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나파와 소노마가 대 화재로 불타기 전부터, 캘리포니아의 와인 업계는 크게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나서 와인에 대한 소비가 과거같지 않은 상황, 사람들은 더 이상 고급 와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대신 크래프트 비어의 붐이 일었고, 그것이 미국 전역을 강타했지요. 와인 업계는 고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존의 전략을 짜 내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와인 문화는 사실 그다지 깊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미국은 맥주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종교의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넜을 때, 굳이 그 험한 플리머스에 상륙한 것은 식수 대용으로 가져왔던 맥주가 떨어진 까닭도 있었지요. 미국에서 만드는 와인은 멕시칸들의 땀, 그리고 그들이 마신 맥주로 만들어졌다는 농담도 통할 정도니. 캘리포니아에서는 기존에 심지 않던 품종들을 열심히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진판델 품종으로 만든 잔당을 남긴 로제가 '화이트 진판델'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는 것을 봤던 그들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의 일환으로 로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레드와 화이트의 경계일 뿐 아니라 독특하며 아이덴티컬한 딸기 향을 갖는 로제는 굳이 달게 잔당을 남기지 않아도 마시기 쉬운, 이른바 '콰퍼블 quaffable' 한 와인을 만들기 쉬웠습니다. 진판델은 당도가 너무 높아 유럽 스타일의 드라이한 로제를 만들기 어려웠고, 단가가 높은 카버네 소비뇽이나 멀로를 가지고 이런 짓을 하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지요. 아마 그런 이유에서 그레나슈가 널리 재배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자라기 쉬운 이태리산 포도, 산지오베세 역시 로제 와인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요. 솔직히 그 실험이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와인은 핑크색이 아니었습니다. 화이트 진판델은 핑크지만, 와인쟁이들에게 그건 와인이 아니라 코카콜라의 또다른 버전이었을 뿐입니다. 이미 로제에 대한 편견이 일반화된 이들에게 로제 와인은 솔직히 또하나의 실패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지요. 아, 그러나 로제 와인은 매력적입니다. 잘 만들어진 방돌 같은 건 독특한 매력을 가지지요. 새콤새콤한 딸기, 그리고 어떤 때는 독특한 베리류의 잔향을 남기는 로제는 서머 와인으로서만 아니라 연중 즐길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음식과의 궁합도 넓은 편이고. 얼마 전, 우편배달을 하다가 큰 나무가 부러져 떨어지고 여기에 맞는 사고를 당해서, 집에서 이렇게 뜻밖에 쉬고 있는 시간, 소독(?)을 핑계삼아 와인을 꺼내어 봅니다. 초여름에 걸맞는 로제. 그리고 아들넘들이 닭을 먹고 싶다고 하여 근처 세이프웨이 수퍼마켓으로 가서 치킨 열 여섯 조각, 조조 1파운드를 시켰습니다. 마침 세일이라 하여 4달러 할인받은 가격으로 열 여섯 조각, 치킨 두 마리 분을 시킵니다. 우리나라같으면 치맥이겠지만(뭐 사실 여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래도 기왕에, 혹은 졸지에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그에 걸맞게,. 그리고 환자답게 소독을 핑계삼아 로제를 꺼냅니다. 아... 캘리포니아산 로제여. 2014년산인데 너무 오래 뒀습니다. 산화의 마술을 피할 수 없었군요. 스텔빈 캡만 믿고 놔뒀는데도 와인 자체가 크게 상하진 않았지만 마치 셰리의 느낌이 날 정도로 산화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긴닭과 가볍게 홀짝거리기엔 나쁘진 않습니다. 마치 와인의 영욕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런 느낌이랄까. 와인 자체만 마셨다면 그렇게 썩 좋다고 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튀긴 닭이라는 것이 가벼운 음식인만큼 가벼운 로제는 잘 갑니다. 화이트 진판델만큼은 아니지만 잔당을 남긴 스타일이긴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매우 프루티할 것이지만, 산화의 마법은 이 와인을 원래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여름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마시기에 좋은 저렴하면서 가벼운 와인. 아마 칠링해서 마셨더라면 조금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화이트 와인도 실온에서 마시는 것이 '사실상(김성태 톤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기에, 그리고 와인은 원래 이리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마시는 것이 정상적인 거라 생각하는지라 이 오후를 나른함으로 채워 준다면 그것 자체로 고마운 일이고. 얼른 나아서 다시 일 나가면 좋겠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