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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거역한 이스라엘의 죄악상
사도행전 7:39~43
오늘 본문 말씀은 스데반 집사가 유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의 최고재판 및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의 신앙관을 명백히 설명하는 변론 중 일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 된 이유는 그가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인데, 스데반 집사는 긴 변론을 통하여 그가 모세를 얼마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존중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의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자로 세운 모세를 도리어 대적하고 배반하였던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가 그토록 자기들은 모세를 잘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스데반을 모세를 거역한 자로 몰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도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모세를 거스르고 율법을 위반하고 있는 짓을 하고 있노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주장하며 조상들로부터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고 모세에게 순종하며 그의 전해준 바 율법을 일점 일획조차 다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 조상적부터 모세를 거역하는 악한 습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스데반 집사는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9절로부터 41절까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역하여 악을 행한 것을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39절로부터 4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여기서 스데반 집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맹세하고 언약을 맺은 직후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간 직후에 우상 숭배의 중대한 죄악을 범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 위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중인데, 백성들은 그 새를 못 참고 아론에게 몰려와서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니 우리에게 신을 만들어내라고 압력을 넣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며 절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거역입니다. 지금 산 위에는 신비한 구름이 감돌고 있고, 얼마 전만해도 하나님께서 친히 영광 중에 그 산에 강림하여 번개와 불과 구름과 흑암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위엄찬 목소리로 말씀하심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말고 모세를 통하여 말씀해달라고 간청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목소리를 들을 때 뼈가 떨리고 오장이 녹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대신에 한낱 황소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신이라고 그 앞에 엎드린 것은 좀 전에 언약식에서 맺은 두 번째 계명인 어떤 우상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반역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빨리도 변질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머물 때에 그들이 우상 종교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애굽에는 수많은 우상 숭배, 잡신 숭배, 마술 행위, 잡다한 종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피스 우상 숭배였습니다. 아피스 우상은 큰 황소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아피스 황소 신은 다산과 창조의 신으로 추앙되어 섬겼습니다. 황소 신 숭배는 그 지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앗수르 제국에서도 황소 숭배 조각이 남아있고 지금까지도 저 인도 지역에서는 소를 신성시하는데, 이것도 아피스 숭배와 그 정신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 있으면서 황소 신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내산에 도착한 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강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그 음성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가 잠시 산위로 올라한 틈이 보이자마자 곧장 이렇게 타락한 불신앙이 타올라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신 앞에서 열광적으로 춤을 추면서 엎드려 절하며 먹고 마시는 반역 행위를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 금송아지 우상 숭배의 악만 행했겠습니까?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모세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수많은 죄악들을 범하였습니다.
먼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물이 모자라도 엄청 원망 불평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모세에게 달려와서 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이 광야에 끌고와서 자기들을 이렇게 죽일 셈이냐고 원망하곤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나라는 하는 하늘의 천사들이 먹고 있는 음식을 아침 이슬과 함께 매일 내려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한번도 배 고픈 적이 없게 해주었으나 그들은 말하기를 애굽에서 늘 먹던 고기가 없고 생선도 없고 오이도, 참외도 부추와 파와 마늘도 없다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해주고 메추라기를 바람을 보내어 광야의 그들 진영에 내려주어서 한달 동안 실컷 고기를 먹게 해주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가리워 주시기도 하셨는데도 그들의 불평 불만은 쉬지 않았습니다. 하도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진영 끝에 불을 보내어 진영이 타들어가므로 그들은 급하니까 모세를 찾아와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불이 꺼짐으로써 잠시 원망을 멈추는가 싶더니 또 다시 백성 중 일부가 탐욕을 품고 원망하니 다시 울면서 불평하곤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에돔 땅을 둘러서 가나안으로 가게 되니까 길이 좀 멀어지니까 이스라엘은 또 다시 길이 험하다고, 길이 멀다고 원망 불평을 또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광야에서 거주하던 불뱀들이 나타나 그들을 물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죽어가는 자가들이 많이 생기니까 그 때서야 불평을 멈추고 모세에게 달려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수기 21:7)
