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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BOSS)
삼복(三伏)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폭염이 쏟아지니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보신탕을 찾는 미식가(美食家)들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복날이 다가오면 개들은 수난을 당한다. 복(伏)자를 보면 사람[人]옆에 개[犬]가 있어 복날에는 보신탕을 먹는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허지만 개는 여느 가축과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유구한 역사 속에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여 왔기 때문이리라.
유럽의 일부 나라에는 개 묘지도 있다. 파리 거리에는 개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위하여 개의 배설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하수도가 별도로 설치되어있다. 개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처럼 보신탕을 먹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문화의 차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여러 종류의 가축들이 함께 살았다. 소는 농사일을 돕기도 하지만 중요한 재산이며 송아지를 낳는 날은 아이가 태어나는 일 못잖게 온 가족이 매달리며 밤을 새우면서 돌보았다. 개와 닭 그리고 고양이도 여러 마리가 집 주위를 맴돌면서 정답게 지냈다.
개는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는 삽살개였으며 다른 녀석은 누렁이였다. 삽살개는 머리카락이 눈을 덮어도 얼마나 영리한지 주인을 잘 따르고 재롱을 피웠다. 반면에 누렁이는 미련하였다. 여름 어느 날 아침에 삽살개가 깽깽거리면서 나뒹굴더니 먹은 것을 토하고 그만 죽어버렸다. 동네에 나가서 쥐약을 먹고 변을 당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애석해하였으며 나는 오랫동안 아픈 마음을 참아야 했다.
여름이 지나고 추석 명절 때 부산에서 둘째 삼촌이 친구 두 사람을 데리고 고향에 왔다. 저녁에 삼촌의 고향 친구들과 부산에서 온 손님들이 함께 어울려 잔치가 벌어졌다. 젓가락장단에 멋들어진 노래 솜씨가 한량(閑良)이었다. 이틀을 지내고 삼촌과 함께 부산으로 가면서 친구 중에 한분이 나를 부르더니 돈을 백 원을 주셨다. 나는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돈을 받는 것을 할머니께서 보셨다.
그 당시는 어린아이들은 일원 아니면 오원 정도 용돈을 얻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빨간색 지폐 일원짜리가 상용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할머니가 나를 부르시더니 그렇게 큰돈을 아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할머니에게 맡겨 라고 하셨다.
내가 갖고 있겠다고 좀 버텨 보았지만 할머니의 설득에 지고 말았다. 허지만 학교에 가 있어도 백 원짜리 파란지폐가 눈앞에 알짱거렸다. 그날부터 하교하여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하였다. 병아리가 딸린 어미닭을 사 주던지 강아지를 한 마리 사 달라고 할머니를 못살게 졸라대었다. 장손이 며칠을 칭얼대니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얼마 후 나를 데리고 오일장으로 향했다. 병아리 스무 마리를 거느린 어미닭과 함께 사리나무로 동그랗게 만든 닭장까지 사오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할머니께서 어제 사온 병아리와 어미닭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해 주셨다. 그 날부터 하교하면 메뚜기와 개구리를 잡아와서 어미닭과 병아리에게 정성껏 먹였더니 몰라보게 잘 자라며 거의 중병아리가 되어갔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병아리 몇 마리가 힘이 없어 보이며 모이를 먹지 않고 시름시름 하는 것 같았다. 그 후 하루 한 두 마리 씩 무슨 병인지 모르게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가도 공부가 되지 않았다. 죽는 녀석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곧 닭 부자가 될 것 같던 나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일주일쯤 지나니 어미닭과 병아리 네 마리만 남고 모두 죽어버렸다. 이제 며칠 지나면 다 죽어 버릴 같아 안절부절못하였다. 다행히도 어미닭과 병아리 네 마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병아리 네 마리 중에 장닭이 한 마리고 암탉이 세 마리였다. 어미닭과 병아리들도 성계(成鷄)가 되어 알을 낳기 시작하니 달걀이 쉽게 모아졌다. 집에서 달걀을 반찬으로 하여도 한개 일원 오십 전씩 꼬박꼬박 계산하여 어머님께 받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현금으로 주지 않으시고 계산만 해두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한 두 달이 지나니 집에서 먹은 계란만 해도 상당히 되었다.
이듬해 읍내로 이사를 가면서 키우던 닭을 모두 처분해버렸지만 달걀 값이나 닭을 처분한 돈을 나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이사 온지 2년차 읍내 생활에 익숙해졌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읍내로 이사 오던 이듬해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
이제 닭이나 달걀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할 수밖에 없었다. 반찬으로 먹은 달걀과 처분한 닭을 가격으로 환산해서 큰 닭 열 마리를 사줄 것을 어머님께 제의하였다.
어머니는 펄쩍뛰시면서
“야가 무슨 소리를 하노, 닭 열 마리가 돈이 얼만지 아나!”
