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
1.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
(1668-1715)
1668년에 해남 연동에서 윤선도의 증손으로,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젊은 시절을 서울에서 살았으나 말년에는 해남으로 낙향했다.
증조인 윤선도는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로 서인과 다투다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갔다. 그의 부인은 이수광의 증손녀이고, 가까이 사귄 친구도 옥동 이서와 그의 동생 성호 이익이다. 말하자면 그는 정치적으로 남인 계열이었다. 그의 아들 윤덕희도 화가이고, 손자 윤용도 화가이었다.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못했다. 때문에 당쟁에 휘말리지는 않았다.(숙종조의 장희빈을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아주 심했다.)
공제는 친가나 처가가 모두 학문적으로 유명한 집안이었으므로 사대부의 교양을 고스란히 지녔을 것이다. 이수광, 이익 등의 영향으로 실학 사상도 있었으리고 본다.
윤두서가 한국 회화사에 남긴 업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남종문인화를 적극 도입했다.
2. 속화를 그리므로, 한국화에 사실주의를 구현했다.
당시의 조선 화단은 절파가 유행했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이때 오파의 화풍을 도입했다. 중국에서는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여 남종문인화를 목판본으로 출판했다. 대표적인 것이 ‘고씨화보’이다. 또 ‘당시화보’도 있었다. 윤두서는 기존 화단의 누구와도 사승관계를 맺지 않고 화보에 의하여 스스로 공부했다. (공재의 그림은 상당수가 화본풍이다.)
공재는 인물화와 말 그림에도 명성이 높았다. 공재의 유작에는 산수화보다 말 그림과 인물화가 더 많다. 말과 인물을 함께 그린 그림에 명작이 많다.
<해남윤씨가 전고화첩 두 권>
공재의 그림은 주로 화첩에 실려 있는 소품이 전해진다. 산수, 인물, 풍속, 도석, 영모, 화조 등 다양하다. 산수는 고씨화보와 당시화보의 방작이 많고, 인물화는 섬세하다.
풍속을 그린 것도 있다. (속화), 조선 미술사에서는 이 속화를 주목한다. 조선미술사에서 선비나 사대부가 아닌 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공재 회화를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속화가 사실성에서는 관아재 조영석, 김홍도나 신윤복보다 떨어진다. ‘돌깨는 석공’은 현장감이 느껴진다.
‘노승도’를 공재의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 미술사가도 있다.
공재는 화가로 산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를 두지는 않았다.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이 공재의 화풍을 이었다.
* 남태응의 ‘청죽화사’에서 윤두서 회화에 관하여 많은 자료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