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놓으니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놋뱀은 훗날 인간의 모든 죄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과 영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하늘과 땅 사이에 저주 받아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4,15)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원망과 불평으로 인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들게 하여 보게 하였던 장대에 매달려 하늘과 땅 사이에 저주받은 모습의 놋뱀은 죄와 허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보면 멸망에서 건져지고 영생을 얻게 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도 늘 원망 불평합니다. 그래서 그 죄 값으로 삶의 환경에 불이 붙어 살라지기도 하고 뱀에 물려 독이 올라 퉁퉁 부어 죽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징계하시면서도 피할 길을 내시고 용서해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시곤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인생 광야 길에서 망하지 않고 보존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시절에 범한 죄악들을 생각해보면 우상 숭배의 죄와 원망 불평의 죄 말고도 다른 죄악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모세를 대적한 반역 사건도 있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끈 지 수 년이 지난 어느 날인데, 레위 지파의 한 족장인 고라는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주동이 되어 당파를 만들어서 모세와 아론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각 지파의 지도자 격인 250명의 인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무리를 지어 모세와 아론에게 찾아와 이렇게 따졌습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수기 16:3)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의 목자로 세웠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십계명 돌판을 받아 전해주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려놓고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내려고 간절히 기도한 모세,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을 더 이상 자기들 위에 지도자로 둘 수 없다고 거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가 자기의 주인이 되고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배교 행위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 동안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수고하고 헌신했던 모세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여 그 주동자들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그의 가족을 땅을 갈라 한순간에 삼켜 죽였고 250명의 협력자들 역시 불에 살라 타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할텐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크게 분노한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들은 떼로 몰려와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라고 말하면서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 위 구름 가운데 나타나서 모세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고 하시면서 회중을 멸하시려고 염병을 내리셨습니ᄃᆞ. 그러자 모세가 급히 아론에게 명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향을 피어 올리라고 명함으로 아론이 달려가서 회중 가운데 서니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아론이 속죄함을 인하여 간신히 질병과 사망의 천사가 멈춰 섬으로써 염병이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염병으로 죽은 자만 만 사천 칠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그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하고 도전하기를 무모하게 계속했던 것입니다. 전도서 5:2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하늘만큼 높으시고 하늘만큼 거룩하시고 온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시요 땅과 바다에 사는 저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만드시고 기르시기에 능할 만큼 능력이 심히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세상 역사를 그의 깊으신 뜻을 따라 다스리시며 그의 공의를 실현하시며 악을 마침내 멸하시고 그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가시는 일에 있어서 누구도 측량할 수 없이 깊고 깊은 신비를 가지신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지존하신 그에게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따질 자가 있습니까? 그가 결정하신 바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으며, 그가 구부려놓으신 것을 누가 감히 곧게 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자기 눈앞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행하시는 모든 일을 체험하고도 이렇게 정면으로 도전하며 반역을 꾀하고 고집을 부렸으니,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악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세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코앞에 둔 모압 평지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를 앞두고 백성들에게 유언처럼 가르쳐준 신명기 설교 중에 이 말을 반복하여 그들에게 새겨주려 했습니다.
