무조건 전래 방식으로 한지를 뜨라는 것은 한지 업체들에게 종이뜨기를 그만두라는 말과 같다. 많은 한지장들이 수지타산이라는 현실에 묶여 변형된 재료와 생산 방식을 따르고 있어 자연히 종이의 질이 떨어지고 있으며, 저질 저가의 수입 종이도 넘친다. 서울 인사동에선 한 장에 팔백원부터 이만여원까지의 종이들이 모두 '전통 한지'로 팔린다.
이런 판에도 많은 한지장들이 새로운 기법과 아이디어로 국산이든 수입이든 오로지 순수하게 닥나무만을 원료로 떠내는 '한지'는 그 예술성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작품'들이 많다.
노(老) 한지장들은 지금도 '조으'라는 옛 말을 상용어로 쓴다. '종이'는 많으나 '조으'는 드문 이 난장판에서 우리의 소중한 재래식 한지 제조 기술은 거의 숨을 거두어가고 있다.
문경골의 한지 뜨기
3개월이 넘게 재래의 방법으로 종이를 뜨는 곳이 있나 수소문하였다.
▲ 양심, 진실, 전통 세 가지를 지키겠다고 '삼식지소'라 이름 지어 작업장 입구 머리에 붙였다.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문경한지의 한지장 김삼식(63) 장인은 54년 전 9살 이후 "스승에게서 배운 고대로만 종이를 뜨는" 사람으로, 기자가 확인한 바로는 가장 전통 방식에 가깝게 종이를 뜨는 사람이다. 특유의 제지 기법이긴 하나, 오로지 이 분만이 전통 한지 제조법을 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성소다가 덜 빠진 펄프를 씹었다가 혀를 덴 일도 있었지만 기자가 종이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하고 냉정한 방법은 종이를 먹어보는 것이다. 김 장인의 한지가 이에 씹히는 첫 순간에 기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종이는 이전에 먹어본 어느 종이와도 달랐다. 질기면서도 부드럽고, 짧은 듯 긴 전통 한지 섬유의 특질이 그 종이엔 모두 살아 있었다. 유연한 듯 강한 한지의 특질은 우리 민족성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지만으론 생활이 빠듯해 농사와 한우 치기를 겸하면서도 좀더 편리한 방법, 쉬운 재료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스승(고 유영운. 김 장인의 매형)에게서 배운 전래의 방식 그대로 '조으를 뜨는' 그의 고집은 일종의 신념이었다. 닥 펄프를 뜨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을 뜨는 그의 종이가 탁월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 생닥 삶기. 이렇게 쪄내는 것을 '한 솥 찐다'고 하고, 보통 5~6 솥을 쪄서 일년을 쓴다. 화력이 좋아 껍질 벗긴 닥나무를 때는 데, 8시간을 계속 때야 한다.
지난 해 12월 22일 밤, 급한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예보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닥 삶을 채비를 하라'고 하셨다는 김삼식씨의 아들 김춘호씨의 급한 연락이었다. 대량의 닥을 흙가마로 삶는 일은 요즘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일정을 제치고 달려갔다.
김 장인의 흙가마는 증기를 내기 위한 물을 담는 부분만 철판이고 나머지는 모두 흙이 재료다. 흙으로 만든 거대한 욕조 모양으로 키 높이보다 약간 높게 사방 5m의 정방형이다. 오랫동안 쓰던 옛 가마가 낡아서 지난해 새로 지었다는데 단순히 흙과 돌을 쌓는 일이 아니라는 아들의 말이다.
오전 6시부터 땐 불을 무려 8시간 계속하고 오후 2시 반에 껐다. 한 시간쯤 뜸을 들인 후 3시 반에 세 겹의 비닐 커버를 벗기니 훈김이 몰아친다. 그 냄새가 고구마 삶는 냄새와 아주 흡사하여 일부러 가까이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렇게 한 번 쪄내는 것을 '한 솥 찐다'고 한다는데, 보통 500관(2000Kg) 정도씩 5~6회를 찌어 일 년 쓸 닥을 채비한다.
