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 마 5:9-12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산상 수훈의 결론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산상수훈의 8복을 잠깐 설명하자면 8복의 요지는 세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문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한꺼번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과정을 순서적으로 통과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빌 1:6)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때문에 이것으로 시작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딤후 3:15)
성경은 아무라도 같은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조 사건에서도 땅을 만드시고, 그 땅의 물이 땅과 하늘로 자리를 나누시고,
또 땅에서 물과 육지를 구분하신 후 풀과 채소와 나무로 덮으시고, 그 다음에 해 달 별로 지구를 자라게 하시고,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를 지으신 후, 짐승과 사람을 지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차례차례 만드시고 사람을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믿음의 요구를 선포하시는 과정에서 인본주의적인 생활의 포기를 바로 바벨론 나라에
포로가 되었던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는 선지자들의 외침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번제의 불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기록된 이사야서에는 심판의 끝에 진정으로 참회하여 애통하며 울라고 요구하시고 그 마지막 66장
2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조건에 심령이 가난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2)
이렇듯 인본주의 행동의 종말을 뜻하는 예레미야서의 핵심 내용은 씻음과 정결입니다.
또한 에스겔서는 성령의 운행과 말씀 사역을 통해 생명수 강물 있는 성전에대한 예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결론인 12장에 생명수 강의 이 편과 저 편을 이어주는 자가 있고 예배와 예배의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사역자가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였고,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복을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성막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죄인의 상징으로 타락한 이후 짐승으로(악한 영에 사로잡힌 상태) 살기를 포기하고 제사장의 손에 잡혀 성막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목이 따여 죽은 짐승은 각이 떠지고 번제단에서 불에 죽습니다.
(우리도 이렇듯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물에 손과 발을 씻고 이제 생명의 양식이 있는 성소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생명의 양식과 함께 하나님의 감동이며 조명을 뜻하는 성령의 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삶을 소원하여 자신이 완전히 죽기까지 고생해야 하는 향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여지는 사람과의 완전한 화평의 상징인 두 번째 휘장이 있습니다.
타인의 죄사함을 위해 수고하는 대제사장의 자리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8복에 관한 이 말씀도 이런 순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다툼에서 사람이 사는 관계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그 안에서 마음의 성품을
볼 수는 절대 없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 중심에 두셨다는 영의 문제를 발견하는 문제는 절대 다른
것입니다.
용서, 인내, 모두 다 남의 문제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두 단어가 가진 의미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에서는 이미 화를 냈고 타인을 판단했습니다.
다만 사람이 보는 행동에서만 참고 용서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있는 화와 분과 선악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고 토해내지 못한 자신의 영을
내어놓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들이 자신은 부자라는 의미에서 타인을 재판하고, 자기의 기분이 세상의 최고라고
여긴다는 의미(무의식에서)에서 세상이 자기의 뜻대로 바꿔지길 바라면서 마음 안에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살후 2:4)
"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
우리는 그것부터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는 성품이나 믿음 그 어느 것도 없는 가난뱅이
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령을 보는 자가 있는가? 생각해 봐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니>로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만 처리하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구주를 기다리며 사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참 신앙은 시작되는 것이 공감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므로 타인과의 싸움을 위한 생각을 버리게 되어 평안한
천국 생활을 시작한 그 신앙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애통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여 온유(부드럽고 따뜻한) 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마음에서 의로움을 생각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성품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 위한 발버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때부터 저절로 타인을 위한 긍휼을 베풀 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아 마음에 인본주의 성품을 청소 받아, 영원한 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가 마음에 확실히 정립되어 매사에 사람과 싸우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믿는 사람의 본으로 보이기 위해 일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화평은 마음에서 화가 나도 머리로 노력하여 이루는 화평이 아닙니다.
천국이 소원되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본주의 성품이 없어진 관계로
타인에게 무엇으로 하나님을 믿는 본을 보일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다 그렇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가지고 세상이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가진 조건과 보편적
상식의 조건 안에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명예를 훼손을 목적하여
거짓으로 타인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하늘의 삶에 있는 사람은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줄 압니다.
그리고 소금과 빛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금의 사역은 세상의 변화일까 아니면 내가 녹는 것일까요?
바다를 변화시키는 것은 소금이라고 하지만 소금은 그저 자기의 맛을 가지고 그 물에 녹을 따름
입니다.
녹아진 소금에 의해 바다에 있는 모든 오물이 바다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각자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 틈에 우리 기독인들이 있습니다.
자존심에 영웅심에 물질, 명예, 권위의 욕심을 배경으로 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일속에서
타인과 다투지 않고 바다에 녹아진 소금처럼 자기 소리 내지 않고 잠잠히 있어도 때가 되면 그런
행동이 빛이라는 착한 행실로 드러나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저희 모임의 모든 일을 자기의 주장대로 이끌어 가려 했던 것이 드러난 일도 있습니다.
우리 회원 중 설교시 자기들의 목적에 반하다고 말씀을 전하지 않았으면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회원들의 공감대는 이미 잘되고 못 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벌써 다 아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버려져야 할 저의 성품을 위하여 지었던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과의 문제에서
검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가르치는 문제에서 타인의 요구 속에 존재하는 내가 죽어야 하는 문제를
검증 받는 일은 이번 상황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저는 제 삶의 목적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그 목적을 위해 사람의 논리 속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마귀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 위에서 죽었듯이 저 역시 그 분들의 요구를
따라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멸시나 조롱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제가 죽어야 합니다.
만일 제가 사람의 보편적 방법을 따라 그 분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모임을 이끌거나 전체 회원을 소집해 의견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는 그 일을 한 제가 육신을 보는 사람이지, 영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을 가진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분들의 영을 사랑하는 저는 그분들에게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의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저는 그 분들께 제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일까? 라고 하는 의문이
생길 때, 자기들의 또 다른 의 때문에 만들어낸 인간적인욕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따라 세상의 모든 것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제게는 큰 영광이며, 그런 저를 기억해 주시면 더 없는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정치의 야인처럼 아무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예수님의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부숴진 영광 같지만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더 아름답게 세워주신다는 약속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람과의 화평이란 사람과 싸움을 포기하고 생각과의 싸움을 벌여 타인에게 잘 보이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사랑 때문에 행동하는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화평이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사랑이며
너의 착한 행실로 그가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마태복음 5장 16절을 이뤄드리는 화평
입니다.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 5:16)
그리고 그 화평은 하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기의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아 그 영혼을 사랑하여 같은 마음 같은 성품을 가게 하기 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품이 하나님께는 죄라는 것을 발견하고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불합리한 요구 조건을 가지고 보편적 사람이 요구하는 이미지 파괴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진실 앞에, 마음을 비워야 하고 도를 닦기 위해 입산수도를
해야 하는 등을 강요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신의 복을 추구하며 육신 세상에서의 최고를 위해 기도
하는 모든 신앙에 대한 관념마저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감정의 동물인 육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물질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던 그런 일들도 영을 사랑해서 해야 하는 참 사랑의 원리 앞에 머지않은 장래에 무너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깨어 있는 집' 카페의 가족이나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이 말들을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런 신앙의 기준이 세상 안으로 들어와 함께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육신의 욕심을 위한 타인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세상에
화평을 전하는 귀한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때를 소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나 여러분들께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