신명기 9:6,7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9:13 말씀에서도 모세는 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9:2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어지는 신명기 10:16 말씀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교회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많은 기사와 표적을 눈앞에서 보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목을 곧게 하고 늘 거역하곤 하였던 교만한 심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광야 시대만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선 후에도 그들은 수많은 반역을 하나님께 행하였으니, 한 예만 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 제 1계명에 불순종하고 온갖 잡신을 끌어들여 섬기곤 했습니다. 열왕기하 21장에 보면, 유다 백성들이 범한 우상 숭배의 죄악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들은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고 하늘의 일월성신들을 경배하여 섬겼고, 예루살렘 성전에 일월 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으며 자기 아들들을 몰렉 신상 위에 놓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였고 점을 치며 마술을 했고 점쟁이들과 굿을 하는 자들을 찾아 길흉을 물어보았습니다. 에스겔서 8장에도 선지자가 영으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들여다보니 성전 안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을 만들어놓고 벽에 그려서 섬기고 있었으며 그 성전에서 유다의 여인들이 모여 다산의 남자 신 담무스를 향하여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 나라에 팔아넘겨 그 백성들이 산지 사방으로 끌려가버렸고 남 유다 왕국도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수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공격당하고 파괴되고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였던 그 마음의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우리 모세가 예언하였던 그 선지자 마지막 선지자로 이 세상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참 진리와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증거해주셨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보다 더 많고 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시며 기이한 진리의 말씀을 알기 쉬운 비유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을 보고서도 그들은 눈으로 볼수록 완고해졌고 귀로 들을수록 더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고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 않습니까? 그 후에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쳐주시고 각종 이적들이 계속 나타나며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중에도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과 유다 백성들은 사도들과 스데반 집사와 성도들의 참 진리의 증언을 여전히 거부하며 죽이려 들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어 세운 초대 이방 교회들 내에서도 인간의 완악함은 여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하고 성령께서 많은 은사를 베풀어서 큰 부흥을 이루었던 고린도교회만 보아도 교회 안에 있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그 교회를 떠난 후 얼마 안 되는 그 몇 년 후에 교회 안에 수많은 죄들이 일어났음을 사도가 써 보낸 편지 속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편지를 보면, 거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범한 죄악들이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진리를 믿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면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홀로 따르기보다는 자기들을 인도한 영적 지도자들을 인간적으로 따름으로써 교회 안에서 당파를 짓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르기를 “나는 바울파, 나는 베드로파, 나는 아볼로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하나 되기를 싫어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대신 피 흘려 죽었습니까? 베드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그들이 받았습니까? 아볼로가 그들에게 다른 예수를 전파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나는 바울파, 나는 베드로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
또한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한 사람은 성경에서 명백히 금한 결혼을 하는 음행 죄를 범하였는데, 그것을 모든 교회 성도들이 알면서도 책망하고 징계를 내리지 아니하고 내버려둠으로써 성전을 더럽히는 큰 죄도 범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해져서 자기들의 은사를 자랑하면서 교회의 예배를 무질서하게 드리는 죄도 범했습니다. 또한 기근으로 고생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구제 헌금을 드리자고 사도 바울이 제안하자 그들 중에 일부가 선동하여 사도 바울이 구제 헌금을 명목으로 교활하게 재물을 속여 빼앗는다는 악한 말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거짓 교사의 말을 받아들여 사도 바울의 복음을 믿지 않게 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상 숭배의 유혹에 넘어가서 우상의 전각에 가서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는 자도 있었으며,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거짓 사도들이 찾아오면 그들의 가르침을 냉큼 받아들이면서도 참 사도요 그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내놓고 사역한 사도 바울은 무시하는 그런 자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애찬의 식사를 할 때에 부자는 부자끼리 모여 먼저 기름진 음식을 나눠 먹고 가난한 노예 출신 성도들이 뒤늦게 일을 마치고 교회에 달려오면 남은 먹거리가 하나도 없어 섭섭함을 느끼게 만드는 죄도 범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은 결코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성령을 받고 많은 기적과 이적을 사도 바울을 통하여 직접 체험도 하였고 최고의 교사 사도 바울과 아볼로를 통하여 진리의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았으나 여전히 시험 앞에 연약하고 유혹 앞에 쓰러지고 자기 속에 있는 타락의 본성 앞에 무력한 것이 인간인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 시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의 사사 시대나 왕정 시대나 예수님이 오셔서 친히 가르치실 때에나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교회를 세우고 주의 백성들을 불러 모았던 초대 교회 시대나 동일하게 인간은 이렇게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세태도 살펴보면 위험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도 하고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점도 치러 다니고 손금을 보고 오늘의 운세도 살펴보는 자가 있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일부 젊은이들 중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도 보면서, 명상을 하면서 타로 점을 치면서 자기의 미래를 점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타로 점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운세를 보고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죄악입니다. 