재래식 닥삶기는 밭에 큰 구덩이 두 개를 파고 쪄내는 방식이지만, 요즘은 그런 방식으로 닥을 삶는 곳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벗긴 닥나무 껍질의 검은 외피를 제거하고 연두색 부분(청태)도 긁어내어 하얀 기초 섬유(백닥)를 만드는 매우 고된 과정이다.
한지 제조 전 과정이 힘들지만 이 과정이 가장 싫다는 아들 김춘호씨의 말. 종일 일해도 혼자 10Kg 벗기기가 고작이다. 고된 노동이기도 하고 청태를 벗기면 펄프 양이 줄어 종이 수확도 적으므로 많은 한지 제조자들은 검은 겉껍질만 벗겨내고 표백제로 표백하지만 김 장인은 "하얗도록 청태를 빡빡 긁어내라"고 배웠다고 말한다.
스승에게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할 뿐이라는 김 장인의 말은, 전통의 고수가 매우 단순하고 쉬운 이치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 유명한 한지 업체를 방문했을 때는 작업장 전체에서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절대로 화학 표백을 않는다는 김 장인의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이 생산된 종이를 보면서 기자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챘다.
▲ 재 만들기는 중요한 일이다. 한 해 쓰려면 큰 자루 10자루 정도가 필요하다.
메밀대와 콩대를 태워 재를 만든다. 가장 좋은 재는 메밀대를 태운 것이나 필요량을 확보하기가 힘들어 재를 만들 목적으로 메밀을 심기도 하고 가을에는 이리저리 메밀대를 구하러 다닌다.
메밀대는 속이 대나무처럼 비어서 태운 재의 양이 매우 적다. 한 해 동안 쓰려면 농협에서 나온 40Kg들이 수매자루로 10자루의 재가 필요한데 한 트럭 정도의 메밀대를 태워야 그 정도의 재가 나온단다.
메밀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진 물을 가라앉히고, 그 물에 청태를 벗긴 흰 백닥을 넣고 2~3시간 삶는다. 천연 잿물 대신 양잿물(가성소다. NaOH)을 쓰기도 하나 김 장인은 철저히 천연 잿물만을 사용한다.
잿물에 쪄낸 닥에서 잡티(검은 겉 껍질의 잔존물)를 뺄 때 김 장인은 근처 냇물에서 세차게 흔드는 방식을 쓴다. 잡티를 뺀 후 맑은 물에 2~3일 충분히 우려낸 닥을 넙적한 돌에 얹어 단단한 자작나무 방망이로 곤죽이 될 때까지 쳐댄다. 방망이로 자작나무를 쓰는 것도 김 장인의 노하우다.
역시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과정이다. 잘 쳐댄 닥죽은 특유의 빛깔과 미끈거리는 감촉을 낸다. 사진의 돌('딱돌'이라 부른다)은 김 장인과 40년을 같이 한 돌로 아들 김춘호씨에게 물려질 것이다.
▲ 물질하기
충분히 쳐대어 곤죽이 된 닥죽과 '닥풀'을 맑고 찬 물에 같이 풀고 "팔에 쥐가 나도록" 나무 주걱으로 천여 번 휘젓는다. 천연 잿물로 삶은 것은 양잿물로 삶은 것보다 섬유가 잘 안 풀려 젓는 수고가 열 배는 더 든다. 전통을 지켜내는 과정은 이래저래 고행의 연속이다.
닥풀은 이 과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첨가물인데 닥풀로 무엇을 쓰느냐는 종이의 치밀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섬유 안정제'다. 닥풀을 섞지 않으면 섬유가 자꾸 물 밑으로 가라앉아 작업도 어렵다. 닥풀의 원료로는 '황촉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나오는 끈적거리는 액을 주로 쓴다.
종이 섬유를 뜨는 발은 결이 고운 대나무 발인데, 어떤 발을 쓰는가도 종이의 성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물질 순간에 팔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생산하려는 종이의 무게를 1g단위까지 예측하여 균일하게 맞춘다.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며 오로지 세월의 지혜가 쌓여야 하는 한지 제조 기술의 절정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사각통은 맘먹고 돈을 들여 춘양목을 두껍게 켜서 짠 것으로, 작업 내내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좋은 종이를 위해 김 장인은 여름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첫 추위가 올 때 닥을 삶고 추위가 가시며 물질을 시작하는 전통한지의 제조는 철저히 자연의 순환에 의존한다.
