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의 낡은 골목을 거닐다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포항, 그중에서도 구룡포는 언제나 특유의 비릿하고도 짭조름한 바다 내음으로 여행객을 맞이한다. 항구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정박해 있고, 갈매기들의 우렁찬 날갯짓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하지만 오늘 나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바다의 역동적인 풍경이 아닌, 항구 뒤편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시간의 골목, 바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다.
바다와 맞닿은 이 작은 마을에 100여 년 전의 시간이 고스란히 멈춰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묘한 설렘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동해 최대의 어업기지였던 구룡포로 몰려든 일본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은 곳. 뼈아픈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지만, 지금은 그 아픔마저도 세월의 풍화 작용을 거쳐 하나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자 추억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항구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자, 마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턱과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한 목조 문틀 위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라는 금빛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진 현판이 나를 반겼다. 그 문 너머로는 까마득하게 위로 뻗어 있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단 위로는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듯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분주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네이비색 점퍼를 입고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걷는 어르신부터, 검은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는 청년,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가족들까지. 무채색의 차가운 돌계단 양옆으로는 붉은 철쭉과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끝까지 오르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고 하지만, 나의 시선은 계단 좌우로 낮게 엎드린 듯 이어지는 오래된 목조 가옥들의 골목길로 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첫걸음, 그 길 위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본격적으로 거리에 스며들자, 일본식 전통 가옥 특유의 짙은 갈색 목재 외벽과 겹겹이 쌓인 검은 기와지붕이 이국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중, 어느 고즈넉한 담장 아래서 발길이 머물렀다. 투박한 나무판자로 덧대어진 벽면 앞에 놓인 짙은 청록색의 커다란 우체통. ‘추억의 느린우체통’이라는 정겨운 이름 아래, “이 우편물은 6개월 후에 배달됩니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소중한 사람이나 미래의 나에게 구룡포의 추억을 전해보세요. 엽서는 구룡포근대역사관 내에 비치되어 있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소비되고 잊히는 현대 사회에서, 반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서야 마음을 전하는 우체통이라니. 나는 잠시 눈을 감고 6개월 뒤의 평범한 어느 날, 뜻밖에 찾아온 과거의 편지를 받아 든 누군가의 환한 미소를 상상해 보았다. 시간의 지층이 두껍게 쌓인 이 거리만큼 느림의 미학이 잘 어울리는 오브제가 또 있을까 싶었다.
느릿한 사색에 잠겨 걷던 나를 현실로 이끈 것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풍겨오는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였다. 낡은 목재 건물 1층, 노란색 차양 아래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곳이 있었다. 입구에 세워진 길쭉한 노란색 입간판에는 큼지막한 10원짜리 동전 그림과 함께 ‘십원빵’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교동 우리쌀 100%’로 만들었다는 4,000원짜리 십원빵은 반으로 갈랐을 때 치즈가 듬뿍 늘어나는 모습이 사진으로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 아래에는 치즈와 피자콘이 들어간 5,000원짜리 ‘오백빵’도 함께 소개되어 여행객들의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1966년도 발행된 10원 동전 모양을 그대로 본떠 구워낸 빵은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십원빵을 하나 베어 물고 다시 길을 나서니, 입안 가득 퍼지는 짭조름하고 고소한 풍미가 걷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오래된 거리의 정취에 갓 구운 길거리 간식의 유쾌함이 더해지니,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 한결 친근하고 다정한 온기로 다가왔다.
십원빵의 여운을 즐기며 걷는 길, 유독 화려한 장식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은 어느 낡은 사진관 앞이었다. 짙은 고동색 나무 문틀 위로 연분홍빛 벚꽃 조화가 눈이 내리듯 흐드러지게 장식되어 있었다. 진짜 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화사함은 낡은 건물의 외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묘한 낭만을 자아냈다.
유리창에는 세로로 ‘구룡포 사진관’이라는 글씨가, 다른 한쪽에는 ‘경동약재’라는 옛스러운 한글 폰트가 시트지로 붙어 있어 1930년대 개화기의 어느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한편에는 최신 AI 프로필 필터를 홍보하는 입간판과 'SIGNATURE PHOTO STUDIO'라는 둥근 간판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의 재미있는 공존을 보여주었다.
마침 사진관 앞에서는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와 화려한 장식이 달린 청조끼, 그리고 통이 넓은 청바지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한 중년 여성 관광객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그 즐거운 순간을 기록하는 일행의 보이지 않는 미소가 골목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과거의 슬픔이 서린 공간을 오늘날의 찬란한 미소로 덧칠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거리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길을 조금 더 옮기자, 오랜 세월을 버텨낸 2층짜리 적산가옥들이 아기자기한 소품샵으로 변모해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구룡포길 151’이라는 푸른색 도로명 주소 판이 붙은 어느 상점 앞, 활짝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예쁜 밀짚모자와 에코백들이 가지런히 전시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창문 너머로는 은은한 알전구들이 따뜻한 빛을 밝히고 있었고, 그 안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평화롭게 어른거렸다. 마침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편안한 차림을 한 여성이 미소를 머금은 채 가게 문을 나서고 있었다. 상점 앞 작은 나무 벤치 위에는 누군가 올려둔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다소곳이 놓여 있어, 낡은 흑백 사진 속에 떨어진 붉은 물감 한 방울처럼 강렬하면서도 로맨틱한 인상을 남겼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서의 시간은 마치 흑백의 역사 위에 화려하고 따뜻한 색채를 덧칠해 나가는 과정 같았다. 단절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의 삶이 깃든 공간.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내음과 골목 구석구석 배어 있는 낡은 나무 향기, 그리고 이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다정한 웃음소리까지. 아픈 역사를 지우지 않고 보존하되, 그 위에 새로운 생기와 추억을 쌓아 올린 구룡포의 풍경이 참으로 깊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며 검은 기와지붕 위로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을 즈음, 나는 다시 처음 마주했던 길고 가파른 돌계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과거와 현재가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걷는 이 골목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또 하나의 아름답고 찬란한 구룡포의 봄날을 소중히 접어 넣었다.