신명기 4:19 말씀에 이르기를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에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고 명백하게 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별을 숭배하고 점을 치는 악행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그 중에 하나가 타로 점을 치는 행위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버젓이 점 까페 같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에 대한 경각심이 없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스스럼없이 행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 자체의 타락의 본성을 깊이 자각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거듭 거듭 경계한 대로 우상을 멀리하라고 엄중하게 말한 바를 마음에 새기고 이 세상의 세태를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신앙적인 깨달음이나 신앙적인 결심이나 종교적 노력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며 하나님 대신에 온갖 잡신, 우상, 미신들을 믿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며 노력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예레미야 13:23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프리카 사람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직후에 베풀어주신 언약인 구원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곧 뱀의 머리를 짓밟아 깨뜨리실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 우리 구주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오직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인하여 선물로 주어진 믿음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은 뒤라도 우리는 자신 안의 육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타락의 본성을 십자가에 거듭 거듭 못박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금도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려는 마음,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하여 거역하려는 마음, 분열하고 분쟁하며 인간적인 파당을 짓는 마음, 남보다 좀 더 탁월한 것이 있을 때 교만해지는 마음,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새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세상 쾌락을 따라 살려는 마음, 인색한 마음,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에 잡히는 마음 등을 발견하면 그냥 두지 말고 곧장 십자가 앞에 나아와 그것들을 기도로써 십자가 아래 파묻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고 그 대신 우리 심령을 성령의 은혜로 가득히 채워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7 말씀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 당부하였습니다. 황제 숭배의 강력한 시험을 앞두고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베드로 사도는 더 뜨거운 기도로 무장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에 편지하라고 하시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교회마다 악한 영의 시험이 스며들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이세벨이라는 간교한 여선지자가 주의 종들을 미혹하고 성도들에게 우상 숭배의 유혹에 굴복하도록 유혹하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세벨의 영이 사람들에게 세상의 유혹을 받아들이도록 속이는 가르침을 퍼뜨리곤 합니다. 성도들에게 신앙을 이용하여 세상적인 성공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메시지를 퍼뜨립니다. 세상적인 부를 가진 성도들에게는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갖게 하여 성령의 감동도 없고 자신은 영적으로도 부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거짓된 안전감을 갖도록 유혹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뜨뜻미지근하므로 그들을 토하여 내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 것 같은데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하여서도 부활의 주님은 만약 첫 사랑의 순수한 신앙의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는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립시다. 계시록 3:19 말씀에서 우리 부활의 주님이 교회를 향하여 당부하신 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 지금보다 더 신앙적인 열심을 냅시다. 더 모이기를 힘쓰고 더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기를 힘씁시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당부하셨던 말씀들을 우리가 마음에 새길 때입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대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이러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예레미야 4:3,4)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예레미야 6:1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 불온한 영적 시대 속에 오늘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고발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교회 시대의 반역을 기억합시다. 그 반역의 정신과 행동은 그 후에도 결코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반역의 정신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를 기웃거리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간구하면서 나아갑시다. 흔들리면서도 계속 우리 구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순례길을 계속 걸어갑시다.
흔들리는 것을 느끼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꽃들도 바람에 흔들리면서 뿌리가 깊어지고 자라고 꽃이 피고 꽃씨를 그 바람에 날립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면서 주님을 의지합시다. 이 악한 시대 속에서 자기 영혼의 흔들림을 전혀 못 느끼는 것이 도리어 때로는 세상과 마귀와 우리 안에 있는 타락의 본성 때문에 깊은 영적 불감증에 걸린 까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며 불안해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이 불온한 시대 속에서 우리 주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믿음으로만 살아갈 것을 각오합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확신하는 바 그의 고백을 기억합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9)
그렇습니다. 결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입닏. 그러므로 흔들리며 불안한 가운데서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순례길을 끝까지 계속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세상의 이 모든 시험과 유혹 중에라도 끝내 이기게 하시고 믿음으로 천성 문에 들어갈 때까지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