이른 봄 얼음이 풀리며 녹은 물을 쓸 때 최고의 종이가 나오는데, 그 물의 온도는 최적의 종이를 위한 물 온도인 영상 4~6도에 거의 일치한다.
▲ 말리기
떠낸 종이를 12시간쯤 돌로 눌러두었다가 일일이 한 장씩 떼어 가열된 철판에 붙여 말린다. 철판 가열에는 장작을 쓴다. 이 건조 장비는 어느 업체든 같은 모양인데 가스를 써서 가열하면 종이의 감촉이 다르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옛 문헌에는 고운 흙벽을 가열해 종이를 붙여 말렸다는 기록도 있다.
▲ 김삼식 장인의 종이
김 장인의 작품으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식 같은 종이". 가장 오른쪽이 그가 자랑하는 큰 사이즈의 '대(大)발 종이'로 '물도침'(뜨자마자 통을 발에 굴려 물을 빼는 전통의 방식)한 종이이다. 종이의 질감이 초보자가 만져도 확연히 다르다. 맨 왼쪽은 약품표백을 한 종이로 다른 곳에서 기자가 샘플로 얻어서 가지고 다니던 종이로 흰색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종이는 시각적으로 거칠다. 이 점은 김 장인의 종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결정적인 요소이지만 김 장인은 그렇게 말하는 이가 종이를 가져오면 돈을 다시 내어주고 종이를 되받는다. "조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조으가 전통의 조으라고 강조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내 조으를 아는 사람들이 날 찾아주면 그기 행복한기라요"라고 한다.
주변에 흔한 복사지는 30초 정도 씹으면 죽 같이 갈려버린다. 기자는 김 장인의 한지를 씹다가 결국 뱉어냈다. 씹어보는 방법이 한지 판별의 전부는 아니지만, 씹을수록 단단히 뭉치는 그의 종이는 '잘못 씹으면 이가 부러지는' 전래 한지의 특질을 그대로 지녔다.
그러나 한지를 쓰는 전문 작가들 상당수는 그의 종이를 '나쁘다'고 한단다. 그들이 접해본 종이는 거의 양지에 가까운 한지였으니, 붓이 흐르는 감각이나 먹이 스미는 감각이 지금까지 접하던 종이와는 영 다른 김 장인의 종이는 당연히 '나쁜 종이'였을 법하다.
아들 김춘호씨가 아버지의 대를 잇겠다고 했을 때, 김 장인은 무조건 4년 이상 도시생활을 할 것을 명하고, 편한 세상의 맛을 보고 나서도 종이 뜰 생각이 나거든 들어오라 했단다. 대학(전자공학과)을 마친 김춘호씨는 아버지이자 스승께서 내건 조건대로 도시 생활 딱 4년만에 종이를 뜨겠다고 다시 나타났다. 잘 나가던 직장을 접고 험한 종이 뜨는 일을 하겠단 아들을 붙들고 김춘호씨의 어머니는 울며 말리셨단다.
김춘호씨는 아버지의 염려보다는 훨씬 진지하게 전통 한지를 지켜내는 일의 중차대한 의미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다고 기자는 느꼈다. 지난 1월 1일 새벽에 혼자 소백산에 올랐다는 김춘호씨의 다짐이 궁금하다.
한지의 X세대, '창작 한지'
무형문화재 다시보기(7) - 창호지이기를 거부한 한지
곽교신(iiidaum) 기자
한지는 그저 창호지가 아니다
▲ 실험을 위해 복원된 세계 최초의 조선 온실.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 채광창으로 썼다.
한국의 원예학자 전희 박사가 200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26회 국제원예학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대회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 학계에서 최초의 인공난방 온실로 인정하던 독일의 온실보다 170년이나 빠르고, 자연보온 온실의 개발국인 영국보다는 무려 240년이나 빠른 1450년경에 조선에서 온실을 만들었다는 발표였다.