“엄마, 내가 그걸 우째 아는교, 하여튼 할매가 사주었던 닭하고 그동안 먹은 달걀하고 합쳐서 큰 닭 열 마리만 사 주이소.”
“야야, 그라면 니는 집에서 밥 묵고 학비대고 하는 그 돈 다 내놔라.”
“엄마, 그거 하고는 다른 거잖아예. 부산 삼촌 친구가 분명 나한테 준 돈이 그렇게 된 거 아임니꺼?”
“부산 삼촌 친구가 니한테 준 돈은 다 니 아버지보고 주는 기다. 나는 모르겠다. 아버지한테 말해봐라.”
이제 그만 일이 틀렸다. 아버지에게 물어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헛일에 신경을 쓴다고 야단 들을 일이 뻔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원망스러웠다. 약 한 달이 지난 후에 나는 어머니에게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엄마, 닭 열 마리는 돈이 많이 들고 읍에서는 키우기도 어려우니 강아지를 한 마리 사 주이소.”
한참 생각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래 그러면 앞으로 닭이나 달걀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한데이. 알았째”
“예! 그러지요. 그 대신 강아지 밥은 엄마가 주고 나중에 큰 개가 되어 팔면 나하고 돈을 반으로 나누어야 됩니데이.”
“오냐, 다음 장날 강아지 사러 같이 가자.”
지루하게 기다린 장날이 왔다. 엄마와 장터를 누비며 강아지를 고르기 위해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앞가슴에 누런 점이 있으며 까맣고 털이 매끈한 수놈 녀석이 내 맘에 들었다.
주인이 강아지 애비가 “세퍼드” 종류이며 인물이 좋은 놈이라고 말해주었다. 강아지를 안고 집에 오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강아지는 하루가 다르게 귀엽게 자라고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은 무척 의젓해 보였다. 엄마와 나의 정성을 아는지 어느덧 중개가 되었고 목줄을 해서 같이 다니기도 하였으며 짖는 소리도 우렁차고 사내다웠다.
개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궁리하다가 나는 영어사전을 뒤져서 보스(Boss)라고 지었다. 그 당시 흔한 개 이름이 “해피” “메리” “쫑” 등이며 시골의 강아지는 “오요” 누렁이는 “워리”로 많이 불러졌다. 아침으로 밥 얻으러 오는 거지들도 보스의 눈치를 살폈다. 기골이 장대하고 짖는 소리에 감히 접근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번은 신문 배달하는 아이가 겁 없이 우리 집으로 뛰어 오다가 보스에게 물려서 소란이 벌어졌다. 그 후 보스는 목줄을 단단히 매어두게 되었고 시간이 날 때 마다 내가 데리고 산으로 강으로 운동을 시켜주었다.
녀석은 나에게는 충견이었다. 내가 아무리 해롭게 해도 꼬리를 흔들고 목을 부비며 좋아라고 달려들었다. 다른 동네를 지날 때면 개들이 모여 있다가 보스를 보면 줄행랑을 놓았다. 떡 벌어진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컹컹하고 한번 우렁찬 목소리로 짖으면 길가의 똥개들은 꼬리를 내리고 멀리 달아났다. 녀석의 미끈한 외모와 두목다운 기질은 나의 마음에 들었고 녀석도 나를 무척 잘 따르니 정을 서로 듬뿍 주고받았다
보스는 낮에는 목줄을 매어두었지만 밤에는 풀어놓았다. 도둑을 예방하고 오래 매어두면 사나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보스가 없어져버렸다. 온 동네를 다녀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길을 잃을 일은 만무하고 더구나 개 도둑이 보스를 몰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를 더 기다려보았다.
저녁이 되어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서글퍼지며 녀석이 매어있는 것이 싫어서 가출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틀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무척 상심한 것을 아시고 걱정이 되셨는지 잊어버리라고 자꾸만 달래셨다.
삼일 째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어쩐 일인가? 보스가 마루 밑에 힘없이 엎드려있었다. 너무 반갑고 좋아서 녀석을 덥석 안았지만 녀석은 시무룩했다. 이상해서 얼굴과 몸을 살펴보니 눈에는 눈곱이 끼어있고 몸에는 생기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어디 가서 뭇매를 맞았나. 무슨 병에 걸렸나.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네요.”
“야야 그 녀석이 어디 가서 바람피우고 왔는갑다. 한 며칠 가만히 놔 두거라.”
“예, 바람이라고요?”
“개들은 그래 하는 것이 있다. 내가 밥을 좀 잘해 먹여야 되겠다.”
“예...”
보스가 갑자기 불쌍하게 보여서 그날부터 녀석을 데리고 강에 가서 파리낚시와 종발무지로 피라미를 열심히 잡아 와서 밥하고 푹 삶아서 며칠을 먹였다. 일주일쯤 지나니 녀석은 털이 매끈해지고 눈빛이 밝아지며 생기를 찾고 전처럼 늠름해졌다. 그 후로는 녀석이 행여 또 가출할까 해서 대문을 철저히 잠그고 밤에 잠이 깨면 한 번씩 불러보기도 했다.
