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피아노 연주의 기본적 상식인 손가락에 되도록 부담을 주지 않고 근육을 이완시켜, 팔의 중량으로 연주하는 것의 중요성은 이미 리스트 시대부터 피아노 주법문제를 해명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보는데, 이 결실을 피아노 교육학자인 크를 라이머와 함께 이론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바로 발터 기제킹이다. 그는 라이머와 함께 《현대 피아노 연주법》(1930)이라는 저서를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연주가로서 자기와 라이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실천해 보인 피아니스트이다.
기제킹은 1895년 11월 5일 리옹에서 태어나, 1956년 10월 26일 런던에서 작고한 독일의 대피아니스트로서, 양친이 모두 독일인인데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년 시절은 주로 프랑스에서 지냈다. 1911년 하노버 시림 음악원에 입학하여 카를라이머에게 사사했다. 1920년 대에는 현대음악을 주로 연주하여 신즉물주의 연주가라는 말을 들었다. 1926년 미국에서도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가 정말로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1937년 뉴욕 필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했을 때였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으 세력권내나 중립국에서 연주를 계속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이 찍혀 연주도 1949년 미국연주시 연주도 못한 채 귀국하기도 했었다.(그는 1947년 이미 무죄가 확정되어 국외에서 연주를 시작했다.)하지만, 1953년 다시 방미했을 때는 압도적인 성공과 환영을 받았다.
그는 많은 연주, 녹음 스케줄을 정력적으로 수행했을뿐 아니라, 또한 초인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레코드 녹음도 암보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초인적인 기억력 덕분인지 그의 스케줄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활동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는 1951년과 1955년에 두 번의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특히 두 번째 사고에서 그의 부인은 즉사를 했었다. 이 때의 부상은 회복은 했지만, 그는 이듬해 1956년 런던에서 감염으로 쓰러져, 10월 26일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는 어떠한 피아노로든지 그지없이 절묘한 음색과 음향을 표현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였고, 나비를 사랑하여 나비류의 채집과 분류에 열중하였으며,등산가였고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으며, 금연주의자였으며, 찰학,역사 및 전기를 즐겨읽는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음악을 무심하고 낙천적이며 직접적으로 즐기는 대가의 풍모를 지닌 진정한 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