조선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적힌 그대로 온실을 짓고 책에 쓰인 방법대로 난방을 하고 실험한 결과, 550년 전에도 한겨울에 채소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보고는 학계 상식으론 놀라운 일이었다.
온실의 주요 기능인 채광창의 재료로 들기름을 먹인 한지를 쓴 것은 판유리가 없던 시절로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또 그건 한지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지에 기름을 먹이면 종이는 얇아지고 마치 얇은 비닐처럼 낭창거리면서 투명도가 높아져 채광성이 우수해진다. 또 한지의 자연 통기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우린 한지를 창호지와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지를 창호지에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 생생한 예가 바로 세계 최초의 온실을 지으며 채광창에 한지를 응용한 사실이다.
한지의 새로운 수요 창출을 위한 노력들
▲ 떡살로 제작한 입체문양 한지. 한지 공예나 인테리어 소재로 응용되는 이러한 창작 한지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특허권을 신청 중. 충북 괴산 S한지 작품.
우수한 종이로서의 한지를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는 없다. 전래 한지의 제조 기법과 우수한 지질의 전통은 재료 구입 단계부터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원료인 닥나무(국산)의 고갈, 한지 수요의 현실적 한계, 제조업체의 영세성 등 한지를 둘러싼 여건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최근 한지의 우수성에 주목한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저질 수입한지가 전통 한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며 시장 가격도 교란시키고 있어 만만치 않다.
질기고도 부드러운 한지를 채광성이 높아지도록 변형을 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온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형 한지를 온실에 응용한 선조들의 이런 노력은 다행스럽게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우연히 발생한 작업상의 실수에 착안, 1년여 시행착오 끝에 2002년에 개발된 '물방울 문양지'. 지난 1월 20일에 특허 인증 확정. 벌써 유사품이 나돌고 있으나 아직 본격 시판에 들어가진 않았다. 괴산 S 한지 작품.
▲ 능화판(고서 겉표지 인쇄용 목판)을 이용한 입체 문양지. 한지 공예재료로 쓴다.
▲ 와당문 입체 문양지. 흡음 한지. 미적 기능이 뛰어난 방음재.
어려운 여건인데도 한지장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한지의 발전과 새로운 용도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 종이들은 한지 벽지, 특수 화선지 등의 기초적인 변신 외에도 각기 입체문양지, 물방울한지, 투명문양지 등의 고유 이름을 달고 전통의 바탕 위에서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다.
한지 천년의 미래를 위해
현대 창작 한지는 단순히 종이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하나 장인의 혼이 들어간 그 작품들은 2차 가공 없이 그냥 액자처럼 벽에 걸어놓아도 좋을 만큼 품격 있는 예술품들이다.
▲ 한옥 창살문을 그대로 응용한 특수 문양지. 발을 엮는 실부분에 펄프가 덜 얹히는 원리를 이용하여 개발.
▲ "장인의 웃음"이란 이름의 문양지. 종이를 뜬 후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아예 종이를 들 때 문양이 생긴다. 이 부분 특허권을 가진 가평 J 한지 작품.
▲ 기능성 한지로 만든 옷. 오른쪽은 물방울지. 왼쪽은 반건조 상태에서 때 구긴 후 완전 건조시킨 주름지. 파티복으로 실제 사용했던 옷. 의상 디자인 윤계섭.
한지를 취재하면서 내내 고민한 것은 '전통 한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제조법과 어떤 종이를 전통으로 불러야 하는가다. 분야만 다를 뿐 다른 무형문화재를 취재하면서도 늘 따라다니던 어려운 화두였다. 과연 전통이란 무엇인가.
제조자, 소비자, 우리 전통 문화유산을 그리워하는 국민들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옛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은 답습이지 전통의 유지가 아니며, 옛 것의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는 전통의 사이비 창작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또 방치되다시피 했던 지금까지의 한지 관련 정책도 현실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진통은 모든 새로운 탄생의 통과의례이다. 최고(最古)의 종이를 가진 나라에서 최고(最高)의 종이가 나올 수 있길 기대한다. 신라의 천년이 담긴 한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듯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담은 한지는 또 천년 뒤 후손에게 우리의 모습을 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