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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의 노력 | ||||||||||||||||||||||||||||||||||||||||||||||||||||||||||||||||||||||||||||||||||||||||||||||||||||||||||||||||||||||||||||||||||||||||||||||||||||||||||||||||||||||||||||||||||||||||||||||||||||||||||||||||||||||||||||||||||||||||||||||||||||||||||||||||||||||||||||||||||||||||||||||||||||||||||||||||||||||||||||||||||||||||||||||||||||||||||||||||||||||||||||||||||||||||||||||||||||||||||||||||||||||||||||||||||||||||||||||||||||||||||||||||||||||||||||||||||||||||||||||||||||||||||||||||||||||||||||||||||||||||||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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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자로 명예회장이었으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 회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영웅시대》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 활동으로는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생애[편집]생애 초반[편집]출생과 성장[편집]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에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8세에 통천송전소학교(通川松田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졸업하였다.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이며, 그의 정식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유일하다.[2]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1930년부터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1931년 가출에 성공한다. 고향을 떠난 후[편집]1931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1932년 세 번째 가출 때는 부친이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네 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20세인 1934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해 일했다. 이 일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1936년 6살 연하의 변중석과 결혼하였다. 장부를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신임을 받았다.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해 쌀가게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의 주인이 되었다.[3]쌀가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다. 기업 활동[편집]자동차 공장 설립[편집]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4]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수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현대그룹 설립[편집]해방과 한국전쟁[편집]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창업 전반기와 전후 복구 사업[편집]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2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 계열사인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경제건설사업 참여[편집]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하여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으며, 이어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나 2001년 해체하였다. 사회 활동[편집]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ㆍ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ㆍ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ㆍ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올림픽 유치 추진 활동[편집]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생애 후반[편집]정계 입문 초기[편집]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ㆍ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출마[편집]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방북과 금강산 개발[편집]그러나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출처 필요]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죽음[편집]2000년 5월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정주영은 2000년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부인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후 자택에서 요양중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뒤인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87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아내 역시 입원중이었다. 사후[편집]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명예 박사 학위[편집]
연보[편집]
서훈[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가족 관계[편집]
저서[편집]
정주영을 연기한 배우들[편집]드라마[편집]
기타[편집]1992년 11월에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의 한사람인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풍자할 때 그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풍자를 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에도 14대 대통령 선거를 전에 두고 다른 대통령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주석[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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