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월 25일 오후 2시 반경 여객선 한성호가 목포항을 출발하여 팽목항을 향하여 항해 도중 침몰한 사건.
원인은 과적으로 알려졌으나, 수십명의 인명피해가 난 부분은 아직도 의문이 많이 나는 사건임. 사망자 13명, 실종 48명으로 당시 대참사였음.
의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가 객실문을 밖에서 잠근 것(누가 잠그라고 했을까?) 사고가 난 후, 그것도 대낮에 시간을 모두 허비하고 밤에 철야수색한다고 난리를 폈지만, 선실안 인명 구조 못함(안했다는 의혹도 있음, 무능이 아니라 고의나 타의라는 뜻으로 해석). 초기에 대부분의 구조는 어선이 행함. 정부는 사고를 일부러 방치? 한성호 사건의 전후 역사적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음.
0)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일대 바람을 일으킴. 그리하여 오랜만에 분열되고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이 아닌, 3선 개헌까지 해가며 출마한 박정희를 크게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줌. 비록 선거 결과는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의 신승으로 끝났지만 부정선거 및 개표부정의 의혹이 많았음(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김대중이 이겼다고 생각함).
0-1) 이에 박정희는 독기를 품기 시작함.(심지어는 정보기관은 김대중을 바다물에 수장해 죽이려고 함) 1) 1972년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헌법을 제정함.
2) 1972년 12월 23일 유신헌법에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100% 득표율로 당선됨,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단임제 중임제 제한 규정이 없으므로)
3) 박정희의 꼬붕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1973년 1월 중 고교평준화 시안을 마련하여 2월에 발표하려 하나, 중학교 평준화에 이어 74년에 고교에 입학하는 특정인을 염두해 두고 교육정책을 또 바꾸는 게 아니냐는 비판 여론 비등(영구집권에 후계구도까지? 의혹)
4) 여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전반 민심흉흉 하던 차에 정치적 이슈를 묻어버릴 사회적 이슈인 대형사건이 필요함
결론: 결국 한성호의 대참사 원인의 뿌리를 캐면,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선 빅 매치가 부정선거로 겨우 이겼다는 박정희의 불안감, 조급함과 정통성 부정을 당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한성호 사건은 정치적 이슈를 덮기에 충분했고 그 뒤 박정희는 6년간의 독재를 더 할 수 있었다. 사악한 사람들 측으로 봐선 한성호 사건은 대단히 성공적인 뉴스 물타기 성공전략이었고 향후 비슷한 위기일 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자 모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지 아버지는 사람 수몰시켜서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구만. 허허 정말 악마들 집단이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