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먼저 시 한 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밤
밤은 편안하옵니다. 옥에서 풀려 남 몰래 출옥한 사람의 오랜 휴식처럼 편안하옵니다. 아무도 곁에 없어도 한없이 고적해도 있는 것이라곤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어도
생존하는 자들의 고독처럼 밤은 그저 편안하옵니다. 들리는 것이 영원, 생각하는 것이 영원, 소망하는 것이 영원,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여 소곤소곤 시간을 이어 가는 깊은 정적뿐이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숙명은 남고.
이것이 요즘 나의 밤의 정경이옵니다. 6월 10일, 안성읍에 있는 안성여자중학교에 가서 문학 강연을 했습니다. 안성여자중학교는 1943년, 그러니까 해방 전에 세워진 오랜 세월을 가지고 있는 안성에서 제일 가는 여자 중학교라 하겠지요. 오래간만에 접하는 소녀들, 참으로 맑고, 밝고, 청순한 찔레꽃 같은 소녀들이 자욱히 앉아서 내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들이 자욱히 앉아서 내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이 소녀들이 자라서 안성을 이어가는 빛나는 어머니들이 되겠지요. 고향을 빛낼.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지구는 어디나 타향이자 고향이겠지만, 자기가 태어난 곳의 흙은 정답지요. 언젠가는 사라지니까. 실로 이 세상은 가숙(假宿)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항상 아름답게 사시길. (199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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