개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 후에 개는 암컷이 발정(發情)을 하면 수 십리 밖에 있어도 낌새를 수놈이 알아차리고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지만 대체로 암놈은 찾아온 수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두 놈에게만 허락하여 종족을 이어간다는 사실도 늦게 알았다. 우리가 흔히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는 정조(貞操)관념은 강하지만 부모 자식과 형제를 구별하지 않고 자손을 번식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하교하니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얘야, 보스를 내 친구 집으로 보내야 되겠다. 그 집이 술도가를 하는데 도둑들이 자주 와서 사나운 개를 한 마리 구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하는데 우리 집의 보스가 제격인 것 같다. 너는 어떠냐?”
이게 무슨 청천 벼락같은 말인가. 이제 정이들대로 들고 웬만한 내말을 척척 잘 알아듣고 어디를 가면 든든한 보디가드가 아닌가. 그런데 보낸다니.
“아버지 안 됩니다. 보스 같은 개는 구하기도 어려워요. 얼마나 영리하고 믿음직한 녀석인데요.”
“그래, 니 마음은 안다마는 곧 고등학교에 가면 공부에 전념해야지 개하고 늘 놀 수 있겠나? 그리고 친구가 그렇게 도둑놈들 때문에 불안하다는데 아버지가 도와주어야지.”
“보스는 네 말은 잘 들어도 사나운 녀석이다. 그러니 좋은 주인에게 보내 주는 것이 보스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겠나?”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마음을 굳히고 계시며 나를 달래본 것이다. 그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보스를 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우울해지고 밥맛이 없어졌다. 엄마는 벌써 이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나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직접 하셨다.
일주일 후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마음이 좀 서운 하지만 내일 술도가 주인이 개를 데리고 간다고 최후통첩을 하셨다. 심란했지만 아버지의 결정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보스가 가는 날 나는 일찍 일어나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부둥켜안고 이별을 하였다. 종일 학교에 가도 공부가 되지 않았다. 집에 오니 텅 빈 보스의 집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엄마는 나를 달래셨다.
“얘야, 개가 뭐 그렇게 대수냐, 또 강아지 한 마리 사와서 키우면 되지.”
“싫어요, 보스 같은 놈이 어디 있어요. 얼마나 멋진 놈인데.”
“야야, 개는 어디까지나 개지 뭐가 그렇게 마음 상해서 그러냐? 네 아버지가 네가 하도 서운해 하니까 저 녀석이 개에게 빠졌다 하면서 나를 나무라셨다. 그리고 술도가 주인에게 받은 개 값은 너에게 다주라고 여기 돈을 두시었다.”
나는 아버지의 배려에 깜작 놀랐다. 예전 같으면 의례히 돈의 행방은 묘연하기가 일수 인데 큰돈을 엄마에게 맡겨 두셨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는 네가 갖고 싶은 것을 사라고 하셨다. 나의 상한 마음을 엄마와 아버지는 다 헤아리고 계셨다. 나도 마음을 풀고 열었다.
“엄마, 손목시계 하나 사주시고 나머지는 엄마가 쓰세요. 보스를 길러 엄마하고 돈을 반반 나누기로 하였잖아요.”
“괜찮다. 네가 뭐 특별히 사고 싶은 것 있으면 사거라. 그동안 네가 용돈 모아서 병아리 키우고 달걀도 집에서 잘 먹고 하였다. 이제 너도 철이 들었으니 돈을 가져도 된다.”
철없이 굴어도 감싸주시고 꾸중도 안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시계도 사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엄마는 나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사주셨고 나머지 돈은 내가 기어코 어머님께 드렸다.
그 후 나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보스만한 녀석을 구하기도 어렵다고 생각 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오늘 초복(初伏)이다. 어린 시절 한 폭의 추억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온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워하는 보스의 모습이 나의 얼굴에 겹쳐서 얼른거린다. (2008.화요수필 제3호)
첫댓글 오래된 추억입니다. 애완견 글을 많이 올려주시어 저의 개 이야기 한편 올립니다.
어릴적 한 두번씩은 겪어본 가축들과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정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좋아하던 동물들과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엣날 시골집 평범한 가정에 흔히있는일을 정감나게 쓰신글 잘읽었읍니다. 감사드립니다.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보스'견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 그늘 아래서 병아리, 강아지 키우며 정 붙이고 살던 그 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것 같습니다. 또 소중한 아들이
더 없이 아끼는 '보스'를 친구 돕기위해 보내주는 아버지의 모습도 훌륭하십니다.
경영 소질이 비상하신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를 사랑하면서 거침없이 팔아버리거나 잡아먹는 이중성이 엿보입니다. 개에 대한 숫한 전설과 미담으로 미화하기도 하는 한편 보신탕을 즐기는 음식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