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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7일 주일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주님 은총으로 우리에게 깨끗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고,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정성껏 준비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한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냐고 유다인들이 묻자,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한다(복음).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1-2ㄱ.10-1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묻습니다. 군중이 요르단강에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는 종교 운동에 대하여 지도자들이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단호히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기 에, 요한은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그들의 둘째 질문은 “엘리야요?”입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올 엘리야’라고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었지만 부인합니다. 겸손한 요한은 자신을 위대한 신앙의 영웅인 엘리야에 비기지 않습니다. 셋째 질문은 “그 예언자요?”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따라 모세가 예언한 그 메시아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역시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넷째 질문은 “당신은 누구요?”입니다. 신원을 밝히라는 요구에 요한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하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우리도 신앙인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며, 그분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자유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가톨릭은 마리아교? 뭘 잘 모르는 타 종교인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틈만 나면 툭툭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가톨릭은 마리아교다!” “가톨릭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지만 더불어 마리아를 여신으로 신격화한다며 언성을 높입니다.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 안에서도 성모 신심과 관련해서 책잡힐만한 행동을 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성모님만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미사 중에도 손에 묵주를 꼭 쥐고 중얼중얼 묵주기도를 바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시는 본당공동체는 뒷전이고 교회 인준도 받지 않은 자칭 ‘성모성지’에만 혈안이 되어 쫓아다니십니다. 정식으로 승인되지도 않은 특별한 메시지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여기는 신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를 향한 각별한 사랑은 뒷전이고 무시무시한 종말 메시지만 난무하는 서적을 성경 이상으로 끼고 다닙니다. 가톨릭교회는 절대로 성모님을 신격화해서 여신으로 숭배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의 이정표요 길이지 종착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으로서의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깊은 신앙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공경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의 첫째가는 협력자이자 동반자로서 각별하고 헌신적이었던 성모님을 존경합니다. 더불어 교회는 성모님의 출중했던 덕행들, 예를 들면 지극한 겸손, 철저한 순종, 무한한 인내를 칭송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데 도움과 격려를 주는 분이지 방해하는 분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만일 한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있는 성모 신심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여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 그 성모 신심은 그릇된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성모 신심이 지향해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와 하나이신 하느님 아버지라는 불변의 진리를 간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성모상 앞에 아름다운 꽃다발을 봉헌하는 것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모상 앞에 마련된 봉헌함에 정성껏 예물을 봉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 안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속적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함께 갈바리아 산 십자가 밑에 끝까지 서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정체성의 힘
얼마 전 MBC ‘휴먼다큐 - 사람이 좋다’에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한 고 김자옥씨의 가족들이 출연해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고인의 남편 오승근씨는 암임을 알고도 치료를 미루고 고인이 tvN의 ‘꽃보다 누나’에 출연했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병원에서는 오랜 여행으로 피곤해지는 ‘꽃보다 누나’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말렸고 촬영을 위해 출국하기 한 달 전부터 항암치료를 권유했었지만 고인은 치료 대신 프로그램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당시 김자옥은 ‘꽃보다 누나’에서 자주 누워있는 모습은 물론, 길에 있는 벤치에 눕기도 했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에 들어가서는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보인 바 있습니다. 김자옥씨는 ‘그냥’ 울었다고 하지만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인의 아들 오영환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암을 치료하는 대신 방송에 출연하여 돈을 벌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혔습니다. 어머니의 수첩에는 오영환씨의 결혼 준비과정이 빼곡히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암인 것을 알고도 결혼식을 앞당기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더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씨는 “어머니가 제 결혼자금에 대한 부담감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인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픈 와중에도 작품을 쉬지 않았다는 얘기에 대해 제작진이 묻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100% 아들 결혼식 자금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인은 지난 11월 16일 사망했고 아들의 결혼식은 내년 3월 예정입니다.
우리는 당장 죽음이 와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고 김자옥씨가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유는 자신이 어머니로서 그 일을 해야 하는 확신이 죽음보다도 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이 정체성은 죽음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은 누구요?”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왜 세례를 주는 거요?”라고 하는 행위의 이유에 대한 물음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렷이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예언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따집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제요 레위인들, 즉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임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위한 예식을 하면 우리가 해야지 당신이 어떠한 권위로 근거도 없는 예식을 하는 것이요?”라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만 더 명확히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즉, “너희들은 사제요 레위인이라고는 하지만 너희는 너희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너희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남이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았던 요한 세례자와 일은 열심히 하고 있을 지라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며 무작정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던 당시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완전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기보다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가 행하는 세례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반면 성전에 가서는 탁자를 뒤집어엎고 장사꾼들을 내쫓습니다. 그들은 평생 성전에서 봉사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뽑아주신 하느님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아는 것은 나를 보내신 분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로부터 파견되었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교수는 영국의 대 철학자이며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러셀과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엥글리컨 개신교를 믿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대로 이어오던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도 담을 쌓고 살아갔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날, 그 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가냘픈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눈구덩이에 빠져 있는 늙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둘러 눈덩이에서 할머니를 건져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이트헤드에게 정말 고맙다고 거듭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내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당신은 분명 신앙심이 깊은 분이겠지요. 어느 교회에 나가십니까?”
화이트헤드는 약간 겸연쩍은 듯 머리를 끌쩍이며 대답했습니다.
“아뇨,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심도 없고요.”
그러자 노파는 의외라는 듯이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할머니로 하여금 저토록 두려운 죽음 앞에서 큰 확신을 갖고 찬송을 부르게 하는가? 내가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수학, 아니 어느 학문이라도 저 할머니가 갖고 있는 저런 확신을 줄 수 없지 않는가?’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온 학문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젊어서는 신앙에 대해 회의하였으나 늙은 이제는 그토록 자신 만만해 하던 학문에 대해 회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기로 하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기에 자신의 원천인 하느님을 모른다면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를 만들어주시고 세상에서 살게 해 주신 분을 알아야만 합니다. 정체성은 관계에서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누구로부터 파견 받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파견 하신 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다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도 “나도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는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기적과 예언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겠지만 그분은 여전히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이 일을 하겠다는 확신이 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견해 주신 분을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진정 잘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은 점점 커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음을 깨닫고 그저 찬미와 흠숭만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그래서 그분의 은혜에 한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정체성이 확실할 때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당당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이 감사하며 살아가기에 힘이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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