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비구 무념
- 실존주의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
(Existence precedes essence)
여기서 본질이란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음에 대한 답, 즉 존재의 본질을 말한다.
서양에서 오랫동안 존재의 본질은 “신이 나를 창조했다.”라는 것이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창조론의 허구가 들어났고, 그것을 대체할 어떤 논리가 마땅히 없던 그때 데카르트가 나섰다.
“누가, 어떤 것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는지 그건 알 수 없어. 그런데 나에게는 생각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니 그 생각하는 자, 그 자체가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야.”
그는 이 논리로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
“내가 여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그렇다면 굳이 내가 존재의 근원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본질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 던져졌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나가면 되는 거야. 존재가 본질을 앞서는 거야.”
이렇게 실존주의가 시작된다.
- 현대인은 모두 실존주의자
종교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도들은 “신이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주셨다.”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이 ‘존재가치를 위탁받는 자’임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점에서 그들 역시 실존주의자다.
매일 신도들을 만나 법문을 하고,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고, 심지어 가난한 나라에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종교인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점에서 그들도 역시 실존주의자다.
힘들고 불쌍한 나라돕기를 하면서 정작 본인은 고급호텔에서 고급음식을 먹으며 여행한다면, 그 봉사활동 자체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몸짓에 불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순수하지 않은 봉사활동이 그가 순수한 실존주의자임을 증명한다.
불교의 주지, 조실, 총무원장, 종정까지 모두가 기를 쓰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애쓴다.
그러므로 그들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실존주의자다.
유물론자는 브르조아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한다고 생각하기에 투쟁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일반인들도 다르지 않다.
돈으로, 명예로, 지위로, 권력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 이 세상 모두가 실존주의자다.
- 실존주의 또 다른 얼굴, 무위자연
실존주의의 반대편처럼 보이는 것이 도교의 ‘무위자연’이다.
“굳이 그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투쟁하고,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다투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불합리하면 불합리한 대로, 무의미하면 무의미한 대로, 비오면 비오는 대로, 바람불면 바람부는 대로, 막히면 돌아가고 물흐르듯이 살아가면 그뿐이야.”
무위자연은 실존주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실존주의다.
또 다른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한가롭게 누워 바다를 바라보며 낚시를 하는 어부에게 부자가 말했다.
“왜 더 열심히 일해서 배를 여러 대 사지 않습니까?”
“배를 여러 대 사서 무얼합니까?”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거지요.”
“부자가 되어 무얼합니까?”
“경치 좋은 해변에 누워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겁니다.”
“지금 내가 정확히 그러고 있지 않소.”
앞의 부자가 서양의 실존주의라면 뒤의 어부는 도교의 실존주의다.
열심히 살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과, 여유와 한가함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은 결국 하나다.
- 불교와 실존주의
불교에서는 마음의 행위 자체가 실존주의로 본다.
탐욕: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행위다.
분노: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저항하는 행위다.
어리석음: 충족되지 않는 감정을 상상속에서라도 채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행위다.
마음의 활동, 그것이 곧 실존주의다.
마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애쓴다.
마음이 대상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유튜브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생각에 잠겨 있거나, 색성향미촉법을 한시도 벗어나지 못한다.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부지런히 애쓰는 자. 그것이 마음의 활동, 상카라(행)이다.
- 불교의 깨달음과 실존주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내면의 실존주의자, 그 행위자(행)를 무너뜨리고 제거하려는 노력이 곧 수행이다.
내면의 실존주의를 가라앉히는 것이 사마디이다.
그 내면의 실존주의를 완벽하게 놓아버림, 소멸, 멸진이 도와 과이다.
그 내면의 실존주의자가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