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 증후군
김기준
잘 좀 봐 주세요 명함을 내밀며 어느 자리에 있고 누구랑 친하며 이러지들 좀 마세요 푸른 지붕 근처에 마취하러 갔더니 눈 감고도 집어넣던 주사바늘 비껴나고 기관 삽관 한 번에 되지가 않더이다 부탁 받고 수술한 환자 결과들이 좋지 않아 힘들어 울부짖던 선배 후배들 보았으니 의사를 선택하였으면 담담히 믿고 따르고 차라리 하늘에 빌며 부탁함이 어떠실까 환자를 환자로만 보아야 의식하지 아니하고 손 떨지 아니하며 오직 전심전력 예리한 판단 빠른 결정할 수 있지 않겠느뇨 스님이 제 머리 못 깎듯 의사들도 자기 몸과 가족 병 고치기 힘드오니 환자님들 괜한 걱정 꼬옥 붙들어 매시고 원칙과 최선은 의사의 본능임 알아주심 감사감사 빨리 완쾌하소서
----한국의사시인회, {개화산에 가는 이유}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권력이란 힘이고, 이 힘만큼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유란 모든 일들을 자기 자신의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며, 타인들에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마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가 있다. 권력이 증대된다는 것은 자유가 증대된다는 것이며, 자유가 증대된다는 것은 그 어떠한 반대파도 제거하고 절대군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철학의 아버지, 음악의 아버지, 바둑계의 황제, 진시황제,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황제, 민족시조인 건국의 아버지 등은 권력의 화신이며, 그 모든 가치들을 창출하고, 그 이름 밑에 만인들을 복종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명령하기 위해 태어났던 것이고, 따라서 만인들 위에 군림하며, 무한한 자유를 향유했던 것이다. 권력은 삶의 의지의 총체이자 모든 욕망의 원동력이고, ‘만인 대 만인’의 사생결단식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군주는 천하무적의 상승장군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절대 자유 속에서 무한한 고독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다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가 없는 것이며, 수많은 충신들과 간신들이 언제, 어느 때 그 악마의 발톱을 들이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모든 군주의 덕목은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간지’가 있어야 된다고 역설한 바가 있듯이, 절대군주는 자비롭고 친철하기 보다는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할 때 그 권력을 유지하기가 쉽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자는 늑대를 단번에 때려잡을 수가 있지만 너무나도 쉽게 함정과 올가미에 잘 걸리고, 여우는 인간의 함정과 올가미는 곧잘 피하지만 그의 천적인 늑대에게는 꼼짝달싹 못한다. 권력을 잡기도 무척이나 어렵지만, 권력을 유지하기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평화 시에는 더없이 자비롭고 친절한 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사회적 위기 시에는 마치 천둥번개와도 같은 철권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고의 통치술이라고 할 수가 있다. 덕의 정치는 스스로 자발적인 복종을 강제하고, 철권의 정치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복종을 강제한다.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황제가 전인류의 영웅이 되었던 것은 더없이 자비롭고 친절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수십만 명씩, 수백만 명씩 살해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권력은 힘이고, 힘은 자유이다. 자유는 황금왕관이고, 황금왕관은 천하제일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것은 무한한 찬양과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무한한 찬양과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너무나도 크나큰 무서움과 공포를 가져다가 준다. 권력과 자유도 하나이고, 아름다움과 추함도 하나이다. 존경과 공포도 하나이고, 지배와 복종도 하나이며, 이처럼 절대적인 상극은 하나의 끈으로서 묶여져 있다. 아주 작은 권력, 좀더 작은 권력, 평균의 이하의 권력, 좀더 큰 권력, 아주 큰 권력, 최고의 권력 등, 이 세상에는 수많은 권력들이 있고, 이 권력의 크기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며, 우리들은 모두가 다같이 이 권력관계 속에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왕복운동을 하게 된다.
김기준 시인은 연세대 마취과 의사이며, 그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서 그 권력의 크기만큼 자유를 향유하면서 살아간다. 그의 [브이아이피 증후군]은 의사로서의 정치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노래한 시이며, ‘의술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너무나도 당연한 요청이라고 할 수가 있다. 보통 사람의 보통 환자, 또는 그 어떠한 청탁도 없는 환자의 경우라면 그의 지식과 능력대로 마음껏 진료와 시술을 할 수가 있지만, “잘 좀 봐 주세요 명함을 내밀며 어느 자리에 있고 누구랑 친하며” 청탁을 하는 ‘브이아이피’ 환자들은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가 없다. 몸이 굳고 힘이 들어가면 홈런은커녕 안타도 칠 수가 없는 것처럼, 병명 이외의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곧바로 의료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청와대, 즉, “푸른 지붕 근처에 마취하러 갔더니 눈 감고도 집어넣던 주사바늘이 비껴나고 기관 삽관 한 번에 되지” 않았던 것이 그것이고, “스님이 제 머리 못 깎듯 의사들도 자기 몸과 가족들의 병 고치기” 가 힘들어 진다.
‘브이아이피’란 특별한 권리와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상류 사회의 인사들을 말하며, 이 상류 사회의 인사들을 잘못 치료했다가는 그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브이아이피’는 이익과 불이익, 출세와 퇴출 등의 양날의 칼을 움켜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권력이 오히려, 거꾸로 의사의 자유를 짓밟고 “환자를 환자로서” 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브이아이피 증후군’이란 상류 사회의 인사들 앞에서 어떤 일정한 증후가 나타나는 병적 현상이며, 따라서 이 증상들을 뿌리뽑고 의료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의사를 믿고 의사의 진료와 처방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으로서의 만인은 평등하지만, 사회적 지위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만, 개인의 자유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 김기준 시인의 [브이아이피 증후군]은 의사들의 숙명적인 질병이며, 의사가 의사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인간의 권력은 평등하지 않고, 이 말장난의 토대 위에서 상류 사회의 의사의 권력은 보다 큰 권력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 된다.
권력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권력 앞에서는 최하천민도, 절대군주도 모두가 다같이 부들부들 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